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19화 (219/225)

# 219

그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두컴컴한 구석에 거대한 덩치 사내가 앉아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블랙 로브 전사단에게 쫓기던 홀딘이었다. 하지만 김필도는 그가 홀딘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먼저 이 양반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양해를 부탁드리겠소, 천족 양반.”

“그렇게 하게.”

홀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일반적으로 황제를 살해한 자가 옆에 있으면 깜짝 놀라 도망을 치든지, 전투기갑을 착용하고 싸울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녀석은 조금도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만 참으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인간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소, 천족 양반.”

김필도는 홀딘에게 목례를 하고는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천족 양반에게 당한 후에 샬 블레어 후작에게 당한 겁니까?”

“그렇다.”

“노틸리어스 공작이 배신을 한 거군요.”

“잘 아는구나.”

“두 공작에게 가짜 태양의 인장을 준다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잠적한다는 말을 하지 말든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황제는 깜짝 놀라 물었다.

“내게도 이게 있습니다.”

김필도는 왼손을 황제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에는 태양의 인장이 끼워져 있었다.

“그건 태양의 인장?”

“케이샬이 가져왔더군요.”

“그럼 황실에 있던 네가 가짜가 아니었단 말이냐?”

“황제께서 가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모토 남작 앞에서 알짱거렸던 겁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가 진짜인 줄 모르고 루시안과 닮았다면서 황실로 데리고 가더군요.”

“내가 한 방 먹었구나.”

황제는 어이없는 얼굴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황실로 들어가서 특별히 얻은 게 없으니까 억울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케이샬을 얻은 것 같은데 아니냐?”

“그게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네요. 신의 정원에서 황실로 파견한 위원이 바로 케이샬이었으니까요.”

“케이샬이 사라진 위원이었단 말이냐?”

“모르셨습니까?”

“전혀 몰랐다.”

“그는 황실에서 일하는 자들의 주인이 돼 있더군요. 그래서 황제가 노반과 나눈 이야기를 내가 알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랬구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할 이야기라도 있습니까?”

김필도는 황제의 가슴에 꽂힌 검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날 죽일 셈이냐?”

황제는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검을 뽑아내면 바로 피가 터져 나올 테고 자신은 바로 숨이 끊어질 터였다.

“난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럼 안녕히!”

김필도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황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김필도는 검을 뽑아내려다 말고 물었다.

“마, 말해라.”

황제는 말을 더듬었다.

“제 외조부 말입니다.”

“발몬 하이저 아이작 황제를 말하는 거냐?”

“그분을 독살한 자가 누굽니까?”

“그걸 말해 주면 날 살려 주겠느냐?”

“그럴 수 없다는 건 아시잖습니까.”

“그렇겠지. 네 외조부를 독살한 자는 노반이다.”

“명령은 황제께서 내렸겠죠?”

“그랬다. 그런데 황제가 되고 싶은 게냐?”

“평생을 성에만 처박혀 살았던 놈이 황제 자리를 준다고 하겠습니까? 나는 황제 자리엔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악착을 떠는 거냐?”

“살아남기 위해 그랬을 뿐 뭔가를 얻기 위해 그런 건 아닙니다. 나를 천둥의 성에서 끌어내 대공 작위를 내려서 문 대륙으로 보낸 사람도 황제였지, 내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랬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고맙단 말씀 드리겠습니다.”

“뭐가 고맙단 말이냐?”

“날 문 대륙으로 보내 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입니다.”

휙!

김필도는 검을 쥐고 있던 손목을 틀었다.

“커억!”

황제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넘어왔다.

“문 대륙으로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겁니다. 황제는 내게 은혜를 베푼 두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김필도는 검을 사정없이 뽑았다.

츄악!

피가 솟구쳐 오르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김필도는 검을 한편으로 던졌다.

“이곳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때 위쪽에서 천족의 언어가 들려왔다.

“끙!”

홀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블랙 로브 전사단이었던 것이다.

“들어가서 확인하라!”

“헬드레이크!”

홀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김필도는 헤를리온을 착용했다.

“밖에 있는 자들이 누군지 아는가?”

“모릅니다.”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블랙 로브 전사단이란 자들이네.”

“검은 로브를 걸치고 사신의 낫을 든 자들을 말하는 겁니까?”

“봤는가?”

“이곳으로 오긴 전에 잠깐 봤습니다. 어떤 자들입니까?”

“한때 천왕을 호위하면서 율법을 집행하던 자들이었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겠군요.”

“하지만 문 대륙을 떠나면서 그들은 잊혔네. 아마 에바르본 가문에서 국방대신이 나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했을 거네.”

“그러니까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이 세이아칸 그놈 가문 소속이라는 겁니까?”

김필도의 몸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렇다네. 그런데 세이아칸 그자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겐가?”

홀딘은 떠보듯 물었다. 김필도가 착용한 전투기갑이 헤를리온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놈에게 죽임을 당했으니까,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을 진 셈이죠.”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 집어넣었던 헬칸을 꺼내 들었다.

“그건 헬칸인가?”

김필도가 꺼내 든 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에 대해 많이 아는가 보네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네.”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는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오테릅니다.”

“오테르가 추가됐구먼.”

쿵쿵쿵! 쿵쿵쿵!

바로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계단 앞으로 가서 섰다. 그러자 쿤할도 김필도와 4미터 거리를 두고 계단을 바라보며 섰다.

“오테르 가문의 가주가 됐거든요.”

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앗!”

김필도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고 헬칸이 허공을 갈랐다.

“저, 적…….”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은 급하게 검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콰앙! 슈캉!

하지만 김필도가 휘두른 헬칸은 천족의 검을 자르고 그대로 진행하더니 목까지 잘라 냈다.

“대단하구먼.”

홀딘은 검을 힘차게 내리그었다. 두 번째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이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슈캉!

스악!

그의 검 또한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의 검과 머리를 동시에 잘라 냈다.

“놈들은 마족이 펼치는 암흑 마법과 흡사한 마법을 펼치고 있네.”

“그래 봐야 내겐 안 됩니다.”

김필도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헬칸을 내리찍었다.

콰앙!

슈캉!

“크악!”

둔탁한 소성과 검이 잘려 나가는 소리 그리고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내리찍은 헬칸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차앙!

그러자 들어 올린 헬칸에서 검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앗!”

김필도는 검을 밀어붙임과 동시에 횡으로 휘둘렀다.

스악!

“커억!”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리가 잘린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따라오세요.”

김필도는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올라오자 허공에 몸을 숨기고 있던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이 무차별하게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들의 검은 김필도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오히려 흘리는 공격에 의해 목이 잘리고 허리가 잘리고, 심장이 박살나 죽임을 당했다.

“공격하라!”

“죽여라!”

지하 2층에 있는 자들을 무차별하게 없애고 있는데, 지상에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격 명령을 내린 이들은 이카렌과 하라미였다.

“차앗!”

“타앗!”

“이야압!”

창! 창창창! 창창!

“크악!”

“아악!”

“으악!”

곧이어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더불어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이 들려온 곳은 지상뿐만이 아니었다. 지하에서도 쉬지 않고 비명이 들려왔다.

“루시안, 거기 있어요?”

그때 위에서 하라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라미냐?”

김필도를 따르고 있던 홀딘이 버럭 소리쳤다.

“아빠예요?”

“그래 나다, 이 녀석아!”

홀딘은 급하게 지하 1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지하 2층과 달리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가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홀딘은 한달음에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는 멍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을 무차별하게 공격하고 있는 자들은 천족과 마족으로 구성된 아주 특이한 조직이었다.

맨 선두에는 여자 마족과 하라미가 적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고, 둘 주위에서도 천족과 마족이 함께 블랙 로브 전사단을 공격하고 있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허공에 몸을 숨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족과 마족의 특이한 조합의 대원들은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죽음을 선물했다.

“어떻게…….”

홀딘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천족과 마족으로 구성된 특이한 조합일 뿐 아니라 개개인의 실력 또한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을 능가했다.

“가주님!”

바로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홀딘은 고개를 돌렸다.

“라팔!”

홀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죽은 줄만 알았던 라팔과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 수백 명이 뒤편에 서 있는 것이었다.

“살아 있었구먼.”

홀딘은 라팔의 손을 잡았다.

“대공녀님 덕분입니다.”

“하라미?”

홀딘은 고개를 돌렸다.

“차앗!”

그때 하라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20미터 높이까지 솟구친 그녀는 전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에서 수백 줄기의 광채가 쏟아져 나와 전방을 가득 채웠다.

“만광?”

홀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라미가 펼치는 검술은 빛의 검술 최고 경지라 불리는 만광이었던 것이다.

“언제…….”

그는 멍한 얼굴로 하라미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론 하라미는 빛의 검술 중급에 해당하는 1백 광(光) 정도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홀딘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쩌엉! 쩌엉! 쩌엉! 쩌엉! 쩌엉! 쩌엉!

뭔가가 어는 듯한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오더니 블랙 로브 전사단 대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하얀 얼음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블랙 로브 전사단 단장인 헬드레이크도 섞여 있었다.

“말도 안 돼!”

헬드레이크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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