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숲 속의 비밀
로즈는 범려의 힘을 빌려서 단 4일 만에 레벨 85에서 20레벨을 올려 105레벨에 되었다. 그렇게 레벨을 올리는 사이에 범려의 레벨도 118이 되었다.
"자, 아이템 가져가라."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야?"
"내가 사제들이 쓰는 아이템을 쓸 수는 없잖아."
매머드 던전을 도는 동안 로즈가 사용해야 할 아이템이나 신성 마법서가 많이 나와서 건네주었지만, 그녀는 범려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괜찮아. 내 거 나오면 내가 쓸 거야. 걱정 마."
"그럼 다행인데, 지금까지 하나도 안 나왔잖아."
"……."
운도 지지리 없는 범려. 아직까지 아이템을 먹지 못했다. 챙긴 게 있다면 오로지 돈밖에 없다.
"아, 그리고 나 방송 일 있어서 지금 가봐야 돼."
"어, 알았어. 잘 다녀와."
사냥이 한 번 끝나자 로즈는 방송을 위해 로그아웃을 했다.
그녀가 가버리자 홀로 남은 범려는 자리에 앉아 뼈로 병사들을 만들고는 길을 가면서 사냥을 했다.
몇 단계의 해골 전직, 끝없는 레벨 노가다 해골들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직업인 해골 제작자였다.
범려는 다시 자연의 도로시 지역으로 돌아와 단절의 산맥 끝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에서 엘프들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거지?"
엘프들을 찾는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정보 길드에서 찾지 못한 걸 찾아달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난이도의 퀘스트였다.
엘프들의 발견이 산맥 끝자락에서 시작되었지만, 잠시 이곳을 지나가는 길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곳에서 수색이 가능하려나."
혼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번쩍하며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스승님!"
사냥철이 되면 어김없이 활을 들고 경찰서에 달려가 신고를 하고는 사냥을 하러 떠나는 스승님이다. 범려는 그 뒤를 자주 따라다니며 사냥을 했다.
범려의 스승님은 사냥꾼처럼 동물들을 추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 흔적을 잘 찾아 뛰어난 사냥꾼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스승님한테 귓속말을 해봐야겠어."
[스승님!]
[무슨 일이냐, 제자야.]
[제자를 도와주십시오, 스승님.]
[네가 나한테 도와달라는 걸 보니 뭔가 찾으려고 하는구나.]
[네, 스승님. 엘프를 찾으려고 합니다.]
엘프라는 말에 안서진은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연락이 왔다.
[어디냐, 내가 그곳으로 가마.]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곳 위치가…….]
범려는 스승님에게 위치를 말하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약 4시간을 기다린 결과, 궁귀 안서진이 범려를 찾아왔다.
"그래, 엘프를 찾는다고."
"예, 스승님. 엘프를 찾는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엘프를 처음으로 발견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추적술을 모르고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좋아. 엘프 찾는 것을 도와주지."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런데 저 뒤에 있는 녀석들은 뭐냐."
궁귀가 범려의 뒤에 있는 병사들을 가리키며 묻자, 범려는 자신의 직업을 스승님에게 알려 드렸다.
"해골 제작자라. 좋은 걸 얻었구나."
"아닙니다, 스승님."
"가자, 엘프를 찾으러."
궁귀는 가장 먼저 동물들의 흔적을 걸러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흔적을 보기 위해 다른 흔적들을 파악하면서, 원하지 않는 흔적들은 소거해갔다.
"음, 어린아이인가? 아니, 그러기에는 발자국이 너무 커."
궁귀는 딱 20분 만에 엘프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발 크기가 얼추 270밀리미터 정도였지만, 그 무게는 반도 안 되는 아주 가벼운 사람의 흔적이었다.
"제자야, 혹시 엘프에 관한 것 중에 몸무게에 대해 아느냐?"
"저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몸이 가볍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럼 이 발자국이 엘프와 가장 가깝겠구나."
땅바닥에 찍혀 있는 발자국을 보고 궁귀는 그렇게 예상을 했고, 범려는 스승님의 추적술을 보고 감탄했다.
"스승님은 역시 대단하십니다."
"가르쳐 줄까?"
"네! 스승님."
"그러지. 일단 길을 가면서 이야기하자."
궁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추적술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판게아 월드』에서는 모든 동물들의 흔적을 아주 자세하게 구현해놓았기에 좋은 수업 교제가 될 수 있었다.
"이 발자국을 봐라. 깊이와 넓이를 보면 어디 쪽에 힘이 많이 가해졌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추적을 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실력을 보여 주는 궁귀는, 교제가 될 만한 발자국을 발견하면 어김없이 범려에게 설명해주었다.
"여기서 사라졌다."
궁귀는 엘프의 추적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엘프의 흔적을 찾다가 끊어졌다는 곳이 이곳이군."
범려는 정보 길드에서 알려 준 엘프의 흔적을 잃어버렸다는 커다란 나무 앞에 도착했다.
"나무를 올라탄 흔적은 없고, 뛰어오른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졌구나, 제자야."
궁귀의 말에 범려는 여기까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반대로 여기가 단서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디로 갔을까."
범려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주변을 둘러보고는 위를 올려다봤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다.
"위로 올라가기에는 쉽지가 않은데."
아무리 엘프라도 원숭이가 아닌 이상 이런 나무를 타고 흔적 없이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제자야, 아무래도 나무 위를 조사해봐야겠다."
궁귀는 이 거대한 나무 위가 수상했다. 땅으로 사라진 흔적도, 날아오른 흔적도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위로 끌어올려졌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끙! 답이 없네."
범려는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거대한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무를 타고 계속 올라갔지만, 지상에서 5미터 정도 오르니 더 이상 밟고 올라갈 부분이 없어서 땅으로 몇 번이나 떨어졌다.
"으악!"
"제자야, 왜 그리도 나무를 못 타느냐."
"얘들아, 땅속으로 들어가라. 아무래도 난 저 위로 올라가야겠다."
범려의 말에 해골 병사들은 땅속으로 파고들더니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후! 다시 올라가자!"
범려는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갈 생각으로 안간힘을 써가면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올라와라. 빨리 올라와서 떨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궁귀는 천천히 올라오라고 했지만, 정작 그는 이런 나무쯤은 우습다면서 성큼성큼 올라가고 있었다.
"진짜 빠르네."
범려 역시 스승님처럼 나무를 빠르게 타고 올라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몸은 쉽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쉬어볼까."
궁귀는 어느새 거대한 나무의 첫 번째 가지 위에 올라서서 휴식을 취했다.
"끄응!"
"어서 올라오너라."
범려는 궁귀가 있는 나뭇가지로 올라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후! 이제 조금 살겠다."
"제자야, 아직 멀었다. 저 위를 보거라."
지상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위를 보니 아직 절반도 오르지 못했다.
범려는 10분 정도의 짧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차근차근 나무를 타면서 위로 올라갔다.
쉬이익!
"컥!"
순간, 화살이 하나 날아와 옆에 꽂히자 범려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저게 엘프군."
궁귀는 반대편 나뭇가지에서 화살을 날린 사람을 보면서 그가 엘프라는 종족임을 확인했다.
"신기하게 생겼군."
기다란 귀에 예쁜 얼굴, 늘씬한 키, 감탄할 만큼의 활 실력을 가진 존재인 엘프를 발견한 것이다.
"스승님, 신기하게 생겼다니요! 전 죽게 생겼는데."
"여기서는 진짜로 죽는 게 아니지 않냐. 한 번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스승님!"
범려가 버럭 소리를 치자 궁귀는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 엘프의 활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옆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여기는 인간들이 올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엘프가 큰 소리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범려는 퀘스트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다.
"저는 탐험가입니다. 모험을 좋아해서 우연치 않게 이 나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너그럽게 용서를 해주십시오."
범려는 거짓으로 자신을 모험가라고 밝히면서 엘프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대답은 한 가지였다.
"돌아가라!"
'미쳤냐? 돌아가게? 어떻게 찾은 건데!'
범려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엘프를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스승님, 이럴 때 좋은 방법 없습니까?"
"없다. 그냥 죽든가, 아니면 저 아래로 내려가든가 둘 중 하나다."
범려는 궁귀에게 현명한 판단을 기대했지만, 그는 유일한 제자인 범려를 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포기하면 퀘스트는 못한다. 절대 물러날 수 없다!'
반드시 해야겠다는 의지를 내뿜는 범려였다.
그런 의지가 그의 머리를 점점 빠르게 회전시키더니, 이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서 이대로 내려가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무슨 말이냐? 불가능하다니? 말도 안 된다. 이대로 내려가거라!"
엘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래로 내려가라 재촉했지만, 범려는 그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따라주지 않았다.
"전 초보 모험가라서 이 위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 없습니다. 나쁜 뜻은 없으니 절 아래로 내려가게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냥 떨어져 죽어라!"
엘프가 매몰차게 말했지만 범려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렸다.
"제 목숨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너무나 억울합니다. 절 이곳에서 내려가게 도와주십시오!"
범려는 계속 도움을 요청했고, 엘프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만족할 만한 대답을 했다.
"알았다. 도와주지. 거기서 그대로 기다려라."
"감사합니다."
건너편에 있던 엘프는 나뭇가지를 타고 풀쩍 뛰어넘더니 범려가 있는 나무에 가지를 타고 원숭이처럼 뛰어넘어 두 사람을 근처에 두꺼운 나뭇가지가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범려가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자, 엘프는 인간에게 이런 감사의 표시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벼, 별거 아니었소."
'이야, 제자가 이런 아부를 할 줄 알다니. 평생 아부 같은 건 모르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제일 놀란 사람은 옆에 있던 범려의 스승이었다. 범려는 쉽사리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인사는 자주 해도 상대방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 그였다.
"제가 너무 고마워서… 드릴 선물은 없고, 이걸 하나 드리겠습니다."
범려는 황혼의 무덤에서 마법사만 죽어라 잡아서 얻은 자연의 로브를 엘프에게 건네주었다. 어차피 너무 많은 자연의 로브를 얻어서 어떻게 처분을 해야 할지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이, 이런 걸……."
"저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물건입니다. 그냥 받아주십시오."
'흐흐흐! 어차피 해골 마법사들은 전원 자연의 로브를 입고 있으니 남는 것 하나 처분하는 것뿐이다.'
범려는 자연의 로브를 전혀 아깝다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걸 얻을 수 있는 투자라고 생각했다.
"제발 이걸 받아주십시오. 아니면 지나가다가 주웠다고 생각하십시오."
범려는 무조건 물건을 들이밀면서 로브를 받도록 유도했다. 이거 말고는 딱히 줄 것도 없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엘프는 결국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범려의 선물 공세에 이기지 못하고 물건을 받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범려는 이제 물러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계속 붙어 있으면 오히려 문제가 되니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따라오시지요."
선물을 받은 엘프는 범려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활을 다루는 엘프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이지만, 그래도 선물을 받았으니 행동이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열려라, 나무야."
엘프가 이 거대한 나무에 속삭이듯이 말하자 거대한 줄기에서 문이 생기면서 열리자, 범려와 궁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둘은 엘프의 안내를 받아 나무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엘리베이터와 같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엘프가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오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지상에 도착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우리가 땅에 내려서자, 엘프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닫혀라, 나무야."
완벽한 엘리베이터였다. 문을 열고 닫는 주문은 열려라, 참깨처럼 '열려라, 나무야', '닫혀라, 나무야' 이 두 가지였다.
"스승님, 왜 추적을 하다가 사라졌는지 알겠는데요."
"네 말이 맞다. 이런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누가 생각했겠냐."
범려는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나무 위는 퀘스트에서 요구하는 마을이 아니었다.
"내일 다시 와야겠어요."
"왜 다시 오려는 거냐?"
"퀘스트를 받았거든요."
"퀘스트? 그 퀘스트라는 거 같이 할 수 있느냐?"
"공유해드릴게요."
-조건이 맞지 않아 퀘스트를 같이 공유할 수 없습니다.
"앗! 스승님, 조건이 맞지 않아 퀘스트 공유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조건이 필요하다고? 그럼 어쩔 수 없구나."
궁귀는 순순히 퀘스트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하지만 엘프라는 것을 처음 봐서 그런지 호기심이 생겼다.
"제자야, 내가 따라다닌다고 해서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
"안 돼요, 스승님. 절 따라다니면 위험해요. 제가 하는 퀘스트가 상당히 위험해서 스승님을 보호해드릴 자신이 없어요."
범려의 솔직한 심정은, 퀘스트가 난이도가 있어서 궁귀를 보호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럼 이번에는 물러나마. 대신 내가 강해진 뒤에 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는 당연히 같이 해야죠. 스승님 실력이면 레벨 90 정도만 돼도 대환영입니다."
"좋다. 90레벨이 돼서 보자꾸나."
제자의 말을 들은 궁귀는 레벨 90을 달성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지만, 범려는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조금 전에 만난 엘프는 마을이 아닌 어디 망루 같은 곳에서 혼자 사는 것 같았다.
"일단 내일도 찾아와야겠어."
범려는 저 위에 있는 엘프가 퀘스트를 하는 데 있어 열쇠로 인식되었다.
게임 시간으로 하루가 지나자 범려는 나무 위에 있는 엘프를 다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
엘프는 어제 봤던 사람을 오늘도 보게 되어서 그런지 인상을 찡그렸다.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엘프인 모양이다.
"어제는 감사한 나머지 제가 제대로 대접을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과일을 몇 개 가져왔습니다."
범려는 들풀 도시에서 과일을 몇 종류 가져왔다. 사람이든 엘프든, 일단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 자연스럽게 먹게 된다.
"고맙습니다."
엘프는 과일을 몇 개 집었다. 육식을 하지 않는 엘프에게는 이런 과일이 최고의 음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혼자 살고 계시는 것 같던데, 맞습니까?"
"네, 이곳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범려는 가볍게 질문을 하면서 주변을 살며시 둘러보았다. 집은 나무 안에 구멍을 내 만들어놓은 형태로, 저 아래가 아주 잘 보이도록 설계된 망루였다.
'확실히 여기는 그냥 집이 아니야.'
범려는 엘프가 사는 이곳이 집이 아니라 망루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동안 혼자 지내면서 상당히 지루했을 텐데, 어떻게 지루함을 달래시고 사셨는지요."
"주변의 동물들과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동물들과 이야기를 하실 줄 아시는가 보군요. 엘프들은 모두 다 동물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까?"
"너무 궁금한 게 많으시군요."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호기심이 생기면 참지를 못해서……."
범려는 살짝 상대를 떠보면서 말을 건넸고 엘프와의 친밀도를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엘프가 아직은 날 경계하고 있구나.'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전 범려라고 합니다."
범려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소개를 하자 엘프도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골이라고 합니다."
"아골 님이시군요. 이렇게 아골 님의 이름을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범려는 어떻게 해서든 아골과의 친분을 두텁게 만들기 위해 매일같이 도시에서 나오는 최고급 과일을 사다 바쳤다. 그렇게 과일을 사다 바치기를 게임 시간으로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아골은 범려가 올 때마다 그를 반겨 주었다. 언제나 먹을 것을 가져다주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어서 오세요, 범려 님."
"오늘도 별일 없으셨나요, 아골 님."
별일이 있을 리가 있을까. 이곳을 아는 사람은 범려와 그의 스승 궁귀뿐인데.
"범려 님, 오늘 바쁜 일이 있으신가요?"
'왔다.'
일주일 동안 최고급 과일만 처먹은 아골이다. 이제는 뭔가 답이 하나 나와야 정상이다.
"다른 게 아니라, 범려 님에게 저희 가족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범려는 가족이라는 말에 뭔가 확실하게 왔다는 것을 느꼈지만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
"무슨 말인가요? 제가 처음 물어봤을 때 혼자 사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때는 범려 님을 잘 몰라서 함부로 가족들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하긴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죠."
범려가 그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투로 말하자 아골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 가족들은 마을에 살고 있는데,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네? 단순히 가족만 사는 게 아니었습니까?"
범려는 짐짓 놀란 척을 하면서 대답했다.
"오늘은 제가 마을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그 전에 다른 동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다른 동료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니요?"
"이곳은 망루라서 10일간 이곳에서 감시를 하다가, 일이 끝나면 며칠간 마을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교대를 해줄 동료가 와야 합니다."
"아, 어쩐지…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이곳이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구석이 많다고 느꼈는데, 아골 님의 집 꾸미는 취향이 이렇구나, 하고 오해했습니다."
범려는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포근한 집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범려는 상대를 완전히 낚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똑똑! 똑! 똑!
문을 두드리는 것에도 암호가 있는지 일정한 간격으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골이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다른 엘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잘 있었나?"
"물론이지."
"헛! 인간!"
방금 들어온 엘프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들었지만 아골이 나서서 그 엘프를 진정시켰다.
"잠깐! 저 인간은 내 친구야."
"친구?"
범려는 아무런 걱정 없이 엘프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듣고만 있었다.
"범려 님은 내 친구야. 그러니 위해를 가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어."
"알겠네."
이야기가 끝났는지 아골은 나를 불러 눈앞에 있는 엘프와 인사를 하게 해줬다. 적당히 통성명을 한 범려는 아골을 따라서 망루를 나왔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골 님."
범려는 느긋하게 행동하면서, 아골이 먼저 앞서 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하암! 이 퀘스트 상당히 지루한데."
퀘스트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퀘스트 같았다. 일단 엘프가 관리하는 망루에서 벌써 일주일을 넘게 시간을 소비했다.
"아무리 게임 시간으로 일주일을 보냈다고 하지만,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대략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아골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나타났다.
"범려 님, 저를 따라오시지요."
"네."
앞장을 서서 걸어가던 아골의 모습이 어느 순간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골 님?"
"여기입니다."
아골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제가 깜빡했군요."
허공에서 불쑥 나타난 손에 의해 범려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
범려는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는 나무밖에 안 보이는 숲이었는데, 지금은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저희들이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거대한 나무 몇 개를 중심으로 지상에서 나무 꼭대기까지 엘프들이 사는 집이 늘어서 있었고, 수많은 엘프들이 범려의 눈에 들어왔다.
-엘프의 도시를 발견하셨습니다.
범려는 엘프들이 이런 식으로 도시를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골 님, 엘프들은 대단하군요. 이런 도시를 감추고 있다니."
"아닙니다. 이건 도로시 님이 해주신 마법입니다."
"자연의 도로시?"
"네. 그렇습니다, 범려 님."
자연의 도로시라면 이 지역을 수호하는 드래곤을 말한다. 엘프들은 도로시의 가호 아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다시 아골의 안내를 받으며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많은 엘프들이 범려를 쳐다보았다.
"인간이다."
범려는 동물원에 살고 있는 원숭이처럼 엘프들의 구경거리가 됐지만, 그는 자신이 원숭이가 된 것도 모르고 엘프들을 살피며 동물원에 놀러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범려 님, 저희 집에 가기 전에 먼저 이곳에 들러야 합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엘프의 도시를 다스리시는 분이 계시지요."
아골은 엘프들의 수장에게 먼저 범려의 얼굴을 보일 작정이었다. 이 도시에 인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들어가시지요."
아골은 범려를 안내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나이 든 엘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 인간이군."
"아골이 데려왔다는 인간이 저 인간인가? 별 볼일 없는 모습이군."
다들 범려를 보고 좋은 말은 하지 않았다. 분위기 역시 그를 배척하는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범려라고 합니다."
범려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여러 수장들의 눈을 봤다.
'이거 퀘스트 한번 하기 더럽게 어렵네.'
그는 속으로 이 퀘스트가 얼마나 난관이 많을지 실감하고 있었다. 엘프의 도시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는 어디 도망갈 데도 없었다.
"별다른 위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군."
수많은 엘프들 속에 유독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 엘프가 있었다. 그 엘프는 수염이 얼마나 긴지 발끝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대장로님, 위험하지 않다니요?"
"전혀 위험하지 않으니 그냥 놀다 가게."
위험하지 않다는 대장로의 말에 다른 엘프 장로들은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몇 마디 하더니 조심스럽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범려 님, 이제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네."
아골을 따라간 범려는 곧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아골의 집은 수수한 멋이 있었고, 그의 부인과 아이들은 상당히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제 아내 셀린이고, 여기 아이들은 테일과 마린입니다.
"반갑습니다."
범려는 아골의 부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고, 아이들에게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빠, 이 아저씨 누구야? 엘프가 아니잖아."
아이들은 인간을 처음 보는지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봤다.
"난 인간이란다. 엘프와는 다르지."
아골이 해야 할 대답을 대신하며 범려는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기해!"
두 아이는 처음 보는 인간이 신기한지 범려에게 달려오더니 장난스럽게 볼을 만져 보았고, 아이들의 무례한 행동에 셀린이 소리를 쳤다.
"손님에게 무슨 짓이니!"
"괜찮습니다."
범려는 아이들의 행동이 약간 짓궂었지만, 이해해주었다. 이런 귀여운 아이들의 장난을 받아주는 것도 재미난 일이었다.
"아저씨 나이가 몇이야? 인간들 나이가 우리보다 적다는데, 사실이야?"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어서 들어가!"
셀린은 아이들의 장난이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들을 방으로 쫓아 보냈다.
"죄송합니다. 애들이 버릇이 없어서."
셀린은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범려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아이들인데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셀린은 얼굴에 미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언제나 말썽꾸러기들이라 무슨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배가 조금 출출하군요."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이쪽으로 오세요."
정신을 차린 셀린은 범려를 식탁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아골이 먼저 의자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어서 앉으시지요."
"네."
둘은 식사를 같이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날 밤 범려는 아골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날이 바뀌고, 범려는 엘프 도시를 구경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런데 많은 엘프들이 범려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반쯤은 침입자로 여겼다.
"이거야 원, 아무리 인간들의 손이 닿지 않은 도시라고 하지만, 이런 노골적인 시선은 별로인데."
인간들을 경계하는 엘프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시선들을 바꿀 방법이 없을까?"
혼자서 고민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누군가 범려를 도와 인간들에 대한 이미지를 같이 개선한다면 모를까.
"범려 님!"
"아골 님, 여기까지 오셨네요."
"아니, 여기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부터 대회가 열리는데."
"대회요?"
범려는 아골을 따라서 엘프들의 대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
"무슨 대회인가요?"
"때마침 오늘부터 엘프들의 궁술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엘프 도시에서는 최고의 궁수를 뽑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대회를 여는 이유는 뛰어난 엘프 전사들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대단하네요. 이렇게 많은 엘프들이 이런 곳에 모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죠? 엘프들은 매년 열리는 이 대회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다들 도시를 지키기 위해 그러는 것이죠."
"도시를 지키기 위해 이 대회에 열광한다고요?"
"아, 범려 님은 모르고 계시지요. 엘프 도시는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막상 그렇지 않습니다."
아골은 엘프 도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었다.
"이곳은 평소에도 몬스터들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습니다. 많은 엘프들이 정령들을 끌어들여 싸움을 했지요. 그러다 보니 많은 정령의 힘이 한곳에 집중되고, 자연의 힘이 어긋나기 시작한 거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정령의 힘이 너무 강대해지자 자연의 균형을 원하는 정령의 왕들이 스스로 정령계의 문을 닫아버렸지요. 수많은 정령들이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정령의 힘으로 몬스터를 막았던 저희들은 그 힘을 잃자 무기를 만들어 싸우기 시작했지만, 많은 수의 몬스터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순간 자연의 도로시가 나타나 몬스터들을 쓸어버리고, 이곳을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게 된 겁니다. 정령의 힘을 잃은 엘프들은 정령을 대신할 무기와 마법을 익히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회를 열며 전사들을 양성하게 된 것입니다."
아골의 말을 들은 범려는, 이 도시에 몬스터가 침입을 하게 되면 모든 엘프들이 무기를 들고 도시를 요새화시키는 모습을 떠올려 봤다.
"그런데 도시 전체를 은폐시켜 놓았다면서 왜 전사들을 양성하는 거죠? 드래곤이 이곳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닙니까?"
"도로시는 엘프들이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시간을 줬을 뿐, 보호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이 은폐 마법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힘을 기른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골의 말을 들은 범려는 약간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은폐 마법에 대해 힘을 기르고 있다는 말은, 누군가의 손에 발견되면 이 은폐 마법이 사라진다는 소리와 동일하다.
'게임 스토리상 누군가 이걸 발견하면 은폐 마법이 사라지고 도시가 드러난다는 것인데, 엘프의 도시를 발견한 건 나잖아-!'
이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범려의 군대는 저 멀리 도시 바깥에 숨어 있었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은폐 마법이 벗겨질 것이다.
"하하……."
불운의 씨앗이 돼버린 범려였다.
"아골 님,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요."
"네? 무슨 말입니까?"
"이제 곧 이 도시에 은폐 마법이 벗겨지게 될 겁니다."
"네?"
아골은 범려의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엘프의 도시를 감싸고 있던 은폐 마법이 사라집니다.
"크윽! 빠르다."
범려가 신음 소리를 내면서 메시지를 보고 있을 때, 다른 엘프들이 소리쳤다.
"은폐 마법이 사라진다!"
"마법이 사라진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엘프들의 외침에 다들 놀라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구 하나 빠짐없이 신속하게 준전시체재로 발동이 걸린 것 같았다.
"범려 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골은 범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활과 화살, 그리고 검을 꺼내들며 전투 준비를 했다.
"아직 몬스터가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벌써 준비를 하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범려 님, 이 도시는 지난 수십 년간 몬스터들에 의해 공격당해 왔습니다. 그들이 언제 또 이곳을 노리게 될지 모릅니다."
아골의 말에 엘프들이 지난 세월 얼마나 몬스터들에 의해 시달림을 받아왔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제 병사들이 바깥에 주둔해 있습니다. 비록 많지 않은 해골 병사들이지만, 엘프들을 돕겠습니다."
"해골 병사?"
엘프인 아골은 해골 병사라는 말에 약간 의문을 가졌고,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네크로맨서?"
"전 네크로맨서가 아닙니다. 아르테미스 님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영혼의 천사 아르테미스 님이 인간을 선택하시다니 이건 믿을 수 없습니다!"
아골은 범려의 말을 믿지 못했다. NPC들에게 아르테미스는 영혼의 세계 신이다. 그런 그녀가 인간을 선택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믿지 않으신다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르테미스!"
화아악!
엘프의 도시 위에 찬란한 빛을 뿌리며 아르테미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범려는 집 안이 아닌 집 바깥에서 번쩍이는 빛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아르테미스 님!"
엘프의 도시에 모습을 드러낸 아르테미스는 평상시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니라 여섯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쿨럭!
범려는 엘프의 도시 위에 멋있게 등장한 아르테미스의 모습에 기침을 했다. 평소에는 절대로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범려 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엘프들이 제가 아르테미스 님이 인정한 사람인 것을 믿어주지 않더군요."
"어머! 그거 괘씸한 소리군요!"
아르테미스는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면서 흥분했지만, 많은 엘프들은 아르테미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오, 고귀하신 영혼의 천사께서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엘프 대장로가 노구를 이끌고 아르테미스 앞에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나의 대리인이 이곳에 왔는데,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감히 어느 누가 영혼의 천사님의 대리인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없다는데요, 범려 님?"
"아, 그럼 제가 잘못 들었나 보네요."
범려는 살짝 웃으면서 아골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믿겠지?'
라는 표정을 짓는 그 모습에 아골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등에 달린 날개는 뭔가요?"
평상시에는 이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아르테미스였다.
"원래 제 날개는 12개예요. 너무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 같아서 2개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감추고 다녀요."
"……."
범려는
'오늘은 왜 이렇게 나왔어?'
라고 묻고 싶었지만, 모든 엘프들이 아르테미스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황이니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여기서 말하지만, 나의 대리인은 여기 있는 범려 님이다. 범려 님을 함부로 하는 자는 나를 함부로 대한다는 걸로 생각하겠다."
아르테미스가 으름장을 놓으면서 겁을 주자 엘프들은 그 말에 순순히 복종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르테미스 님."
"범려 님, 이제 가볼게요."
아르테미스는 손을 흔들면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찬란한 빛을 뿌리면서 영혼의 세계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