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제작자-42화 (42/80)

제2장. 해골들은 만능일꾼?

"이건 거의 지도를 직접 만들라는 소리밖에 안 되는 건데."

범려는 항구에서 산 해도를 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부실한 것도 정도가 있지, 거의 백지에 가까운 해도는 정말 쓸모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후… 뭐, 배를 타고 다니면서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워야지."

어차피 항해를 하다 보면 여러 곳을 돌아다니게 될 테니, 자연스럽게 그곳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서 항로를 하나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물론 범려가 발견한 항로가 이미 다른 유저나 NPC들이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으윽, 머리야."

취선은 선실에서 누워 있는 것이 지겨운지 갑판으로 나와 바닷바람을 쐬면서 몸을 진정시켰다.

"후, 조금 살겠다."

"취선아, 아직도 멀미하는 거야?"

"네, 아주 죽을 맛이에요. 무슨 게임에서 멀미를 하게 만들었는지."

취선은 게임을 하면서 처음으로 멀미라는 걸 경험하고 있었고, 왜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왜 난 멀쩡하지?"

범려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배라는 것을 타본 적이 없다. 게임에서 타는 것이 처음이었다.

"왜 나만 멀쩡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한 답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헬렌과 로즈가 바깥으로 나왔다.

"끄응."

"속이 울렁거려."

그들의 뱃멀미가 심각한 듯하자, 범려는 다시 항구로 가서 지나가던 NPC들에게 멀미약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멀미약? 그게 뭔가. 바다 사나이라면 의지로 버텨야 하네!"

"하하하! 그따위 뱃멀미, 한 일주일만 참으면 다들 알아서 적응하네."

"멀미약이라……. 저 위에 의술사가 운영하는 병원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곳에서 파는지는 모르겠네."

대부분 멀미 따위는 그냥 참고 견디라고 했지만, 그중에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항구에 병원이 하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안녕하세요, 저기……."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습니까?"

"아, 제가 아픈 게 아니라 멀미약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요."

"멀미약은 저기 보이는 창구에 가셔서 구입하시면 됩니다."

접수처에 있던 간호사가 친절하게 멀미약 파는 곳을 안내해주었다.

"멀미약을 사러 왔는데요."

"몇 명이나 먹을 거야?"

"3명인데요."

"여기 3일분 약이다. 가격은 5골드."

창구에 근무하는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약을 내밀자 범려는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일단 급한 건 자신의 일행들이었기에 얼른 돈을 지불하고 배로 돌아왔다.

"여기, 다들 받아. 멀미약이야."

"응."

멀미약을 받아먹은 일행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속이 그렇게 울렁거리고 머리가 무거웠는데, 씻은 듯이 사라졌어."

"어머, 이런 약이 있으면 진작 먹었어야 하는 건데."

이로써 일행들은 멀미와 안녕을 고했지만, 혹시 모르니 약은 꾸준히 복용하라고 범려는 일러두었다.

"오늘 하루는 항구에 머물러 있을 건데, 혹시 사야 할 물건 있으면 미리미리 사둬. 바다에 나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까."

"네, 형님."

"응, 알았어."

다들 특별히 살 물건들이 많지는 않은지 짐들이 그리 크지 않았다.

"형님, 해골들은 장비 수리 안 해요?"

"아! 장비 수리."

평상시에는 대장간에서 내구도를 수리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바다로 나가게 되면 이용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지? 바다로 나가면 장비가 망가져도 고칠 수가 없는데."

"형님, 대장장이를 한 명 구할까요?"

"대장장이?"

분명 직업 중에 대장장이라는 게 있다. 아이템을 제작하거나 혹은 수리하면서 돈과 경험치를 얻는 직업이었다.

"그래, 대장간에 가서 한번 이야기해보자."

"저도 같이 가요."

범려와 취선은 대장장이를 배에 태우기 위해 폴리항의 대장간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대장간에 들어서자 쇠를 열심히 두드리던 대장장이가 손을 멈추고 손님을 맞아들였다.

"물건을 찾으십니까? 아니면 수리를 원하십니까?"

"둘 다 아닙니다. 선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선원?"

대장장이는 의아해했다. 선원을 구한다면 대장간에는 볼일이 없을 터였다.

"선원을 구한다면 술집으로 가셔야지,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대장일을 할 수 있는 선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대장장이는 범려의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난 이 항구에서 나갈 생각이 없소이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구려."

범려와 취선은 대장장이 선원을 한 명 구하려다가 오히려 대장간 주인에게 안 좋은 인상만 심어주게 되었다.

"저기, 저희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보시는 게……."

"필요 없소이다."

대장장이는 매몰차게 둘을 바깥으로 내쫓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열심히 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후… 이거 원, 대장장이 한 명 구하는 게 이리도 힘들 줄이야."

"형님, 포기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유저들이 있잖아요. 유저들에게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유저들이 과연 배에 탈까? 대장장이라는 직업이 흔한 건 아니지만, 배에 오르게 되면 몇몇 사람들의 무기 수리 말고는 할 일이 없기에 돈을 주고 고용하지 않는 이상 선원이 되어 배에 오르려고 하지 않을 텐데."

"그러네요. 별 친분도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이득 없이 배에 오를 리가 없죠."

범려가 원하는 것은 굳이 대장장이가 아니더라도 무기나 방어구 수리가 가능한 직업이었다. 그게 대장장이라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이득이 없는데 선원이 돼줄 유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에휴, 어디 무기만 수리해줄 사람 없나."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범려가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취선은 다시 대장간에 들어가 사정하고 있었다.

"당장 나가!"

"어이쿠!"

취선은 대장장이한테 내동댕이쳐지면서 바닥을 두어 번 구르더니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빌어먹을, 수습생이라도 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사람을 던지나."

수습생이라도 경험 삼아 보내달라고 취선이 부탁했지만, 대장간 주인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면서 쫓아낸 것이다.

"형님, 아무래도 NPC 대장장이들은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후, 그럼 대장장이를 어디서 구하냐? 유저들은 이득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테고, NPC들은 요지부동이고. 우리가 대장장이 기술을 배울까?"

"대장장이 기술은 대장장이 직업을 가진 유저가 아니면 절대 배울 수 없잖아요."

범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인벤토리에 있는 정령의 뼈를 꺼냈다.

"이렇게 되면, 모 아니면 도다."

"형님, 뭐 하시게요?"

"딱 보면 몰라? 해골 만들잖아."

범려는 해골들이 병사가 되지 않으면 인구수에 대한 제약이 없다는 것을 이용해 병사가 아닌 순수한 해골을 만들었다.

"완성!"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해골을 하나 완성해버렸다.

"이 녀석을 대장장이로 만들겠어."

범려는 유저들이 사용하는 스킬들을 해골들이 배울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기에 이 해골을 대장장이로 전직시킬 작정이었다.

"그걸 대장장이로 만든다고요?"

"어차피 대장장이를 구하는 건 어려워. 그렇다면 만들어야지."

해골을 데리고 대장간에 들어간 범려는 대장장이를 향해 넓죽 엎드리면서 절을 했다.

"난 이 항구를 나가지 않겠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요!"

"다름이 아니라 이 녀석을 잠시 맡아주십시오."

"해골!"

대장장이는 해골을 보더니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해골은 제 명령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범려는 대장장이를 안심시키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 해골을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녀석에게 대장장이 기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저 해골한테 대장장이 기술을 가르치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대장장이가 버럭 소리쳤지만 범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 데리고 있어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무기 수리가 가능한 정도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이래 봬도 이 녀석, 꽤나 성실합니다."

"허허, 이거 젊은 친구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구먼."

"부탁드리겠습니다."

범려는 옆에 있는 해골과 같이 머리를 바닥에서 떼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한 번만 이 녀석을 써보십시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얼마나 간곡하게 사정을 하는지 대장장이는 방금 전과 다르게 소리치지 않고 범려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대장장이 기술을 전부 다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이 녀석에게 무기와 방어구를 수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가르쳐 주십시오."

"내 20년째 대장장이 생활을 해왔지만, 무턱대고 대장장이 기술을 해골에게 가르쳐 달라는 건 처음이오."

대장장이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자 범려의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승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감사합니다."

해골은 범려와 같이 몸을 일으키더니, 대장장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얼른 달려가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어이쿠, 이런……."

대장장이는 해골이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자 처음엔 기겁해서 몸을 움츠렸지만, 해골의 손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동안 피로로 똘똘 뭉친 어깨 근육이 풀어지면서 자연스레 그에 대한 긴장감도 풀어졌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리 기술만 가르치면 되오?"

"물론입니다."

"알겠소이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본격적인 대장장이 기술을 가르치기는 어렵지만, 수리 기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모양이었다.

"형님, 결국 해골을 대장간에 맡긴 겁니까?"

"그래, 수리 기술만 가르친다고 했어. 뭐, 이렇게 받아줬으니 이제 가능성은 있어."

항구에 있는 대장간에서는 해골이 용광로에 풀무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옆에서는 대장장이가 열심히 자신의 핵심 기술을 속성으로 해골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재단사하고 무두장이를……."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이 지독해지는 법. 범려는 대장장이에게 고개 숙여 해골에게 수리 기술을 배우게 하자,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형님, 너무 욕심 부리는 거 아니에요?"

"후후후, 내 해골들은 자식 같은 녀석들이야. 그런 녀석들이 잘되는 게 뭐가 나빠?"

입으로는 해골들이 잘돼야 한다고 하지만, 해골들이 여러 생산기술을 배워가지고 온다면 차후에 아이템을 자급자족하며 살 수가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 음흉한 웃음은 뭡니까?"

"앗!"

범려는 황급히 입을 가리면서 웃음을 멈췄지만, 얼굴엔 이미 웃음꽃이 피어 감출 수가 없었다.

"해골들이 수리 스킬을 배워오면 너는 걔들한테 무기나 방어구 수리 안 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하하하! 그게 아니지요. 저야 언제나 형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취선은 해골이 아이템을 수리해주면 수리비 나가는 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기에 범려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자식, 속 보인다."

"형님, 저 수리비 장난 아니에요. 한 번만 봐주세요."

취선은 깊이 생각지도 않고 범려에게 매달리며 애절한 눈빛으로 공짜로 해달라고 했다.

"좋아, 녀석이 돌아오면 공짜로 해주지."

"감사합니다."

취선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표시를 하고 있을 때, 범려의 눈앞에 독특한 메시지가 떴다.

-개마 기병과 망구다이가 초급 항해를 익혔습니다.

"그 두 녀석이 스킬을 배웠네. 이제 녀석들이 배를 몰면 난 뭐 하지?"

범려는 괜히 항해 스킬을 배운 건 아닌지 생각했지만, 상황에 따라 자신이 키를 잡아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마법사들이 블리자드를 배우냐, 안 배우냐 인데."

범려의 최대 관심사는 해골 마법사들이 블리자드 마법을 배우냐 안 배우냐에 신경이 쏠려 있는 상태였다.

"형님, 이제 배로 돌아가실 거예요, 아니면 다른 곳을 더 둘러보고 가실 거예요?"

"당연히 더 둘러봐야지. 해골들도 몇 군데 맡기고 가야 하고."

범려는 이 기회에 해골들 몇몇을 완전한 생산직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병사가 아니라면 해골 인구수 제한에 들어가지 않을 테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대장간은 됐으니 이제는 방직소와 활 만드는 곳에 녀석들을 투입시켜야겠다."

"그럼 저한테 콩고물 하나 떨어지나요?"

"후후후… 너 너무 공짜를 많이 바라는구나."

"아하하! 그냥 공짜 수리에 만족할게요."

취선은 더 이상 욕심을 부렸다가는 공짜 수리도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했다.

범려는 해골들을 더 만들더니 몇 군데 보냈다. 방식은 대장간 때와 동일하게 다짜고짜 쳐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애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런 무식한 방법이 100퍼센트 성공률을 자랑하면서, 해골들은 전부 다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후후후, 이제 해골들이 돌아올 때는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범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형님, 이제 배로 돌아가실 거죠?"

"그래야지. 한동안은 이곳을 중심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다. 원래는 장거리 항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범려는 장비의 내구도 때문만 아니라면, 장거리 항해를 하면서 해도를 만들고 싶었다.

"저 바다 위에는 능구렁이 같은 해적들도 있을 것이고, 그들이 숨겨 놓은 보물도 있을 텐데 말이야."

분명히 존재할 거라 믿고 있는 보물. 혹 다른 유저들이 먼저 획득할 가능성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물을 찾았을 때의 이야기다.

"보물……."

취선은 듣자마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보물에 대한 욕심을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야, 보물 너무 좋아하지 마라. 그거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될 거라 생각하는 거냐? 보물 지도도 없지, 그리고 이 해도도 불완전하지, 아주 불가능에 도전을 해라."

범려는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하며 취선의 보물에 대한 꿈을 철저히 부숴버렸다.

"체에……."

허망한 꿈이 부서지자, 녀석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졌는지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런다고 또 포기하냐? 남이 뭐라고 하든 넌 꿈을 향해 한 발자국씩 움직여야지."

"지도도 불완전하고 보물이 있을 만한 장소도 모르잖아요."

"그 반대로 생각해봐. 남들도 우리와 똑같아. 해도라고 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보물 지도 역시 녀석들이 있을 것 같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그러니 너무 기운 빼지 마. 아직 기회는 있다고."

범려가 남들도 우리와 같은 조건을 갖추었다면서 기운을 북돋아주자 취선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보물을 찾으러 가자-!"

"잠깐, 보물을 찾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아?"

범려가 해도를 눈앞에서 펄럭거리며 흔들자 취선이 곧바로 대답했다.

"바다를 여행하면서 지도를 완성하는 것!"

"맞았어. 제일 우선시돼야 할 것이 지도, 그다음이 보물이 있을 법한 곳을 탐색하는 거지."

어떻게 보면 병 주고 약 주면서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로만 보이겠지만, 세상일이란 준비 없이 되는 건 없다. 범려는 그걸 취선에게 알려 주기 위해 일부러 녀석의 기운을 빼놨다가 다시 북돋아준 것이다.

"내일 당장 출항할 거니까, 배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해둬라."

"네! 함장님!"

취선은 평소에 쓰지도 않던 칭호를 내뱉으면서, 배가 있는 곳으로 힘차게 걸어갔다.

'참 알기 쉬운 녀석이야.'

범려도 일단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배로 돌아와 함장실로 들어가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 * *

똑똑.

"누구야?"

"나야."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로즈였다. 범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와."

"어머나, 이거 우리가 쓰고 있는 방이랑 너무 차이 나잖아?"

로즈가 함장실에 들어와서 대뜸 한 말이었다.

"왜? 샘나?"

"그럼! 샘나지. 호텔처럼 좋은 방을 혼자서 쓰고 있는데 어떻게 샘이 안 나?"

"하하하! 겨우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어머, 겨우 그런 거라니! 혼자서 여기 쓰는 거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지 않아?"

"그럼 너도 여기 써. 그러면 되겠네."

"이게!"

로즈는 살짝 화가 났는지 범려의 옆구리를 강하게 꼬집었다.

"아악!"

"날 놀린 벌이야."

평소에는 느껴 보지 못한 통증이 옆구리에서 밀려오자 범려는 참기기 힘들었다.

"크윽, 분명 게임에서는 고통이 상당히 줄어들어야 하는데 이건 왜 이리 아프냐."

"흥!"

로즈는 범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씩씩거렸다.

'이럴 때는.'

"아악! 내 생명력이 계속 떨어져-!"

범려는 호들갑을 떨었다.

"흥! 누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알아?"

로즈가 단호하게 말하는데도 그는 계속 아프다면서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쯤 해서…….'

뚜뚝.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범려가 소리쳤다.

"지, 진짜야! 내 생명력을 봐봐!"

"누가 믿을……."

하지만 실제로 그의 생명력이 계속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자 로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머나, 힐! 힐!"

로즈가 힐을 쓰는데도 범려의 생명력은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

"나… 죽어."

"어떻게 해."

로즈는 힐이 통하지 않자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범려의 생명력이 계속 떨어지자 결국 울기 시작했다.

"으앙, 어떡해!"

"으윽, 로즈가 키스해주면 멈출지 몰라."

범려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로즈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그에게 키스해주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생명력이 떨어지던 것이 멈췄다.

"멈췄다."

"어머, 정말."

로즈는 범려를 와락 끌어안더니 정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행동했다.

"다시는 꼬집거나 하지 않을게."

"후후, 난 좋은데. 로즈가 키스도 해주니까."

"흥……."

범려는 로즈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사이, 얼른 오른손에 있던 부러진 화살촉을 침대 밑으로 귀신같이 던졌다.

범려가 로즈한테서 키스를 받기 위해 일부러 화살을 부러트려 화살촉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자해를 했음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인벤토리 안에서도 화살을 부러트릴 수 있다니, 참 좋은 정보였어. 그 대가가 조금 고통스러웠지만 말이야.'

잠시 후, 로즈는 범려의 품에서 떨어지더니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이제부터 여기서 살 거야."

"아까는 싫다면서 마음이 바뀐 거야?"

"나 싫다고 한 적 없어. 그냥 샘난다고 했지."

그렇게 로즈가 범려와 같이 지내기로 한 찰나, 정확히 5분 후에 방해꾼이 함장실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

"나야, 헬렌."

방문을 힘차게 열면서 등장한 헬렌은 범려가 있는 곳을 향해 아주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언니!"

"얼른 이쪽으로 안 와?"

헬렌은 다짜고짜 로즈의 팔을 잡아당기며 함장실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거야."

"뭐가? 어때서."

"다 큰 처녀가 남자 혼자 있는 방에 들어가고, 이게 큰일 날 짓 하고 있어."

"언니!"

함장실 바깥에서 두 여자가 싸우는 소리에 범려는 한숨만 쉬었다.

"에휴, 내가 나가서 해결을 봐야지."

범려는 함장실 문을 벌컥 열고는 로즈를 확 잡아당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헬렌 누나, 그럼 이만."

딸깍!

방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헬렌은 멍하니 함장실 앞에 서 있었다.

"야! 문 열어! 이것들이 어디서."

"언니, 미안해. 나 범려가 너무 좋아."

"로즈 너! 이 사실 이모가 알면 참 좋아하겠다!"

"언니, 엄마한테 말하면 나도 언니 비밀 다 폭로할 거야."

"윽!"

방문을 하나 두고 두 여자 간의 비밀 폭로 협박이 잠시 이어지더니 곧 바깥이 잠잠해졌다.

"헬렌 언니 로그아웃해버렸네. 에휴."

접속한 친구 중에 헬렌이 없어진 걸 보고 로즈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시무룩해졌다.

"헬렌 누나는 금방 올 거야. 그러니 걱정 마."

"언니는 한번 삐치면 쉽게 안 풀어지는 성격이라서 적어도 보름은 갈 텐데."

"……."

보름 정도 간다는 로즈의 말에 범려는 머리가 아찔해짐을 느꼈다.

"진짜로 보름이 걸리는 건 아니겠지?"

"아니, 진짜야. 전에도 이런 일 있었는데 보름 동안 나한테 말도 안 붙였어."

생각보다 뒤끝 있는 헬렌이었다.

"내가 너무 큰일을 벌인 건가."

범려는 헬렌이 설마 뒤끝이 이렇게 심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냐, 괜찮아. 언니는 내가 더 잘 알아. 그냥 내버려 둬."

로즈는 내버려 두라고 말했지만, 범려는 이래저래 불편한 사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헬렌 언니 보름 지나면 오늘 일 잊어먹어. 언니 기억력, 생각보다 별로거든."

로즈는 그가 걱정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서, 아무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달래주었다.

그렇게 로즈가 범려를 걱정해주고 있을 때 눈앞에 메시지가 하나 뜨면서 범려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해골 마법사들이 블리자드를 배웠습니다.

-블리자드 마법은 해골 마법사 5명이 있을 경우 발휘할 수 있습니다. 유저들과 동일한 쿨 타임을 가지게 되며, 마나의 소모는 해골 마법사의 숫자만큼 나누어 소모합니다.

"헉! 해골 마법사들이……."

범려는 광역 마법은 너무 데미지가 크고 범위가 넓어서 해골들이 배우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해골 마법사들은 블리자드 마법서 하나를 완벽하게 독파하더니, 『판게아 월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광역 마법을 익히고 만 것이다.

"마법사가 20명. 한꺼번에 네 번을 연달아 쓸 수 있다는 소리잖아?"

이걸로 헬렌이 없더라도 마법에 대한 불안감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하하하! 녀석들이 배웠어! 배웠단 말이야-!"

"범려야, 왜 그래?"

방금 전까지 헬렌 때문에 걱정하고 있던 범려가 지금은 미친 듯이 웃으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아, 별거 아니야. 그냥 해골들이 마법을 하나 배워서."

범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이건 별일이 맞았다.

블리자드를 쓰는 마법사 4명을 동시에 부리는 것과 같은 효과의 능력을 얻었는데, 그게 별일이지 다른 게 별일이겠는가.

"후, 이제 마법사들을 신나게 부려먹어볼까."

범려는 함장실에서 나오더니 해골들을 불렀다.

"해골들 전원 집합!"

해골들은 분주하게 갑판으로 튀어나오더니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을 하고는 범려를 바라보았다.

"출항 준비를 해라. 출항 시간은 10분 후다! 서둘러!"

해골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바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충무공호는 빠른 속도로 항구를 벗어나 거대한 돛을 펼치고 드넓은 바다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바다의 몬스터들아, 기다려라! 내가 너희를 잡으러 왔다!"

범려는 크게 소리치면서 병사들을 전투 배치시켰는데, 일부 병력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발리스타를 준비하고 여차하면 사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여기서부터는 망원경을 자주 써야겠군."

인벤토리에서 망원경을 꺼낸 범려는 주변의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혹시 있을 바다 몬스터들을 찾았다.

"아, 발견!"

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있다는 켈피라는 바다 몬스터였다. 특별한 형체가 없는 녀석으로 어떻게 보면 바다의 정령 같지만, 사람을 빠트려 죽이기 때문에 유령 취급을 받았다.

"켈피? 웬 유령같이 생긴 녀석들이 잘도 뛰어오네. 숫자는 20마리… 꽤나 많군."

처음에는 적당히 선회해서 발리스타의 밥으로 만들 작정이었지만, 육체가 없는 유령 같은 녀석들이라서 발리스타의 물리적 공격은 먹히지 않을 듯했다.

"유령을 상대하려면 물리 공격보다 마법 공격이 좋겠지. 마법사들은 저 유령들을 처리해라!"

해골 마법사들이 뼈밖에 없는 앙상한 손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법을 동시에 쏟아냈다.

"후후후… 녀석들, 말 안 해도 한 놈만 패는구나. 나머지 해골들은 배를 조종하면서 켈피들이 배 위에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유령은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존재가 아니다. 해골들의 무기에 속성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로즈! 저 녀석들 속박돼?"

"아니, 안 돼. 저것들은 언데드가 아니라 정령으로 취급돼서 스킬이 안 먹혀."

"이런! 그럼 혹시 해골들 무기에 성(聖) 속성 부여 가능해?"

"가능해."

"그럼 궁수들한테 부여해줘!"

"아스페르시오!"

-해골 궁수들의 무기에 10분간 성 속성을 부여합니다.

로즈가 범려의 말대로 궁수들의 무기에 성 속성을 부여하자 궁수들은 거침없이 활을 당겼다.

쉬이익! 쉬이익!

"켈피 녀석들이 따라붙는다. 배에 달라붙지 못하게 우측으로 선회해!"

키를 잡고 있던 해골이 갑자기 우측으로 확 틀어버리자, 배가 급격하게 선회하면서 켈피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 놈만 공격해!"

켈피들은 배 위에 오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배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배 근처에 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하하하! 역시 배는 빠르고 병사들은 강하고 봐야 돼."

"형님, 여기서는 제가 할 일이 없네요."

"무슨 소리! 은밀하게 다가오는 거대 오징어인 크라켄이 나타나면, 궁수들이나 마법사들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그럴 때는 취선 너같이 힘 좋은 녀석들이 나서서 처리를 해야 해."

"그 오징어 대가리가 징그러운 다리를 배에 올리는 순간 절단을 내버리겠습니다, 형님!"

취선이 천공의 도끼를 어루만지면서 크라켄이 이 배를 공격한다면 그 다리를 싹둑 잘라버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후후후, 너만 믿겠다, 취선."

범려는 취선을 독려하며 망원경을 가지고 다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 켈피 무리가 보인다! 전투 준비!"

범려의 시야에 걸린 켈피 무리는 멀리 있었지만, 속도가 상당히 빠른 충무공호는 그 정도 거리는 우습다는 듯 달려가더니 성 속성이 부여된 화살 세례와 마법 폭격을 날려 주었다.

"으흐흐, 다 죽는구나."

결국 바다의 정령이자 유령인 켈피들은 해골들의 손에 걸려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음? 갑자기 부표가 나타났네?"

켈피들이 죽고 난 뒤 갑자기 부표가 하나 생기더니 반짝거리면서 '어서 이곳으로 오세요'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뭔데 저런 게 생긴 거지?"

범려는 조심스럽게 배를 몰아 그 앞에 멈추고는 줄사다리를 내려서 부표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켈피의 눈물을 획득하셨습니다.

"부표가 아이템 상자였어. 그런데 주는 아이템이 겨우 잡템이라니."

켈피의 눈물을 회수는 했지만, 별로 큰돈이 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하암, 졸리네."

배 위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 보니 취선은 한쪽 구석에 앉아서 하품만 하고 있었다. 뭐 하나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되는 건가."

범려가 열심히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취선은 '지휘관이라는 것도 참으로 힘들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그의 눈은 서서히 감겼고, 이내 완전히 잠들고 말았다.

"으음, 나도 버프 걸어주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네."

로즈 역시 해골들의 무기에 성 속성을 부여해주는 일을 제외하면 딱히 할 일이 없었고, 한번 버프하고 나서는 10분 동안 멍하니 범려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속력 전진! 전방에 몬스터들이 있다!"

범려 혼자서 사냥을 한다고 해도 거의 무방했는데, 취선과 로즈는 파티 경험치로 인해 많은 양은 아니지만 조금씩 보너스 경험치를 먹고 있었다.

해골들과 같이 몬스터들을 한참 쓸어버린 뒤 범려는 잠시 쉬고 있다가 한창 단꿈에 빠져 있는 취선을 보게 되었다.

"아니, 이게! 대기하고 있으랬더니 여기서 꾸벅꾸벅 졸고 있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