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돌아온 공구장
"청소 끝!"
아침 7시부터 시작한 청소가 11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그 더럽고 지저분한 방은 이제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고마워. 이렇게 신경써줘서."
"그걸 알면 좀 깨끗하게 치우고 살아. 아무리 남자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하하……."
멋쩍은 웃음을 흘리면서 어물쩍 넘어갔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토요일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놀려고 왔지!"
"전에도 스케줄 때문에 바빠서 가버렸잖아."
"걱정 마세요. 오늘하고 내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미진은 오늘과 내일 스케줄이 하나도 없음을 선포하고는 하루 동안 잘 놀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뭐 하고 놀 거야?"
솔직히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희성을 찾아왔으니 계획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 그게……."
"그냥 왔구나."
"어, 그냥 왔어."
희성은 무턱대고 찾아온 미진을 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그나마 어디 놀이 공원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놀이 공원이라도 갈래?"
"응! 난 어디든지 좋아."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희성의 정강이를 축구공 차듯이 차던 그녀가 이제는 어디든지 좋다고 말하니 적응하기가 꽤나 힘들었다.
"그런데 유명 VJ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사람들 시선을 끌잖아. 나 그거 무척 싫어해."
"걱정 안 해도 돼. 이럴 줄 알고 다 준비해왔지."
그녀가 준비한 것은 선글라스였는데, 얼굴이 작아서 그런지 얼굴의 상당 부분이 단숨에 가려져 버렸다.
"얼굴이 작기는 작다……."
"내 얼굴 작은 거 이제 알았어?"
가벼운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가니 미진을 알아보는 인간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얼굴이 작고 예쁘게 생겨서 시선을 살짝 잡아끄는 정도였다.
"이거, 사람들 시선이 마음에 안 들어."
"질투야?"
"아니.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귀찮을 뿐이야."
희성은 게임에서도 그렇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많이 받으면 부담스러워했다.
"흥! 좀 질투해주면 안 돼?"
"아, 예! 그럽지요, 아씨."
"정말 못됐어. 질투 좀 해주면 어디 덧나나."
미진은 살짝 투덜거리며 인상을 썼지만, 아무리 찡그리고 화를 내도 예쁘게만 보였다.
'크윽! 너무 귀여워!'
희성은 미진의 귀여움에 손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기본 좋게 놀이 공원을 찾아온 두 사람.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역시 주말이라서 사람들이 참 많구나."
놀이 공원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디 명동 한복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하지?"
놀이기구를 타려면 최대 대기시간 한 시간 반, 제일 짧은 시간은 20분 정도였다.
"괜히 온 건가."
희성은 괜히 놀이 공원에 놀러온 거 아닌지 걱정했지만 미진은 그렇지 않았다.
"가자! 아주 잘 놀아야지. 호호호!"
"그래, 잘 놀아보자."
이런 놀이 공원에 여자와 같이 온 경험이 아예 없는 희성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미진은 알아서 희성을 끌고 다니며 놀이 기구를 탔다.
그중 제일 화끈한 것이 자이로 드롭이었다. 한순간의 짜릿함과 공포가 공존하는 놀이 기구였다.
"나 어지러워."
미진은 자이로 드롭을 몇 번 타지도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이런 놀이 공원을 너무나 오랜만에 온 희성은 반대로 미쳐 있었다.
"쩝! 한 번만 더 같이 타고 싶었는데."
이미 지쳐 버린 미진을 데리고 한 번 더 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범려는 미진과 휴식을 취하기 위해 중앙 광장에 있는 벤치로 가 앉았다.
"내가 아이스크림 하나 사올게."
희성은 미진을 위해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아이스크림 2개 주세요."
"2천 원입니다."
돈을 지불하고 뒤로 돌아서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중앙 광장에 이상한 장비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뭐지?"
중앙 광장에 설치되는 장비들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상현실 캡슐이었다.
"웬 캡슐들을 이렇게 많이 가져오지?"
적게 잡아도 200대 정도 되었다. 광장은 그 캡슐들로 인해 공간이 절반 정도가 사라져 버렸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어? 잠깐 저거 보고 있었어."
"뭐야, 나랑 같이 있는데 게임 생각한 거야? 흥!"
뭐가 그리도 불만인지 미진은 자기 생각을 안 해준다면서 살짝 삐친 얼굴이 되어서는, 범려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내가 네 생각 안 해서 그런 거야?"
"흥! 말도 하기 싫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미진은 하나도 화나지 않았다. 다만 관심을 끌고 싶어서 투덜거릴 뿐이다.
"그럼 미진은 게임하고 싶지 않아?"
"아, 그건……."
미진은 희성의 말에 부정을 못했다. 아무리 바쁜 스케줄 때문에 피곤해도 쉬는 날은 어김없이 게임을 즐겼고, 그녀가 키워놓은 캐릭터에 대한 애착도 강했다.
"크으! 그런 표정은 참기 힘들어."
희성은 약간 우물쭈물하는 표정과 행동을 보이는 미진을 참지 못하고 끌어안아버렸다.
"어머나."
미진은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은 희성의 행동에 놀랐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둘이 그렇게 닭살 돋는 행동을 하자, 주변에서 따가운 눈총이 동시에 희성을 향해 쏟아졌다.
'크윽! 온몸이 따끔거리는 이 시선들은 뭐냐.'
희성은 그런 시선들을 살포시 무시해주고는 미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중앙 광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은 한순간 그쪽으로 이목을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강재석입니다! 지금 한창 즐거우실 텐데, 더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판게아 월드』에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특별 이벤트를 열게 됐습니다."
『판게아 월드』에서 나왔다는 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귀가 솔깃했고, 희성도 마찬가지였다.
"『판게아 월드』 공식 홈페이지에 알려 드린 대로 오늘 이곳에서 특별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특별 이벤트?"
평소에 공식 홈페이지를 보지 않는 희성은 지금 내용이 약간 생소했지만, 며칠 전부터 홈페이지에 공지한 내용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토너먼트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토너먼트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관심을 보였다.
"오늘 토너먼트에서 승리하신 분은 이 뒤에 보이는 아이템들 중에서 한 가지를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사회자의 등 뒤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스크린에 등록된 아이템들은 지금까지 나온 아이템 중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이야! 저건 하늘의 망치!"
한때 패치를 했지만, 그래도 현존하는 망치 아이템 중에서는 최고다.
"저건! 운명의 활, 세월의 검!"
최고의 아이템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는데, 저런 아이템 하나만 있어도 자랑하고 다닐 정도였다.
"대단한 물건들만 있는데."
"희성아, 나 저기 나갈래."
"뭐?"
사제는 토너먼트에 나갈 경우 그리 좋은 승률을 장담하기 힘들다.
"차라리 내가 나갈게. 사제는 토너먼트에 제대로 된 활약을 하기 힘들잖아."
토너먼트라고 해서 해골 제작자인 희성이 당해내지 못할 상대는 없다.
"기다리고 있어. 갔다 올 테니."
지원자들은 이날 놀이 공원에 놀러온 사람 반, 홈페이지에서 공지 사항을 보고 참석한 사람 반이었다.
"지원하신 분들은 게임에서 쓰고 있는 닉네임과 직업을 적어주세요."
희성은 토너먼트 지원서에 착실하게 내용을 채우고는 번호표를 받았다.
"이 번호표에 적힌 캡슐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진행 도우미의 말대로 희성은 번호표에 적힌 캡슐 안으로 들어가 접속했다.
"후! 이거 놀러 와서도 게임에 접속하다니."
범려는 아직 해골들을 불러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타고 있는 해골마만을 불러들였다.
"그런데 어디서 토너먼트를 하지?"
-토너먼트 장소로 텔레포트됩니다.
"어!"
순식간에 텔레포트가 되면서 범려는 토너먼트 장소에 등장했다.
"이거 한순간에 장소를 바꿔주네."
"헉! 해골마다-!"
대형 스크린에 범려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걸 보고 있던 사람들이 해골마를 보면서 소리쳤다.
"여기서 해골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줄이야!"
현재 『판게아 월드』에 나와 있는 해골마는 8필. 천마 길드 5필, 헬렌, 취선, 그리고 범려가 3필을 가지고 있다.
"천마 길드 사람일까? 아니면 해골 제작자와 친분이 있는 건가? 진짜 해골 제작자인가?"
많은 사람들의 의혹 속에서 범려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음 접속자의 모습이 차례차례 나왔다.
"지원자들이 모두 접속을 완료했습니다. 이번 토너먼트는 여러 사람의 레벨과 상관없이 모든 레벨이 230으로 고정됩니다. 그러니 자신의 레벨이 낮다고 걱정하시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판게아 월드』에서는 레벨 제한이 500으로 잡혀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재 등장한 레벨은 최고 237이다. 230으로 해도 부담감은 없다.
"레벨이 230이라. 아주 좋은데."
범려는 레벨 230이라는 말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언제 200레벨을 찍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잠시나마 이런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이다.
"토너먼트에서는 모든 장비의 옵션과 기능이 상실되며, 형평성을 위해 저희들이 정해놓은 임의의 수치만 적용됩니다."
"……."
여기서 제일 피해를 많이 보게 되는 사람은 범려였다. 그는 공격 기술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스킬이 해골 병사들과 관련되어 있고, 오로지 믿는 것은 자신이 들고 있는 활 하나뿐이었다.
"제길! 저주가 따로 없군."
범려는 토너먼트에서 저주받은 직업이 되었고, 그나마 이길 가능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해골마였다.
"이 해골마도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사실 범려의 활 실력만으로도 엄청나다. 굳이 해골마에 의존할 필요성은 없었다.
"희성아! 파이팅!"
미진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희성을 응원했고, 그 소리는 캡슐 안으로도 똑똑히 들려올 정도였다.
"이거 지면 안 될 상황이잖아."
미진은 창피한 것도 무릅쓰고 응원했다. 그렇다면 희성도 그 응원에 걸맞은 경기를 해야 한다.
"대진표는 컴퓨터로 인해 자동 집계가 되며, 경기 방송은 1분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16강부터 보실 수 있습니다. 아직 16강을 가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마술사 한 분을 소개해드립니다!"
사회자는 마술사 한 명을 소개해주었고, 사람들은 16강의 선수들이 가려질 때까지 마술사의 재미난 쇼를 볼 수 있었다.
"후! 한번 해볼까."
범려는 해골마를 탄 상태에서 내리지 않고 상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범려의 첫 토너먼트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피어?"
17세기 유럽에서 한참 유행했을 만한 복장을 하고는 검은 레이피어를 들고 서 있는 남자였다.
"아하! 당신이 내 상대구나!"
"댁은 뭐 하는 사람이오?"
범려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 없이 상대는 오로지 검부터 먼저 휘둘렀다.
"어라!"
재빨리 말 기수를 돌려 피한 범려가 동시에 활을 꺼내 당기는 동작까지 2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쉬이익!
"컥!"
범려의 공격이 시작되자 화살이 멈출 줄 모르고 당겨졌고, 더군다나 말을 타고 움직이기에 근접 공격을 펼치는 상대는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쉽네."
첫 상대를 가볍게 처리한 후 맞닥트린 다음 상대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법사네."
일대일 싸움에서 마법사나 전사는 거기서 거기다. 다만 무식하게 달려오냐, 아니면 마법을 쓰냐 이 차이밖에 없었다.
"가볍게 눈을……."
"컥!"
한참 마법을 준비하려던 마법사가 범려의 화살에 눈을 공격당하고 혼란에 걸린 사이, 범려는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날렸다.
"실……."
다시 한 번 마법을 날리려던 마법사는 마법을 외치기도 전에 눈을 공격당했다.
두 번의 눈 공격으로 6초 동안 꼼짝도 못하고 범려의 치명타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마법사는, 그 이후 화살 몇 대 더 맞더니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마법사나 전사나 둘 다 똑같지, 뭐."
범려에게 있어서 둘 다 다를 게 없다. 그러나 활을 드는 궁수들은 조금 달랐다. 똑같이 화살을 날리는 공격을 하니 스킬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색의 빛!"
화살이 빛에 휩싸이면서 날아오는 공격은 상대 유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크윽! 이런 기술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당연하지. 이건 내 고유 기술이니까."
범려는 활 실력과 기마술, 이 두 능력만으로 16강에 올랐고, 16강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대형 스크린에 이들이 비추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본선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16강에 오른 사람들은 본명보다는 게임에서 사용되는 닉네임과 직업을 밝혔다.
사회자가 16강에 오른 사람들을 일일이 화면으로 설명해주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직업은 범려의 해골 제작자였다.
"해골 제작자다!"
"해골 제작자가 이 토너먼트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저 캡슐 안에 해골 제작자가 있는 거다!"
사람들은 누가 해골 제작자인지 눈에 불을 켜고 캡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영상, 동영상을 찍어야 돼!"
많은 사람들이 해골 제작자가 싸우는 모습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지만, 사회자가 그들에게 재를 뿌리는 말을 해주었다.
"이 스크린은 동영상이 찍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찍으려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자의 말을 무시하고 스크린을 향해 핸드폰을 들었지만, 아무런 영상도 잡히지 않고 그냥 하얀 스크린만 보일 뿐이었다.
"헉!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화면에 아무것도 안 보여!"
많은 사람들이 찍으려고 그렇게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덧붙여진 사회자의 말에 다들 포기하고 말았다.
"이건 새로 개발된 스크린입니다. 아직은 상용화가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실험적으로 선보인 물건입니다."
즉, 캠 버전 동영상이나 불법 복제 영상들이 함부로 나돌지 못하도록 특수한 처리가 된 스크린이다.
"아, 이런!"
사람들은 다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범려에게는 다행이었다. 영상이 퍼지지 않는다면, 그나마 사람들에게 덜 시달리기 때문이다.
"본선 첫 출전 선수는 해골 제작자 범려 님과 흑마법사 아쉔 님입니다."
"와! 해골 제작자 전투다!"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을 못 찍는 사실에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범려의 전투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환호했다.
"해골마를 타고 나온다!"
"토너먼트에서도 해골마를 타고 나올 수 있다니!"
"대단해!"
같이 등장한 흑마법사는 범려의 위용에 가려져 있었다.
"크윽! 하필 본선 첫 싸움 상대가 해골 제작자라니."
흑마법사는 해골 제작자라고 해서 상당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네크로맨서들은 귀찮은데……."
흔히 사람들은 범려가 소환을 해서 싸우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려는 소환 기술이 전혀 없다.
'시작하자마자 눈부터 노린다.'
소환 기술이 없기에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눈부터 노리기 위해 범려는 흑마법사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헉! 누,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범려의 눈빛이 호랑이의 눈빛을 닮아서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3초 카운트가 시작되자, 범려는 화살을 시위에 올려놓은 채로 당기지도 않았다.
"3, 2, 1, GO!"
쉬이익!
"크악! 내 눈……!"
눈을 공격당하자 흑마법사는 바로 3초간 혼란에 빠지면서 생명력이 푹푹 내려갔고, 많은 사람들이 흑마법사가 당하는 모습을 보고 멍하니 바라만 봤다.
"이익! 어둠……."
혼란이 풀리자 흑마법사는 다시 마법을 쓰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같은 방법으로 다시 눈을 공격당해 제대로 마법도 못 써보고 생명력 반이 사라진 상태로 시작이 되었다.
"어둠의 화살!"
"마법 캐스팅이 늦네."
범려는 재빨리 말을 타고 마법 사정거리 바깥으로 달아나 마법을 피해버렸다.
"헉! 피했어!"
"내 진짜 실력을 보여 주마!"
10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범려가 쏘아 보낸 화살이 흑마법사를 향해 날아가 머리에 제대로 꽂혀 버렸다.
"크윽! 또 치명타……!"
흑마법사는 범려가 계속 치명타 공격을 터트리자, 혹시 버그 플레이어가 아닌지 의심했다.
"해골 제작자가 버그를 쓰는 거냐!"
흑마법사가 버그를 사용하는 거냐고 큰 소리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달랐다.
"내가 버그를 썼다면 시작부터 부정 처리당했겠지? 안 그래?"
범려의 말대로 버그를 사용한 플레이어가 정상적인 토너먼트에 참여할 가능성은 없다.
"그럼 진짜 활 실력이……."
"당연하지. 누구한테 배운 활인데."
범려는 복수라도 하듯이 흑마법사에게 화살을 날렸고, 모든 공격이 치명타로 터져서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흑마법사는 바닥에 눕고 말았다.
"우와! 대단하다! 해골 제작자!"
"아니야. 저건 저 유저가 대단한 거야!"
해골 제작자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해골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활 실력 하나만으로 승부를 보는 대단한 인물로 인식이 바뀌고 있었다.
"역시 희성이야."
미진은 희성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판게아 월드』 안에서는 연예인 부럽지 않을 만큼의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캡슐 안에서도 잘 들리기에 범려는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이거 큰일인데. 단순히 활만 당겼을 뿐인데 사람들이 열광하잖아.'
이대로 간다면 우승을 하지 않아도 토너먼트 우승자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것 같았다.
"후! 이왕 이렇게 된 거 화끈하게 놀아보자."
이 기회에 화끈하게 놀아볼 생각을 하자, 토너먼트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실력을 모두 다 보여 주면 사태가 심각해지니까 일부분은 감춰야지."
범려는 150미터에서 활을 당길 수도 있지만, 적당히 하기 위해 100미터에서 활을 당기고, 회색의 빛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토너먼트 출전자들과 경기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고 있었다.
"정말 킹왕짱이야-!"
어떤 소녀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를 치고서 아차 싶은지 고개를 숙이며 친구들과 키득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해골 제작자를 보고 대단하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때, 단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너였어. 네놈 때문에 내가 검을 떨어뜨렸지. 해골 제작자… 날 네 번이나 죽인 놈."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사람은 범려 때문에 무기를 잃어버린 공구장이었다.
"해골 제작자… 필드에서 보자."
공구장은 경기를 구경하다가 자리를 떴다. 다시 게임을 시작해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범려는 계속 토너먼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랴!"
범려는 자신이 연습한 기마술을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고 말을 달리는 사이에 공격도 하지 않았다.
'말달리면서 활 쏘는 모습까지 보여 주면 내 비밀이 너무 많이 드러나겠지.'
의도적으로 몇 가지의 능력을 감추고 활을 쐈지만, 다른 유저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크윽! 쫓아가기가 힘들어."
범려를 제외한 많은 유저들은 해골마가 없기에 쫓아가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근접전을 주로 하는 캐릭터 같은 경우는 한 대도 못 때리는 경우가 생겼다.
"해골마… 나도 가지고 싶다."
게임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나 탈락한 사람들은 범려의 해골마를 가지고 싶어 했지만 소용없는 소리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쉬이익! 푹!
"으헉!"
심장에 화살을 맞은 유저는 생명력이 급격하게 빠지는 것을 보고 바닥에 쓰러졌다.
"역시 근접 캐릭터는 쉬워."
범려에게 그나마 제일 까다로운 캐릭터는 궁수 계열 캐릭터다. 그들은 마법사보다 강한 방어력과 생명력, 그리고 범려와 같은 사정거리를 가지는 캐릭터다.
"이번에 궁수만 나오지 마라."
궁수만은 나오지 말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하필 제일 귀찮은 존재가 나오고야 말았다.
"궁수……."
일대일 싸움에서 제일 싫은 직종이 나오자 범려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흠, 어쩔 수 없지. 그냥 활을 당기는 수밖에."
궁수가 나오자 범려는 일단 거리를 벌렸다. 거리가 멀면 상대방도 치명타를 날리기 힘들어진다.
"그 유명한 해골 제작자와 겨루게 되다니, 영광이군."
"하하! 감사합니다."
범려는 약간 한숨을 쉬면서 대꾸해주었다. 분명 저 궁수는 시작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을 난사할 것이다. 아무리 해골마를 타고 뛰어다닌다고 해도 그 공격을 모두 다 피할 수는 없다.
"3, 2, 1, GO!"
"더블 샷!"
"역시 시작부터 스킬 난사구나."
정말 시작부터 모든 스킬을 퍼부어가며 날리는데, 범려는 그걸 피하기 위해 열심히 해골마를 몰았다.
"에이, 이건 안 쓰려고 했는데."
범려가 말을 달리면서 활을 당기자 안심을 하고 있던 궁수가 그 공격에 놀라 황급히 몸을 수그렸다. 그사이 놈의 공격이 멈추고 말았다.
"지금이다!"
때는 이때라면서 틈을 잡은 범려가 화살을 날리기 시작하자 상황은 반전되었고,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화살 하나로 반전되는 광경에 역시 해골 제작자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크윽! 컥! 으헉!"
궁수는 화살에 맞을 때마다 신음을 흘렸고, 미묘한 통증으로 인해 조준이 조금씩 흐트러지며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클클클! 좀 아플 거다."
시간이 흐를수록 궁수는 불리해졌고, 범려는 기세등등하게 상대를 몰아세웠다.
"크억!"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가상의 상태로 활을 다루던 사람과 진짜로 활을 다루는 사람의 실력 차이는 미묘한 것 같았지만, 극명한 차이를 보이면서 범려가 승리했다.
"흐흐흐! 우승이 멀지 않았다."
범려는 자신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우승을 향해 달려갔다.
토너먼트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치러졌고, 한 경기당 2분을 넘기지 않고 승패가 결정되었다.
16강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8강, 그리고 4강까지 치러졌다.
"다들 대단한 실력들이야!"
4강까지 남은 사람은 범려를 포함해 4명이었다. 놀이 공원에서 이벤트로 열린 토너먼트였지만 그 열기가 대단했고, 일부 사람들 중에는 이 토너먼트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 4강 첫 경기를 발표하겠습니다. 검사 강토 님과 전투 마법사 운룡 님입니다."
"와!"
메인 스크린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범려는 캡슐 안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아, 너무 집중해서 싸웠더니 약간 피곤하네."
범려만 피곤한 게 아니다. 4강까지 올라온 모든 이들 다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도 먼저 휴식을 취하게 된 범려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최대한 기운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 유명한 사막의 주먹 운룡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사막의 주먹은 무슨, 그냥 보리스 지역에서 자주 사냥할 뿐이다."
운룡은 이번 이벤트 토너먼트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 해골 제작자만큼이나 인지도가 있는 유저다. 아니, 『판게아 월드』가 등장했을 때, 최초의 숨겨진 직업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요즘에는 전투 마법사가 되는 방법이 공개되었지만, 처음 나왔을 때는 신비의 대상이었다.
"스트랭스!"
전투 마법사의 특징은 직접 전투를 하는 도중에 마법 주문을 외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문의 완성 시간이 2배나 걸린다. 대신, 자신의 몸에 버프를 걸고 방어 마법을 걸기 때문에 웬만한 격투가 계열의 캐릭터나 전사 계열의 캐릭터 못지않은 능력을 자랑한다.
"흐흐! 전투 마법사 따위야 내 검에 맞는다면 한순간에 재가 된다."
불꽃의 검사라 불리는 강토의 직업은 단순한 검사다. 하지만 그가 들고 다니는 검 때문에 불꽃의 검사라고 불린다.
"아이스 피스트!"
운룡이 자신의 주먹에 얼음 보조 마법을 걸어서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불길을 저지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얼려서 봉쇄하려는 작전이다.
"흐흐흐! 그따위 마법은 나에게 통하지 않을 거다."
"그거야 해보면 알지."
운룡의 주먹에서 차가운 냉기가 심상치 않게 피어오르자, 강토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레벨이 230으로 고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비교해본다면 운룡이 한 수 위에 있는 유저다.
"먼저 간다!"
선수필승이라는 명언에 따라 운룡이 앞서서 뛰쳐나가자, 강토가 불꽃 검을 내밀면서 운룡의 주먹을 막아냈다.
캉! 캉!
주먹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쇳소리가 나면서 몰아치는 운룡은, 전투 마법사라기보다는 격투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줬다.
"아이스 애로우!"
"컥!"
바로 코앞에서 날아오는 얼음 화살은 절대로 막을 수가 없다.
"전투 마법사들이 많아서 몇 번 해본 모양이지만, 난 그런 어중이떠중이들과 비교하면 안 되지."
운룡은 그동안 게임을 하면서 정말 여러 사람들과 겨뤄봤는지 검사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편한 상대였다.
"파이어볼!"
"실드!"
강토는 가지고 있는 검의 능력으로 마법을 구현할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횟수에 제한이 있어서 자주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차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파이어볼이면 그리 위력적인 마법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대 맞으면 좀 아픈 마법이다.
"젠장."
강토는 이번 공격이 먹혀들면 한 번에 스킬을 몰아치려고 했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것이다.
운룡은 파이어볼에 기습적으로 당해서, 이제는 그 마법에 주의하면서 전투를 펼쳤다.
"아이스 애로우!"
눈앞에서 생기는 아이스 애로우 때문에 강토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은 차갑게 서리가 내린 운룡의 얼음 주먹이었다.
"어때, 내 주먹맛이? 상당히 시원하지 않아?"
"내 몸이 워낙 뜨거워서 아직 잘 모르겠는데."
"후후후! 아직 덜 맞은 모양이군."
운룡은 다시 주먹을 휘두르면서 주문을 외웠고, 그렇게 30초가 넘게 싸우고 있었다.
캉! 캉!
"프로즌!"
일인 대상을 순식간에 얼려 버리는 마법이 발동하자, 활활 타오르던 불꽃 검의 불길이 얼어버리고 그 검을 쥐고 있던 주인도 같이 얼어버렸다.
"분쇄!"
뭔가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강토의 몸이 바위처럼 부서졌고, 그 파편들은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1경기 승자는 전투 마법사 운룡 님입니다!"
"와! 역시 전투 마법사 운룡이다!"
사람들은 운룡의 실력에 감탄했다.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범려 역시 운룡이라는 유저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대단한 놈이야 전투 마법사라는 직업과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데, 정말 기대돼."
범려가 한참 경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 사회자가 다음 경기에 나올 사람을 소개했다.
"다음 경기는 해골 제작자 범려 님과 어쌔신 월인 님입니다!"
어쌔신이라면 은신과 기습으로 적을 노리는 직업이다. 범려는 은신을 주로 쓰는 암살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랐지만, 월인은 전투가 시작되자 바로 은신을 쓰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후후후! 해골 제작자라고 해서 잔뜩 긴장했는데, 단 한 번도 해골들을 소환하지 않는구나."
목소리는 들리지만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고, 다가오는 발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범려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스르륵!
어쌔신이 공격을 하기 직전 은신이 풀리면서 모습을 드러내자, 범려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왔다.
"동작 한번 빠르구나."
녀석은 공격이 실패하자, 다시 은신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제길!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범려가 은신을 찾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사이, 어쌔신이 다시 한 번 다가왔다.
"이런 쓰벌!"
지독하게도 그는 은신을 했다가 풀었다를 반복하면서 범려를 자꾸 위험에 빠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격을 하기 직전에 은신이 풀려서 단 1초라도 피하거나 방어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한판 승부다."
범려는 잠시 상대를 기다리면서 활보다는 등에 차고 있던 벼락검을 쥐고는 마지막 순간을 노렸다.
"이제 포기했나 보구나."
어쌔신은 포기를 했냐는 투로 물었지만 범려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내 뭔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쌔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범려는 그대로 벼락검을 휘둘러 녀석의 공격을 막았다.
"헛!"
"넌 잘못 걸렸어."
어쌔신이 다시 은신을 하려고 하자, 범려는 조준은 생각지도 않고 급하게 활을 꺼내 당겼다.
"컥!"
"벌써 은신을 하면 곤란하지."
범려의 공격이 치명타는 터지지 않았지만 은신을 저지하기에는 충분했다.
쉬이익!
"으악! 내 눈-!"
어쌔신은 눈을 처음 공격당했는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고통을 호소했지만, 범려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가차 없이 활을 당겼다.
"클클클!"
남들이 봐도 섬뜩하리만치 사악한 웃음을 흘리면서 어쌔신을 처리해버렸고, 그걸 보고 있던 사람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어쌔신을 무너트리는 범려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어쌔신이면 암살 전문인데 저렇게 쉽게 잡다니!"
많은 이들이 놀라고 있을 때, 유일하게 미진만이 좋아했다.
"이봐요?"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미진을 유심히 보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이미진?"
"어머! 아니에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과 닮았나요?"
"네, 많이 닮은 것 같은데요."
"호호호! 고마워요. 그렇게 봐주셔서. 하지만 아니랍니다."
"네……."
미진은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고는 열심히 응원했다. 마침 해골 제작자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적당히 넘어갈 계기가 되기도 했다.
'후! 평소 같았으면 벌써 사람들이 몰려들었겠지만, 다행히 토너먼트 중이라서 한고비 넘겼다.'
미진이 이 자리에 있건 없건 그와는 상관없이 경기는 이제 결승전만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여러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결승전을 시작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토너먼트는 절정에 다다랐다.
"결승전 선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해골 제작자 범려 대 전투 마법사 운룡입니다!"
두 사람이 커다란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화면이 아주 멋지게 장식되었다.
"드디어 해골 제작자와 한판 겨뤄보는군."
"하하! 노가다 직업이 뭐가 좋다고……."
범려는 노가다 직업이라고 말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최고로 폼 나고 화려한 직업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럼 한바탕 해보실까?"
운룡은 주먹을 가볍게 쥐면서 자세를 잡았다.
"나야말로 기대하고 있지."
범려는 시위에 화살을 재어놓고는 조준도 하지 않은 채 활을 내려놓고 있었다.
"3, 2, 1, 경기 시작!"
"헤이스트!"
운룡은 자신에게 헤이스트를 걸더니 남들보다 2배나 빠른 속도로 달려와 범려를 말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림없지."
히이잉!
범려가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해골마가 두 발로 일어서더니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런!"
해골마가 앞발로 공격을 가하자, 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던 운룡은 황급하게 실드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해골마의 말발굽 공격은 실드 마법 따위는 가볍게 부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실드가 날아가는 사이, 범려는 운룡을 향해 조준하더니 화살을 날려 보냈다.
"크윽!"
머리에 공격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운룡의 왼쪽 어깨가 뚫려 버렸고, 그의 생명력이 화장실에서 소변 보고 물 내리듯 빠져나갔다.
"해골마를 이용한 공격이라니……!"
"하하하! 이 정도쯤이야."
범려는 가볍게 미소를 띠고는 상대를 비웃었지만, 속으로는 헤이스트까지 쓰고 달려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후! 순식간에 달려와서 깜짝 놀랐네.'
운룡의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범려는 이 기회를 틈타 말을 몰며 이리저리 활을 당겼다.
"크윽! 컥!"
"뒷발로 차버려!"
뻥!
해골마가 힘차게 뒷발로 차버리자, 그 싸움 잘하던 전투 마법사의 모습은 어디 가고, 허수아비가 화살 몇 대 맞고 날아가는 꼴이 따로 없었다.
"멀리도 가네."
대충 10미터 정도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은,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따로 없었다.
"마무리를 지어볼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운룡을 향해 화살을 몇 번 날려 주니 경기가 어이없게 끝나버렸다.
"토너먼트의 우승자는 범려 님이 되셨습니다!"
"와!"
강함도 이런 강함이 없다 싶을 정도로 범려는 깔끔한 승리를 했다.
우승자와 준우승자는 게임에 접속한 상태로 원하는 상품을 고를 수가 있었다.
"범려 님, 혹시 원하시는 물건 있습니까?"
"아티샤의 로브가 필요합니다."
"아티샤의 로브? 범려 님에게 사제들이 입는 옷이 필요한 겁니까?"
"아니요. 제 애인 주려고요!"
범려가 큰 소리로 외치자 얼굴이 새빨간 사과처럼 변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오! 범려 님은 애인이 있으시군요."
"물론입니다!"
"알겠습니다. 아티샤의 로브를 드리겠습니다."
-아티샤의 로브를 획득하셨습니다.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온 아티샤의 로브를 보자 범려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템을 확인했다.
-아티샤의 로브
대사제 아티샤가 사용했다는 로브이다.
방어력:200 내구도:100/100
재질:천
옵션:지능 +80, 정신력 +77, 체력 +40
신성 주문에 의한 치유력이 13% 증가한다.
범려는 아이템을 받자 캡슐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와 함께 캡슐 안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몇몇이 같이 밖으로 나왔다.
"으, 피곤하다."
사람들은 누가 해골 제작자인지 그걸 알기 위해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마침 때를 같이해 캡슐에서 나온 사람들 때문에 누가 해골 제작자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누가 해골 제작자이지?"
"조금만 기다려 봐. 토너먼트가 끝났으니 MC가 해골 제작자를 부를 거야."
많은 사람들이 해골 제작자가 누구인지 확인을 하려는 사이, 희성은 미진과 같이 아이템만 받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자, 토너먼트의 우승자는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승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불러도 우승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준우승자만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하암! 어서 올라오지, 어디로 간 거야?"
결국 5분 동안 범려를 불러봤지만 답이 없었고, 결국 준우승자인 운룡만 트로피를 받고 어처구니없게 토너먼트가 끝나고 말았다.
"희성아, 아까 우승 트로피 주려고 하던데, 안 받아도 돼?"
"그런 것도 있었어?"
희성은 아이템 때문에 토너먼트에 참가한 거지, 트로피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트로피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설마 몰랐단 말이야?"
"엉. 그리고 트로피 같은 건 필요 없어. 내가 사는 집이 얼마나 좁은데. 방에 트로피 놔둘 공간도 없어."
희성이 살고 있는 자취방은 그리 큰 공간이 아니라서 트로피 같은 물건을 놔둘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응, 집에 가자."
둘은 그렇게 오늘 하루 스트레스를 확실하게 풀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희성은 샤워를 하고는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기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희성은 가벼운 산책을 하고 미진의 집 근처를 향해 걸어갔다. 때마침 미진이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여기가 집이구나. 되게 크다. 족히 50평은 되겠는데."
일반 사람들은 꿈도 꾸기 힘들, 50평짜리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주눅이 들면서 부럽기도 했다.
"희성아!"
"어, 미진아."
자신의 집과 상당한 차이가 나는 미진의 집을 본 희성은 약간 목소리에 힘을 잃었지만, 미진은 거침없이 희성의 품 안으로 들어오면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말만 한 처녀가 이러면 안 되지."
"쳇! 그럼 희성이는 내가 싫어?"
"그건 아니고……."
미진이 싫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여자를 어디서 찾을까. 아마 평생을 가도 이런 여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호호호! 너도 좋으면서."
"쩝! 그래. 너무 좋아서 아침 일찍 이렇게 찾아왔다."
"그렇게 사실대로 말하면 얼마나 좋아."
희성은 결국 진실을 말했고, 미진은 웃으면서 그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산책 나온 거야?"
"응, 산책 나왔지. 이제 돌아가서 게임에 접속해볼까 생각 중이야."
"그럼 같이 게임하자. 어차피 오늘 일요일이고, 어디 가기도 그렇잖아."
희성의 집에 있는 캡슐은 커플용이라서 두 사람이 게임을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 집으로 가자."
집으로 돌아온 둘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는 같이 게임에 접속했다.
엘프 도시에 나타난 범려는 로즈에게 아티샤의 로브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거 받아도 되는 거야?"
"받아. 하나도 부담 가질 것 없어. 네가 힐을 잘해주는 게 나도 오래 살고, 해골들도 오래 사는 길이니까. 부담 가질 거 하나 없어."
범려는 자신과 해골들을 위해서라며 핑계를 댔고, 로즈는 그 말을 믿고 범려를 위해 열심히 힐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냥 가자."
사냥을 가자는 외침에, 해골들은 로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범려를 다시 쳐다봤다.
"가자."
범려의 명령이 떨어지자, 해골 병사들은 경험치를 먹기 위해 필드로 나왔다.
"로즈, 힐!"
"알았어."
확실히 사제가 있으니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해골 병사들은 많고, 그들을 지휘하는 범려가 있었으며, 그 뒤를 받쳐 주는 로즈가 있었다.
"기병들은 뭐 해! 어서 움직여!"
범려가 병사들을 독려하자 전투는 활기를 띠었고, 해골 병사들은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다녔다.
"다음 녀석들을 끌어와!"
정확한 명령이 내려지자 망구다이들이 몬스터를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범려는 대단해."
"이 정도야, 뭐."
미진의 칭찬에 범려는 한껏 콧대가 높이 솟아오르는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범려와 미진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저 멀리서 범려의 모습을 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여기 있구나. 해골 제작자, 널 기다리고 있었다."
범려를 보고 있던 눈은 다름 아닌 공구장이었다.
"저 해골 제작자를 잡으면 되는 건가?"
"물론이지."
공구장 옆에는 10명의 유저들이 있었는데, 다들 직업이 제각각이었다.
"후후! 그 유명한 해골 제작자를 이 눈으로 보게 되다니, 아주 떨리는데."
"그런데 저 해골들은 어떻게 할 거지? 숫자만 어림잡아 100은 넘어 보이는데."
"저 해골들 생명력은 별로 없어. 마법 몇 번 써주면 아작이 나는 녀석들이야.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걸 어떻게 믿지?"
공구장은 범려와 마찬가지로 우연치 않게 정보 길드에 관련된 퀘스트를 받게 되었고, 퀘스트를 통해 정보 길드와 접촉, 돈만 준다면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렇지. 나도 저 해골들의 체력이 별로라는 것은 최근 들어서야 알았지. 빌어먹을 정보 길드 녀석들! 내 돈 8만 골드나 처먹고 겨우 알려 준 정보가 해골들의 생명력이 빈약하다는 정보뿐이야.'
하지만 공구장이 얻어낸 정보는 옛날 정보가 되었다. 지금의 해골들은 정령의 뼈로 인해 능력치가 20퍼센트 상승되어 있고, 4대 속성에 대한 저항도 20퍼센트나 된다. 전처럼 마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내가 널 잡을 시간이 찾아왔다, 해골 제작자."
공구장은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10명을 고용했다. 다들 공구장과 비슷한 레벨을 가지고 있는 유저들이고, 살인자 딱지를 달고 사는 인간들이다.
"이봐, 공구장, 해골 제작자를 몇 번이나 죽일 거지?"
"적어도 열 번은 죽여야지."
"악연이군."
공구장에게 돈을 받고 고용된 그도 해골 제작자에 대한 소문은 듣고 있었다.
"뭐, 해골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을 지휘하는 유저는 한 명. 하나만 죽이면 나머지 해골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범려는 이러한 상황도 모른 채 로즈와 함께 사냥하고 있었고, 해골들은 로즈를 보호하면서도 경험치에 목말라 있는 모습을 보여 줬다.
"경험치다! 경험치! 다들 잡아라!"
"범려는 몬스터 못 잡아먹어서 굶어 죽은 귀신이 붙은 거야? 왜 그렇게 사냥에 목을 매는데?"
"너도 내 심정 모르지? 이것들 경험치 먹으면 나한테 40퍼센트밖에 안 줘. 나머지는 저것들이 다 가져가."
범려는 자신이 왜 경험치에 목매는지 하나하나 전부 다 설명하면서 로즈에게 하소연을 했다.
"어머나! 그런 거야?"
"그래. 그러니 내가 이것들을 없애버릴 수도 없고, 한탄스럽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잖아."
"아니야. 이 해골 제작자, 끝없는 노가다의 결정판 직업이야."
범려는 노가다의 결정판 직업이라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래, 노가다의 결정판이야."
로즈는 범려를 그냥 이해해주는 척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대꾸해주었다.
"그럼 다시 사냥을 해볼까?"
쉬이익!
저 멀리서 파공음을 흘리며 화살 하나가 범려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팡!
범려보다 앞서서 걸어갔던 돌격병이 자신의 방패를 들고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리지 않았다면, 범려는 방금 날아온 화살에 공격당했을 것이다.
"누구냐!"
범려가 뒤돌아서서 외치자, 뒤에서 공구장을 포함한 11명의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긴, 널 잡으러 온 저승사자들이지."
"넌? 공구장?"
범려는 공구장의 얼굴을 보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으흐흐흐! 나머지 여섯 번을 채우러 왔구나."
"여섯 번이라니? 처음 듣는 소리인데. 그건 둘째 치고, 난 널 죽이러 왔다. 그리고 저 해골들도 말이야!"
"으흐흐! 나하고 내 해골들을 잡으러 오셨다? 그게 말처럼 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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