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22화 (222/225)

# 222

“제 러브 서클이 향기를 뿜어냈다고요.”

“진짜?”

“네.”

“정말?”

“그렇다니까요.”

“말도 안 돼!”

홀딘은 황당한 얼굴로 하라미를 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하라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다.

왜냐면 홀딘의 아내 또한 러브 서클이 향기를 뿜어내 그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왜 말이 안 되는데요?”

“녀석은 천족이 아니고 인간이잖아.”

“천족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죠. 세이아칸 같은 놈은 수백 명을 가져온다고 해도 상대도 안 되고요.”

“끙!”

홀딘은 얼굴을 찌푸렸다.

러브 서클이 향기를 뿜었다면 그 키 작은 녀석이 천생 배필이란 말이 된다.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살지 않을 거래요.”

“그럼 어디서 살 생각인데?”

“문 대륙의 리모스에서 산대요.”

“리모스?”

“네.”

“아무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 식사부터…….”

홀딘은 말끝을 흐렸다.

느닷없이 겨울의 궁 외부로부터 살기가 밀려든 것이었다.

“황실엔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어버지 홀딘과 마찬가지로 살기를 감지한 하라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일 가능성이 높아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온 사람은 라헤나였다.

“그들이면 누구를 말하는 거죠?”

하라미는 라헤나를 보며 물었다.

“그분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탐내는 자들요.”

“제국군 총사령관인 노틸리어스 공작이란 말이군요.”

“네.”

라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기갑기사를 대동하고 별궁으로 들어온 자는 노틸리어스 공작과 세 후작이었다.

“시작하라!”

노틸리어스 공작은 주위에 있는 기갑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존!”

기갑기사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갔다.

“컥!”

“윽!”

“큭!”

잠시 후 기갑기사들이 달려간 곳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응?”

노틸리어스 공작은 옆에 있는 샬 블레어 후작을 바라보았다.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샬 블레어 후작 또한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론 지금 이곳엔 가짜 대공과 열 명의 하인만 있다. 케이샬은 밖으로 유인해 낸 상태고 가짜 대공은 살려 두라고 했으니까 열 번의 비명이 들려오면 정리가 끝나야 한다.

그런데 비명은 수십 번 이상 들려오고 있다.

“나에 대한 조사를 게을리해서 그런 거야.”

나직한 목소리가 전면에서 들려왔다.

노틸리어스 공작을 비롯한 네 사람은 시선을 들었다.

전면에는 김필도, 이카렌, 알리토, 크레디안, 록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빈손이 아니었다. 김필도를 제외한 네 명은 화살을 장전한 채 노틸리어스 공작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헉!”

“억!”

네 사람은 황급히 오른손을 심장에 댔다. 전투기갑을 착용하기 위해서였다.

“늦었어, 노틸리어스.”

김필도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네 명은 시위를 놓았다.

틱! 틱틱틱!

슈악!

퍼억! 퍽! 퍽! 퍽!

네 대의 화살은 노틸리어스 공작 일행의 심장을 관통하여 빠져나갔다.

“크윽!”

“윽!”

네 명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공작으로 만족하며 가만있거나, 내게 충성을 맹세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노틸리어스 공작은 앞으로 나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떻게?”

노틸리어스 공작은 경악한 얼굴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천족과 마족이 나와 함께 있는 이유가 궁금한가 보지?”

“그, 그렇다.”

“이 아가씨가 내 부인이고, 저들은 부하라면 기절하겠구나.”

“…….”

노틸리어스 공작은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놀랐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인간이 마족을 부인으로 삼고, 마족과 천족을 부하로 거느린단 말인가?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때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곳이 이 세상이잖아.”

“가, 가짜가 아니었구나.”

“이제야 눈치챈 거야?”

“세상 전부가 속았…….”

노틸리어스 공작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너희는 속은 게 아니고 너희가 나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야.”

김필도는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던 김필도는 그 자리에 멈췄다. 바로 앞에 홀딘과 하라미가 서 있었다.

“나 좀 보세.”

홀딘은 김필도를 불렀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어르신.”

김필도는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케이샬과 디바스칸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명하십시오, 대공 전하.”

김필도와 시선이 마주치자 디바스칸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백작은 동로군벌을 이끌고 수도로 진입하도록 하게.”

“동로군벌을 막는 자들은 어떻게 처리하면 됩니까?”

“제거하시오. 그리고 점령이 끝나면 그들을 이끌고 프라넬 대평원으로 이동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케이샬도 함께 가서 도와주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하.”

케이샬은 고개를 숙이고 디바스칸 백작을 따라나섰다.

“이제 됐습니다.”

케이샬과 디바스칸 백작이 떠나자 김필도는 홀딘 곁으로 갔다.

“여기에 술 있는가?”

“휴도니아 대륙에서 가장 좋은 술은 이곳에 다 있을 겁니다.”

“한잔하세.”

“준비시키겠습니다.”

잠시 후 김필도가 머무는 겨울의 궁에는 술상이 차려졌다.

“하라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잔이 몇 번 돌고 나자 홀딘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훌륭한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자네를 남편감으로 생각하고 있더구먼.”

“총리대신께서는 반대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네. 나는 반대네.”

“제게 바라는 거라도 있습니까?”

“원래는 하라미 곁에서 떠나 달라고 해야 하는데…….”

홀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키만 작다 뿐이지 나머지 모든 부분은 천족 청년을 압도한다. 게다가 헤를리온을 착용하여 어쩌면 천족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모른다.

아무리 쥐어짜도 흠잡을 게 없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노력해 본다는 말인가?”

“떠나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 하라미를 버린단 말인가?”

“총리대신께서 바라시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천계의 율법에는 아이에 대한 양육권은 남편에게 있다고 하더군요. 하라미가 낳은 아이는 제 자식이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김필도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아, 아이라고……?”

강한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온몸을 후려쳤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 정도면 아이가 생기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김필도가 그 아이를 달라고 한 것이다.

“이런 제길…… 이것 보게! 이것 보게! 사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임신이란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홀딘은 벌떡 일어나더니 김필도를 쫓아 나갔다.

“풋!”

바로 그때 안쪽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 김필도와 홀딘이 앉아 있던 곳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라헤나였다. 그녀 옆에는 하라미가 안도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내가 잘될 거라고 그랬잖아요.”

라헤나는 웃으며 하라미를 보았다.

“그래도 노력해 본다고 했을 땐 아찔했다고요.”

하라미는 배시시 웃었다.

“자, 이제 떠나야 하니까 준비해요.”

“어딜 가는데요?”

“라파로 가야 해요. 리시아!”

라헤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네, 언니.”

이어 리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파로 갈 준비는?”

“다 끝났어요.”

“바로 출발하도록 해요.”

“알았어요, 언니.”

리시아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1시간 후, 수백의 인마(人馬)가 빛의 궁을 떠나 라파로 향했다.

* * *

둥! 둥! 둥! 둥! 둥!

전고 소리가 프라넬 대평원을 떠돌다가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척척! 척척! 척척! 척척!

이어 수십만 명의 발자국 소리가 전고 소리를 쫓아 날았다. 전고 소리와 병사들이 내딛는 발자국 소리로 가득 찬 이곳은 프라넬 대평원이었다.

“적은 어디 쯤 있느냐?”

천족 진영 중간 지점에서 이야크를 타고 이동 중이던 세이아칸은 창 너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곳에는 서로군벌 수장인 이케이 하다르만 백작이 이야크를 타고 따르고 있었다.

“5킬로미터 지점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중입니다.”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저는 지금은 일단 방어에 치중하고 공격은 내일 낮에 했으면 합니다.”

“우리 천족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낫다는 말이냐?”

세이아칸의 눈초리가 살짝 추켜 올라갔다. 하다르만 백작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는 뜻이었다.

“우리 적은 5킬로미터 밖에 있는 영지 연합군뿐만이 아닙니다.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마족도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전력을 보존했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 생각은 너와 다르다, 하다르만.”

“경청하겠습니다, 마스터.”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하면 내일 아침까지 계속될 게다. 해가 떠오르는 곳은 도하 군 뒤쪽이고 우리를 비추게 된다. 그때 황금색 전투기갑과, 황금색 갑옷을 걸치고 황금색 검을 든 천족 15만 명이 일제히 나서면 어떻게 되겠느냐?”

“적의 사기는 한껏 위축되겠군요.”

하다르만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해가 뜰 때 천족의 공격이 시작된다는 건 오늘 밤 전쟁은 서로군벌이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하다르만.”

“또 있습니까?”

“우리에게 패한 도하 군이 갈 데는 한 곳밖에 없다.”

“헬모트 공작이 이끄는 아스달 진영으로 간단 말입니까?”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둘로 나눠졌던 영지 연합군은 하나로 합쳐지고, 우린 그들의 배후에서 적당히 압박만 가해 주면 놈들은 북로군벌을 밀어붙이게 될 것이다.”

“그렇군요.”

하다르만 백작은 감탄한 얼굴로 세이아칸을 보았다.

잘난 부모를 둔 덕분에 대천신관 지휘관이 됐다며 내심 욕도 많이 했다. 그런데 단순히 잘난 부모 덕분만은 아니었다. 세이아칸은 지휘관 자격이 충분한 자였다.

“내 작전을 이해하겠느냐?”

“당장 서로군벌을 전방으로 배치하겠습니다, 마스터.”

“이래서 난 하다르만 네가 좋아.”

세이아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서로군벌 진형이 선봉 인간, 후방 천족으로 완전하게 바뀐 건 1시간 후였다. 그리고 진형 구축이 끝나는 순간 노르탄 공작이 이끄는 도하 군과 마주했다.

양측 사이의 거리는 1킬로미터였다.

둥둥둥! 둥둥둥! 둥둥둥! 둥둥둥!

“기사는 준비하라!”

“기사들은 돌격 준비하라!”

“궁병은 준비하라!”

“기병은 준비하라!”

“보병은 준비하라!”

전투 준비를 알리는 외침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서로군벌 전 병력이 공격 태세를 갖추고 늘어섰다.

“진격하라!”

“진격하라!”

“진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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