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싸움은 이미 끝나고, 알리토 일행은 한편에 모여 있었다.
“날 죽여라!”
실바크는 김필도를 향해 소리쳤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김필도는 왼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슉!
미약한 소리가 그의 왼 손목 근처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검은 광채 하나가 실바크를 향해 쏘아져 갔다. 검은 광채는 누운 상태인 실바크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크악!”
실바크의 몸통이 1 자로 잘려 나감과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끝장내 버렸군.”
쿤할은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일반 마족도 아니고 전투기갑을 착용한 마족 5백여 명이었다. 그런데 그들 전부 1시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전부 죽임을 당한 것이다. 단 다섯 명에게. 아니 마족의 수가 두 배 또는 세 배 이상이라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섯 명은 그만큼 강자였다.
“나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오테르요, 제2원로.”
“대, 대공이었단 말이오?”
쿤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엄청난 실력으로 마족을 도륙했던 자가 이번 전쟁의 기폭제가 됐던 대공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쪽은 토바하크 가문의 가주 오디안이고, 이쪽은 한때 마계10군단 검술 교관이었던 알리토, 그리고 이쪽은 오테르 가문의 수호 전사인 파라온 고스트 오테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쪽은 내 부인인 시아나요. 시아나는 헬칸의 딸이요.”
“……!”
쿤할은 바보처럼 눈을 껌뻑거렸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마법 가문이라고 불리는 토바하크 가문이나 마계10군단의 검술 교관인 알리토에 대해서는 들어 보고 만나 봤기에 놀랄 것도 없다.
하지만 파라온과 헬칸의 딸은 아니었다.
파라온은 마계 역사상 가장 강한 전사로 마신의 칭호를 받았던 자이고, 헬칸은 문 대륙에서 다섯 종족을 쫓아냈던 장본인이다.
“저, 정말이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나와 시아나가 착용하고 있는 전투기갑은 헤를리온이오.”
“다 사실이었구먼.”
쿤할은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프리메우스가 출병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헤를리온이었다. 그때만 해도 출병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다.
“우린 자리를 옮길 건데 함께 가시겠소?”
김필도는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나가는 길을 알고 있는 거요?”
쿤할은 반 공대를 했다. 조금 전 김필도가 말했던 프리우스오테르란 말 때문이었다. 그 말은 곧 히데우스의 후계자이자 오테르 가문의 가주라는 의미였다. 그런 자를 보통 인간들과 같이 대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전투를 치른 건 처음이 아니오.”
“그럼 신세 좀 지겠소, 가주.”
쿤할은 김필도 일행을 따라나섰다. 사실 그가 계속 쫓기고 있었던 것은 숲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어쩐 일입니까?”
김필도는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천계의 총리대신이 이곳으로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만나러 왔소.”
“그를 없애러 온 게 아니고 만나러 왔단 말입니까?”
“그렇소.”
“이상하군요. 천족과 마족은 견원지간이라고 알고 있는데.”
“조금 전에 가주가 없앤 그자들 때문이었소.”
“드반 족의 존재를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나는 몰랐는데 마왕은 알고 있었소.”
“하면 마왕 지시로?”
“그렇소.”
“드반 족을 솎아 내서 없앨 생각을 못하고, 제2원로에게 마족의 정예를 딸려 보냈다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거군요.”
“예리하군요.”
쿤할은 부정하지 않았다. 마계전사 15만 명이 마계를 떠나는 순간 반란은 시작됐을 것이다. 실바크가 말했던 것처럼 마계는 이미 드반 족에게 장악됐을 터였다.
“마계가 그 정도면 천계 또한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본 거군요.”
“그렇소.”
“홀딘 그 양반이 이곳으로 온 겁니까?”
“그렇다고 들었소.”
차앙! 창창!
“크악!”
“아악!”
쿤할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멀리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들 또한 편한 상황이 아닌 모양입니다.”
“가 보시겠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김필도는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응?”
빠르게 달려가던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그가 가고 있는 곳은 전에 이카렌과 함께 갔던 그 길이었다. 즉 노르카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저기 나무 위로 올라가요.”
김필도는 전에 이카렌과 들어갔던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파앗!
가장 먼저 나무 위로 올라간 이는 시아나였다. 그 뒤를 김필도와 알리토, 오디안, 쿤할, 그리고 고스트 킹이 따랐다.
일행은 빠르게 나무 위로 올라갔다.
30여 미터를 올라가자 아래쪽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엉?”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나무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과 검은색 로브를 걸친 자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기갑을 착용한 자들은 놀랍게도 발탄 제국군 기갑기사단이었다.
“아악”
“으아악!”
비명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나 잠깐 다녀올게요.”
김필도는 오디안을 보며 말했다.
“어, 어디 가려고요?”
그러자 시아나가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이 근처를 돌아보려고 그래.”
“이 근처요?”
“응! 실종된 발탄 제국 황제가 이곳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아, 알았어요.”
“은밀함! 그 조용한 움직임! 인비지빌리티!”
김필도는 마법 지팡이를 꺼내 투명화 마법을 펼쳤다.
“어?”
김필도의 모습이 사라지자 오디안은 깜짝 놀랐다. 김필도가 마법을 펼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왜 그래요?”
김필도는 물었다.
“마법도 배우신 겁니까?”
“우연히 배우게 됐어요.”
김필도는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쪽 나무 동굴은 전과 다름없었다.
그는 전에 이카렌과 하룻밤을 머물렀던 곳으로 내려갔다. 나무 아래쪽 공간은 전과 약간 달라져 있었다. 그와 이카렌이 떠난 후에 누군가 머물렀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황제 일행이라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들이 돌아온 게 맞나 보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곳을 나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다른 장소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전에 확인했을 땐 없던 흔적이 지하 공간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노르카로 보이는 자들의 시체도 발견할 수 있었다. 김필도는 인비지빌리티 마법을 해제했다.
“후퇴하라! 철수하라!”
바로 그때 지상에서 철수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발탄 제국 기갑 기사들의 수뇌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결국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모양이었다.
“오픈!”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 통신 마법구를 꺼내 마나를 주입했다. 잠시 후 통신 마법구 표면에 라헤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잘 있었어요?”
김필도는 웃으며 물었다.
“저는 잘 있어요. 바르칸은요?”
“나도 잘 있어요.”
“식사는 잘 하고요?”
“네. 라헤나, 몸은 어때요?”
“아주 좋아졌어요. 그리고 케이샬로부터 좋은 선물도 받았어요.”
“어떤 선물인데요?”
“상태 유지 마법 아이템하고 전투기갑이에요.”
“완치가 불가능한가 보죠?”
상태 유지 마법 아이템을 받았다는 소리에 묻는 말이었다. 치료가 가능했다면 상태 유지 마법 아이템이 필요할 리가 없을 테니까.
“거의 영구 마법에 가까운 마법이 심어진 마법 아이템이라 완치된 거나 다름없어요.”
“몸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그렇겠죠.”
“이렇게 했는걸요?”
라헤나는 귀를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황금색 귀고리가 나타났다.
“그 귀고리가 마법 아이템?”
“혹시 분실할 때를 대비해서 귀고리 말고도 몇 개 더 만들었어요. 상태 유지 마법이 해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어디죠?”
“라파 산맥이에요.”
“동로군벌 일은 잘됐나 보죠?”
“동로군벌은 지금 테라를 향해 이동 중에 있어요.”
“성공했군요.”
“네. 그보다 혹시 기갑기사단이 움직인 거 같은데 아는 거 있어요?”
“얼마 전에 케이샬에게 마법 아이템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니 그곳으로 갔나 보네요.”
“어떤 마법 아이템이었는데요?”
“케이샬로부터 듣는 게 낫겠어요.”
“그럴까요?”
“접니다, 전하.”
곧 통신 마법구 표면에 케이샬의 얼굴이 나타났다.
“잘 지냈어요?”
“하만티움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냈습니다.”
케이샬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만티움은 많으니까 더 필요하면 말하세요.”
“아직 남은 하만티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죠?”
“노틸리어스 공작이 마각을 드러낸 모양입니다.”
“황제를 제거할 결심을 했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가 케이샬로부터 얻어 간 마법 아이템은 어떤 거였습니까?”
“땅을 돌처럼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마법 아이템입니다.”
“노르카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는 뜻이군요.”
“황제의 거처가 라파 산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렇겠군요. 그럼 지금 제국군 상황은 어때요?”
“전 병력 중 절반은 영지 연합군을 지원하고 나머지는 테라를 지키는 걸로 공작들과 합의를 했답니다.”
“그럼 이곳에 있는 기갑기사는 어떻게 된 겁니까?”
“남은 기갑 기사 전붑니다.”
“병력을 출병시키면서 기갑 기사 1만 명은 이쪽으로 돌린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좀 더 둘러봐야 하겠지만 노틸리어스 공작이 성공한 것 같아요.”
“그럼?”
“디바스칸 백작과 연락을 취해서 좀 더 은밀하게 이동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다음에 봐요.”
김필도는 통신 마법구에서 마나를 제거했다. 그리고 아공간에 집어넣고 주위를 수색해 나갔다. 그가 황제를 비롯한 노르카의 수뇌를 발견한 곳은 2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남쪽이었다. 그곳은 상당히 넓은 지하 공간이었는데, 일반 가옥처럼 돼 있었다. 다만 지상이 아닌 지하로 파고들어 가면서 지어진 건물이란 점이 일반 집과 달랐다.
황제 일행을 발견한 장소는 지하 3층이었다.
황제는 아직 죽은 게 아니었다. 심장에 검이 박혀 있지만 아직 가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검을 뽑아 내지 않아 아직 숨을 쉬고 있을 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냐?”
힘없는 목소리가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참, 나는 전투기갑을 걸친 상태지.”
김필도는 얼른 헤를리온을 해제했다.
“넌?”
황제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전투기갑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김필도였던 것이다.
“그렇소, 납니다.”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황제 앞으로 다가앉았다.
“네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놀랍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발탄 제국 기갑기사들에게 당한 겁니까?”
“샬 블레어 후작은 확인 사살을 했을 뿐이다. 날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는 따로 있었다.”
“누가 황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저자다.”
황제는 오른편 구석을 가리켰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