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무난한 직업을 얻다?
쉬이익! 쉬이익!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연이어 터지는 치명타. 정말 100퍼센트를 자랑하는 무서운 공격이었다. 레벨은 얼마 안 되지만 공격력은 2~3레벨 위 수준의 위력을 보여 주기에 파티에서는 쏠쏠한 재미를 부여해주는 범려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사냥을 하는 동안 어느새 레벨은 10을 달성하고 이제 전직을 할 때가 왔다.
"10레벨이 돼서 이제 전직하러 갈게요.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범려는 이제 전직을 한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런데 어떤 직업으로 전직할지는 아직 결정을 하지 않았다.
"전직하러 가는 거라면 궁수 하세요. 활 쏘는 게 보통이 아니던데."
헬렌은 범려가 궁수를 하면 『판게아 월드』에서 궁수 지존 게시판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활은 오랫동안 만져서 다른 걸 하고 싶기도 하고, 화살 값이 좀 부담될 것 같은데."
범려는 화살 값이 걱정이었다. 사냥을 해서 돈을 벌기는 하지만 화살 값이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하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화살 값은 싸요. 무기 상점에서 파는 화살은 100개에 1쿠퍼예요."
화폐 단위가 제일 작은 것부터 쿠퍼, 실버, 골드로 가고 실버 단위로 가는 돈은 100쿠퍼당 1실버다. 거의 부담 없는 가격이다.
"……."
그 정도 돈이면 지금 받은 10만 개 화살을 무료 쿠폰으로 받았기에 대충 10실버 정도의 돈밖에 안 되는 거다.
지금까지 사냥을 통해 화살을 6천 개 소비했고, 벌어들인 돈은 10실버. 비록 파티를 통해서 얻은 수익이지만 별로 부담되는 장사는 아니다.
"전사들도 싸우고 나면 검이나 방어구를 수리해야 하니 그 돈이랑 계산해도 거의 같은데요."
"그러네요."
주변의 반응을 보아 궁수를 해도 그리 나쁠 것 같진 않았다. 이렇게 되자 어차피 늘 하던 거 조금 더 한다고 해서 별로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궁수로 전직하죠. 늘 하던 거 조금 더 오래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범려가 궁수로 전직한다고 하자 다른 파티원들은 환영했다. 그가 궁수가 되면 몇몇 스킬들의 힘을 얻어서 정말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 거라 예상했다.
"그럼 전직하고 올 테니 나중에 봐요."
범려가 가고 나자 일행들은 그를 친구 등록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범려가 가는 길에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궁수 하나 얻었다. 이제 사제 하나만 구하면 끝이다.'
파티원들은 이런 의뭉스런 속셈을 가지고 범려를 봤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범려는 그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떠난 것이다.
"이곳이 궁수 길드인가?"
초보 마을에서 궁수 길드를 찾는 건 쉬웠다. 문밖에 전사, 궁수, 마법사 등의 기초 직업군을 한곳에 모아두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줄을 서시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다 보니 줄 서서 전직을 위한 접수를 받고 있었다.
"오늘 안에 접수가 되는 건가."
『판게아 월드』의 인기를 실감함과 동시에 이건 해도 해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 새치기, 당장 뒤로 가!"
간혹 가다 몰래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생기자 마을 경비가 달려와서 그 새치기한 인간을 잡아다 제일 뒷줄에다 세우고, 한 번만 더 그러면 감옥에 쳐 넣어버린다고 협박까지 했다.
"무섭네."
어떤 유저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인지 경고를 무시하고 또다시 새치기를 하려다가 경비병에게 덜미가 붙잡히자 그 즉시 감옥으로 끌려가버렸다.
일단, 감옥에 가면 게임 시간으로 이틀, 그러니까 현실 시간으로 하루를 그곳에서 보낸다. 게임을 하는 데 하루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묶여 있게 된다면 별로 달갑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저쪽으로 가세요. 다음!"
"궁수로 전직을 하려고 왔는데요."
"그럼 저기 보이는 남자한테 가보세요. 다음!"
-전직 퀘스트, 궁수
교관을 따라가서 그가 시키는 일 3가지를 완수하라.
0/3
보상:궁수 전직
사람이 많으니까 잡설은 집어치우고 바로 전직할 수 있는 교관을 알려 주고 다음을 외쳤다.
"어서 오게. 궁수로 전직하고 싶어서 왔나?"
"예, 궁수로 전직을 하려고 왔습니다."
"날 따라오게."
교관은 자신을 따라오라며 이상한 문으로 들어갔고, 범려도 그 문을 따라 들어갔다.
"자, 궁수가 되고 싶으면 일단 저기 보이는 과녁을 모두 맞히게. 아마 과녁이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맞히기 힘들 거야."
"음, 저게 움직이나요? 가만히 있는데."
"활을 들면 그렇지 않을걸."
일단, 교관의 말이라서 그냥 움직이겠거니 생각했다. 이어 활시위에 화살을 올리자 정말 과녁판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예상하기로는 과녁판이 그냥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약간 다르게 옆으로 천천히 가면서도 간혹 위로 튀어 올랐다.
교관은 그걸 보고 미소를 지었다.
"후후, 조금 어려울 거야."
범려는 일단 활을 쏘지 않고 움직이는 과녁판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어때? 내 과녁판들이."
"……."
범려는 아직까지 옆으로 가면서 간혹 튀어 오르는 과녁을 맞혀 본 적이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새야 멀리서 날아오기에 그걸 보고 예측하고 맞히지만 지금같이 별로 멀지도 않은 곳에서 튀어 오르는 과녁을 맞히기란 어려웠다.
그는 그런 과녁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냥 전직은 안 시켜 준다, 이건가."
범려는 궁수 전직이라고 약간의 어려움은 있을 줄 알았지만, 움직이는 과녁이라니 조금 신기했다.
"하나씩 해볼까나."
범려는 검지로 활줄을 살짝 건드리면서 화살을 꺼내 조준했다. 그리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화살촉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는 화살을 시위에서 떠나보냈다.
쉬익! 툭!
화살이 과녁에 정확히 꽂히자 한 개의 과녁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래도 다른 과녁들은 여전히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날 맞혀 보라며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
범려는 말없이 화살을 시위에 올리고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더니 또다시 과녁을 명중시켜 버렸다.
이후에도 같은 방법으로 계속 과녁을 맞혀 버리자 메시지가 나왔다.
-첫 번째 과제를 완수했습니다.
"대단해. 이걸 단 한 번에 맞힌 인간은 처음이야."
대부분의 유저들은 활을 만져 본 일이 거의 없지만 활을 당겨 연습을 한다면 1차 과제를 충분히 해낼 수 있었고, 범려의 경우 중학교 때부터 배운 궁도 실력 덕에 손쉽게 첫 번째 과제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제 다음 과제를 줄 테니 따라오게."
범려는 교관을 따라서 걸어갔다. 교관은 이번엔 마을 바깥에 있는 활터로 가더니 손가락으로 저 멀리 있는 걸 가리켰다.
"저걸 100번 맞히게."
"저 과녁을요?"
과녁의 거리는 어림잡아 100미터. 초보에게는 어려운 난이도의 과녁이었다.
"100번이라."
범려는 100번이라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교관은 그의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교관에게는 오로지 이번 과제를 잘 해결하느냐 못하느냐 그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한번 해볼까."
활터에서도 이 정도 거리보다 더 먼 거리에서 활 쏘는 연습을 한다.
범려의 눈이 사냥감을 노리는 매의 눈처럼 빛나며,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쭉쭉 뻗어가더니 목표물에 향해 날아갔다.
-과녁에 명중하지 못했습니다.
즉각적으로 메시지가 날아오면서 확인을 했다.
"아차! 실수를 했네. 다시 한 번 해볼까."
범려는 다시 화살을 꺼내 조준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집중력을 발휘해 화살을 날렸다.
-과녁에 명중했습니다.
"앗싸!"
화살이 정확히 꽂혔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 이 여세를 몰아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명중했다는 메시지가 뜨자 두 번째 과제를 완료하였다.
-두 번째 과제를 완수했습니다.
"끝났다!"
두 번째 과제도 완료되자 교관은 무표정하게 범려를 불렀다.
"좋아. 두 개의 과제를 완료했으니 마지막 과제를 주겠네."
"네, 어떤 과제를 주실 겁니까!"
범려는 앞서 했던 과제 정도 난이도라면 마지막 과제도 별거 없을 거라 여겼다.
"음, 자네는 남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약간 특별한 과제를 주겠네. 원래대로 한다면 100미터 거리에서 사과를 하나 맞히면 되지만, 자네는 그 사과를 맞힌 뒤에 화살로 화살을 맞혀야 하네."
범려는 그 말을 듣자 당황스러웠다. 사과를 맞히는 것은 빌헬름 텔이 했던 것이고, 화살을 맞히는 것은 로빈 후드를 따라 하는 것이었다.
"꼭 그걸 해야 하나요?"
"물론이지! 반드시 해야 해! 그렇지 않고서는 안 돼!"
교관은 단호하게 말하며 범려에게 통보했다. 어쩔 수 없이 교관의 말을 들어야 궁수 전직 퀘스트가 완료되니 방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럼 내가 사과를 저 과녁에 고정시켜 놓지."
교관은 100미터 거리에 있는 과녁을 50미터나 멀리 떨어트려 놓았고 그 위에 사과를 고정시켰다. 이건 분명 범려를 엿 먹이려는 수작이었다.
"원래 100미터 거리에서 쏘는 거 아닌가요?"
범려는 교관에게 물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대답이 나왔다.
"음, 100미터 정도는 가까워서 50미터 더 멀리 했지. 이 정도면 자네에게 걸맞은 시험이라고 생각하네."
원래대로 한다면 100미터 사과 맞히기가 되지만, 범려에게는 전에 했던 2가지 과제를 너무나 훌륭하게 완수해내서 교관이 특별하게 50미터를 더 멀리 해주고. 거기다가 화살로 화살을 맞히라는 것이었다.
"미치겠네."
범려는 궁을 배우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움직이는 대상을 화살로 쏘아 맞힌 적도 있고 날아가는 새도 맞혀봤지만, 화살로 화살을 맞혀 본 적은 없다.
"일단 해보는 수밖에……."
끼이익!
활시위가 조심스럽게 당겨지면서 범려는 집중을 했다. 그리고 호흡을 정지한 후 목표물을 향해 시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쉬이이익!
파공음을 날리면서 화살은 사과가 있는 과녁을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사과에 명중하지 못했습니다.
과녁에는 명중했지만 사과는 맞히지 못했다. 그 차이는 겨우 0.5센티. 범려는 아쉽다는 듯이 다시 활을 당겼다. 그러자 다음 화살이 날아가면서 목표물에 가까이 도달했지만 이번에도 사과에는 맞지 않았다.
"클클클, 조금 어렵지?"
이 교관은 유저의 괴로움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듯이 웃고 있는데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고 대놓고 교관에게 욕을 해버릴 상황도 아니었다.
'저 교관, 날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구나.'
화가 살짝 났지만 궁을 잡을 때는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목표물이 있는 곳에 화살이 명중하게 되어 있었다.
"후웁!"
범려는 다시 시위를 당기면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잠깐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범려 자신과 저기 눈앞에 보이는 사과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과에 명중하였습니다.
"앗싸!"
깔끔하게 사과를 명중시키자 범려는 기분이 좋았지만 교관은 별로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겨우 3발을 쐈을 뿐이지만 그걸 맞힌 것이다.
그래도 이번 과제의 문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어험! 아직 과제가 끝난 게 아니네."
행복도 잠시, 범려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교관은 웃으면서 어서 다음 일을 하라며 재촉하는 눈빛을 보였다. 범려는 교관의 그런 눈빛을 봤다고 해서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이 과제를 완수해나갈 거라 생각했다.
"화살, 화살."
집중에 집중을 하면서 범려는 단 하나의 표적만을 노려봤다.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이는 화살을 다시 맞히라니 다른 유저들 같았으면 이건 버그라며 신고를 했겠지만, 범려는 활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리 버그라도 완수해내고 싶었다.
쉬이익! 툭!
화살이 다시 한 번 날아들었지만 안타깝게도 화살 위가 아닌 사과에 꽂히고 말았다.
"난 절대 로빈 후드가 될 수 없지만 그를 뛰어넘겠어."
범려는 자신이 로빈 후드가 아니라고 했지만 이미 빌헬름 텔이 한 사과 맞히기를 했다. 범려라고 해서 로빈 후드가 했던 화살로 화살을 맞히는 묘기를 부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
"후웁!"
범려는 다시 시위를 당기며 호흡을 정지했다. 그러자 시위를 잡고 있던 손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다가 한순간 멈췄다.
피이잉!
손의 떨림이 멈춤과 동시에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화살을 향해서 날아들었고, 아쉽게도 이번에는 화살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
확실히 난이도가 높은 부분이었다.
"어렵지?"
"다시 한 번 해보죠."
범려는 교관에게 어려우니 다른 과제를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분명 교관에게 약간의 아부를 한다면 통할지도 모르지만 활에 관해서는 고집을 피우고 싶은 범려였다.
'내가 반드시 맞힌다.'
독기가 올랐는지 범려의 눈에는 불꽃이 살짝 일렁였다. 이어 시위를 당기자 화살이 날아갔지만 역시나 명중되지는 않았다.
그 뒤로 계속해서 화살로 화살을 맞히겠다는 오기가 생겨 화살을 날려 봤지만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화살을 날리는 사이 사과는 벌집이 되다 못해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인가."
이 이상 오래 끌면 사과도 부서지고, 자신의 집중력도 한계에 다다를 판이었다.
범려는 천천히 활을 당기더니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오로지 한 점만, 한 개의 화살만 자신의 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그 순간!
쉬이익!
-세 번째 과제를 완수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궁수가 되셨습니다.
"끝났다!"
범려의 입에서 끝났다는 소리가 나오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교관이 축하의 말을 건넸다.
"궁수가 된 걸 축하하네."
범려로서는 전혀 축하할 일이 아니다. 이런 개고생을 하고 얻은 건 겨우 궁수라는 직업 하나. 더 이상 추가적인 보상은 없었다.
'젠장, 남들이 궁수를 한다고 하면 절대적으로 말려야지.'
이런 지랄 맞은 퀘스트에 교관이 있다는 것을 세상천지에 다 알리고 싶은 범려였다.
범려는 바로 로그아웃을 하고는 캡슐을 나와서 방바닥에 누워버렸다.
"아, 힘들다. 활터에서도 이렇게 심각하게 활 쏴본 적은 없는데."
일단 과녁에 사과를 올리고 쏘는 것도 생소했고, 화살로 화살을 맞히는 것도 생소했다.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범려, 즉 희성은 정신적인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바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주 늦은 밤이었다.
"아, 잠깐 잠들었나 보네."
희성은 일단 게임을 다시 하기 위해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벤트 기간 중에는 공짜로 체험이 가능하다. 그 뒤에는 돈을 내야 한다.
-'매의 눈'을 습득하셨습니다.
-'조준 사격'을 습득하셨습니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2개의 메시지를 보고는 바로 스킬을 확인했다.
-매의 눈(초급 0.00%)
멀리 있는 대상을 아주 정확히 볼 수 있게 됩니다. 활의 사정거리가 늘어납니다.
-조준 사격(초급 0.00%)
적을 정조준해서 공격하며 공격 준비 시간은 2초, 자신의 공격력에 100% 추가 데미지를 줍니다.
쿨 타임:2초, 마나 소비:30
준비 시간이 2초라는 스킬을 보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특기는 정조준이 맞기는 하지만 2초 동안 조준을 하지 않는다. 1초 조금 넘는 시간을 조준하고 활을 쏜다. 1분을 기준으로 했을 때 마나를 소비하면서 날리는 것보다 그냥 활을 당기는 게 이득으로 보였다.
"별로 쓸모 있는 스킬은 아니지만 첫 화살을 날릴 때는 필요하겠네."
전투 첫 시작할 때만 큰 데미지를 주는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쓸 만한 스킬이라 생각하고는 다시 사냥을 하기 위해 천천히 마을 바깥으로 나왔다.
"아차, 스탯을 확인 안 했네. 스탯창!"
이름:범려 레벨:10 성향:무(無) 직업:궁수
생명력:195 마나:145
힘:10 민첩성:32 지능:10 정신력:10 체력:15
공격력:84 방어력:1 마법 공격력:30 마법 방어력:1
스탯 포인트:0
레벨이 10이 됐지만 입고 있는 방어구는 그냥 맨 처음에 주는 방어력 0인 초보자 옷. 전에 파티를 하면서도 아이템은 나오지 않고, 순록의 뿔이나 가죽 등 별로 쓸모없는 아이템만 잔뜩 나오기에 그냥 돈으로 환산해버렸다.
"음, 이 정도면 순록이라도 쉽게 잡을 수 있으려나."
범려는 방어구가 없으니 스쳐도 피가 쭉 빠졌다. 그러니 단 한 발에 녀석을 죽여야 한다.
"한번 해보자."
활을 꽉 쥐고는 혼자서 순록을 잡기 위해 나왔지만, 일단 같은 동급 레벨 몬스터는 궁수한테는 조금 힘들다. 한 방에 데미지가 4분의 3 정도를 확 줄여 먹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조준 사격!"
피이잉!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머리를 맞히자 치명타가 터지면서 순록의 피가 주르륵 깎이고 단숨에 절반 가까이 빠졌다. 공격력 100퍼센트 추가에 치명타가 터지자 피가 무지막지하게 빠지는 것이다.
범려의 화살에 순록 1마리가 달려오다가 죽고, 다른 순록들도 마찬가지로 공격다운 공격을 못해보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다.
"후, 위험했다."
"다들 도망쳐!"
그때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도망친다고 범려까지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범려의 생각에는 몬스터에게 쫓겨서 가는 거라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크악!"
바로 근처에서 유저를 죽이는 행위가 벌어지고, 멀리서 웬 검을 든 유저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돈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순 거지잖아."
근처에서 PK가 벌어진 것이다. 고의적으로 유저를 죽이는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은 머리색이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붉게 변하는데 이게 살인자라는 증거다.
『판게아 월드』에서는 딱 9레벨까지의 유저만 PK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그러니 전직을 한 10레벨부터는 자율적으로 PK가 가능하다.
"뭐지?"
범려는 처음으로 살인자를 봤다. 일부러 머리색을 붉게 바꾼 거라고 생각했지만 『판게아 월드』는 붉은색 머리는 캐릭터를 만들 때 없는 색상이다.
"저놈은 그래도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겠지."
무섭게 달려드는 인간을 보자 범려는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는 바로 화살을 날렸다.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범려는 치명타가 터지는 화살 공격을 했지만 그 전사는 그런 걸 개의치 않고 몇 대 맞아주면서 계속 달려들었다.
"어라."
범려는 상대가 한 번에 죽지 않자 화살을 계속 날렸다. 하지만 레벨이 높은 캐릭터인지 치명타가 발동해도 데미지는 미미했고, 혹은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이나 방패로 방어를 해버렸다.
"순순히 아이템을 떨구고 죽어라!"
"젠장, 살인자냐!"
검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좁혀지자 범려는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죽는 건 사양하고 싶다.
"검기 발출!"
기사의 검에서 뭔가 선명하게 그어지는 선이 생기더니, 범려의 등을 시큰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크윽!"
"흥, 이놈도 별거 없군."
범려는 죽어가는 순간에 녀석의 얼굴을 확인한 후 머리 위에 '공구장'이라는 이름을 보고 죽어버렸다.
우우웅.
주변의 환경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이루어진 공간. 영혼들만이 오가는 공간에 범려가 왔다.
"젠장! 공구장 녀석!"
공구장이라는 녀석에게 당한 사람이 많은지 주변에는 꽤 많은 영혼들이 있었고, 다들 울분을 터트리며 분노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모든 게 조용하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도, 누군가를 만지는 것도 금지된 공간.
"아, 그놈 진짜. 아, XX."
게임을 하다가 고의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정말 화가 난다. 특히 아이템을 목적으로 노리는 것이라면 더더욱.
범려는 10레벨에 좋은 아이템을 들고 있다고 보기에는 말도 안 되고, 공구장은 일부러 사람을 죽이며 스트레스를 푼 것이다.
범려는 죽어서 영혼의 세계에 왔지만 주변이 조용하다는 것을 느끼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다들 조용하네. 이봐요. 어라?"
자신이 손을 내밀어서 상대를 만지려고 했지만 만질 수 없었고, 아무리 외쳐도 자신의 목소리가 남에게 들리지 않았다. 혹시 몰라 발을 구르며 땅을 건드려 봤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야, 이거."
범려는 처음으로 죽어봤기 때문에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그러다가 이 회색빛 세계에서 유일하게 황금빛 머리카락과 파란 눈,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아르테미스!"
부활의 천사, 아르테미스. 이곳을 관장하는 천사의 이름이다. 동시에 범려가 처음으로 만나 튜트리얼을 진행해준 NPC이기도 했다.
범려는 그녀에게 다가가 외쳤다.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 저 모르시겠어요?"
"범려 님, 안녕하세요."
아르테미스는 범려의 얼굴을 다시 보더니 밝게 웃었다. 아르테미스가 여성이기는 하지만 NPC라는 이유 때문인지 범려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저 좀 부활시켜 주세요."
"10골드예요."
아르테미스가 밝게 웃으면서 10골드를 외치자 범려는 부활하는 데 돈을 지불한다는 소리에 살짝 주춤했다.
"돈 말고 부활하는 방법은 없나요?"
"12시간 후에 자동 부활됩니다. 호호호."
지금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친절 봉사를 위한 천사의 모습이지만, 돈을 받으면서 부활시켜 주는 모습은 이 세상에 절대 공짜란 없다는 아주 철저한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듯했다.
"그 두 가지 말고는 부활하는 방법은 없나요?"
"없어요, 범려 님."
딱 잘라 말하는 아르테미스의 모습을 보니 정말 부활하는 방법은 이 2가지 방법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로그아웃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너무 화가 나서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후, 답답하네."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당장 녀석을 잡으러 갈 방법은 없었다. 자신의 활 실력이라면 녀석의 미간에 화살을 무한정 꽂아버릴 실력은 되지만 녀석을 죽일 정도의 데미지는 나오지 않는다.
"범려 님, 뭘 그렇게 씩씩거리세요. 이곳은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아르테미스의 말대로 이곳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불가능했고 건들지도 못했다. 혼자서 화를 내도 자신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너무 화가 나서, 아우!"
남들은 겨우 한 번 죽은 것 가지고 그러냐 하겠지만, 자신은 이렇게 고의적으로 죽이는 녀석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대신 원한을 가지고 싸워서 죽은 적은 있다.
"일단 이곳에서 화를 다스리세요."
"네."
범려는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그녀의 옆에서 천사인 아르테미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봤다.
"부활을 하시려면 10골드입니다. 부활 장소는 자신이 죽은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됩니다."
"부활에 10골드라. 정말 비싸네."
돈이 있는 이들은 돈을 지불하고 부활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죽으면 이곳에 온 뒤 바로 접속을 종료하게 된다. 어차피 현실 시간으로 12시간이 지나면 부활이 된 상태로 접속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음."
혼자서 멍하니 자리하고 있을 때 저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의 눈에는 군대처럼 들어왔다.
"많은 영혼들을 환생시켜 내 부하로 부리면 어떨까나."
범려가 혼자 로그아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동안 아르테미스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부활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한순간 죽은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영혼의 공간이 텅 비어버렸다.
"아, 다 가버렸다."
"이제 일이 끝났다."
아르테미스는 오늘 일과가 끝났다며 기지개를 폈고, 바닥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런데 범려 님은 안 가세요?"
"그냥 시간 지날 때까지 있을래요. 어차피 시간이 가면 자동 부활하잖아요. 그리고 아무 죄 없이 사람들을 죽인 그놈 머리통에 화살을 꽂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르테미스는 범려의 말을 들어주면서 자신의 달콤한 휴식을 심심치 않게 보내고 있었다.
"범려 님은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당연하죠! 비록 제가 힘은 없지만! 녀석의 머리통에 이 화살을 꽂아 녀석에게 응징을 하고 싶어요!"
범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자 아르테미스는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화를 낸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모든 일은 차분하게 하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돼요."
아르테미스가 마음을 진정시켜 주자 범려는 녀석에 대한 분노가 조금 사그라졌는지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꼭 스승님같이 말하네요."
범려는 NPC인 아르테미스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고, 동시에 자신을 타이르는 스승님의 모습도 보았다.
"어머, 그랬나요? 호호호."
적당히 웃음소리를 내면서 밝은 모습을 보여 줬지만, 정말 일반 NPC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다.
"그래도 아이템 때문에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녀석들은 좀 꼴 보기 싫네요."
"그럼 나중에 강해지고 나서 그 사람과 싸울 자신 있으세요?"
"당연하죠."
"그런데 그쪽이 혼자가 아니라면?"
아르테미스는 약간 의심스러운 질문을 던졌지만 범려는 즉각 입을 열었다.
"혼자건 열이건 천이건 모두 다 쓸어버릴 겁니다!"
당찬 모습이 약간 폼 나 보이는 범려였지만, 살짝 적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천 명은 안 되겠네요."
"열 명은 가능해요?"
"아하하……."
범려는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자신 혼자서 한 명 감당하기도 벅차다고 느꼈는지,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어물쩍 넘기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어요. 한 명 감당하는 것도 힘들죠."
끙!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한 손으로 하늘을 전부 가리지는 못한다.
"만약 범려 님이 손으로 하늘을 가릴 정도의 실력이 된다면 한 만 명 정도는 거뜬하겠죠?"
"뭐, 그 정도가 된다면 저를 절대적으로 따라줄 사람들이나 군대가 있다는 조건인가요?"
"음, 뭐 말하면 그럴걸요."
"정말 저를 절대적으로 따라주면 병사들 만 명이 문제일까요. 천하를 휘어잡겠죠. 헤헤."
범려는 천하를 휘어잡겠다며 웃었지만 게임에서 자신의 휘하에 병사들을 거느린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분명 직업 중에서 마을의 경비나 도시에서 병사들을 양도받아 움직일 수 있는 직업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그런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하고 싶어도 조건이 너무나 까다로워서 대부분 포기해버린다.
"아, 생각해보니 정말 그놈 나쁜 놈이네."
범려는 화가 좀 풀리는가 싶더니 다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천사님, 어디 스트레스 풀 만한 데 없을까요?"
"제가 아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곳으로 보내드릴까요?"
"그곳이 어디인가요?"
범려가 아르테미스의 말을 듣고는 솔깃해져서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약간 걱정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딱 한 곳이 있어요. 대신 그곳에 가시고 돌아오시면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좋아요. 그렇게 하죠."
-퀘스트:투쟁의 땅!
수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끝없는 싸움을 벌인다. 단 하나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죽은 자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하지만 아르테미스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보내는 것이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0명과 싸워 이겨라.
난이도:D
발동 조건:영혼 상태, 아르테미스와 단둘이 남았을 때
완료 조건:100명을 죽여라.
보상:아르테미스의 부탁
"수락!"
거침없이 외치며 퀘스트를 수락하자 범려의 몸이 빛으로 휩싸이면서 투쟁의 땅으로 전송되었다.
번쩍!
"여긴가."
"죽어라!"
갑자기 등 뒤에서 살기가 느껴지자 범려는 바로 땅바닥을 구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헉!"
"으아-!"
범려를 죽이기 위해 등 뒤에서 무기를 휘두른 녀석은 아주 무식한 오크였는데, 일반 오크들과 다르게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붉고 지독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크아-!"
"이런, 젠장!"
범려는 바로 화살을 꺼내더니 활시위에 올리지도 않고 녀석의 눈깔에 그대로 찔러버렸다.
푹! 푹!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눈이 급소로 판명이 됐는지 치명타가 터지면서 오크는 시야를 잃고,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를 무작정 휘두르며 발광을 해댔다.
끼이익!
눈을 찌른 화살을 바로 활시위에 올리고 당기자 정확하게 오크의 머리통에 화살이 꽂히면서 치명타가 터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녀석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투쟁의 전사 1명을 해치웠습니다. 해치운 숫자 1/100.
"휴, 죽는 줄 알았네."
투쟁의 땅에 도착하고 1초도 안 돼서 몬스터가 달려들더니, 오자마자 죽는 줄 알았다.
"쿠오-!"
뒤를 돌아보니 이곳에서는 몬스터건 인간이건 서로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마치 이곳이 투쟁의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비명과 괴성이 들려왔다.
"이런 곳에서 100명을 죽이라는 거지."
서로가 미친 듯이 싸우는 곳에서는 적과 아군이 따로 없었고 오로지 피의 향연만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