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건방진 놈
"강토야, 길드원은 얼마나 모였지?"
"급하게 비상 소집령을 내려서 전원이 다 모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희 길드 핵심 요원들은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해골 제작자의 위치는 어디인지 파악했나?"
"아직입니다. 그래도 조만간 소식을 전해올 것입니다."
흑검은 우산 길드의 힘을 총동원해 해골 제작자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었다.
"빨리 찾아라. 녀석에게 지옥 같은 죽음을 선사하고 싶구나."
우산 길드는 랭킹 15위의 길드다. 상당한 힘을 자랑하는 길드로, 단순히 힘만 놓고 본다면 5위인 폭주 길드와 맞먹는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흑검 형님, 해골 제작자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황급하게 연락을 받은 강토가 흑검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디 있냐!"
"폴리항입니다."
"항구에 있다면 녀석은 심해의 노턴으로 갈 생각이군."
"흑검 형님, 심해의 노턴이면 최근에 새로운 업데이트가 됐다는 지역인데 그곳으로 갔다는 말씀입니까?"
"항구에 녀석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바다로 나간다는 뜻이다. 녀석이 바다로 간다면 우리도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배를 구입해라."
"예!"
강토는 다른 길드원에게 연락을 취해 배를 한 척 구입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어이가 없었다.
"뭐? 배가 없어?"
"음?"
강토는 계속 길드원과 이야기를 하더니, 지금 항구에 있는 배가 다 팔려서 배를 구하고 싶으면 조선소에서 직접 수주를 넣어야 한다고 알려 왔다.
"흑검 형님, 지금 항구의 배가 다 팔려서 조선소에 가서 직접 배를 수주해야 한다는데요?"
"그럼 당장 조선소로 가자."
"예."
둘은 곧바로 조선소를 찾아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조선소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형님, 이곳입니다."
"어서 안내해라."
배를 사기 위해 두 사람은 선박 알선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명이 대기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희 말고도 배를 사러온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래봤자 얼마나 큰 배를 산다고."
흑검은 코웃음을 쳤지만, 혼자서 배를 사러 왔다는 것은 그만큼 돈 많은 부자라는 소리였다.
"네, 알폰소 님의 배가 계약되었습니다. 15일 후에 오시면 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알선소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사람들과 계약을 하면서 배의 크기와 속도는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얼마나 선적이 가능한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음 손님."
사람들은 차례차례 배의 크기를 말했다.
"이 정도의 배를 원합니다."
"배 가격이 10억 골드 정도 하겠는데요."
"여기, 들풀 도시 은행 계좌입니다."
흑검은 10억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길드 자금을 다 모은다면 가능한 금액이기는 하지만, 그건 개인의 돈이 아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길드에 가입된 것 같지도 않은데 10억 골드가 든 은행 계좌를 하나 알려 주면서 거래를 하는 것이다.
"흑검 형님, 저희 돈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니, 길드 자금을 총동원하면 못 살 것도 아니야."
"그럼 길드 자금을 총동원할까요? 대략 13억 골드는 나올 것 같은데."
"12억짜리 배를 사고 남은 1억 가지고 몇 가지 물품 사서 다 장부에 적어놔. 길드원들이 그런 큰돈을 어디에 쓰는지 궁금해할 테니 거래 계약서도 확실히 챙겨서 보여 주고."
"네, 형님."
한 길드의 마스터답게 흑검은 모든 자금의 흐름을 세세히 적어 기록으로 남겼고, 12억 골드를 들여서 아주 어마어마한 함선 한 척을 구입했다.
"이 배는 상당히 큰 배라서 30일 후에 나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좀 단축 안 되겠습니까?"
"그건 힘듭니다."
"후, 그렇다면 30일 후에 이곳으로 돌아오지요."
"저희 조선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흑검은 배를 주문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하루빨리 완성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범려를 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강토야, 배가 건조되기 전에 바다에 나가서 필요한 준비물들을 확인해봐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토는 조사하기 위해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으니 해골 제작자는 혼자겠지. 아니면 몇몇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겠어. 그래봤자 허접스런 배 한 척 가지고 바다로 나온 거겠지만."
흑검은 범려가 겨우 얼마 안 되는 해골들을 데리고 작은 배로 바다에 나가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현재 범려가 가지고 있는 배는 드워프들이 직접 만든 최고의 배였고, 해골마를 이용해 돛이 없이도 항해가 가능했으며, 드워프 특제 발리스타도 6기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흑검이 범려의 배를 앞지르려면 적어도 배에 대포라도 달지 않는 이상 어렵다. 하지만 『판게아 월드』에서는 대포를 지원하지 않는다.
"이제 배가 완성될 때까지 사냥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겠군."
흑검이 이렇게 대륙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범려는 배를 타고 대양에서 사냥하고 있었다.
* * *
"발리스타 사격 준비!"
충무공호의 갑판 아래층에 준비되어 있는 발리스타 2기가, 힘차게 줄이 당겨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범려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발사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졌다.
"문어 대가리를 뚫어버려라!"
쉬이익! 쉬이익!
무서운 파공음을 날리면서 발사된 투창은 정확히 거대한 문어 대가리에 명중하면서 깊숙이 박혔다. 공격을 당한 거대 문어는 황급히 바다 속으로 들어가더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젠장! 문어 대가리가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녀석은 이 배를 잡기 위해 올 거다! 다들 준비해!"
병사들은 발리스타를 안으로 집어넣고 밑에서 문어 대가리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스르륵, 스르륵.
"녀석이 왔다!"
거대한 문어가 그 미끌미끌한 다리로 충무공호를 감싸더니 배를 부숴버리려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내 도끼 맛을 봐라! 문어 대가리!"
취선이 높이 뛰어올라 천공의 도끼로 힘차게 문어 다리를 내리찍자 툭 하면서 다리가 잘려 나가버렸다.
"어어!"
문어는 다리가 잘려 나가자 고통스러운지 온몸을 요동치면서 배를 강하게 흔들었고, 해골들이나 취선은 균형을 잡지 못해 갑판 위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이것들아! 어서 문어다리를 잘라야지, 뭐 하는 거야!"
범려가 버럭 소리치자 해골들은 주춤거리는 몸을 일으켜 거대 문어 다리를 잘라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해골들이 문어 다리를 지독하게 공격하자 살점이 잘려 나가고 생명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에 문어가 몸을 빼 도망치려고 하자 범려는 불같이 소리쳤다.
"마법사! 녀석이 도망간다. 블리자드를 써서 녀석이 도망 못 가게 바다를 얼려 버려!"
20명의 마법사들이 동시에 블리자드 마법 캐스팅을 시작했고, 거대 문어가 몸을 빼기도 전에 마법이 시전되었다.
날카로운 얼음과 같이 극심한 추위를 자랑하는 블리자드가 작렬하자 충무공호 주변의 바다가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뼈가 시릴 정도의 추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범려는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자 거침없이 웃으면서 꽁꽁 얼어가는 거대 문어의 모습을 보곤 명령을 내렸다.
"놈이 바다로 도망가기 전에 죽여라!"
해골들은 거침없이 바다로 뛰어들어 문어의 몸 위에 올라타더니 그 연약한 피부를 갈가리 찢어버렸고, 바다 위에는 문어의 살점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그렇게 거대 문어를 잡자 시체가 사라지면서 부표 하나가 생겨났지만, 좋은 아이템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거대 문어의 눈'이라는 쓰레기만 나왔다.
"바다에는 쓰레기만 나오는 거냐, 아니면 이걸 식재료로 쓰라는 거냐."
바다에서 사냥하는 동안 만족스러운 아이템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저 야들야들한 게 속살 혹은 상어 지느러미 같은 요리 재료로 의심되는 것들만 잔뜩 나왔다.
"항구에 있는 음식점에 이걸 팔아치워야 하나."
범려는 지금 나온 아이템을 가지고 항구 음식점에 팔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팔아버리면 되지. 안 팔리면 버리면 그만."
"그래, 일단 항구에 있는 식당에 가서 말해보면 알겠지."
범려는 로즈의 말을 듣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하찮은 이유로 고민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제 항구로 돌아가 볼까."
그렇게 충무공호는 폴리항을 향해 돌아왔고, 배 안은 사냥하면서 모은 시답잖은 아이템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되어 있었지만, 폴리항은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대낮처럼 밝네."
범려는 항구 전체가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보자 대도시의 야경이 생각났다.
"형님, 항구는 24시간 일을 하나 봐요. 저기 보세요. 사람들이 아직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진짜네. 여기 항구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가 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항구의 모습은 로즈 남매에게 원래 이곳은 이렇게 바쁜 곳이란 고정관념을 심어주었지만, 보기와 다르게 이 폴리항은 그다지 바쁘지 않았다.
많은 유저들이 갑작스럽게 배를 만들어 바다로 진출하는 바람에 바쁘게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폴리항은 항구도시 중에서도 좀 작은 편에 속해서 그렇지 정말 거대한 항구도시는 이것보다 몇 배는 바쁘게 돌아간다.
"얘들아,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나 혼자 이것들을 정리하고 오겠다."
해골들은 알았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식당이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볼까나."
범려는 가장 먼저 레스토랑이나 혹은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여관을 찾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발견."
아주 근사한 곳을 하나 발견한 범려가 안으로 들어가자, 고급스러운 복장을 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이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예약석이 있으십니까?"
"아니, 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웨이터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범려는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 궁금해서 묻는 건데 여기서 싱싱한 해산물 같은 걸 사는지 알려 줄 수 있나요?"
"그건 지배인님이 총괄하시기 때문에 저는 잘 모릅니다. 지배인님을 불러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범려의 말에 웨이터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곧 웨이터 복장을 한 중년의 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는지요?"
"여기서 싱싱한 해산물을 사는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지배인은 범려의 말을 듣는 순간 눈빛이 바뀌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싱싱한 해산물이라면 이곳에서 이야기하면 안 되겠군요. 자리를 옮기시지요."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범려는 레스토랑에 있는 작은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먼저, 어떤 해산물을 가지고 계시는지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범려가 상어 지느러미를 앞으로 내밀자 지배인은 그것을 보면서 두 눈을 반짝였다.
"나쁘지 않은 품질의 물건이군요. 다른 것도 있습니까?"
순간, 범려는 속으로 왠지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건 어떤가요?"
그가 이번에는 거대 문어의 눈알을 꺼내들자, 지배인의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이, 이건 그 구하기 어렵다는 거대 문어의 눈알!"
"물건이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군요."
"혹시 따로 거래하시는 곳이 있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지배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희와 거래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값은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당장 거래를 하자며 이야기를 꺼내자, 범려는 뛸 듯이 기뻤다.
'이런 쓰레기들을 처분할 수 있다니 운수 대통이야.'
그렇게 범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식재료들을 처분해 생각보다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었고, 손익계산을 따져 보더라도 40골드나 이익을 본 거였다.
"거대 문어 눈깔 하나가 15골드나 하다니."
완전히 쓰레기 취급받던 아이템들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내자 범려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거 잘만 하면 나중에 육지로 돌아갔을 때 알부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겠는데?"
이건 범려에게만 국한된 사실이지만, 원래는 일단 배를 타게 되면 유저 혼자 운영을 하는 일은 절대 없다. NPC를 태워도 그들에게 월급을 줘야 하고, 같은 유저들이 탄다고 해도 사냥을 해서 얻은 이익을 균등하게 분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사냥을 거의 혼자 다 하는 범려는 상당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범려는 돈을 독식하는 것은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취선과 로즈에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고는 둘에게 레스토랑에 갔던 일을 알려 줬다.
"형님, 그게 사실이에요? 그 쓸모도 없어 보이는 문어 눈깔이 15골드라고요?"
"그래, 엄청나더라. 그 외에 다른 것들도 꽤나 좋은 가격에 팔려서 순이익만 40골드 나왔다."
"형님, 육지랑 바다는 벌어들이는 돈이 다르네요."
"각자 13골드씩 받아."
범려는 로즈와 취선에게 13골드씩 분배해주었고, 그 자신도 13골드를 가져갔다. 그리고 남은 1골드는 배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따로 보관하기로 했다.
"형님, 여기 3골드요. 사냥은 형님이 다 했고 저는 별로 한 게 없잖아요. 공짜로 13골드나 받기에는 좀 그래서요."
취선은 별로 한 일도 없이 13골드나 받기가 미안했는지 3골드를 다시 돌려주었다.
"나도 10골드만 받을게."
로즈 역시 범려에게 3골드를 돌려주었다.
"다들 돌려주네. 이거 수리비하고 화살 값 제외하고 남은 돈인데 그래도 괜찮아?"
범려는 혹시 몰라서 재차 물어봤지만, 로즈 남매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범려가 제일 고생했잖아. 우리가 뭐 한 일이 있어야지."
둘 다 범려에게 얻은 게 많다 보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다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범려도 두 사람의 호의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차후 돈 계산을 하게 되면, 범려가 50을 먹고 나머지 50을 취선과 로즈가 나눠먹는 식으로 결정이 났다.
"형님, 그런데 항구에 맡겨 두었던 해골들은 언제 올까요?"
"나도 몰라. 녀석들이 올 때까지는 이 항구에 자주 정박해야 할 거야."
아직 장거리 항해를 할 준비가 부족한 범려는 어쩔 수 없이 폴리항을 주 항구로 잡고 활동을 해야 했다.
"오늘은 푹 쉬어. 내일부터는 이틀 간격으로 항구에 와서 보급품을 보충하고 움직일 거야."
"네."
"응."
로즈 남매의 대답이 왠지 힘이 없었지만, 범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둘이 있으므로 해서 자신이 해결하기 힘든 부분이 보완됐기 때문이다.
다음 날이 되자 범려는 아침 일찍 출항해 배를 전속력으로 달리더니, 게임 시간으로 12시간 안에 제일 멀리 갈 수 있는 곳까지 움직였다.
"형님, 뭐 이렇게 멀리까지 왔어요?"
"뭐가 멀어. 나중에는 섬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와서 살아야 하는데, 이 정도면 얼마 되지도 않아."
전속력으로 달려왔어도 하루 반나절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범려야, 여기가 어디야?"
로즈는 갑자기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배가 멈추자 긴장되는지 물었다.
"여기? 폴리항 근처 바다."
"그래? 그것치고는 상당히 멀리 온 것 같은데."
"해골들이 돌아오면 더 멀리 진출할 거야. 그러니 다들 익숙해져야 해."
범려의 말에 로즈 남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보다 더 먼 바다를 항해할 것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음?"
그때, 저 멀리서 물보라가 일어나는게 보였다. 범려는 바로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형님, 저쪽에 뭔가 있는 건가요?"
"잠깐만 기다려 봐. 나도 확인 중이야."
범려의 망원경에 걸린 대상은 다름 아닌 상어. 그것도 현실 세계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상어 무리였다.
"상어? 그런데 저놈, 색깔이 빨간색인가?"
붉은 상어 무리가 점점 다가오자, 범려는 상어들의 머리 위에 보이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블러디 샤크?"
바다의 폭군에 걸맞은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발리스타, 준비되는 대로 블러디 샤크를 향해 쏴!"
해골들은 범려의 명령대로 발리스타를 힘차게 당겼고, 주저 없이 투창을 날려 상어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이런! 놈들이 너무 빨라! 전속력으로 움직인다!"
범려는 일단 배를 선회시켜 녀석들의 추격 속도를 떨어트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블러디 샤크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헤엄쳐 오더니 어느새 발리스타의 최소 사정거리 안에 다다라 있었다.
"젠장! 궁수! 마법사! 녀석들이 배를 향해 돌진하기 전에 막아라!"
블러디 샤크는 머리와 등은 상어의 모습이지만, 목 아래부터는 인간과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손과 발에 물갈퀴가 있어서 물속에서도 거침없이 헤엄칠 수 있는 것이다.
"크아! 인간이다! 맛있는 인간 고기!"
"뭐야? 팔다리가 달려 있는 놈이잖아."
"어머! 징그러워!"
"근접 병사들, 전투 준비! 녀석들이 배 위로 올라온다!"
상어들의 숫자는 얼추 40마리. 그것들이 빠르게 바다를 헤엄쳐 배 밑으로 오더니 어느새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크아-!"
블러디 샤크는 오른손에 기이하게 구부러진 검을 들더니 그대로 해골들을 향해 휘둘렀다.
팡! 팡!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돌격병이 커다란 방패로 그 검을 막으면서 버티자, 뒤에 있던 근위병과 개마 기병이 창을 날카롭게 찔러가며 블러디 샤크를 공격했다.
푹! 푹!
해골들의 무기는 다들 미스릴로 만들어져 있어서 블러디 샤크의 몸에 깊은 상처를 만들어냈다.
이어 다른 해골 근위병들이 순식간에 녀석의 몸을 찌르자 10개의 창이 블러디 샤크의 몸에 치명상을 남겼다.
"오랜만에 활 좀 당겨 볼까."
범려는 시위를 힘차게 당겼다. 오른손에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으라라라!"
빠각! 퍽!
취선은 거침없이 도끼를 휘둘러 상어들의 머리를 쪼개며 미친 듯이 날뛰었고, 로즈는 수많은 해골들의 생명력을 동시에 파악하면서 이리저리 힐을 해주었다.
"크르릉."
한참을 싸우다가 갑자기 몇몇 해골들의 눈이 파란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더니 동작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범려는 해골들의 뒤통수만 보고 있어서 그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공격 속도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해골들의 존재를 느꼈다.
'뭐지? 몇 녀석의 동작이 빨라졌어.'
남들 같으면 그 미묘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해골들을 쭉 봐온 범려이기에 그 차이를 몸으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다섯. 다섯 놈이군.'
정확히 다섯 녀석의 몸동작이 보통이 아니었고, 다른 해골들이 그 녀석들을 보조하며 싸우고 있었다.
'뭔가 있다. 이 전투가 끝나면 저 다섯 녀석을 불러서 확인해봐야겠어.'
눈이 주황색으로 변한 다섯 녀석의 지휘로 인해 블러디 샤크들은 바다 위에 빠지더니 아이템만 남기고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크으… 역시 이놈들, 아이템이라고 주는 게 붉은 상어 지느러미네."
게임 시간으로 18시간 정도 사냥한 것 같은데, 거기서 나온 아이템들은 하나같이 식재료로 사용되는 것들만 잔뜩 나왔고, 어디 방어구나 검 같은 물건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무슨 동물 뼈가 나오기도 했지만, 식재료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돈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왠지 기운 빠진다."
범려는 아이템을 회수하고는 방금 행동이 빨라진 다섯 녀석을 불렀다.
"너, 너, 너. 앞으로 나와."
해골들이 거의 다 똑같이 생겨서 구분하기가 힘든데 범려는 귀신같이 그들을 집어냈다. 다섯 해골들은 돌격병, 개마 기병, 저격병, 근위병, 마법사였다.
"어라? 종류별로 있네."
범려의 생각과 다르게 종류별로 다섯이 모이자, 녀석들의 눈이 다시 푸른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음!"
그 모습에 범려는 이 다섯 녀석들에 대해 무척 궁금해졌다. 그는 곧 해답을 찾기 위해 아르테미스를 불렀다.
"아르테미스!"
"휴, 안녕하세요."
개미 이벤트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아르테미스는 이벤트가 끝나자 다시 범려에게 얼굴을 보여 주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사정이 생겨서 불러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미안해요."
아르테미스는 범려의 부름에 제대로 응답을 못한 게 미안했는지 사과했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 알고 있었기에 범려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것보다 해골들 몇 녀석이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어머나! 병사들이 승급할 시기가 찾아왔네요."
"승급?"
범려는 아르테미스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법사 이후로 해골들에게 특별한 변화가 없어서 심심했는데, 퀘스트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범려 님, 병사들의 승급 시험을 치르실 겁니까?"
"물론입니다."
-신성한 시련
해골 병사들이 승급을 하기 위한 시련이 주어졌습니다. 그 시련을 이겨 내고 자격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난이도:B
완료 조건:승급 대상 해골 병사들과 함께 시련을 극복하라.
보상:아르테미스의 손길
"아르테미스의 손길?"
범려는 퀘스트 보상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보상은 언제나 물질이거나 혹은 명성처럼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었는데, 이건 뭔가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손길이라……. 조금 수상하기는 하지만, 난이도를 생각했을 때 절대로 나쁜 보상은 아닐 텐데 말이야."
"범려 님, 시련을 치를 준비가 되셨나요?"
"네, 준비됐습니다."
"그럼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헉!"
충무공호 전체를 감싸는 빛이 생기더니 배가 감쪽같이 바다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번쩍!
"어머나! 여기가 어디야?"
충무공호와 같이 끌려온 로즈와 취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봤지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설마……."
범려는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는 영혼의 세계를 보면서 이곳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이곳은 영혼의 바다. 죽은 자들이 스스로 천국을 향해 모험을 하는 곳이지요."
"그럼 이곳이 영혼의 세계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아르테미스는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지만 범려는 지금 상황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젠장, 영혼의 세계의 최대 난적은 아르테미스의 해골 병사들인데, 설마 그들과 싸우라는 것은 아니겠지?'
범려는 경험상 영혼의 세계에 있는 해골 병사들은 피하고 싶었다. 그들과 싸운다면 필패(必敗)라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범려 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아니요. 그냥 잠시……."
말끝을 흐리던 범려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영혼의 세계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 님, 그런데 시련은 어떤 것인가요?"
"글쎄요. 범려 님에게는 힘든 하루가 될 수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옥 같은 하루가 된다고 해야 할지."
'힘든' 그리고 '지옥 같은'이라는 말을 듣자 범려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져 갔다.
"그럼 범려 님과 승급 대상이 되는 해골들만 따로 이동시켜 드리겠습니다."
"네? 아니, 잠……."
뭐라고 이야기할 틈도 없이 범려는 승급 대상이 되는 해골 병사들과 같이 사라져 버렸다.
"범려야!"
로즈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범려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아르테미스 같은 NPC에게 유저를 어디로 훌쩍 보내버리는 일은 눈 한 번 살짝 깜빡거리는 수준밖에 안 된다.
"헉! 여기는 또 어디야?"
또다시 환경이 바뀌고, 이번에는 같은 영혼의 세계지만 땅바닥에 서 있었다.
"해골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정말 승급 대상이 되는 다섯 해골들만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만 있구나."
그나마 다행은 개마 기병과 망구다이는 해골마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슨 시련을 겪으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무작정 이곳으로 보내지다니."
범려는 살짝 한숨을 내쉬면서 현재의 상황을 재빨리 파악해나갔다.
"좋아, 일단 핵심이 되는 녀석들이 있고 단순한 전투에서는 쉽게 밀릴 일이 없어. 그렇다면 단순 전투는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다는 소리인데."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딱히 정답이 될 만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와아! 북부 녀석들을 물리쳐라!"
"남부 녀석들이 쳐들어온다! 박살내버려라!"
순간, 좌우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범려는 깜짝 놀랐다.
수많은 영혼들이 무기를 들고 상대방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얘들아, 도망쳐!"
언뜻 보아도 서로를 향해 달려오는 병사들은 최소 수천에 해당하는 병력들이었다. 그런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으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정도가 아니라 몸뚱이가 짓이겨진다.
황급히 해골 병사들과 같이 자리를 피한 범려는 곧 수많은 영혼들이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야, 영혼들이 싸우고 있는 모습은 정말 대단해. 나 혼자 보는 게 아까울 정도야."
범려는 영혼들이 싸우는 전투가 너무 멋져서 자신도 모르게 푹 빠져 있었다.
"북부 녀석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남부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영혼들이 싸우는 모습은 화려하고 대단했지만, 정작 칼로 찌르고 베어 넘기는 와중에도 영혼들은 소멸되지 않고 영혼의 구슬이 되어 땅바닥을 굴러다녔다.
"헛, 영혼의 구슬들이."
바닥에 굴러다는 것들만 해도 해골 병사들 수천은 양성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였다.
"흐흐, 내가 해골 병사들을 더 만들 수 있다면 저 굴러다니는 영혼들은 다 내 것이 되는데."
알게 모르게 영혼의 구슬에 욕심을 부리는 범려였지만, 별로 의미가 없는 욕심이었다.
전투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서로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자 영혼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구슬을 주어라!"
"한 놈이라도 더 많은 구슬을 주어라!"
한창 전투를 하던 영혼들이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영혼의 구슬을 줍느라 분주하게 움직이자 당황했다.
"뭐야? 이것들, 싸우다 말고 구슬은 왜 주워?"
전투의 열기가 급격하게 식으면서 영혼들은 구슬을 한 아름 집어 들더니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망을 치네."
영혼들의 그런 일련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던 범려는 이들의 전투에 뭔가 숨겨진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다.
"뭔가 있구나."
범려는 조심스럽게 양측의 영혼들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을 하더니 먼저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시각, 로즈와 취선은 배 위에서 아르테미스와 같이 범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범려가 언제 올까?"
"글쎄, 아마 오늘 안으로 돌아오기는 힘들 것 같은데. 그나저나 우리를 이렇게 잡아뒀으면 뭔가 보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유저를 아무 짓도 못하게 묶어두다니 말이야!"
취선은 일부러 아르테미스가 듣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테미스가 그의 말에 반응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두 분에게 너무 폐를 끼쳤네요."
아르테미스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하는데도 취선과 로즈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두 분에게 각자 2만 골드씩 드리겠어요. 보상이 너무 짜다고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헉!"
자신들의 인벤토리에 2만 골드라는 거금이 척 하고 들어오자, 두 사람은 얼굴에 화색을 띠면서 입을 열었다.
"범려 형님 기다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안 그래, 누나?"
"음, 조금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야."
범려를 따라다니면 개같이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지 않는 보상이 뒤따르곤 했기에 그들은 기분이 좋았다.
"형님을 따라다니면 뭔가 꼭 하나가 생겨서 좋아."
"그러게 말이야."
"누나, 그런데 지금 방송국 가야 할 시간 아니야?"
"아! 방송국 스케줄 있었지!"
로즈는 방송국 스케줄 때문에 황급히 자리를 비웠고, 취선은 혼자 있기 뭐해서 그대로 로그아웃을 했다.
* * *
"이것들 어디까지 가는 거야."
범려는 북으로 이동하는 영혼들을 따라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짐작이 안 갈 정도로 북으로 계속 가는 것이었다.
"멈춰라!"
그렇게 한참 길을 가다가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손을 들며 소리치자 병사들이 발길을 멈추었다.
"나와라!"
곧이어 대장 영혼이 큰 소리로 외치자 허허벌판에 갑자기 거대한 문이 생기더니 열렸고, 그 모습에 범려의 눈은 커질 대로 커졌다.
"이럴 수가! 저 영혼들, 정체가 뭐지?"
영혼들이 거대한 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자, 범려는 해골들에게 신호를 보내 조심스럽게 거대한 문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영혼들이 다 들어가는구나."
영혼들이 거의 다 들어간 뒤 문이 닫히려는 기미가 보이자 범려는 해골마를 달리기 시작했고, 해골들도 그 뒤를 따랐다.
보병들은 이미 해골마 갈비뼈 안으로 들어가 있어서 따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끼이익-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닫히자 언제 있었냐는 듯 거대한 문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주위는 다시 허허벌판이 되었다.
"휴, 겨우 들어왔네."
범려는 완전히 닫히기 전 간발의 차로 그 거대한 문을 넘었다. 워낙 아슬아슬하게 들어와서 그런지 유령 중에 범려의 존재를 눈치 챈 녀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들오는 데 성공."
들어오는 데 성공하자, 주변으로 바깥세상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환영으로 만들어진 흐릿한 건물들, 반투명한 영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 그리고 바깥에서 범려가 보았던 영혼의 군대.
"약간 흐릿한 것들이지만 한번 구경해볼까."
"누구냐!"
"……."
범려가 막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갑자기 유령들이 병장기를 들고 나타나더니 소리쳤다.
"어쩐지 너무 쉽게 들여보내준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