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새로운 기술 (1)
범려가 엘프들의 과도한 친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이 엘프 도시에 유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번 이벤트를 통해서 정령사를 새로 시작하거나, 지금의 직업을 버리고 정령사로 직업을 변경해 지존을 꿈꾸는 이들이었다.
"많이도 몰려온다."
엘프 도시 한쪽에는 전직을 시켜 주는 정령사들이 있어서 유저들의 직업을 변경해주거나 전직을 하게 해주고 있었다.
"음, 그런데 저건 뭐지?"
엘프들은 유저들에게 이상한 돌을 하나 주면서 전직을 시켜 주고 있었다.
"저 돌은 뭐지? 사람마다 주는 색상이 다르네."
네 종류의 돌을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며 정령사로 전직하고 있었다.
"무슨 돌이지?"
신기하게 생긴 그 돌이 궁금해진 범려는 엘프들에게 물어봤다.
"혹시 저 돌이 뭔지 아시나요?"
"저 돌은 정령석입니다. 인간들은 정령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인위적으로 정령과의 친화력을 가지게 하는 물건입니다."
"아, 정령석!"
엘프의 설명에 범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좋은 물건이군요. 저런 물건이 있으면 누구나 다 정령을 소환하겠네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직 정령사만이 소환이 가능합니다. 정령석이 있다고 해서 모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범려는 엘프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엘프의 설명을 다 듣고 나자 그는 머리에서 무언가가 번쩍 떠오르더니 곧장 대장로를 찾아갔다.
"대장로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범려 님."
범려가 찾아온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저에게 정령석을 만드는 비법을 알려 주십시오."
"네?"
엘프들이 만드는 정령석을 범려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정령석을 만드는 방법은 저희들만이 알고 있는 비법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겁니다."
"허허… 이런."
대장로는 범려의 요구에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이걸 배우시고 정령사가 되고 싶은 겁니까?"
"아닙니다. 그냥 해골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배우려는 겁니다."
단순히 정령사가 되고 싶어서 배우는 게 아니라 해골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기술을 전수해달라는 것이다.
"음, 그럼 제가 제시하는 시험을 통과하십시오. 그걸 통과하신다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범려는 자신 있게 대답하면서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대장로의 시험
엘프들의 비법인 정령석 제조 방법을 공짜로 가르쳐 줄 수가 없어서 시험을 치른다.
난이도:B
완료 조건:상급 정령과 싸워서 이겨라. 4대 정령 전부 모두 다.
보상:정령석 제조법
범려는 퀘스트를 받자마자 살짝 걱정이 되었다. 4대 정령과 싸우라는 내용 때문이다.
"하급도 아니고 상급 이상의 정령과 싸우라니……."
하급과 상급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소환되었을 때 뿜어내는 위용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범려 님."
"네."
상급 정령과 싸워야 하다니, 걱정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고위 정령사는 반쯤 마법사와 같은 존재다.
"정령들과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하는 거지……. 상급 정령이면 상당히 강하겠지."
혼자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누군가 귓속말을 시도했다.
[범려야.]
"아! 로즈다."
[거기서 뭐 해? 엘프 도시에 구경 간 거야?]
[아, 퀘스트 때문에 왔어. 신기한 퀘스트를 받았거든.]
[신기한 퀘스트?]
[정령들하고 한판 싸우래.]
[진짜? 재미있겠다. 나도 가서 구경해도 돼?]
로즈는 범려가 화끈하게 전투를 벌이는 줄 알고는 구경을 와도 되냐고 물었다.
[후! 와서 구경해. 그런데 재미있겠냐고 묻는다면 장담은 못해.]
[괜찮아. 범려가 알아서 잘 싸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투에서 풍겨지는 뉘앙스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범려는 이렇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로즈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알았다. 지금 와라.]
[응!]
귓속말을 끄고는 해골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범려의 뒤에서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범려야!"
"헉! 로즈."
한달음에 엘프 도시까지 달려온 로즈는 범려를 보자 부끄러움도 없이 품에 안겨 버렸다.
"……."
온몸으로 전해지는 감촉에 범려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일 바쁘지 않아?"
"지금은 쉬는 시간이야. 일 이야기는 그만."
로즈는 범려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었고, 범려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왕 왔으니 해골들 보러 가자."
"응."
범려는 로즈를 데리고 도시 바깥으로 나가서 해골들을 불러들였다.
"얘들아, 내가 일러주는 방법대로 내일 상급 정령들이랑 한판해야 한다."
범려는 정령들과의 전투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해골들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정령들을 오래 붙잡고 싸우려고 하지 마라. 그들은 일반 생명체가 아니라서 위험하다."
해골 병사들은 범려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 특히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부분 같은 경우 상당히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이상 정령들의 대처법이다. 물론 100퍼센트 확신하는 방법은 아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
해골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날이 바뀌자 범려는 해골 병사들을 이끌고 엘프 도시 안에 있는 경기장으로 갔다.
"범려 님, 일찍 오셨군요."
경기장에 나와 있는 엘프들은 고위 정령사와 대장로를 포함해 5명이었다.
"시간 끌 것 없이 단숨에 끝내죠."
단숨에 끝내자는 소리에 정령사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4명을 다 상대하겠다는 겁니다."
"전부 다 상대하겠다고 말하신 겁니까?"
"네!"
범려가 힘차게 대답하자 장로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상급 정령 넷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은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나 전사라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범려 님에게 뭔가 한 수가 있으시구나.'
대장로는 범려에게 좋은 방법이 있기에 저런 행동을 보이는 거라 여겼다.
"그럼 시작하라."
대장로가 외치자 4명의 정령사들이 각기 4대 정령을 소환했다.
4개의 정령이 움직이자, 범려는 약간 뒤로 물러나서 활을 당겼다.
"회색의 빛!"
순식간에 화살 끝에 빛이 모여들더니 활을 떠나 상급 정령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물과 불의 정령이 그 화살에 적중 당했다.
"와라, 정령들아!"
상급 정령들은 겉으로 보이는 위용만으로도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범려는 아주 덤덤하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첫 번째 목표는 불의 정령이다!"
가장 위협적인 불의 정령을 목표로 두고 궁수들이 활을 당기자, 어마어마한 숫자의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쿵! 틱틱틱!
불의 정령을 향해 날아든 화살은 땅의 정령이 만들어낸 바위벽에 의해 막혀 버렸다.
"너희들도 한 팀이라 이거지!"
범려는 망구다이들을 앞세웠다.
"녀석들을 찢어놔."
짧은 한마디를 내뱉자, 망구다이들이 전속력으로 달려가 화살을 날려 정령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쿵! 화르르! 휘이잉!
"와우! 각양각색으로 망구다이들을 공격하려고 하네."
정령들이 망구다이들을 향해 공격을 가했지만, 망구다이들의 기마술은 정령들의 공격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이며 공격을 피했다.
"클클클! 망구다이들을 공격하려면 상당히 빨라야 할 것이다."
4대 상급 정령들의 시선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쏠리자, 범려는 개마 기병들에게 바람의 정령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가라!"
망구다이들을 신경 쓰던 바람의 정령은 뒤에서 덤벼드는 개마 기병에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후우웅!
그 기다란 창이 바람의 정령을 향해 수십 번 휘둘러지자 바람의 정령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들이 곧장 개마 기병에게 바람을 보냈지만 기마술이 워낙 대단하기에 개마 기병들은 아슬아슬하게 바람을 피해 다녔다.
"마법사들! 바람의 정령을 향해 공격!"
20명의 마법사들이 동시에 수인을 맺으면서 캐스팅을 준비하자 마법이 한순간에 쏟아져 나와 정령을 덮쳐 버렸다.
"회색의 빛!"
번쩍- 번쩍- 콰쾅!
범려가 스킬을 쓰자 벼락과 동시에 빛의 화살이 같이 떨어지더니 바람의 정령 생명력이 3,000 가까이 사라져 버렸다.
한 번에 많은 생명력이 사라지자 바람의 정령의 시선이 범려에게 향하더니 이상한 바람이 날아들었다.
"젠장!"
범려는 황급히 기수를 돌렸지만 공격당하고 말았다.
"컥!"
방금 공격이 치명타가 터져서 생명력이 크게 깎였다.
그렇게 생명력이 줄어드는 와중에 버프 한 개가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범려는 인상을 찡그렸다.
"상혼의 힘!"
-상혼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10분간 파티 전체 공격력과 방어력이 3% 상승합니다.
범려는 뒤늦게 상혼의 힘을 사용하면서 생명력을 더 깎아먹었다.
"젠장! 시작부터 버프를 했어야 하는데."
후회를 해봐도 이미 늦은 뒤다. 그래도 생명력이 더 줄어들기 전에 시전을 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큰일이 났을 것이다.
"바람의 정령을 잡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람의 정령이 졸졸 쫓아오는 걸 보니 부담이 되었다.
"제길! 아까 공격이 너무 컸어."
해골들이 시선을 빼앗기 위해 그렇게 공격을 해도 바람의 정령은 뒤돌아보지 않았고, 범려는 아예 포기를 한 상태에서 회색의 빛 쿨 타임이 돌아오자 다시 스킬을 썼다.
쾅! 쾅!
이번에는 치명타가 제일 큰 데미지로 터졌는지 4,000 가까이 나왔다. 이건 범려 자신도 놀랐다.
"헉!"
무식한 데미지가 딱 뜨자 바람의 정령의 생명력이 바닥을 쳐 버렸다.
"죽었다."
해골 병사들이 지속적으로 공격을 하면서 범려가 간간이 큰 공격을 날려 주자, 상급 바람의 정령이 연기처럼 흩어지면서 사라진 것이다.
"불의 정령을 잡아라!"
먼저 마법사들이 마법을 날리자 망구다이를 한참 쫓아가던 녀석들이 마법사들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공격!"
화르르!
보병들이 근접전을 펼치려고 하자 불의 정령이 스스로 불꽃을 일으키면서 해골 병사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저지했다.
"불길 때문에 접근을 못하잖아."
불의 정령은 스스로 몸을 지키면서, 두 손에 불덩어리를 만들더니 그걸 해골들에게 던졌다.
"피해!"
엄청난 열기를 머금은 불덩어리는 땅바닥에 그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해골 마법사 마법이 랜덤만 아니면 얼음 마법으로 퍼부어주는 건데."
범려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마법 공격을 하면 정령들에게 확실한 피해를 줄 수 있다. 다른 궁수나 보병들처럼 물리 공격을 하는 얘들은 어떻게 된 건지 정령에게 피해를 주는 정도가 마법사의 반도 안 되었다.
"근접 병사들은 대지의 정령을 맡아라!"
범려가 그나마 공격이 제대로 될 거라 생각되는 정령을 지목하자, 해골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가 대지의 정령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쿵!
대지의 정령이 땅을 내리치자 달라붙어서 싸우고 있던 해골들의 공격 속도가 느려지면서 생명력이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범위 공격!"
범려는 망구다이 두 놈을 지목하더니 대지의 정령을 가리키며 외쳤다.
"너희 둘은 올가미로 녀석이 범위 공격을 못하게 막아라!"
지목을 당한 망구다이는 활을 당기면서도, 대지의 정령이 무슨 기술을 쓰려고 하면 올가미를 던져 스킬을 못 쓰게 저지했다.
올가미 던지기는 매즈 마법이라서 상대방을 묶어두는 마법이지만, 누군가가 마법에 걸린 대상을 때리면 마법이 풀린다. 하지만 단순히 공격의 흐름을 끊기 위해서라면 최고의 방법이다.
"회색의 빛!"
펑! 펑! 콰쾅!
벼락과 빛의 화살이 동시에 떨어지자 불의 정령의 생명력을 크게 깎아내렸다.
불의 정령은 공격을 당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불덩어리 하나를 무조건 날린다.
"불의 정령은 공격을 당하면 반격을 저렇게 하냐?"
불덩어리가 날아올 때마다 그걸 피하려고 해골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바쁘다, 바빠!"
특히 해골 마법사는 미끄러지듯이 낙법을 펼치며 불덩어리를 피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무술을 배운 적도 없는데 유단자만큼 낙법을 하네."
범려는 말을 타고 있어서 해골 마법사들처럼 낙법을 할 필요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격하면 되었다.
"범려, 파이팅! 힘내!"
로즈가 상급 정령과 격전을 벌이는 범려를 응원했지만 그 소리는 범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나지?'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던 순간, 범려의 머리로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기억이 있었다.
"격노!"
우연치 않게 두 번의 격노를 통해 해골들이 엄청난 분노에 젖어 공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격노는 내 체력이 어느 정도 빠지면 발동이 되었지."
정확히 얼마나 떨어져야 하는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정령들이 반격을 가할 것이다.
"불의 정령아! 내가 간다!"
범려는 무턱대고 녀석의 앞으로 달려가 공격을 시도했고, 불의 정령은 목표 대상이 앞으로 오자 입에서 불을 뿜어 그를 태워버렸다.
"크억!"
"범려야!"
생명력이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화상을 입었습니다. 초당 30의 피해를 입습니다. 30초 동안 지속됩니다.
범려가 눈앞에서 불타는 장면을 보자 로즈는 손이 저절로 올라가며 치유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그걸 막아서는 손길이 있었다.
"지금은 시험을 치르는 중입니다. 아무도 도움을 줘서는 안 됩니다."
치유 마법을 쓰려던 로즈는 할 수 없이 손을 멈췄지만, 마음은 이미 저 경기장 안에 있었다.
"젠장! 언제 격노에 빠지는 거야!"
범려는 몸이 불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해골들이 격노 상태에 빠지지 않자 이러다 죽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해골 병사들이 격노 상태에 빠집니다.
범려의 생명력이 30% 이하로 떨어지자, 드디어 병사들이 격노에 빠져 들었다.
"크아-!"
괴성을 지르는 해골들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이 선홍빛으로 바뀌면서 해골 병사들이 분노하고 있었다.
"공격!"
해골들은 모든 분노를 쏟아내겠다는 듯이 정령들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으하하! 생명력 30퍼센트가 되면 격노에 빠지는구나."
범려는 해골들이 격노에 빠지자 불의 정령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반면, 정령들을 향해 철천지원수처럼 분노를 터트리며 공격하는 해골 병사들을 본 엘프들은 놀란 얼굴이었다.
"상급 정령들이……."
집중 공격을 받지 않는 물의 정령을 제외한 불과 대지의 정령은 생명력 0을 향해 광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두 정령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자, 남은 물의 정령은 모든 해골 병사들에게 표적이 되어 단숨에 제거돼버렸다.
"이겼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자, 대장로는 범려에게 천천히 다가와 무언가 적혀 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에는 정령석을 만드는 제조법이 적혀 있습니다. 혹여 걱정이 되어 말씀드리지만, 이걸 나쁜 곳에 사용하지 말아주십시오."
"나쁜 곳에 쓰지 않겠습니다, 대장로님."
-정령석 제조법을 얻으셨습니다.
정령석 제조법을 얻은 범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인벤토리에 그걸 집어넣었다.
"범려!"
"으헉!"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로즈로 인해 범려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왜 그렇게 위험하게 하는 거야?"
"해골들의 상태가 바뀌는 것을 보려고 한 거야. 그리고 그런 공격에 죽을 내가 아니잖아."
아무리 고통을 적게 느끼게 만든 『판게아 월드』지만, 전신을 엄습하는 화염 공격은 두 번 다시 체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사실 기절할 뻔했지만, 로즈 앞이라서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범려는 적당히 웃어주면서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런데 퀘스트 보상으로 뭘 받은 거야?"
"정령석 제조법."
"정령사가 되려고?"
"아니, 정령석을 뼈로 만들어보려고."
"뭐?"
정령석은 순수한 정령의 힘이 뭉친 결정체이다. 로즈는 그걸로 왜 뼈를 만들 생각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어차피 실험이야. 성공을 하면 좋고, 실패해도 나쁘지 않아."
범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무서운 상급 정령들과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정령의 힘을 뼈로 만들 수만 있다면.'
"범려야, 우리 어디로 놀러 가자."
로즈는 범려에게 찰싹 달라붙으면서 둘만의 시간을 즐기려고 했다.
"안 돼. 할 일이 많아."
"무슨 일? 그래봤자 게임 하는 거 말고 더 있어?"
로즈의 말에 범려는 할 말이 없었다. 복학 준비를 하고는 있지만 하루에 한 시간씩 복습 위주로 공부하는 것뿐, 나머지 시간은 거의 게임을 하며 보내고 있었다.
"너 혹시 정령석 제조법인가 그거 하려고 그러는 거야?"
범려를 바라보는 로즈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설마 저 정령석 제조법을 자신보다 중요하게 여길까,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헉! 아, 정령석 제조법을 배우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속으로 뜨끔했는지 범려는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진짜?"
로즈는 말만 들어도 행복한지 얼굴을 붉히면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그런데 어디 가고 싶어?"
"음, 딱히 어디 가고 싶은 건 아니고……."
로즈는 그저 조금이라도 범려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손 이리 줘봐."
범려는 로즈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하늘만 바라보았다.
"참 좋다."
하늘이 맑아서 좋다는 건지, 아니면 로즈의 부드러운 손을 잡아서 좋다는 건지는 애매모호했지만, 그래도 로즈는 기분이 좋은지 웃고만 있었다.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이제 가야 해. 스케줄이 있어서."
"연예인이라는 거 참 바쁘구나."
"미안해."
"괜찮아. 어디 세상일 마음대로 되는 게 얼마나 된다고."
로즈는 방송 스케줄 때문에 범려와 오래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고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에구, 별수 없이 정령석 제조법이나 배워야겠다."
범려는 제조법이 적힌 종이를 꺼내 들고 읽어 내려갔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정령 마법진을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면 모든 게 해결된다.
"간단하네."
-정령석 제조법을 익히셨습니다.
단순히 읽기만 했는데, 제조법을 익혔다는 메시지와 함께 스킬창에 정령석 제조법이 등록되었다.
-정령석 제조법
정령의 마법진을 그린 후 정령의 힘을 결정화시키면 모든 게 해결된다.
아주 간단한 설명. 그와 함께 마법진의 문양이 나와 있었다. 아마도 스킬을 시전하면 이 그림대로 마법진을 그리게 될 것이다.
"이거 마법의 깃털 펜으로도 그림이 그려지려나?"
범려는 불안한 마음으로 깃털 펜을 잡았다. 이걸로 마법을 부릴 수는 있지만, 조금 위험하다.
"잘못되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
범려는 죽을 각오를 하고 펜을 들어 스킬을 시전했다.
"정령석 제조."
손이 멋대로 움직이면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곧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마법진이 멋들어지게 그려졌다.
"이야, 그려졌다. 발동이 되면 어떻게 될까."
은근히 밀려오는 두려움이 온몸을 옥죄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실험해봐야 한다.
우우웅!
그때, 정령 마법진이 알아서 발동을 하더니 정령의 힘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일반 마법이 아닌 정령 마법이라서 그런지 범려에게는 별다른 피해가 오지 않았다.
"바, 발동한다."
범려는 긴장을 한 채로 마법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정령의 힘이 응집되더니 결정이 만들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만들어진다! 만들어져!"
결정이 거의 만들어지고 있는 사이, 범려의 머릿속은
'저걸 어떻게 뼈로 만들지?'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인위적으로 뼈를 만들어야 하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범려는 정령의 결정이 정령석으로 변화하기 전에 그걸 뼈로 만들기 위해 손을 대버렸다.
"크윽!"
살짝 짜릿한 감각이 느껴져 신음을 흘렸지만, 정령석이 만들어지기 전 단계여서 그런지 부드러운 찰흙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뼈로 만들어보는 거다."
양손을 이용해 그 결정을 주물럭거리자, 찰흙처럼 모양에 변화가 생겼다.
"마치 도자기를 만드는 것 같네."
그 말랑말랑한 결정을 주무르다 보니 어느새 뼈 모양의 정령석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졌다!"
하지만 범려의 손재주가 아직은 좋지 않아서 그런지 이건 뼈라고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음, 자세히 보니 이건 뼈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어. 모형을 뜰 형틀이 있다면 좋겠는데."
뼈 모양의 틀을 어디서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 엘프들이 생각났다.
"다시 엘프들을 찾아야 하나."
정령의 힘은 무형의 기운이라서 그 형태를 잡아줄 물건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대장로에게 찾아가서 해골을 본뜬 형틀을 만들어줄 엘프를 소개해달라고 해야지."
손으로 뼈를 만들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생각보다 결정이 빠른 속도로 굳어서 문제였다.
혼자서 느긋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대장로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손님에 의해 편안한 하루를 망치고 말았다.
"대장로님!"
"무슨 일이신가요, 범려 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해골 모양의 형틀을 하나 구하려고 하는데, 솜씨 좋은 장인을 추천받고 싶습니다."
"음, 그거라면 도시 북쪽에 있는 코엔을 찾아가십시오. 그는 오래전에 드워프 밑에서 장인 기술을 배워왔기에, 범려 님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대장로님."
범려는 대장로의 말대로 도시 북쪽에서 혼자 살고 있는 코엔을 찾아갔다.
"계십니까?"
"누구인데 이런 곳에 온… 범려 님 아니십니까?"
엘프 장인 코엔은 범려의 얼굴을 보자 고개를 숙이면서 엘프들의 영웅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범려는 자신에게 예를 갖추는 코엔을 붙잡고는 일으켜 세웠다.
"저한테는 굳이 예를 갖추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엘프들의 영웅이신데 이건 당연한 것입니다."
엘프들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범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범려 님,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코엔 님이 제가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주실 수 있다고 하기에 찾아왔습니다."
"제 실력이 그리 뛰어나다 자부하기는 힘들지만, 범려 님이 원하시는 물건이라면 최선을 다해 만들어보겠습니다."
흔쾌히 허락하는 코엔의 모습에, 범려는 해골을 보여 주면서 이 모양을 찍어낼 수 있는 형틀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음, 이런 뼈를 만들기 위한 형틀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내일 오셔서 물건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코엔 님.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코엔은 범려가 떠나자마자 형틀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부탁을 하고 나온 범려는 다른 일을 알아보기 위해 엘프 도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엘프 도시에서만큼은 뭘 부탁하면 잘 들어주고, 물건 가격도 50퍼센트 할인이니 참 좋아. 여기서 추가로 기술 하나 더 배울까?"
정령석 제조법도 배웠는데 다른 기술 하나 더 배운다고 해서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뭘 배우지?"
범려는 뭘 배워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장장이처럼 무기나 방어구를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궁장(弓匠)이 되어 활을 만들지, 혹은 가죽 세공이나 재봉을 배워 옷을 만들지 말이다.
"배울 것은 많은데 이거 뭘 배워야 할지 고민이네."
범려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수많은 유저들이 엘프 도시를 찾아와 사냥을 하거나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음? 저건 뭐지?"
평소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건데, 엘프 도시 곳곳에는 이상한 문자가 쓰여 있었다.
"신기한 글자네."
범려는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글자를 보고 참 재미있어 보이는 글자라고 생각했다.
"이건 엘프들의 언어인가?"
『판게아 월드』에는 종족들의 고유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조건 한글이다.
범려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엘프들이 사용하는 문자라고 오해하고 있을 때, 뒤에서 그 글자를 보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룬 문자네."
룬 문자, 흔히 말하는 마법 문자라고 한다.
범려는 그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아는 사람이 아니군.'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룬 문자를 아는 것을 보니 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 보였다.
'룬 문자라면, 그 인터넷에서 찾으면 나오는 그것인가? 이런 건 대장로에게 찾아가서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범려는 다시 대장로를 찾아갔다.
"대장로님."
"오늘은 자주 오시는군요."
"다름이 아니라……."
"길게 이야기하지 마시고 본론만 말하십시오. 오늘 이 늙은이 몸이 좋지 않아 범려 님과 길게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룬 문자는 어디서 가르쳐 주나요?"
"도시의 서쪽에 가셔서 갈릭이라는 엘프를 찾으시면 됩니다."
갈릭은 엘프 도시에서 룬에 관한 한 최고 일인자다. 또한 그는 룬을 배우고 싶어 하는 엘프가 있다면 열심히 가르쳐 주기로 소문난 자였다.
"여기 갈릭이라는 분이 살고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앗! 범려 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엘프 도시 어느 곳에서든지 범려는 영웅 취급을 받는다. 그건 갈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룬 문자를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그게 뭔지 해서 궁금해서 왔습니다."
"범려 님이 이렇게 찾아와주신 것도 감사한데, 저의 미천한 능력을 궁금하게 여기신다니 영광입니다. 그런데 룬 문자의 무엇이 궁금해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범려는 룬 문자가 어떤 것인지 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자세히 물어보았다.
"아, 그러니까 룬 문자는 단순히 보조 마법에 불과하다, 이건가요?"
"그렇습니다. 룬 문자는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처럼 화려한 공격이나 급격한 변화가 아닌, 작지만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효과를 부여하는 게 그 목적입니다."
갈릭의 이야기를 다 들은 범려는 곰곰이 생각했다.
'룬 마법은 하나의 대상에 마법을 영구적으로 부여하는 거였어. 그럼 해골들에게도 이런 마법이 부여될까?'
룬을 이용해 무기나 방어구에 영구적으로 마법을 부여할 수 있지만, 해골 병사에게도 마법 부여가 되는지는 직접 해봐야 하는 문제였다.
"룬 마법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범려 님이 룬 마법에 관심을 가져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럼 수업은 언제부터 하실 생각인가요?"
"오늘부터 당장 하겠습니다."
범려가 시간 질질 끌 필요 없이 당장 배우겠다며 나서자, 갈릭은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바로 칠판과 교재를 가져오더니 기초적인 수업을 시작했다.
"룬이란……."
룬의 조합은 일정한 순서가 있기 때문에, 갈릭이 가르쳐 주는 것은 룬 문자의 조합과 그 순서가 전부였다.
-룬 마법을 배우셨습니다.
-룬 문자 조합 초급을 익히셨습니다.
-초급 룬 문자 조합(0.00%)
룬 문자의 배열에 따라서 여러 가지 능력이 부여됩니다. 초급일 때는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단 하나만 가능합니다.
"배웠다. 당장 가서 실험을 해봐야지."
"아, 범려 님, 룬 문자를 새기실 때는 반드시 마력이 깃든 물건으로 하셔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마력이 깃든 물건으로 새기라고 한다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마법의 깃털 펜……."
마법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마법을 쓰면 범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정식으로 룬 마법을 배웠다. 펜을 잘못 써서 범려가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