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지하 터널
"이런! 여왕개미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해골들에게 공격을 당하는데도 여왕개미는 생명력이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취선이 신음 소리를 낼 정도로 그 공격력은 실로 강했다.
"이대로 가면 로즈의 마나가 먼저 떨어진다."
사제가 혼자라서 마나 물약을 마시며 힐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산성 물약 투척!"
몬스터의 방어력을 떨어트리는 산성 물약을 던지자 '치이익'거리면서 뭔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마야, 나도 산성 물약 던지는 거 가능해?"
"여기 있어."
제마는 깊이 생각지도 않고 산성 물약을 범려에게 몇 개 건네줬다.
"특별한 제약이 없으니까 알아서 던져라."
산성 물약은 별다른 제약이 없어서 범려도 쉽게 사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럼 한번 던져 볼까?"
범려는 여왕개미 주변을 돌면서, 제마가 준 물약을 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여왕개미의 몸에서 이상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방어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왕개미가 산성 물약을 뒤집어썼습니다. 방어력이 3% 감소합니다. 1분간 지속됩니다.
-여왕개미가 산성 물약을 뒤집어썼습니다. 방어력이 6% 감소합니다. 2분간 지속됩니다.
있는 대로 다 던지다 보니 어느새 여왕개미의 방어력이 30%나 떨어지고, 지속 시간은 10분이 되었다.
"음, 괜찮은데."
10분 동안 방어력 감소가 이루어지자 해골들이 여왕개미에게 입히는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 좀 괜찮은 데미지가 나오네."
여왕개미에게 입히는 피해의 정도가 커지기는 했지만, 생명력이 떨어지는 속도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범려야, 얼음 덩어리 100개 다 만들었어."
해골들이 한창 전투를 치르는 도중에 헬렌이 얼음 덩어리들을 다 만들었는지 전투에 참여했다.
"얼음 덩어리 던져!"
헬렌의 말을 들은 범려는 곧장 투석기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해골들에게 얼음 덩어리를 날리라는 신호를 보냈고, 이내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갔다.
쿵! 쿵!
얼음 덩어리들이 머리 위로 몇 번 떨어지자, 여왕개미가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끼아악!
여왕개미는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이, 범려 모르게 알을 하나씩 낳으면서 반격의 시기를 노렸다.
이걸 모르고 있던 범려는 여왕개미를 두들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쩌적! 쩍!
그때, 뭔가 깨지는 소리가 범려의 귀에 걸렸다.
"뭐지?"
주변을 다급하게 둘러보았지만, 여왕개미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알이 깨지는……."
범려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더니 여왕개미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개미 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그렇게 공격을 당하면서도 여왕개미가 은밀하게 모아놓은 알들이 부화되려고 하자, 범려는 다급하게 해골들을 불렀다.
"개미 알들이 부화하려고 한다. 막아라!"
해골들의 시선이 개미 알에 고정되더니 곧장 공격을 퍼부었지만, 여왕개미는 자신의 그 큰 몸집을 이용해 알이 공격당하지 못하게 막아냈다.
"젠장!"
여왕개미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알을 부화시키려고 했고, 개미들은 마침내 밑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병정개미!"
결국 병정개미 30마리가 튀어나오자, 범려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취선을 빼고 나머지는 병정개미들을 공격해!"
범려는 개미들이 튀어나오자 해골들에게 병정개미 처리를 맡겼다.
"여왕개미…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범려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더니 여왕개미의 뒤꽁무니로 시선이 갔다.
"알을 다 깨부숴주마."
범려는 활이 부러질 것처럼 가득 당기고는 여왕개미가 낳고 있는 개미 알을 노려봤다.
"한 방에 꿰뚫어주마."
지금 범려의 목소리는 과연 이게 사람 목소리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쉬이익! 퍽!
화살이 개미 알에 정확히 박히자 알의 옆구리가 퍽 하고 터지면서 멀쩡한 알이 못 쓰게 돼버렸다.
"더 이상 개미를 부화시키지 못하겠지."
범려는 지휘를 하는 와중에 여왕개미가 알을 낳는다 싶으면 바로 화살을 날려 알의 생성을 철저히 막아버렸다.
"블리자드!"
헬렌이 범위 마법을 펼쳐 병정개미들의 단단한 껍질을 두들기며 시간을 벌었고, 로즈는 해골들과 취선에게 힐을 해줘야 하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제마야! 정령 폭탄 쿨 타임은?"
"다 됐어! 폭탄 던질까?"
"던져!"
휘이익! 콰쾅!
엄청난 풍압을 일으키며 정령 폭탄이 터지자, 그 풍압을 견디기 위해 해골 병사들은 몸을 숙이더니 폭탄의 위력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역시 정령 폭탄. 병정개미들의 그 두꺼운 껍질이 부서지다니."
부서진 껍질은 일부분이지만 여왕개미를 제외한 병정개미들의 사라진 생명력은 어마어마했다.
"회색의 빛!"
범려는 병정개미들을 한시라도 빨리 정리하기 위해 회색의 빛으로 병정개미 4마리에게 타격을 주었다.
해골들은 범려가 스킬을 쓰는 것에 맞춰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을 동원해 병정개미들을 쓸어버렸다.
"여왕을 잡아라!"
범려가 큰 소리로 여왕을 향해 외치자, 해골마가 앞다리를 번쩍 들더니 마치 명화(名畵) 속의 나폴레옹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해골들이 여왕개미에게 맹공을 퍼부었지만, 범려가 격노 상태에서 풀려 있어서 공격력이 크게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격노가 없잖아. 여왕개미한테 한두 대 맞아야겠네."
범려는 어쩔 수 없이 격노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여왕개미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님! 안 보여요!"
"격노 상태가 풀려서 그래. 생명력 30퍼센트가 될 때까지 몇 대만 맞자."
푸욱!
"컥!"
여왕개미가 범려를 한 번 물어뜯자 치명타가 터졌는지 한순간에 생명력 70퍼센트가 사라져 버렸다.
"형님!"
"나, 난 괜찮아……."
역시 가죽을 입는 범려와 판금을 입는 취선의 방어력 차이는 너무나 컸다.
"이제 격노가 켜지겠구나."
"크아아아!"
해골들은 범려의 생명력이 30퍼센트가 되자 즉각 격노에 빠지고, 모든 능력치가 50퍼센트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후! 격노 상태를 활성화하기 진짜 힘드네."
해골들의 능력치를 순식간에 올리기 위해 이런 무식한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 범려였고, 그걸 불쌍히 여기며 로즈가 옆에서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걱정 마. 이 정도로 난 죽지 않아."
범려는 가슴을 탕탕 치더니 아무런 문제없다며 로즈 앞에서 자신감을 드러냈다.
'크윽! 여왕개미에게 한 대 맞고 빠져서 다행이지, 진짜 죽을 뻔했네.'
두 번째 공격까지 당했다면 정말 죽었을 것이다. 한 대 맞고 재빨리 몸을 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골들이 격노 상태에 빠지자 여왕개미의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다들 죽기 살기로 싸웠다.
"힘내라! 다 끝나간다!"
범려가 파티원들과 해골들을 독려하면서 몰아치자 여왕개미의 몸에 있던 단단한 껍질이 일부분 부서져 나갔다.
"껍질이 부서진다!"
개미 몸의 그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기 시작하더니 여왕개미의 생명력이 빠지는 속도가 급물살을 타면서, 몸이 빠르게 붕괴되었다.
끼아아악!
여왕개미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지만, 범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회색의 빛!"
쉬이익! 번쩍!
빛 무리가 터지며 마무리 일격을 가하자, 여왕개미는 생명력이 0이 되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잡았다!"
-여왕개미를 잡으셨습니다.
-여왕의 보물 창고로 가는 문이 열립니다.
여왕개미를 잡자 땅 한쪽 구석이 무너져 내리면서 길이 열렸다.
"보물 창고?"
범려는 보물 창고라는 말에 해골마를 타고 창고가 있는 방향으로 얼른 들어가 버렸다.
"어어, 형님, 같이 가요."
"나도 같이 가!"
다들 범려를 따라 보물 창고로 들어오자 이상한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여왕의 보물 창고에 오셨습니다.
-이벤트로 인해 플레이어 한 명당 아이템 상자 하나를 열 수 있습니다. 각 상자는 아이템 종류별로 구분되어 있으니 신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더니 다들 미소를 지었다. 각자 원하는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순간이다. 대신, 단 하나만 선택이 가능하니 신중해야 한다.
"형님, 이거 보세요. 상자마다 무슨 아이템이 있는지 적혀 있어요."
취선이 가리킨 것은 각 상자마다 붙어 있는 이름표였다. 종류별로 검, 창, 활, 목걸이, 반지 등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거 어떤 아이템을 손대야 할지 난감하구만."
범려는 무슨 아이템 상자를 열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 앞에서 고민했다.
"형님, 그럼 저 먼저 골라도 되죠?"
"먼저 골라."
범려가 선뜻 먼저 고르라며 양보하자 취선은 생각도 하지 않고 양손 도끼라고 적혀 있는 상자를 거침없이 빼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기가 낡아서 새 무기를 찾고 있었어요."
취선은 천천히 상자를 열더니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이, 이건! 천공의 도끼!"
양손 도끼 중에서 서열 1위에 해당하는 대단한 아이템이 나오자 다들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축하해."
"취선아, 축하한다."
"이게 다 형님, 누님들 덕분이에요."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취선이 무기를 바꾸어 착용하자, 진정한 바바리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선택해볼까."
범려가 손을 뻗어 아이템 상자를 잡아채더니 '창'이라고 적힌 상자를 잡았다.
"형님, 주 무기가 활 아닌가요?"
"활은 저번에 새로 얻어서 더 필요 없어. 대신 이번에 창을 배우게 돼서 근접 무기가 필요했거든."
범려가 거침없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창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섬전의 창?"
-섬전의 창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에서 금속을 채취해 만든 창이라고 한다.
유성에서 나온 금속이 가벼워 창 전체를 금속으로 만들어 엄청난 내구성을 자랑하며, 창날 부분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다이아몬드도 두 쪽 내버릴 정도로 예기가 대단하다.
공격력:1,300 내구도:1,500/1,500
옵션:섬전의 창 착용 시 환영섬(幻影閃) 스킬 사용 가능
-환영섬(幻影閃)
섬전의 극을 보고 싶어 하는 자는 그 극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전방에 있는 모든 적들을 향해 섬전 같은 찌르기를 선사한다. 공격력 400%의 추가 피해를 입힌다.
쿨 타임:2분, 마나 소비:800
"창 공격력이 1,300이네."
"1,300-!"
무기 공격력이 1,300이라는 말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범려를 쳐다봤다.
"범려야, 대박이다!"
"무슨 소리야? 대박이라니?"
"몰라서 묻는 거냐? 무기 중에서 제일 공격력 강한 무기가 도끼인데, 그게 공격력 1,100이다. 그런데 1,300이라니! 이건 공격력이 미친 듯이 높은 아이템이야!"
제마는 웬만한 아이템은 거의 다 자신의 손을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종류의 아이템을 만져 봤다. 그런 아이템 중에서도 공격력 1,000이 손에 꼽을 정도다.
"진짜?"
"그럼! 내가 친구 앞에서 거짓말 하겠냐?"
"어머! 범려가 아이템 좋은 거 먹었어!"
로즈는 마치 자신이 좋은 아이템을 먹은 것처럼 기뻐했다.
"……."
범려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창을 한번 바라보았다.
'이거 지금 기뻐해야 되는 거야?'
너무 좋은 아이템을 먹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다들 범려가 얻은 창을 보고 축하해주었다.
이후에도 각자 원하는 상자를 열어 아이템을 가져갔고, 하나같이 현재 아이템들 중에서 지존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야, 여왕개미를 처음 잡았다고 해서 이런 아이템을 주다니."
"이제 바깥으로 나가자."
쿠르릉!
아이템을 다 챙기고 돌아가려는 찰나, 땅이 흔들리면서 개미굴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형님, 개미굴이 무너지려고 해요! 여왕개미를 잡아서 이런 일이 생기나 봐요!"
"어서 도망가자!"
다들 해골마에 올라타더니 재빠르게 개미굴 바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르릉 쿵!
"어! 어!"
개미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열심히 말을 달리는 도중에 굴 전체가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개미굴 전체가 무너져 내리려고 하자, 해골들이 스스로 온몸의 뼈를 분해하더니 범려 주변을 둥그렇게 에워싸서 뼈로 된 공을 만들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해골들이 해골 제작자를 지키기 위해 해골 방어벽을 형성합니다.
"다들 내 주변으로 와!"
범려는 메시지를 듣자 재빨리 방어벽 안쪽으로 파티원들을 불러들였다.
-해골 방어벽이 완성되었습니다. 해골 제작자가 위험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해제되지 않습니다.
쿠쿵!
완벽히 땅속에 갇히게 된 일행은 절로 한숨을 쉬었다.
"이거 뭐야! 탈출도 못하고 이렇게 땅속에 갇혀 버리다니."
"다들 안 죽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이대로 흙 속에 묻혔으면 그대로 죽었어."
범려는 목숨을 건졌다는 것에 안도하며, 해골들에게 감사했다. 그는 해골들이 만든 방어벽에 대해 궁금해지기도 했고, 동시에 아르테미스와 지금 상황을 이야기해서 벗어나야 했기에 그녀를 외쳐 불렀다.
"아르테미스!"
범려가 불러보았지만, 아르테미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형님, 10골드 천사가 안 나와요.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은데……."
"다시 한 번 아르테미스!"
범려의 부름에 항상 밝은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내던 아르테미스가 무슨 일인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아르테미스!"
"……."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를 부를 때마다 범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부르는 것을 포기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난 뒤에 해골들에게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야겠다.
"이거 뭔가 잘못됐다."
범려는 인벤토리를 뒤지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삽이란 삽을 다 꺼냈다.
"그나마 삽이 몇 개 남아서 다행이야."
전에 삽을 팔아치울 때 실수로 몇 개를 빠트렸던 모양이었다.
"다들 삽 들어.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땅을 파야 하니까."
일행들이 삽을 들자 범려가 해골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땅을 팔 수 있게 조금만 비켜 줘."
범려를 보호하기 위해 둥그렇게 만들어진 뼈의 보호막이 조심스럽게 삽으로 땅을 팔 공간을 열어주었다.
"형님, 그런데 해골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나요?"
"나도 오늘 처음 알았어. 그런데 지금은 해골들 능력을 확인할 시간이 없다. 여기서 빨리 나가야지."
범려는 삽질을 시작해 위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다들 땅을 파기 위해 열심히 삽질을 했고, 해골 병사들의 뼈들이 자연스럽게 흙을 파낸 곳으로 스르륵 움직여 천장이 무너지지 않게 해주었다.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해골들이 형님을 지키려고 필사적인 것 같은데요."
"고맙다, 해골들아."
덜그럭덜그럭.
범려의 한마디에 해골들이 뼈를 들썩거리자 천장이나 벽에서 흙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그런다고 덜그럭거리지 마. 무너지잖아."
범려가 다시 한마디 하자 해골들은 뼈들을 진정시키며 잠잠해졌다.
"어서 위로 가자."
다시 위를 향해 땅을 파기 시작하고 약 한 시간쯤 흘렀을 때, 그들은 가장 큰 문제에 부딪히고 말았다.
캉! 캉!
"제길! 바위야. 그것도 엄청 큰 거."
곡괭이가 없는 이상 바위를 쉽게 뚫을 수 없다.
보리스 지역이 사막이라고 해서 땅속까지 모래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땅속은 아주 튼튼한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바위가 상당히 많다.
"바위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옆으로 돌아가야겠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삽질을 하면서 바위를 피해 길을 계속 뚫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들이 아래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래로 가는 건데!"
"땅이 쉽게 파지는 곳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삽으로 저 바위를 뚫을 수 있어?"
"……."
삽으로는 바위를 뚫을 수 없다. 로즈는 결국 입을 다물고 계속 범려를 따라 흙만 파내기 시작했다.
"후! 계속 파다 보면 길이 열리겠지. 그러니 포기하지 마."
범려는 자신이 게임에서 땅속을 헤집고 다니는 경험을 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벤트를 하는 도중에 말이다.
"형님,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여왕개미를 잡았는데 아이템을 받는 즉시 개미굴이 무너지는 거요."
취선은 갑자기 개미굴이 무너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취선의 말을 듣자, 범려도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네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그러네."
다들 땅을 파면서도 대화는 주고받고 있었다.
"이거 『판게아 월드』에서 일부러 그런 거 아닐까요?"
"일부러?"
"아이템을 너무 좋은걸 줬잖아요. 그리고 여왕개미를 한 번 잡은 사람들은 또 잡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죠."
"그렇지."
"그래서 굴이 무너뜨려 유저들을 죽이려고 한 거죠. 다행히 형님의 해골 때문에 저희는 목숨을 건졌지만, 다른 유저들은 100퍼센트 죽었을 거예요."
취선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스를 잡는다고 해도 이렇게 아이템 상자까지 보여 주며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아이템을 주는 경우도 없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취선아."
범려는 취선의 결론이 가장 궁금했다.
"곰곰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하나 있는데, 제가 볼 때는 아이템 먹었으니 이벤트에서 빠지라는 것 같아요."
"빠지라고?"
"저희들이 먹은 아이템은 당장 경매장에 내놓으면 『판게아 월드』에서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줄 것들이에요. 그러니 아이템 먹었으니 그만 욕심 부리라는 것 같은데요."
취선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더군다나 지금 아르테미스를 불러도 답이 없는 걸 보니 『판게아 월드』 운영자들이 이벤트를 위해 10골드 천사 아르테미스에게 간섭을 하는 모양이다.
"취선, 네 추리가 앞뒤가 맞게 이어지는 걸 보니 의심은 한번 해봐야겠지."
취선의 추리는 너무도 정확했다. 『판게아 월드』 측은 좋은 아이템을 주는 대신 이벤트에서 너무 많은 아이템이 풀리면 안 되니, 일부러 유저들을 죽이고 이벤트 끝날 때까지 접속 불가능이라는 조건을 달아놓았다.
"그건 둘째 치더라도 여기서 빨리 벗어나자. 로그아웃을 해도 이곳으로 다시 온다면 끔찍하거든."
"아, 그러네요. 어서 파죠, 형님."
해골들이 굴을 파도 무너지지 않게 지지하고 있어서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었지만, 삽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겨우 5명밖에 안 되니 작업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으아! 더 이상 못 파! 나 그냥 여기서 죽을래."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취선이었다. 바바리안이라서 힘이 제일 좋기는 하지만, 인내심이 적어 먼저 지쳐 쓰러진 것이다.
"……."
"나도 포기!"
"나도!"
범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포기하자 범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 포기해버리면……. 에휴."
절로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범려마저 포기한다면, 정말 흙 속에 파묻혀 죽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쉬어. 나 혼자 팔 거야."
범려는 혼자서 묵묵히 땅을 파며 길을 뚫어갔다. 그러자 취선이 벌떡 일어나더니 삽을 들고 같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후! 형님, 좀 쉬자고요."
"……."
범려는 말없이 땅을 팠고, 취선이 그 옆에서 투덜투덜하면서 파고 있었다.
"뭐야, 우리만 나쁜 사람 되는 거야?"
잠깐 쉬고 있었던 헬렌, 로즈, 제마가 왠지 자신들이 범려만 부려먹는 인간처럼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바위 때문에 땅을 파는 각도가 계속 틀어지고, 다시 복귀하기를 수차례. 그들은 결국 주변이 바위로 꽉 막힌 곳에 도착했다.
"뭐야, 주변이 다 바위야?"
사방이 아주 단단한 돌들로 이루어져서, 다시 뒤돌아 가야 할 상황이었다.
"뒤로 가서 파자."
범려가 다시 뒤로 돌아 땅을 파려는 찰나, 땅이 진동을 일으켰다.
우르르르!
"다들 모여!"
범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자 뼈들이 다시 공 모양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걸려서 뚫어놓은 건데 한순간에 무너지다니."
뒤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파야 할지 다들 막막해지는 순간이었다.
쩍!
그때 뭔가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진이 일어나는 도중이라지만, 그 소리는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형님, 이 소리 바위가 갈라지는 소리 아니에요?"
"맞아. 바위가 갈라지는 소리야."
이런 땅속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바위가 갈라지는 게 이상하지만, 분명 바위가 쪼개지는 소리였다.
그러다 한참 땅을 흔들던 지진이 멈추자, 범려와 일행들은 조심스럽게 바위가 갈라진 곳으로 다가갔다.
"형님, 이거 보세요!"
"헉! 빛이다!"
"빛!"
바위가 갈라진 틈에서 미약하지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들 그 빛을 보자 미친 사람처럼 삽을 들더니 삽이 망가지든 말든 무조건 바위에 벌어진 틈을 벌리고 부수어, 사람이 들락거릴 정도의 구멍을 뚫었다.
"나가자!"
다들 어두운 공간에 너무 오래 있어서 바깥으로 나오자 밝은 빛으로 인해 얼굴을 찡그렸다.
"이야! 드디어 하늘을……."
"어? 하늘이 없네."
일행들이 위를 보며 입을 열었지만, 위에 보이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거대한 동굴의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동굴치고는 상당히 따뜻한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동굴은 한겨울이건 여름이건 온도가 일정하지만, 따뜻할 정도는 아니다.
"누구냐!"
문득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다들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일이 펼쳐졌다.
"저 땅딸보는 뭐지?"
"뭐! 땅딸보? 난 드워프 일족 중에서 키가 제일 큰 편에 속한다. 누가 감히 나한테 땅딸보라고 하는 거냐!"
"드워프?"
『판게아 월드』에서 드워프는 아이템으로 그 존재를 확인할 정도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종족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스스로 드워프라고 말하는 존재가 있으니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그를 쳐다봤다.
우르르르-
파티원들이 드워프를 보고 있을 때, 해골 병사들이 그 작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와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하고 있었다.
"네, 네크로맨서!"
"그 말 참 오랜만에 듣네."
네크로맨서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다른 직업이다.
"네크로맨서가 쳐들어왔다!"
"아, 골치 아픈 일이 생겼네."
드워프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이곳으로 드워프 병사들이 몰려올 것을 생각하자 범려는 골머리가 아팠다.
"어디에 네크로맨서가 온 거냐!"
"여기다!"
"버, 범려야……."
눈 깜짝할 사이에 드워프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일행들을 위협하는 모습에 로즈는 약간 겁을 먹었다.
"괜찮아. 다 생각이 있어."
범려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더니 드워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네크로맨서가 아닙니다. 물론 해골들을 다루는 건 맞지만, 해골들을 다루는 것만 같을 뿐, 네크로맨서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웃기지 마라! 네크로맨서! 너의 그 사악한 마음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다!"
"그럼 저기 보이는 해골들에게 사제의 축복이라도 내려서 확인할까요?"
"하하하! 별 웃기는 소리를 다 하는구나. 언데드 병사들에게 축복은 죽음과도 같은 것인데,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범려는 드워프들에게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로즈를 앞으로 내세웠다.
"여기, 사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신의 말씀을 듣고 움직이는 사제입니다."
"오, 사제님! 어서 저 위험천만한 악의 무리와 떨어져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드워프들은 로즈한테는 깍듯하게 대하면서, 어서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재촉했다.
"싫어요. 그리고 범려는 네크로맨서가 아니에요."
"저 사악한 네크로맨서가 순결하신 사제님을 타락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저 네크로맨서를 잡자!"
"어이, 이봐!"
범려는 드워프들이 자신이 사제를 타락의 길로 인도했다는 어이없는 오해를 하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리고는 섬전의 창을 꺼내들더니 드워프들을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확인도 안 해보고 사람을 이상한 놈으로 몰아세우다니!"
범려의 외침이 드워프들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우하하하! 힘없는 네크로맨서가 창을 들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구나!"
"뭐!"
드워프들은 마법사들의 체력이 아주 빈약하다고 생각하는 종족들이다. 그런데 범려가 마법이 아닌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웃은 것이다.
"난 마법사가 아니야!"
범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섬전의 창을 높이 들더니 바닥을 향해 힘차게 내리쳤다.
쾅!
창으로 내려친 땅이 움푹 파인 걸 보고 드워프들은 동시에 웃음을 뚝 멈췄다.
"정체가 뭐냐!"
"아까도 말했지만, 네크로맨서가 아니라 해골 제작자 범려다!"
"해골 제작자?"
범려는 이제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태가 됐음을 보고 안심했다.
"그래. 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좋아. 네크로맨서가 아니라고 하니 믿어주겠다. 하지만 몰래 벽을 뚫고 우리 도시에 온 것은 침략의 의지가 있다고 봐도 되겠나?"
"그런 뜻은 없다."
"그럼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드워프들은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무기를 버리라고 강요했다.
"좋아. 난 너희들과 싸울 의사가 없으니 무기를 버리지."
범려가 싸울 의사가 없음을 확실히 보여 주려고 창을 아래로 떨어트리자, 해골 병사들도 같이 무기를 떨어트렸다.
"음!"
드워프들은 범려가 아무런 미련 없이 무기를 버리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악당은 아니군."
"이제 알았냐!"
범려는 버럭 소리치면서 발끈했지만, 드워프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범려와 해골들을 한꺼번에 감옥에 가둬버렸다. 덤으로 다른 사람들도 감옥에 갇혀 버렸다.
"형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이대로 감옥에서 생활할 수는 없잖아요."
"걱정 마. 내일이면 풀려나. 하루 종일 땅만 팠더니 어깨 아프다."
범려는 감옥에 들어와서도 아무런 걱정이 안 되는지 바닥에 드러눕더니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피곤했으니 편히 쉬겠다는 행동이었다.
"에휴! 저도 모르겠네요."
파티의 리더인 범려가 드러누워 버리자, 다들 땅 파느라 피곤했던지 감옥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딱 하루를 감옥에서 보내고 다음 날, 드워프들의 장로가 감옥으로 찾아왔다.
"해골 제작자가 누구인가?"
"음?"
바닥에 누워 있던 범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로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냐?"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신의 이름부터 밝히시지요."
"이놈이!"
드워프 장로는 범려의 대꾸에 아주 건방지다고 생각했는지 발끈했지만, 이내 진정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난 칼만이라고 하지. 드워프 장로들 중 한 명이다."
"전 범려라고 합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회색의 전승자라고 부르더군요."
"회, 회색의 전승자!"
드워프 장로 칼만은 눈이 커질 대로 커져서는 다시 물었다.
"영혼의 천사의 힘을 이어받았다면 그 증거를 보여 다오."
"저기 있잖아요."
범려는 턱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해골들을 가리켰다.
"저건 그냥 해골들 아니냐."
"아, 답답하네. 아르테미스 님이 주신 능력으로 저 해골들을 만든 거예요. 그리고 저 해골들은 신성 마법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거든요. 사제들이 있다면 한 명 불러와서 확인해보시죠."
범려가 따지듯이 대답하자, 장로는 약간 당황했지만 곧 간수를 불러 도시에 있는 신전에서 사제를 하나 불러오라고 시켰다.
간수는 장로의 말대로 신전으로 달려가 드워프 사제를 한 명 데려왔다.
"장로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 해골에게 축복을 걸어라."
드워프 사제는 해골들을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내 장로의 말대로 축복을 걸었다.
축복을 받은 해골 병사는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진 빛을 보고는 턱을 들썩거리면서 좋아했다.
"클클클! 아주 좋아하는데."
범려는 해골 병사가 턱을 움직이는 게 웃고 있는 것임을 알기에 같이 웃었다.
"어떻게 된 건가?"
드워프 사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해골이 축복을 받아들였습니다. 일반적인 언데드라면 거부 반응이 일어나야 정상인데……."
"정말 회색의 전승자군."
드워프 장로는 그제야 범려 일행을 다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