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소들의 천국
"저기 소 대가리들이 몰려 있다. 잡으러 가자!"
범려 일행은 미노타우로스가 눈에 보이면 만사 제쳐 놓고 그것들을 먼저 잡았다.
"형님, 저쪽에 소들이 또 있어요."
"가자!"
지하 세계에서 지낸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다들 평균 레벨이 187에 도달해 있고, 그보다 밑에 있는 녀석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쿠어-!"
"소들이 도망간다. 잡아라!"
무리를 이루고 있던 미노타우로스들이 사냥하다가 도망을 치자, 범려는 얼른 망구다이를 불러서 올가미로 녀석들의 발을 묶어 남은 것들을 모조리 정리해버렸다.
"범려 형님,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어디기는. 당연 미노타우로스들이 우글거리는 미궁이지. 필드에서 몇 마리 잡는 것 가지고는 부족해."
범려는 미노타우로스가 몰려 있는 미궁으로 향했다.
"드워프들의 말대로 남서쪽으로 가면 미궁이 있다더니, 이런 거대한 미궁이라니……."
팀원들은 드워프들에게 미궁의 위치를 전해 듣고 오기는 왔는데, 거대한 미로가 너무나 웅장하게 펼쳐서 있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단해."
"이야! 이거 미궁에 들어가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미궁이 너무 크다 보니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포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범려야, 어떻게 할 거야?"
범려는 제마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 미궁 안에는 씨를 말려야 할 소 대가리들이 있는데, 미궁이 너무 크다 보니 자칫 잘못해 저 안에서 길을 헤매다 영영 나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후! 미궁으로 들어간다."
"정말 들어갈 거야?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벽에 표시를 하면서 이동하면 돼. 아무리 미궁이라고 해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로는 없어."
범려는 마음을 굳게 먹으면서 미궁의 입구로 천천히 다가갔다.
"다행히 입구 주변에는 녀석들이 없네요."
"그래도 안에 들어가면 미노타우로스들이 떼지어 몰려다닐 거야. 다들 단단히 긴장해."
범려는 팀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막 미궁의 입구에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범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범려! 멈추게!"
"음?"
그 소리에 범려는 뒤를 돌아보며 누가 자신을 부르는지 자세히 쳐다보았다.
"바론 님?"
그의 친동생인 반트도 마차를 끌고 같이 오고 있었다.
"아니,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당연히 미스릴 무구를 배달하러 왔지."
"제가 어련히 찾아갈 텐데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하하하! 내 동생이 하루라도 빨리 물건을 전해주고 싶다고 해서, 급히 도시에 있는 마차를 빌려서 이렇게 달려왔다네. 나머지 병사들에게 착용할 무구들이니 확인을 해보게."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요. 전 바론 님과 반트 님을 믿습니다."
"하하하! 이 친구, 우리 형제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먼."
미스릴 무구는 모든 해골들이 착용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오히려 미스릴이 남아 차후에 해골들이 늘어난다면 미스릴 무구로 장비를 시켜도 될 정도였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범려는 내심 미스릴 무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물건이 도착하니 안심이 되었다.
'이게 해골들의 생존에 보탬이 되겠지.'
해골들이 오래 살아남으면 살아남을수록 해골들의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범려에게는 좋은 일이다.
"물건을 다 전했으니 우리는 이만 가겠네."
"네. 여기까지 무구를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다음에도 무구를 만들 일이 있다면 연락하게. 재료만 가져온다면 언제든지 공짜니까 걱정 말고!"
마음 좋은 드워프 형제 바론과 반트는 물건만 가져다주고 훌쩍 드워프 도시로 돌아가 버렸다.
"미스릴 무구로 장비하지 않은 녀석들은 모두 미스릴로 바꿔라."
해골들이 각자 앞으로 나와 자신의 옛 장비를 내려놓고 새 장비를 착용하니 다들 모습이 멋지게 변했다.
"이야! 대단한데. 이거 누가 봐도 후줄근한 언데드 병사가 아니라 휘황찬란한 언데드 병사로 보이는데."
"어머! 모습이 확 바뀌어버렸는데? 뭐, 해골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병사들의 모습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얼굴 부위에서 드러나는 해골은 여전히 감출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소 대가리 녀석들 씨를 말려야지."
해골들과 같이 미궁 안으로 들어가니 바깥에서 보던 모습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달랐다.
"바깥에서 미궁의 모습을 봤을 때는 웅장하고 거대하더니, 안쪽은 삭막한 벽과 썩은 고기 냄새뿐이구나."
"크윽! 냄새."
범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코를 막으면서 지독한 냄새에 치를 떨었다.
"언제까지 한 손으로 코를 잡으며 냄새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빨리 이 냄새에 적응해야지. 여기는 무식한 소 대가리들의 영역이야. 긴장해."
"알고는 있는데 냄새가 지독하단 말이야."
로즈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코를 꽉 붙잡고 있었다.
"바깥에서 볼 때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미궁이 역시 크다는 것."
범려는 해골 병사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최소의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다행히 미궁 안은 해골 병사들이 움직여도 큰 지장이 없을 정도의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왔는데 소들이 안 보이네."
범려는 미궁에 들어오는 즉시 미노타우로스들이 주변에 우르르 깔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다들 벽에 낙서를 조금씩 하면서 이동하자. 우리가 왔던 길을 표시해야 하니까 아주 확실한 낙서를 해줘."
"알았어."
"응, 그럴게."
다들 미궁 안에서 길을 잃은 미아가 될 수 있으니 가는 길목마다 낙서를 조금씩, 그것도 한눈에 누가 했는지 알아보기 편하게 표시를 남겨 놓기 시작했다.
<범려는 바보예요-!>
<로즈도 바보예요-!>
로즈가 먼저 범려를 바보라면서 벽에 낙서하자, 범려는 복수라도 하듯이 더 거칠게 낙서를 남겼다.
"하여튼! 둘 다 이런 미궁까지 들어와서 유치한 장난을 할 거야?"
"어머! 언니, 이런 장난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난 재미있기만 한데."
당당하게 낙서를 써내려가는 로즈를 보고 있자니 역시 여자는 남친이 생기면 뭔가 든든한 보호막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렇게 모두는 길을 천천히 가다가 틈틈이 낙서를 해나갔다. 혹 낙서가 시간이 지나 지워지는 건 아닌지 불안해했지만, 다행히 낙서는 시간이 좀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다들 정지! 전방에 소 대가리들이 있다! 전투 대형을 만들어라!"
해골들이 진형을 만드는 사이에 범려는 시위에 화살을 재고는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소들아, 오늘 너희는 다 죽는 거야."
범려의 그 말을 끝으로 화살이 시위에서 떠나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미노타우로스들을 향해 날아가더니, 그중 한 녀석의 머리통 정중앙에 푹 하고 꽂혔다. 그에 화살에 맞은 녀석이 괴성을 지르며 범려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후후! 어서 와라.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범려가 쏜 화살로 인해 달려오는 무리의 숫자는 10마리. 미노타우로스의 힘과 생명력을 생각해볼 때 이 정도면 상당히 위협적인 숫자에 해당하지만, 그래도 800마리가 쫓아와서 공격하는 것보다 수천 배는 쉽다.
"쿠어-!"
쿵! 쿵!
미노타우로스들은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스스로 멈출 줄을 모른다.
"소들이 달려온다. 좌우로 갈라져라!"
해골들은 범려의 명령대로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쫙 갈라졌고, 멍청한 소들은 그걸 그대로 통과하더니 벽에다 머리를 처박았다.
"에휴! 어떻게 된 게 저리도 멍청하냐."
미노타우로스들이 저렇게 멍청한 줄 알았으면 그때 그렇게 퀘스트를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쿠어-!"
바보 소들이 스스로 벽에 머리를 처박고, 그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 한심해 보였다.
"과연 저것들은 머리에 뭐가 들어 있을까?"
"깊이 생각할 것 없어, 범려야. 저놈들은 뇌가 근육으로 되어 있을 거야."
로즈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자 다른 일행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나쁘지 않은데."
다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 한 번의 웃음으로 긴장감이 적당히 풀렸다.
"내가 앞장서지."
범려는 섬전의 창을 꺼내고는 손에 힘을 줬다 빼기를 반복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몸이 적당히 풀렸어."
로즈 덕분에 범려도 알게 모르게 몸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려 있었다.
"덤벼라! 소 대가리 녀석들아!"
그 말에 미노타우로스들이 발끈하면서 저돌적으로 달려오자, 범려는 그들의 머리통에 구멍을 뚫을 작정으로 힘차게 창을 움직였다.
"환영섬!"
퍽! 퍽! 퍽!
어디서 쪽박 깨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더니 하나도 빠짐없이 미노타우로스들이 머리에서 피분수를 뿜어내고 있었다.
"클클클! 진작 이렇게 할 걸."
머리를 공격당해서 그런지 치명타가 터졌다. 미노타우로스들이 범려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지만, 해골마를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얘들아! 공격!"
해골들이 우르르 달려오더니 미노타우로스들을 무참히 짓이겨 버렸다.
"다음 녀석들을 향해 이동한다."
일행들은 미궁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소들을 학살해나갔다.
"그런데 보스 같은 건 없나?"
범려는 이왕 미궁에 왔으니 보스를 잡을 생각이었는데, 미궁이 워낙 크다 보니 보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형님, 여기에 보스가 있을까요? 던전도 아니잖아요."
"아니야. 있을 거야."
이렇게 몬스터가 몰려 있는 곳에 필드 보스 하나 없는 건 말이 안 된다.
"역시 범려야. 어디 몬스터 조금만 많아도 혹시 보스 몬스터가 있는 건 아닌지, 혹 보스가 나타나면 좋은 아이템은 안 떨어지는지 생각하는데 이거 습관인 거 알지?"
"헙! 그걸 어떻게?"
"난 범려 여친이야. 그걸 모르고 어떻게 여친 해먹어."
범려는 로즈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게임을 계속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보스 몬스터를 잡고 싶어졌고, 그 보스를 잡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쾌감에 중독되어 있었다.
부가적으로 좋은 아이템이 나오면 그보다 더 좋을 게 없을 정도이다.
"범려도 게임 폐인이야."
"크윽!"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전까지는 스스로가 게임 폐인이 아니라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로즈가 폐인이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다.
"좋아. 인정할게. 나 폐인이야. 게임 폐인."
결국 범려는 스스로를 게임 폐인이라고 인정하고는 해골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미 자신은 『판게아 월드』에 푹 빠져 있었다.
"이제 가자. 분명 미궁 안에는 미노타우로스들의 보스가 있을 거야."
범려의 두 눈이 점점 붉게 충혈되면서, 보스 몬스터를 죽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것들의 우두머리를 찾아야 한다. 우두머리."
"형님, 여기 뭐라고 쓰여 있는 거죠?"
취선은 범려를 따라 움직이다가 우연치 않게 이상한 표지판을 하나 보게 되었다.
"글자가 많이 지워져서 나도 잘 모르겠네. 대충 이쪽 방향으로 뭐가 있다고 표시한 것 같은데."
표지판은 너무 많은 글씨가 지워져 있어서 뭔가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었다.
"형님, 한번 가볼까요?"
"음, 좋아. 한번 가보자."
범려 일행은 그대로 표지판을 따라서 계속 움직였는데, 단 한 번도 갈림길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외길만이 이어졌다.
"형님, 이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알 수 없는 표지판이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검은 미노타우로스의 방이었다. 그것도 미노타우로스 800마리를 끌고서 드워프 도시를 공격하러 온 녀석이었다.
"저놈은 그때 지휘관! 발리스타로 투창의 비를 뿌리고 난 뒤, 유일하게 깜둥이 녀석의 시체만 보이지 않았지. 그런데 여기 있을 줄이야."
"혹시 보스가……."
취선은 조심스럽게 보스 몬스터가 아닌지 의심을 해보았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
놈은 독특하게도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털이 검은색이었고, 몸에 난 상처를 보면 수많은 싸움을 해온 전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음, 혼자 있는 데다 녀석의 몸에 있는 상처, 마지막으로 놈의 털 색! 최소한 중간 보스 정도는 될 거야."
범려는 그렇게 말하며 로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곧바로 비프를 시전했다.
"천사의 축복!"
-용맹 상태가 부여됩니다. 보스 몬스터로 분류된 몬스터에게 5%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30분 동안 지속됩니다.
"좋았어. 다들 버프 타임!"
"으아-!"
"상혼의 힘!"
"헤이스트!"
"신의 가호! 빛의 숨결!"
-신의 가호가 내려집니다. 체력이 50 증가합니다. 30분간 지속됩니다.
-빛의 숨결이 내려집니다. 모든 공격 형태의 공격력이 5% 증가합니다. 20분간 지속됩니다.
-바바리안의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전투력이 10분간 170 상승합니다.
-가속 상태가 5분간 지속됩니다.
-상혼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10분간 파티 전체 공격력과 방어력이 3% 상승합니다.
버프가 완료되자, 범려는 두 눈에 이채를 발하면서 활을 꺼내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초반에는 활을 들고 견제하는 게 좋겠지."
활이 가득 당겨지면서 전투 준비를 알리는 신호가 되자, 해골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대열을 만들었다.
"공격!"
쉬이이익!
범려의 화살이 정확하게 놈의 미간에 꽂히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쿠어-! 인간이 왔다. 신성한 미궁에 인간이 왔다!"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하는 깜둥이 미노타우로스.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그 깜둥이를 호위하는 10마리의 부하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났다.
"인간을 죽여라! 신성한 미궁에 발을 들여놓은 인간을 죽여라!"
"망구다이! 올가미!"
범려는 재빨리 올가미 던지기를 이용해 부하 미노타우로스들을 붙잡더니 입을 열었다.
"취선! 보스를 맡아라. 졸개들을 처치하고 난 뒤에 가마."
"예! 형님!"
범려는 취선을 대신해서 가끔 자신이 나서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죽 갑옷을 입는 캐릭터라서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앞으로 나서면 안 된다.
"가끔씩 나도 판금 갑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범려는 섬전의 창을 든 이후로 지금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의 방어력이 낮음을 한탄했다. 판금을 입고 있는 취선이 유일하게 샘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으하하! 이 취선 님이 널 상대하러 왔다!"
취선은 생긴 건 미소년같이 생겨서는 말하는 투는 여전히 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