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다시 영혼의 세계로
범려가 병사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끌려온 지도 벌써 3일이 지났다. 같이 끌려온 해골들도 범려와 같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간수!"
"뭐냐, 인간."
"거참 또 인간, 인간해댄다. 당신 살아 있을 때 사람 아니었어? 한때 같은 사람끼리 너무 섭섭하게 굴지 말지?"
"흥! 난 살아 있을 때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 난 신의 자손이다!"
"참 나, 그렇게 따지면 난 환웅의 아들 단군의 자손이거든! 환웅은 신이었고. 지금 나랑 장난해?"
범려는 간수를 부를 때마다 매번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놈끼리 너무 그러지 말자. 그리고 물 좀 가져다줘. 이놈들이야 해골이라 안 마셔도 되지만, 난 목마르거든."
범려는 솔직히 물을 굳이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간수와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해서 뭔가 하나라도 얻고 싶은 마음에 자꾸 먹을 것이나 물 좀 달라면서 계속 말을 붙였다.
"물 없다!"
"허허… 이봐, 간수, 난 살아 있는 인간이야. 먹고 마실 필요가 없는 영혼이 아니라고. 그러니 내가 잘못했어. 물 좀 갖다줘."
범려가 살살 구슬리자 간수는 투덜거리며 자리를 비우더니 대접에 물을 한가득 담아가지고 왔다.
"역시 간수밖에 없다니까."
"흥!"
토라지는 모습은 살짝 재수가 없었지만, 범려는 그것보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젠장, 3일째 이곳에 갇혀 있어서 퀘스트 진행도 못하고 있으니 큰일이군. 이거 탈옥을 해야 하나?'
"흠… 이를 어쩐다."
"이봐, 인간, 나 심심하다. 놀자."
"어? 간수 심심해?"
지금까지 공을 들여 친분을 쌓아놓은 효과가 발휘되자 범려의 표정이 180도 바뀌었다.
"하하하! 그래, 뭐 하고 놀까?"
"이거 하자."
간수가 손을 내밀어 보여 준 것은 공기였다.
"아, 이걸 가지고 놀자고?"
범려는 겉으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후후후, 어릴 적 공기의 제왕으로 불린 나에게 공기놀이를 하자고 하다니. 간수가 나를 너무 만만히 봤구나.'
범려는 간수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이걸 그냥 하면 재미가 떨어지니, 뭐 하나 내기를 걸고 하면 안 될까?"
"그러자, 인간. 인간은 뭘 걸 건가?"
"나는 이걸 걸지."
범려는 품속에서 정령석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간수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간수, 내가 지면 이 돌을 주고, 내가 이기면 원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나 들을 수 있을까?"
"좋아, 그렇게 하지."
내기가 성립되자 둘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후후후… 오랜만에 나의 비기를 보여 줄 순간이 찾아왔도다.'
범려는 가볍게 오른손을 풀더니 매서운 눈초리로 간수를 바라봤다.
"간수가 먼저 하지."
"인간, 저 반짝이는 돌은 내 거다."
간수는 정령석에 시선을 둔 채 공기를 던지며 게임을 시작했다. 먼저 하나 집기를 하자 그건 가볍게 넘어가고, 2개씩 집는 것부터는 살짝 흔들리더니 겨우겨우 넘어갔다.
"후후후, 그런 실력을 가지고 나에게 도전을 하다니."
범려는 살짝 비웃으면서 간수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크윽!"
"어, 못 집었어."
간수는 범려의 간악한 비웃음 소리에 실수를 하자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흥! 인간, 넌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다."
"아이고, 그러십니까."
범려가 또다시 역으로 놀려 주자 간수는 더욱 분개했지만, 어차피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실수한 사람이 잘못이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범려는 공기를 조물하며 옛 감각을 되살려 보았다.
"비기! 절묘한 공기 던지기!"
다년간의 연구 끝에 일정한 힘과 각도로 공기를 던져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놓게 만드는 범려만의 비기였다.
'후후후, 어릴 적 이걸로 공기놀이를 휩쓸었던 나다!'
정확한 위치에 공기가 멈추자 범려는 빠르게 손을 뻗어 공기를 던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하나 집기를 끝내고 그다음 둘 집기, 셋 집기를 하더니 마지막 넷을 넘기고 꺾기를 넘어 완벽한 공기놀이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크윽, 묻고 싶은 게 뭐냐."
"얼마 전 영혼들끼리 북부군과 남부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 같던데, 왜 같은 영혼끼리 싸우는 거지?"
"그건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나라? 그 나라는 왜 만들려는 거지?"
"질문 끝! 놀이를 계속하자."
간수는 진 것이 억울했는지 마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공기를 집었다.
"내기 조건은 전과 동일하게 해도 되겠지?"
"물론."
내기 공기놀이는 다시 시작됐고, 결과는 당연히 범려의 승리였다.
"나라는 왜 만들려는 거지?"
"이곳을 중심으로 영혼의 세계를 점령하기 위해서다."
"점령? 이곳을 점령한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공기를 계속하자."
범려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녀석을 공기놀이로 이겨 궁금증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점령하면 어떤 이득이 생기지?"
"영혼의 세계에 영혼들의 힘을 모아 해골 군단을 물리치고 이곳에 신으로 군림할 생각이지."
신으로 군림한다는 말에 범려는 살짝 인상이 굳어졌다.
'신으로 군림한다는 것은 아르테미스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영혼의 세계에서 절대자로 취급받는 아르테미스에게 이들은 참 골치 아픈 존재일 것이다.
'영혼의 세계에서 영혼의 천사인 아르테미스에게 왜 반기를 들지? 아르테미스는 평화를 지향하는 천사인데.'
범려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기자 다시 공기를 집었다.
"계속하지."
간수는 말없이 공기놀이를 했고, 여전히 승자는 범려였다.
"이곳에는 영혼의 천사가 있어서 평화롭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녀의 힘이 대단해 이곳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힘은 영혼의 세계의 크기에 비하면 부족하다."
범려는 간수의 말을 듣고 내심 놀랐다.
아르테미스의 위치는 『판게아 월드』의 아홉 수호룡보다 높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부족하다면 답은 하나다.
'이 세계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다는 소리!'
간수의 말을 듣고 보니 이들이 딴생각을 품을 만했다. 지배자의 힘이 미치지 않으면 당연히 그곳의 왕이 되어 반기를 들 것이 분명하니까.
'왜 아르테미스가 날 이곳에 보냈는지 알겠군.'
아르테미스는 해골들의 승급 시험과 동시에 이들을 제압해 영혼의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가지 더 해도 될까?"
"공기 한 판 더!"
범려는 살짝 인상을 쓰더니 다시 공기를 쥐었고, 가볍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영혼들이 싸우다 보면 갑자기 영혼의 구슬로 바뀌던데, 그 구슬은 뭐 하는 데 쓰려는 거지?"
"영혼의 구슬은 우리의 힘이자 병사들이다. 그 구슬을 가지고 이곳의 지도자이신 엘튼 님에게 지배받기 위해서다."
지배라는 말에 범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간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뭐, 뭔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는가?"
"혹시?"
범려는 갑자기 손을 뻗어 간수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화살을 꺼내 목젖을 따버렸다.
"끄억……."
간수의 몸이 힘없이 무너지면서, 작은 영혼의 구슬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역시 영혼의 구슬로 변했어. 그렇다면 내가 이걸 되살릴 수도 있다는 건데."
범려는 영혼의 구슬을 집더니 이 영혼을 어떻게 부활시켜야 할지 생각에 빠져 들었다.
"혹시 회색의 빛?"
순간 범려의 손에서 회색의 빛 스킬이 시전되자 번쩍이는 빛이 감옥을 감쌌다. 그리고 영혼의 구슬로 변했던 간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씨익!
"이거였군."
북부군와 남부군이 싸움을 하다 말고 도중에 왜 구슬을 집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들의 군대를 회수하고, 상대방보다 구슬을 더 많이 집어서 병사의 숫자를 늘리려 한 것이다.
"넌 이제부터 감옥의 간수로 활동해라. 내가 차후에 명령을 내릴 때까지 저들을 속여야 한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범려는 이제 이 퀘스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판단이 섰다.
"우선 이 감옥을 접수해야겠지."
간수를 이용해 감옥에 있던 녀석들을 차례차례 영혼의 구슬로 바꾸고 다시 살리기를 반복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곳은 범려의 소굴이 되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같이 온 해골들 또한 범려와 비슷하게 영혼의 구슬을 자신의 휘하로 부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흐음, 해골 병사들이 휘하의 영혼들을 부리는 건 아무래도 퀘스트 때문이겠지?"
그 후 해골들과 영혼들이 합심해서 이 북부에 있는 영혼들을 야금야금 차지하더니, 어느새 이곳의 절반을 차지하고 말았다.
범려는 여전히 감옥 안에서 나가지 않고, 해골들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확인하고 보고만 받았다.
"얘들아, 영혼들에게 말했지? 평상시와 똑같이 지내라고."
<물론입니다, 범려 님.>
해골 병사는 바닥에 글을 써내려 가며 범려의 명령에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해골의 보고에 사악한 미소를 지은 범려는 이대로 영혼들을 지배해나가라고 명령했다.
"이대로 가라. 이곳의 영혼들을 70퍼센트 차지할 때까지."
<알겠습니다.>
해골들은 범려의 명령대로 영혼들을 급속도로 차지하며 자신들의 휘하에 넣기 시작하더니,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영혼들의 80퍼센트까지 지배해버렸다.
"후, 예상외의 성과인데? 80퍼센트나 지배하다니. 너희들, 능력이 보통이 아니야."
범려가 너무나 좋은 성과를 거둔 해골들을 칭찬하자, 그들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좋아했다.
<범려 님, 한 가지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뭐냐?"
<영혼들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엘튼의 심복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심복을 잡았다고? 데려와 봐."
범려는 영혼의 밧줄에 꽁꽁 묶여서 오는 녀석을 하나 보더니 미소 지었다.
"네가 엘튼의 심복이라는 녀석이냐?"
"흥! 어서 날 풀어주어라.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
"웃기는 소리 하시네."
범려는 섬전의 창을 꺼내 녀석의 머리에 쑤셔 박아 녀석을 영혼의 구슬로 바꿔버렸다.
"회색의 빛!"
그의 외침에 번쩍이는 빛이 발하더니 그 심복이라는 작자가 다시 살아나면서 범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역시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이 죽여 놓고 부활시키면 간단하지."
범려는 창을 집어넣더니 그 심복이라는 작자에게 말했다.
"네 이름은 관심 없다. 이전처럼만 행동해라. 그리고 엘튼이라는 자의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엘튼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녀석의 가슴에 검을 꽂아라."
"예!"
"이제 가서 엘튼 옆에서 충실히 보좌해라. 내가 그곳에 갈 때까지 말이다."
엘튼의 심복은 범려의 말대로 평상시대로 행동하면서 나가버렸다.
"예상보다 일의 진척이 빠르네. 혼자와 녀석들이 있는 차이인가."
지금까지 범려는 혼자서 해골들을 다루어왔지만, 이번에는 해골들의 도움을 받아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속도로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다들 내일 엘튼이 있는 곳으로 간다. 가서 녀석이 있는 성을 점령하고 녀석을 내 휘하에 둔다. 알겠지?"
"네!"
수많은 영혼들이 대답하자 범려는 뿌듯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 기대되는군.'
시간은 흘러 아침이 되자, 범려는 영혼들을 이끌고 엘튼이 살고 있는 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
"와아-!"
영혼의 숫자가 너무나 압도적이다 보니 순식간에 성벽을 장악해버렸다.
전투가 벌어진 지 20분도 안 돼서 성문이 열리고 영혼의 구슬은 3분도 되지 않아 범려의 앞에 놓여졌다.
"회색의 빛!"
구슬로 변했던 녀석들이 다시 부활하더니 일제히 범려에게 고개를 숙이며 '주인님'이라고 외쳤다.
"엘튼을 잡으러 간다."
범려는 단 한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영혼들은 엘튼을 향해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분노를 표출했다.
"다 쓸어버려!"
성문이 열린 이상, 성안을 점령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엘튼이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나? 해골 제작자."
"그게 뭐냐!"
"아, 이렇게 말하면 NPC들은 못 알아먹지? 회색의 전승자라고 하면 알아먹나?"
"뭐, 뭐라! 회, 회색의 전승자! 아르테미스 님의……."
회색의 전승자라는 말에 엘튼의 얼굴이 사색이 되면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갈몬! 녀석을 처단해라!"
"처단당해야 할 녀석은 너다!"
푸욱!
북부군을 지배하는 엘튼은 자신의 심복에게 범려를 처단하라 외쳤지만, 심복의 검은 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네, 네놈이……."
"범려 님의 뜻에 따라 엘튼 너를 처단한다."
푸욱!
그렇게 믿고 있던 심복에 의해 가슴이 뚫려 엘튼은 영혼의 구슬로 변하고 말았다.
"이야, 뒤에서 조종하는 것도 재미있네."
비록 해골들을 통해서 한 짓이지만, 뒤에서 악당처럼 움직이는 것도 상당한 재미를 충족시켜 주었다.
엘튼의 영혼과 다른 이들의 영혼을 부활시키자 북부의 영혼들은 모두 범려의 앞에 부복했다.
"후, 남부 녀석들만 처치하면 이제 끝이라 이거지?"
전에도 남부군과 싸우는 모습을 봤지만, 힘만으로 밀어붙인다면 서로가 호각이라서 시간만 질질 끌지 녀석들을 완벽히 없애버릴 수가 없을 터였다.
"힘이 호각이라면 남은 건 머리가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군. 얘들아, 모여 봐."
범려는 처음으로 다섯 해골들을 앞으로 불러 모았다.
"이번 싸움을 할 때 너희들의 머리가 필요하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나."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해골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건다는 말을 하자 범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난 너희들과 같이 지내고 싶지, 나 혼자 살겠다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목숨을 거네 마네 하는 소리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게임을 하면서 매일 느끼는 거지만, 범려는 해골들이 죽는 게 제일 두려웠다.
이들은 한 번 죽으면 그걸로 끝인 존재들이다. 다시 키울 수는 있어도 자신과 함께했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난 퀘스트를 성공해야 하거든. 너희들이 죽으면 실패야. 그러니 퀘스트 성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야 한다. 알겠냐?"
<네!>
"엘튼인가 알톤인가 하는 녀석, 앞으로 나와."
범려는 엘튼을 불러 해골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만들었다.
"엘튼, 그동안 녀석들과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은 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남부군과 전투를 70번이나 해왔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엘튼은 범려에게 지금까지 남부군이 어떤 전술을 사용했는지, 그리고 허를 찔렸던 자신들의 전술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생각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싸우고 있었네."
영혼들은 기본적으로 진형을 갖추어 싸우는 형태의 전법은 무조건 구사하고 있었고, 상황에 따라 그 진형도 변했다.
"현재 저들이 사용하는 진형의 개수는 5개가 되며, 그걸 변형한다면 적어도 13개 이상의 진형을 만들게 됩니다."
"음, 일반적으로 맞붙어 싸우는 방법으로 승리할 가능성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소리군."
범려가 지금까지 해골들을 계속 다루어오면서 진형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두세 개 정도의 진형은 지휘를 통해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5개가 넘어간다면 주변에서 도와주는 녀석들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계략에 빠트리는 방법인데, 몰래 잠입해서 녀석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고."
영혼들은 누구의 지배에 속하게 되면 그에게 절대적 충성을 보이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는 짓은 소용없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잠입하는 것은 어떨까요?>
개마 기병이 바닥에 글을 쓰며 한 가지 제안을 했지만, 범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방법도 나쁘지는 않지만, 만약 남부군이 잡은 포로들을 가차 없이 처형해버린다면 어쩌겠어? 북부야 운 좋게 감옥에 가두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범려는 또다시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최대한 안전하고 확실한 전략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럼, 부대를 6개로 나누어 활동하는 것은 어떨까요?>
"너희들이 한번 해보겠다는 거냐?"
망구다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범려는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좋아, 부대를 6개로 나누고 각 부대의 지휘는 너희들이 맡아라. 물론 내 계획대로 움직여 줘야 한다."
<물론입니다.>
"작전명은 '사자가 물소를 사냥하는 법'이다."
범려는 이후 해골들과 어떤 식으로 부대를 움직일지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는 해골 병사들을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6개로 편성해 철저한 연계를 통한 공격을 펼칠 계획이었다.
"3번 부대, 더 빠르게 움직여라!"
범려는 6개로 나뉜 부대를 자신의 손발처럼 써먹기 위해 지독하게 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지휘관으로 임명된 해골들은 범려의 눈빛만 봐도 다음 행동이 무엇인지 알기에 잘 따라주고는 있었다. 다만, 해골들은 지휘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서 군대를 통솔하는 데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야, 2번 부대! 거북이 기어가냐? 왜 이렇게 느려!"
범려의 지독한 독설에 해골 병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진격과 후퇴가 물 흐르듯 흘러가지 않으면 각개격파당한다. 명심해!"
영혼의 군대는 땀을 흘린다거나 체력이 지칠 일이 없기에 범려의 체력만 받쳐 준다면 계속 훈련이 가능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이틀 만에 완전한 6개의 군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가자! 남부군을 쓸어버리자!"
"와아-!"
범려는 북부군을 이끌고 먼저 전쟁터로 움직여 남부군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기다리게 되었다.
"북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야! 그 빌어먹을 북부 잡종 녀석들이 온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본때를 보여 주마. 당장 군대를 출정시켜라."
"예!"
남부군은 북부군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 바로 군대 소집령을 내리더니, 북부군을 맞상대하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쯤 해서 남부군이 몰려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범려는 북부군이 남부로 몰려간다고 할 때 일부러 소리를 치며 군대를 진군시켰다. 이번 작전은 공성전으로 돌입하면 말짱 헛일이 되고, 평지에서 싸우는 것도 잘하지 못하면 군대를 다 잃어버린다.
"남부군이다!"
남부군을 발견하자 범려는 크게 소리치며, 그들이 작전대로 걸려들기만을 바랐다.
"작전대로 움직여라!"
북부군의 6개 부대 중 하나는 범려가 맡았다.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 활을 꺼내라!"
범려는 활을 꺼내더니 남부군을 향해 화살을 하나 발사했다. 그 뒤를 따라 영혼들 역시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녀석들이 화살을 쏜다! 우리도 쏴라!"
남부군도 맞대응을 하기 위해 화살을 쏘려는 순간 범려가 외쳤다.
"방패!"
그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방패가 하늘을 향해 자세를 잡더니, 일순간 거대한 방패가 완성되어 남부군의 화살을 모조리 막아내버렸다.
"클클클, 이 정도 대응은 기본적으로 해줘야지."
북부군이 그 짧은 순간에 대응하는 것을 보고 남부군은 깜짝 놀랐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공격!"
남부군은 첫 번째 목표로 범려가 지휘하는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후퇴!"
범려의 명령에 맹렬히 공격을 펼치던 행동이 뚝 그치면서 수챗구멍에 물 빠지듯이 병사들이 주르륵 빠져나갔다. 그러자 옆에서 기회만 엿보고 있던 3번, 5번 부대가 동시에 남부군의 뒤를 쳐 버렸다.
"으악!"
"뭐냐!"
"뒤, 뒤에 적군이!"
"헉! 언제 녀석들이……."
범려 군대를 상대하는 사이 다른 부대들이 이미 자신들을 중심으로 넓게 포위진을 형성하자, 꼼짝없이 갇혀 죽게 될 판국이었다.
"원형진을 만들어라!"
"적들이 원형진을 만든다!"
상대방은 진형을 만들려고 틀을 잡았고, 범려는 가차 없이 병사들을 돌진시켜서 틈을 흩트리고 있었다.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상관없다! 원형진을 완성하지 못하면 다 죽는다!"
일부 병사들을 잃는다고 해도 지금은 진형을 완성하는 게 급선무인 남부군이었다.
"포위해라!"
남부군이 병사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원형진을 완성하자, 범려는 무리하게 녀석들을 뚫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포위를 뚫으려고 하면 그냥 뚫려 줘. 괜히 막는다고 설쳐 댔다간 오히려 당한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듯이, 적군을 너무 몰아세우면 죽기 살기로 싸워 양패구상이 되기에 범려는 일부러 길을 내주었다.
"녀석들의 포위가 허술하다! 뚫어라!"
한쪽 길만이 열려 있는 상태라 남부군이 그곳으로 달려 나가자 범려는 크게 소리쳤다.
"녀석들의 뒤를 쳐라!"
꼬리를 밟는 것은 상대를 굉장히 아프게 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병법이다.
"크악!"
"살려……."
범려가 양손을 이용해 뺨을 번갈아 후려치듯이 남부군을 두들기자, 병력이 크게 감소하고 말았다.
"진형을 유지해라! 진형을 유지해라!"
"6번 부대는 나와 같이 상대의 허리를 친다!"
범려는 포위하는 척하면 풀고, 풀린 척하면 다시 포위했다.
사자가 물소를 사냥하는 것처럼 앞에서 한 사자가 공격을 하다가 물소가 달려들면 물러나는 척하지만, 다른 사자가 옆에서 달려들면서 물소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범려는 6마리의 사자를 이용해 커다란 물소를 사냥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소가 쓰러질 때가 됐는데."
그 말대로 남부군은 병력의 감소가 심해지자 영혼의 구술을 챙기고 후퇴를 하려고 했지만, 범려가 그 꼴을 가만히 볼 인간이 아니다.
"녀석들이 구슬을 집지 못하게 막아라!"
구슬을 집으려고 손을 뻗던 남부군은 여지없이 북부군의 공격을 받아 영혼의 구슬로 바뀌고 말았다.
"이런,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이구나!"
"당연한 소리를 지껄이는구먼."
상처 입은 물소는 성나 있어 쉽게 건드릴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상처는 물소의 힘을 빼앗게 되니 사자는 물소가 쓰러지기만을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어디 한번 느긋하게 기다려 볼까!"
남부군은 이대로 도망을 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바닥에 널려 있는 영혼의 구슬을 포기해야 한다.
범려는 저들이 영혼의 구슬을 포기하게만 하면 된다. 저들은 다시 북부군이 되어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클클클, 도망가 보려면 가봐라. 넌 여기서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도망을 못 갈 테니까."
남부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6마리의 사자들은 물소를 살살 건들이며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판사판이다! 돌격!"
남부군이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자, 그걸 본 범려는 가볍게 웃어주면서 외쳤다.
"마지막 발악이다! 상대해줘라!"
그러자 6개의 부대가 동시에 덮쳐들더니 남부군을 한꺼번에 쓸어버렸다.
"구슬들을 전부 다 내 앞으로 가져와라."
영혼들은 구슬을 가져왔고, 범려는 수천 개의 구슬을 목도하게 되었다.
"정말 많다. 이 많은 구슬들이 다 영혼들이며, 내 해골들의 생명의 원천이란 말이지?"
지금은 병사 수가 제한에 걸려서 더 많은 병사들을 양성하지 못하지만, 이런 영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회색의 빛!"
범려가 손을 뻗어 스킬을 시전하자 그 많은 영혼들이 동시에 부활을 하더니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인님!"
"하하하!"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아주 반가운 음성과 함께 또 다른 메시지가 들려왔다.
-아르테미스의 손길을 배우셨습니다.
하늘에서 아르테미스가 나타나 축복의 빛을 뿌립니다. 모든 형태의 능력치, 공격력과 방어력이 40% 상승합니다. 모든 마법 저항이 20% 증가합니다. 모든 무기에 성 속성이 부여됩니다.
주변의 모든 아군들에게 적용됩니다.
마나 소모:2,000 유지 시간 :1시간
"헉! 버프 스킬?"
범려가 받은 스킬은 버프 스킬로 그 어떤 유저도 이런 버프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내용만 따져도 이건 최강의 사기 스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 한번 스킬을 시전해볼까."
범려는 떨리는 음성으로 크게 외쳤다.
"아르테미스의 손길!"
우르릉!
하늘에서 갑자기 하얀 구름들이 생겨나더니 허리케인이라도 일어나려는 듯이 몰려들어 그 가운데에 신성한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2날개를 가친 천사 아르테미스가 휘황찬란하게 등장했다.
"그대들에게 축복을……."
아르테미스의 온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아래에 있는 영혼들과 해골들, 그리고 범려에게 내렸다.
-모든 무기에 성 속성이 부여됩니다.
-모든 형태의 능력치, 공격력과 방어력이 40% 상승합니다.
-모든 마법 저항이 20% 상승합니다.
"이런……."
버프를 내린 뒤 아르테미스는 사라지고, 엄청난 버프를 받은 영혼들과 해골들만이 존재했다.
"허허허, 웃음밖에 안 나오네."
"아, 몸이 날아갈 것 같아."
"하늘이 나를 부르는구나."
"어라? 영혼들이……."
퀘스트가 완료되자 영혼들은 범려의 속박에서 풀려나 하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몇몇은 땅속으로 사라졌다.
"아, 퀘스트가 완료되면 천국과 지옥으로 알아서 돌아가 버리는구나."
모든 영혼들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해골 다섯과 범려뿐이었다.
"영혼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돌아갈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범려가 고개를 돌려 보니 아르테미스가 서 있었다.
"일이 끝나지 않았다니, 그럼 뭐가 남았다는 건가요?"
"그들을 설득해주세요."
"네?"
무슨 일이 남았냐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들을 설득해달라는 애매한 대답뿐이었다. 그리고 퀘스트 하나가 떠올랐다.
-무장(武將)
영혼의 세계에서 가장 고집불통이며, 앞뒤 꽉 막힌 구제 불능의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집념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난이도:B+
완료 조건: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떠나보내라.
보상:영혼의 융합
"처음에는 승급 시험이라더니……."
처음에는 시련을 준다고 하더니 버프 스킬 하나 주면서 이제 다른 일을 시키는 것이다.
"보상이 영혼의 융합이라. 스킬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원래는 이게 해골들의 변화에 더 가깝겠군."
첫 시험은 가벼운 운동 수준이었고, 이번이 본 시험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저쪽 방향으로 해골마를 타고 쭉 가시면, 폐허가 된 도시에 도착하실 거예요."
아르테미스가 가리킨 방향을 망원경으로 봤지만 범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얘들아, 그냥 가자. 가다 보면 뭐가 나오겠지."
범려의 명령이 떨어지자 보병들과 마법사는 순식간에 자신들의 몸을 압축시켜 해골마 갈비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폐허가 된 도시가 나올 때까지 무한 질주다!"
다그닥! 다그닥!
범려는 해골마를 미친 듯이 몰면서 저 앞을 향해 똑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겨우 5명밖에 없는 해골들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회의도 들었지만, 그들의 머리는 다섯이다. 하나의 머리에서 나오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것들이 뭉치면 달라진다.
"아, 그러고 보니 취선과 로즈는 계속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범려는 로즈 남매가 생각났지만, 그들은 이미 게임은 잠시 접어두고 현실 세계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뭐, 나 없다고 쩔쩔매는 사람들은 아니니 괜찮겠지."
역시나 그 둘을 잘 알고 있는 범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