# 215
어둠에 휩싸여 있지만 김필도는 거침없이 올라갔다.
그아우!
30분가량 올라갔을까. 어둠 속에서 시아나의 울음이 들려왔다. 김필도는 시아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시아나는 이름 모를 계곡의 안쪽에 혼자 앉아 있었다.
“조, 조금만 있다가 가려고 해, 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아나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집 안이 그렇게 싫어?”
김필도는 시아나 옆으로 앉으며 물었다.
“싫은 건 아닌데 다, 답답해요.”
“그럼 앞으로도 시아나를 보려면 숲으로 와야겠네?”
“지, 집에 적응하도록 노, 노력해 볼게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시아나가 행복한 곳에서 살아. 보고 싶을 땐 아무나 찾아오면 돼.”
“지금처럼?”
“응!”
“저녁은 먹었어?”
“성에서 먹고 나왔어요.”
“그럼 오랜만에 술 한잔 할까?”
“조, 좋아요.”
“일단 천막부터 치고.”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천막을 꺼내 쳤다. 그리고 좌식 테이블과 술과 간단한 안주를 꺼내 놓았다. 김필도가 술을 준비하는 사이에 시아나는 천막 안쪽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준비가 끝나자 둘은 술잔을 기울였다.
“어떻게 지냈어?”
김필도는 시아나의 술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하, 하이나와 놀았어요. 당신은?”
“나야 정신없이 살았지.”
“제 생각은 한 적 없죠?”
“없기는. 늘 어떻게 살고 있을지 걱정했는데.”
“지, 진짜?”
“그렇다니까. 그리고 일 끝나면 문 대륙으로 가서 시아나와 함께 살 생각을 하고 있었어.”
“피이!”
시아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거짓말 같아?”
“나, 남자들이 하는 말은 열에 아홉은 거짓말이라고 해, 했어요.”
“누가?”
“하이나가요.”
“하이나는 결혼했어?”
“아, 아이를 다섯 명이나 나, 낳았대요. 그, 그런데 아빠가 전부 다, 다르대요.”
“어떻게?”
“아, 아이를 가지기 전까지는 온갖 아양을 다 떨다가 아이를 가, 가졌다고 하면 도, 도망쳐 버린대요.”
“나는 하이나가 사귄 남자들과는 달라, 시아나.”
“정말?”
“그렇다니까. 내가 죽기 전까지는 시아나를 떠날 일이 없을 테니까 믿어도 돼.”
“믿을게요.”
시아나는 그윽한 눈길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피곤한데 그만 잘까?”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후유증이 비로소 나타난 듯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자,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자, 자고 있어요.”
시아나는 술병과 술잔을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김필도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깜빡 잠들었던 그가 다시 깨어난 것은 차가운 감촉 때문이었다.
“시, 시아나.”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자기 몸도 물론이거니와, 옆에 누운 시아나 또한 알몸이었다. 시아나가 옷을 벗긴 모양이었다.
“사, 사랑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해, 했어요.”
“하이나가?”
“네. 그, 그런데 제, 제가 자, 잘못하, 한 건가요?”
김필도를 바라보는 시아나의 눈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누군가 말리지 않으면 금세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냐, 잘했어.”
김필도는 시아나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시아나는 입을 맞추는 순간에도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지자 시아나는 갑자기 갈증이 났다. 자꾸만 이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강렬한 느낌이 입술에서 느껴지고 불쑥 입안으로 뭔가가 쑥 밀고 들어왔다. 시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느낌은 더욱 선명해졌다.
가슴과 엉덩이에서 타인의 손길이 느껴지고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아아우!
시아나 잇새로 나직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사랑한다는 건 하나가 된다는 거야, 시아나.
문득 하이나의 말이 떠올랐다.
가슴 위로 부서져 내리는 뜨거운 숨결에 시아나는 환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 * *
스윽! 스윽! 스윽! 스윽!
검은색의 로브를 걸친 자들이 어둠을 뚫고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사신의 낫이라 불리는 긴 낫을 들고 가는 이들은 율법의 집행자라고 부르는 블랙 로브 전사단이었다.
“놈들의 위치는 어디냐?”
일행의 중간 지점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브 후드를 깊게 눌러쓴 3미터 신장의 이자는 블랙 로브 전사단 단장 헬드레이크였다.
“1킬로미터 전방입니다.”
선두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이스마디온 전사단이 전부더냐?”
“그렇습니다, 단장님!”
“바로 밀어붙여라!”
“알겠습니다! 전투 대형으로 진형을 바꿔라!”
나직한 외침과 함께 나아가던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이 좌우로 퍼졌다.
좌우로 퍼져 진형을 구축했다고 하지만 3천 명이나 되기 때문에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기를 들어라!”
5백 미터가량 전진했을 때 헬드레이크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대원들이 일제히 사신의 낫을 들어 올리자 접혀 있던 날이 펴지며 새하얀 광채를 쏟아 냈다.
한편.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진영을 구축하고 있던 이스마디온 전사단 또한 수상한 자들의 접근을 눈치채고 있었다.
“단장님!”
경계를 서던 천족 한 명이 진영으로 뛰어가며 라팔을 불렀다.
“말하라!”
“놈들의 목표가 우립니다.”
“어떤 자들인지는 알아냈느냐?”
“검은 로브를 걸치고 사신의 낫을 들었습니다.”
“사신의 낫을 들었다고?”
라팔은 홀딘을 돌아보았다.
“블랙 로브 전사단이네.”
“전설로 내려오는 율법의 집행자들이란 말입니까?”
“그러네.”
“그들이 왜?”
“에바르본 가문이 율법의 집행자 수장 가문이었네.”
“그럼?”
“베칼이 내가 보기 싫었던 모양이지 뭐.”
“하라미 님에게 해코지를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군요.”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라팔은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라팔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1조부터 5조까지는 방어 대형을 구축하고, 6조에서 10조까지는 공격 대형을 구축하라!”
라팔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선두로 나선 5백 명은 방진을 형성하였고, 그들의 후미에 이야크를 탄 대원 5백 명은 이야크 창을 든 채로 전면을 노려보며 섰다.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스윽!
이윽고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행하라!”
“차아아아!”
“타하하하!”
“이야야야야!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은 각자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날려 갔다.
“전사들은 방패를 세워라!”
라팔은 전면을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하!”
이스마디온 전사단 전사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방패를 앞으로 내밀더니 바닥으로 힘차게 꽂았다. 그들의 방패는 아래쪽이 창처럼 뾰족하게 돼 있어 땅속으로 박아 넣을 수 있는 구조였다.
푹! 푹푹푹! 푹푹!
방패 아래쪽이 땅속으로 파고들자 2미터 높이의 장벽이 생겨났다.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은 방패를 몸을 향해 약간 비스듬히 눕히고 그 아래로 들어갔다.
콰앙! 쾅쾅쾅! 쾅쾅! 쾅쾅쾅!
사신의 낫 수백 자루가 이스마디온 전사단 방패를 후려쳤다. 수많은 방패에 구멍이 뚫리긴 했지만 부서진 방패는 많지 않았다.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이 방패에 밀어 넣은 마나 덕분이었다.
만일 방패에 마나를 씌우지 않았다면 방패는 부서졌을 테고, 사신의 낫은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의 머리로 파고들어 갔을 것이다.
“하아!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은 힘차게 방패를 쳐 올렸다. 그리고 방패 사이의 열린 틈으로 검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커억!”
“크윽!”
“아악!”
블랙 로브 전사단 진영 선두가 우수수 쓰러졌다.
“일보 전진!”
“일보 전진!”
라팔의 명령을 복창하며 이스마디온 전사들은 방패를 밀어 쳤다. 그리고 강하게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사이에 뒤쪽에 있던 대원들은 아직 살아 있는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공격하라!”
헬드레이크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차앗!”
“타앗!”
“하합!”
선두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더 강하게 고함을 내지르며 사신의 낫으로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의 방패를 찍었다.
콰앙! 퍼억! 콰앙! 퍼억! 쾅쾅쾅쾅! 쾅쾅쾅!
“크악!”
“아악!”
“으악!”
수십 개의 방패에 구멍이 뚫리고 일부 대원은 머리가 또는 목에 사신의 낫이 꽂혀 죽임을 당했다.
“하아!”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은 처음 공격과 마찬가지로 방패로 밀고 검을 찔러 넣어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을 없앴다.
언뜻 보기엔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이 유리한 것처럼 보였고 실제 결과도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마디온 전사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사신의 낫에 찍힌 횟수가 많아지면서 방패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스마디온 전사단 전사들은 빈자리를 메우며 전진했다.
밀고 밀리는 접전은 1시간 이상 계속됐고, 양측의 아래쪽은 천족의 시체로 가득 찼다.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의 시체가 두 배 이상 많았다.
“이야크 전사는 돌격하라!”
아군의 수가 점점 줄어들자 홀딘은 이야크를 타고 있던 전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타앗!”
“차앗!”
“이럇!”
이야크는 무서운 속도로 적진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집행자들은 진형을 풀어라! 흩어져서 공격하라!”
헬드레이크 또한 가만있지 않았다. 이미 이스마디온 전사단의 공격에 대비한 것처럼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암흑 마법을 펼치는 마족처럼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빛의 검법을 펼쳐라!”
사방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고 새하얀 광채가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의 검에서 쏟아져 나왔다.
“크악!”
“아악!”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 비명은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니었다. 빛의 검법을 펼쳤던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