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뱀파이어와의 협상
"다 만들었다!"
범려는 며칠 동안 해골들을 제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해골 부장의 숫자는 확실하게 늘려 주었다.
그 탓에 해골 병사들의 숫자가 좀 줄기는 했지만 별다른 문제점은 없었다.
"후후후, 해골 부장의 숫자를 최대 수치까지 늘렸다."
-속박(중급 90.98%)
해골 제작자에게 병사들을 소유하고, 그들을 부릴 수 있게 만듭니다. 대신 제한된 숫자를 넘어서면 병사들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해골 병사 숫자 784/2,150
기병 130/210
마법사 40/40
부장 30/30
대마법사 4/?
부장을 만드는 데 소비한 해골 병사들만 해도 어마어마했고, 마법사를 만드느라 며칠이 걸렸지만 끝내 만들어냈다.
대마법사도 만들까 했지만 해골 마법사들의 눈에서 녹색 빛이 비치는 녀석이 나오지 않아 만들지 못했다.
"음, 병력이 줄었어. 이걸로는 흑마법사들이 있는 마탑 공략이 불가능해."
흑마법사들은 아직도 1만이 넘는 언데드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그에 걸맞게 데스나이트들도 많이 있었다. 전쟁을 통해 그 숫자를 좀 줄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였다.
"에구, 일단 해골 병사들의 숫자를 늘리면서 생각하자."
하지만 병사들의 숫자를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마법사들과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아니니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범려는 나름대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루이, 흑마법사들이 있는 탑의 위치를 알아내라. 그리고 그 탑을 발견하면 1시간 간격으로 보고를 해다오."
"네, 주인님."
루이는 바로 쥐들을 불러와 그대로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은 쥐들은 각자 흩어졌다.
"쥐들이 정보를 수집해오려면 시간이 걸리니 잠시 대마법사들이랑 놀아볼까?"
범려는 해골 대마법사들을 불렀다.
"혹시 너희도 부장들처럼 대화가 가능하냐?"
"가능합니다."
해골 부장들처럼 거친 목소리가 아닌 상당히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범려는 속으로 흠칫했지만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라 크게 표시가 나지는 않았다.
"부장들처럼 대화가 가능하기는 하군. 다른 건 아니고, 너희가 가지고 있는 마법 중에 좀 궁금한 게 있어서."
"어떤 마법을 말입니까?"
"음, 해골 운석 소환이지."
"이 마법은 딱히 다른 마법과 크게 다른 부분은 없습니다. 운석의 크기가 좀 작다는 것뿐입니다."
"한번 구경해볼 수 있을까?"
해골 대마법사들은 지금 레벨이 그리 높지 않았다. 이전 해골 마법사들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지만 시범을 보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가장 먼저 하늘의 창을 보여 드리지요."
해골 대마법사들 중 한 명이 나서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늘에 떠도는 무한한 마나여, 나의 손끝에 창이 되어 그 힘을 펼치라!"
쉬이익! 쾅!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섬전 같은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어떠십니까? 아직 장군님에게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쁜 마법은 아닙니다."
"너무 빨라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잠시 위를 봐주시겠습니까?"
다른 대마법사가 같은 마법 주문을 외우자 몇 미터 상공에서 마나가 응집되더니 주문이 끝날 때쯤 창의 모양으로 변했고, 모형이 완성되더니 그대로 목표 지점으로 날아갔다.
"음, 좋은 마법이군."
"다음 마법도 보시겠습니까?"
"좋아, 그렇게 하자."
범려의 허락이 떨어지자 해골 대마법사들은 차근차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지막 마법을 선보일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에 선보일 마법은 해골 운석 소환 마법인가?"
"그렇습니다. 한번 보시지요."
"우주를 떠도는 세월의 흔적이여, 나 여기 이곳에서 그 세월의 흔적을 불러낼지니……."
하늘에서 커다란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그 안에서 운석이 떡하니 하나 튀어나왔다.
"어라? 정말 해골 모양의 운석이네."
일명 불타는 해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의 운석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또 하나 나온다."
온전히 하나가 지상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다음 운석이 마법진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3개 연달아서 떨어지는 운석 소환 마법이네."
범려의 예상대로 다른 2개의 운석들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맹렬한 속도로 땅을 향해 날아와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변에 연기를 자욱하게 만들었다.
"이걸 4명이서 연달아 쓴다면……."
생각만 해도 짜릿할 정도로 무서운 마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마법을 혼자 쓰기보다 다른 대마법사들과 연계해서 쓴다면 그 유명한 메테오 샤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마법이야."
"감사합니다."
현재 해골 대마법사들의 평균 레벨은 100 정도로, 전투에 참여할 정도가 못 되는 게 조금 아쉽다.
"레벨이 딱 180만 되면 좋겠는데 말이야."
동급에서는 거의 지존을 먹을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선보인 마법이었지만, 아직 레벨이 낮다 보니 거기에 걸맞은 위력이 안 나왔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의 로브가 좋은 것이 없었네."
그동안 마법사들을 제외한 병사들 중심으로 장비를 맞추는 바람에 마법사들의 장비에 약간 소홀한 감이 있었다.
"음, 흑마법사들을 처리하고 나서 마법사들의 옷을 모조리 강탈해볼까? 으흐흐."
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로브를 모조리 뺏어버릴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즐거운 상상이 되었다.
"주인님, 탑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루이는 종이에 지도를 그려서 탑의 위치와 주변에 어떤 몬스터들이 존재하는지도 상세하게 표시했다.
"엥? 흑마법사 탑 옆에 뱀파이어의 성이 있네?"
흔히 말하는 마족, 혹은 어둠의 자식에서 항상 등장하는 뱀파이어가 그 옆에 성을 하나 세우고 살고 있었다.
"지도상에 나온 성의 크기가 상당한데?"
이 정도 크기의 성이면 어느 한 제국의 수도 수준이었다.
"이거 잘못 건드리면 이놈들도 같이 쏟아져 나온단 건가?"
흑마법사들 뒤에 이런 든든한 배경이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놈의 마법사들, 뱀파이어가 있다는 이야기는 왜 안 한 거야!"
그걸 알았다면 이 퀘스트는 무조건 거절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범려 성격에 한번 시작한 퀘스트를 관두는 짓은 하지 않았다.
"루이, 흑마법사들에 대한 조사는 아직 진행 중이지?"
"네."
"이 옆에 있는 뱀파이어 성에 대한 조사도 좀 해줘."
"알겠습니다."
루이는 명령대로 이행했다.
범려는 해골들을 이끌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며칠 뒤, 계속해서 해골 병사들의 숫자를 늘리고 있는데 로즈 남매와 헬렌이 접속했다.
"자기야, 나 왔어."
"형님!"
"어? 다들 왔네."
범려가 반갑게 이들을 맞이해주었는데, 헬렌은 별말 없이 하늘만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나,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행동이 약간 이상하기는 했지만 저런 행동을 보일 때는 주로 누군가와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누구와 귓속말을 하는 거지?'
여자가 저렇게 미소를 짓는 경우는 뭔가 있다는 소리다.
"음, 수상해."
범려는 일단 헬렌의 뒷사정은 접어두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형님, 아직도 해골 병사를 만드는 거예요?"
"어쩔 수 없다. 이번 퀘스트를 해결하려면 말이다."
"또 퀘스트예요? 이번에는 뭔데요?"
"뱀파이어 성 옆에 있는 흑마법사 퇴치!"
"네?"
범려는 지도를 보여 주며 상황을 설명했고, 그에 다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상당히 힘들겠는데요. 흑마법사들이 뱀파이어랑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너무 커요."
"그래서 루이에게 뱀파이어 성에 가서 정보를 얻어오라고 명령했다."
"기다리면 알아서 루이가 정보를 가져오겠네요."
취선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이다.
대략 2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루이가 뱀파이어 성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다들 그 정보를 보면서 경악했다.
-뱀파이어의 성
주거 인구:순혈 뱀파이어 1,000명, 잡종 뱀파이어 5,000명, 그들의 퍼밀리어 4만 명(퍼밀리어들은 전부 다 비전투 요원들이다.)
성주:아쉔 데 메르치 루그라도(유일한 성혈 뱀파이어다.)
뱀파이어들의 레벨:240±10
추가 사항:흑마법사들과 상당히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임.
상당히 간략한 내용이었지만 흑마법사들의 관계와 저들의 인구수를 보는 순간 범려는 절망에 빠졌다.
"젠장! 난이도 A라더니, 이건 S급 난이도잖아!"
이건 잘못 건드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일단 건드리면 뱀파이어들 출동이었다. 더군다나 뱀파이어들은 전부 다 어둠의 마법을 능숙하게 다루는 일족. 전투를 하면 100퍼센트 지는 게임이었다.
"형님, 진정하세요."
"그, 그래. 진정해야지. 진정하지 않으면 이길 확률이 점점 없어지는 거니까."
범려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좋아. 한판 제대로 붙어보자 이거지? 내가 다 무찔러주마."
범려는 이때부터 병력 차이를 극복할 만한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형님, 차라리 형님이 뱀파이어들의 성에 들어가는 건 어떨까요?"
"엥? 무슨 소리야? 나보고 저 안에 들어가라고?"
"그게 아니라, 형님이 해골 한 명을 데리고 가는 거예요. 뱀파이어들이 흑마법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형님을 흑마법사들의 일원으로 생각할 거 아니에요?"
취선의 말은 생각보다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졌다. 지금의 범려는 해골 하나만 데리고 가도 딱 네크로맨서로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다.
"맞아!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나 거기서 거기니까, 내가 해골 병사 하나를 데리고 간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지."
범려가 자신의 조언에 미소를 짓자 취선도 웃으며 뱀파이어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가닥을 잡아갔다.
"그럼 누구를 데려가지?"
범려는 이 많은 해골들 중에서 누구를 데려가야 할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두 녀석을 지목했다.
"너희 둘 나와라."
범려가 지목한 둘은 해골 부장과 해골 대마법사였다. 이들은 대화가 가능하고 상당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기에 진행을 하다가도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너희 둘은 나와 같이 뱀파이어 성에 들어간다."
"예! 장군님."
"감사합니다, 장군님."
한 녀석은 열의에 찬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가자."
범려가 해골마에 오르자 해골 부장도 해골마에 올랐다. 하지만 대마법사는 멀뚱멀뚱 서 있었다.
"넌 왜 그렇게 서 있는 거냐?"
"저에게도 말을 주십시오."
범려는 그 말을 듣자 잠시 머리가 띵해졌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스스로 몸을 압축해서 해골마의 갈비뼈 안으로 들어가지만 이놈은 아니었다.
"말 탈 줄 아냐?"
"연습하면 됩니다."
"……."
확실히 말하는 녀석과 말 안 하고 입 꾹 다물고 있는 녀석과는 차이가 있었다.
"좋아, 만들어주지."
말에서 내린 범려는 그 자리에서 해골마를 만들어 대마법사에게 주었다.
"받아라."
"감사합니다."
해골 대마법사가 거침없이 말 위에 오르자 그 자리에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다.
-기마술:말을 조종해 두 손을 자유롭게 하여 무기를 손쉽게 다루게 한다. 이동속도가 향상된다. [패시브]
단! 대마법사의 경우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지만 말 위에선 캐스팅이 가능하다.
범려는 왠지 모를 식은땀을 흘리며 다른 대마법사들을 바라봤다. 역시나 다른 녀석들도 해골마를 타고 싶어 하는 눈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젠장. 이것들! 말을 탈 줄 알면 진작 이야기를 해주든가…….'
"다른 대마법사들은 기다려라. 뱀파이어 성에 다녀와서 다 만들어줄 테니, 너무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범려는 적당히 녀석들을 진정시키고 뱀파이어 성이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그렇게 1시간 반 정도를 달리자 거대한 뱀파이어 성을 볼 수 있었다.
"이야, 엄청나게 크네."
제국의 수도를 방어하는 성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물건이니 눈으로 봐도 그 위용이 남달랐다.
"그럼 조용히 들어가 볼까?"
다들 해골마들을 각자의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조용히 걸어서 성문 앞에 도착했다.
"누구냐?"
성문 입구를 지키는 녀석들은 잡종 뱀파이어들이었다.
뱀파이어들은 피로 그 등급이 나뉘는데, 잡종은 말 그대로 잡종이었다. 뱀파이어들이 인간들을 물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뱀파이어들이 이에 속했다.
두 번째로는 순혈 뱀파이어가 있는데, 순수한 피라는 의미의 순혈은 뱀파이어끼리 결혼을 해서 낳은 아이들을 지칭했다.
마지막으로 성혈은 성스러운 피라는 의미다.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귀족으로 대우를 받는 존재이다.
"아하하, 보시다시피……."
범려가 말끝을 살짝 흐리며 뒤에 있는 해골들을 가리키자 경비병들이 알겠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흑마탑에서 나온 사람이군. 들어가라."
신분증 검사도 할 필요가 없는지 간단하게 얼굴만 비치고는 이 험악하다는 뱀파이어의 성에 들어온 것이다.
"음! 성안에 무슨 저택들이 이렇게 많아?"
성안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규모의 저택들이 쭉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저택들이 전부 다 뱀파이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집들이었다.
"이래서 성이 무식하게 큰 거였어."
"어마어마한 집들이군요, 장군님."
해골 부장이 평소대로 목소리를 약간 높여 부르자 범려가 작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부장, 목소리를 줄여라. 여기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알겠습니다."
해골 부장이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그러는 와중에 대마법사가 범려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장군님, 저기를 한번 보시지요."
"응? 저거 시장 아니야?"
"왠지 저쪽에서 신비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대마법사가 이런 말을 하니 뭔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럼 가보자."
시장에 도착한 범려는 주변을 둘러보며 시장에 진열돼 있는 물건들을 보았다. 굉장한 성능을 지닌 아이템의 냄새가 풍겨져 올라왔다.
"여기는 보통 시장이 아닌데."
범려가 곧장 옷가게에 들어가자 가게 주인이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중한 말투로 손님을 맞이한 뱀파이어가 범려에게 다가왔다.
"음?"
뱀파이어는 인간이 자신의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신기하게 바라봤다. 아마도 이곳에는 흑마법사들이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인간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더군다나 저 해골들을 데리고 말이야."
같은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상당히 거만해진 뱀파이어는 사람을 무슨 짐승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이 옷을 좀 보려고 왔습니다."
"그건 인간이 사기에는 좀 비쌀 텐데."
뱀파이어가 비싸다는 말을 하자
'이게 비싸봐야 얼마나 비싸겠어.'
하는 생각에 가격표를 보던 범려는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300,000골드-!'
좀 멋지게 생긴 로브라서 해골 대마법사에게 입히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른 것인데, 가격이 상상 초월이었다.
"인간들이 사기에는 가격이 좀 비싼 편이지. 혹시 살 마음이 있는 건가?"
"음, 사고는 싶지만 비싸군요."
"후후후, 그래도 사고 싶으면 말하게. 돈 대신 다른 걸 받아줄 테니 말이야."
뱀파이어는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범려를 노려보았다.
그에 범려는
'이 자식, 눈깔을 콱 파버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울컥하면 문제가 많아질 것 같아 참았다.
"돈 대신 뭐로 대신한다는 거죠?"
"뱀파이어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잘 생각해봐."
혀로 입술을 살짝 핥으며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어?'
라는 표정을 짓는 뱀파이어였다.
"피?"
"그렇지. 한 모금 빨 때마다 10만 골드씩 해결해주지."
범려는 잠시 심각한 고민에 빠졌지만 뱀파이어에게 그 한 모금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기에 일단 거절했다.
"아니, 됐습니다. 제 피를 팔면서까지 이 물건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 아쉽게 됐어. 그래도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게."
뱀파이어는 범려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맛있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분 더러운데.'
만약 이놈 혼자 여기서 이런 장사를 했다면 범려가 바로 녀석의 심장에 창을 쑤셔 넣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범려는 화를 꾹꾹 누르며 가게를 나서야 했었다.
시장을 좀 더 둘러본 결과, 두 가지 결론이 나왔다.
첫째, 이들은 돈이 많아서 한번 물건을 살 때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며 사간다. 대신 그 물건의 품질은 최고다.
둘째, 이곳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두 가지. 하나는 골드, 다른 하나는 사람의 피다.
피도 그 등급이 있는데, 수많은 피들 중에서 사제의 피를 최고로 쳤다. 신성력이 가득한 피를 마시면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 힘을 어둠으로 바꾸면 자신의 힘이 그대로 상승되기 때문이다.
즉, 로즈같이 사제에 순결한 처녀인 경우 그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범려는 인간을 자신들의 먹이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뱀파이어들의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잘 알 수 있었다.
"장군님, 그래도 이곳에 왔으니 성주를 한번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주? 그놈 코빼기라도 볼 수 있을까? 절대 못 본다. 인간을 먹이로밖에 안 보는 녀석들이 이곳의 성주를 보여 줄까?"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서 생각한 건데, 여기서 장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무슨 장사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당연히 피 장사지."
근처에서 작은 병들을 수십 개 산 범려는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다들 모여 봐."
"무슨 일이야?"
"피 좀 뽑아야겠다."
"피?"
범려가 뱀파이어 성에 들어갔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다들 뭐 씹은 표정이 되더니 상당히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난 안 해."
"형님, 저는 좀 빼주세요."
"자기야, 그건 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각자 30병씩 어서 할당량을 뽑아."
범려는 다짜고짜 병을 들이밀며 피를 뽑으라고 야단이었다.
결국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범려의 말을 들어야 했고, 아무리 애인이라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히잉."
"어디서 우는 소리야? 난 50병 뽑아야 하거든!"
범려는 혼자서 50병을 뽑는다며 피를 뽑기 시작했다. 뽑는 방법은 간단했다. 손목에 단검으로 상처를 내서 피를 받는 것이다.
피가 빠져나가면 생명력도 빠져나간다. 여기서 로즈가 힐을 주면 그 생명력이 가득 차고, 이런 식으로 반복하면 멀쩡한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피를 뽑을 수 있었다.
"자, 자, 뭐 해? 어서 뽑아."
"끙!"
정해진 양대로 피를 뽑자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피를 다 뽑았으면 어서 나한테 줘."
뽑은 피를 범려에게 주자 각자 독특한 메시지가 떴다.
-용맹한 전사의 피 30병을 얻으셨습니다.
-순결한 마법사의 피 30병을 얻으셨습니다.
-순결하고 신성한 사제의 피 30병을 얻으셨습니다.
-건장한 남성의 피 50병을 얻으셨습니다.
"왜 나는 그냥 건장한 남성의 피냐?"
범려의 피는 그냥 건장한 남성의 피고, 다른 이들은 좀 독특한 이름이 붙었다.
피를 들고 다시 뱀파이어들의 성에 들어간 범려는 바로 시장을 찾았다.
"후후후, 이제 피 장사를 시작해볼까?"
일단 뱀파이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로즈의 피가 담긴 병뚜껑을 열고 날파리가 꼬이기를 기다렸다.
"킁! 킁! 이 냄새는 피 냄새인데? 그것도 순결한 여사제의 피 냄새."
뱀파이어들이 순식간에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오자 범려는 바로 뚜껑을 닫아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피! 그 피 어디 있나?"
뱀파이어들은 피로 인해 흥분했는지 어디 있냐면서 찾았지만 범려는 무심하게 뱀파이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피라면 여기 있습니다."
"어서 나에게 다오!"
"아니, 날 줘!"
뱀파이어들은 서로 자기에게 달라며 애원했지만 범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인간, 어서 피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널 잡아먹겠다!"
"하하하! 절 잡아먹으려면 그렇게 해보시죠. 하지만 그럼 다른 피들은 손도 대보지 못하고 다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협박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범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응해주었다.
"자, 자, 진정들 하시죠. 제가 이렇게 피를 가지고 온 것은 여러분과 좋은 친분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친분? 난 이미 너와 친분이 쌓여 있다. 어서 피를 다오."
한 뱀파이어가 성급하게 행동하자 범려는 코웃음을 쳤다.
"흥! 저와 이번에 처음 뵌 분 같은데 무슨 친분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 아니! 인간 주제에!"
"아, 그렇게 화를 내시면 다른 분에게 이 피가 돌아갑니다."
범려가 피가 가득 담긴 병을 흔들자 그 자존심 강한 뱀파이어도 바로 꼬리를 말아버렸다.
"끙!"
"인간, 뭘 원하나!"
한 뱀파이어가 원하는 게 무어냐 물어보는 순간, 범려는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제가 꼭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흐흐흐. 인간, 그 피를 주면 그것에 합당한 물건을 가져오겠다. 어떤가?"
범려에게 있어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는 뱀파이어가 등장하자 다른 뱀파이어들도 동시에 외쳤다.
"인간, 무얼 원하는가!"
뱀파이어들이 서로 물건을 내놓겠다며 외치자 범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이 피를 받기 위해 합당한 물건을 가져오시지요. 선택은 제가 하겠습니다."
"인간! 우리를 가지고 놀려고 하다니 무엄하구나!"
"아, 그럼 그렇게 말하신 분은 이 피에 관심이 없는 걸로 판단하고 제외하겠습니다."
범려가 아쉬울 거 없다는 듯 그 뱀파이어를 제외시키자 다른 뱀파이어들은 경쟁자가 하나 사라졌다며 아주 좋아했다.
"클클클, 쓸데없이 나서더니 꼴좋군."
여기저기서 오히려 좋아하자 체면을 구긴 뱀파이어가 범려에게 다가오더니 팔을 낚아챘다.
"잠시 이쪽으로."
"그러죠."
범려가 하나도 무서울 거 없다는 듯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뱀파이어가 귀에 속삭였다.
"아하하, 내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야."
"아! 그러시군요. 하긴, 이런 피는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범려는 살짝 뚜껑을 열어 그 뱀파이어에게 가져다댔다. 그러자 녀석은 코를 벌름거리며 흥분했다.
"아, 이 향기……."
"그럼 좋은 물건을 기대하겠습니다."
"무, 물론이지. 내가 아주 좋은 물건을 하나 가져오지."
뱀파이어는 아주 좋은 물건을 가져오겠다면서 저택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버렸다.
"아니, 저놈이 먼저 새치기를 하려고!"
하나가 가자 이제는 다른 뱀파이어들도 덩달아 집으로 가버렸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반쯤 흥분 상태에 빠져 있는 뱀파이어들은 일단 좋은 물건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 물건을 줄 테니 어서 나에게 그 피를 다오!"
가장 먼저 온 뱀파이어가 이상한 지팡이를 내밀더니 바로 피를 요구했다.
"일단 물건을 보지요."
범려는 그 지팡이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마고스의 지팡이
대마법사 마고스가 사용하던 지팡이이다.
공격력:10 내구도:210/210
옵션:지능 +130, 정신력 +100, 체력 +94
옵션:모든 주문 공격력이 12% 상승합니다. 주문 치명타의 발동 확률이 5% 증가합니다.
"자, 이 지팡이를 줄 테니 어서 그 피를 다오!"
뱀파이어는 이 피를 받기 위해서라면 저 지팡이도 아깝지 않은 것 같았다.
"물건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이 정도 물건을 가져왔으니 이걸 받으시지요."
범려는 굉장히 좋은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로즈의 피 대신 헬렌의 피를 줬다.
"아니, 이것도 순결한 처녀의 피! 그것도 마법사의 피!"
로즈의 피가 아니라서 아쉬워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끄억!"
뱀파이어는 피를 단숨에 들이켜더니 거침없이 트림을 하면서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더 없나?"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물건이……."
"잠시만 기다리게. 내 금방 가져올 테니."
뱀파이어는 다시 쏜살같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범려가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금방 가버리네."
"이보게, 내가 이 로브를 줄 테니 피를 주게나."
"어디 물건을 볼까요?"
-마고스의 로브
대마법사 마고스가 입었던 옷이다.
방어력:400 내구도:300/300
옵션:지능 +120, 정신력 +112, 체력 +98
옵션:주문 시전 시 일정 확률로 사용했던 마나를 100% 되돌려 받습니다.
"쓸 만한 로브군."
범려는 좋은 로브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쓸 만하다면서 일부러 물건의 가격을 깎기 위해 건장한 청년의 피 2병을 주었다.
"이건 그 사제의 피가 아니잖아."
뱀파이어는 피 2병을 받았다고 좋아했다가 굉장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런 좋은 피를 이런 싸구려 물건에 거래하려 하다니, 이것도 안 주려다가 주는 겁니다."
"크윽!"
범려는 잽싸게 로브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시치미를 뗐다.
뱀파이어는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피를 마셨지만 별로 기분 나빠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 맛좋다."
'크윽, 남자의 피를 마시고 저렇게 좋아하다니.'
그래도 신선한 피라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이 로브를 내가 좀 더 가지고 있는데, 이거 몇 개를 주면 다른 종류의 피를 줄 텐가?"
범려는 이 로브가 몇 개 더 있다고 말하자 귀가 솔깃했다.
"어험, 있는 대로 다 가져오시면 이거 두 병을 드리지요."
순결한 마법사의 피를 꺼내 보여 주며 말했다.
"꿀꺽! 그 피는 방금 먹은 피하고 좀 다른 거겠지?"
"물론입니다. 향기를 맡아보시지요."
범려가 뚜껑을 열어 확인시켜 주자 뱀파이어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거 이놈들, 다루는 게 너무 쉽잖아.'
괜히 뱀파이어라고 어떻게 할까 걱정했는데 이 피 하나로 뱀파이어들의 단물까지 쪽쪽 빨아먹게 생겼다.
잠시 후, 그 뱀파이어는 자신의 저택에 있는 마고스의 로브를 9개나 더 가져왔다.
"물건을 가져왔다. 피를 다오."
"여기."
범려가 피를 주고 난 뒤에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앞 다투어 모습을 드러냈다.
"자, 내가 이 보석을 가져왔네. 나에게 피를 다오!"
"인간! 돈이 필요하지 않나? 여기 황금을 가져왔다네!"
"나는 이 검을 가져왔네! 어서 피를!"
밤의 귀족이라 불리는 뱀파이어들이 피 한 병에 자신의 있는 거, 없는 거 다 가져와서는 애걸하는 모습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조용!"
"……."
범려의 말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일단 종류별로 먼저 분류를 하겠습니다. 황금이나 돈을 가져오신 분은 이쪽, 보석류는 저쪽, 마지막으로 현물, 즉 물건으로 가져오신 분은 한쪽으로 서주세요."
뱀파이어들은 의외로 착한 구석이 있는지 말을 잘 들었다.
범려는 여기서 또다시 분류를 했다. 돈은 얼마나 가져왔나, 혹은 보석은 어떤 등급의 물건을 가져왔나, 아이템은 얼마나 좋은 물건으로 챙겨 왔는지 등을 말이다.
그렇게 3등급으로 나누어 분류한 범려는 3등급의 물건들을 가져온 뱀파이어들에겐 건장한 청년의 피를 주었고, 2등급에겐 용맹한 전사의 피를, 그리고 1등급에겐 헬렌의 피인 순결한 마법사의 피를 주었다.
"마지막으로 특등급 물건들은 신성하고 순결한 사제의 피를 받으세요."
특등급으로 취급되는 물건들은 몇 가지 안 됐는데, 그중에서 마고스의 지팡이를 9개나 가져온 뱀파이어가 있었다.
"으흐흐, 그 치매 걸린 늙은이의 지팡이를 도둑질해온 보람이 있구나."
"치매 걸린 늙은이라니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법사 마고스가 혼자 살고 있지. 그 늙은이는 요즘 치매가 걸려서 자기가 물건을 만들어도 어디에 뒀는지 기억을 못해. 그래서 내가 종종 가서 그 지팡이와 옷을 슬쩍하곤 하지."
뱀파이어가 도둑질을 한다는 소리는 생전 처음 듣지만 나름대로 좋은 정보였다.
'한번 찾아가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