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봉인 해제
범려는 아스타우스를 이용해 탑에 있는 흑마법사들에게 협박을 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아스타우스의 머리가 땅바닥을 구르게 될 거라며 위협을 가한 것이다.
탑에 있는 마법사는 4명. 언데드 병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탑주를 버리고 자기들끼리 저항을 하는 것도 무의미해서 투항을 하고 말았다.
"후후후, 모두 다 잡았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봉인의 문서가 자동적으로 인벤토리 안에 보관됩니다.
다시 마법사들을 찾아갈 필요도 없이 퀘스트 보상 아이템이 인벤토리 안에 들어갔다.
"봉인된 문서라……."
범려는 조심스럽게 인벤토리에서 그것을 꺼내들었다.
-봉인된 문서
강력한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는 문서이다.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강력한 존재의 힘이 필요하다.
강력한 존재의 힘이라면 최소한 대마법사 마고스 수준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영혼의 천사 아르테미스 정도의 인물이 봉인을 풀어준다면 상당히 손쉬울 것이다.
"음, 일단 이들을 마고스의 저택으로 데리고 가자."
아스타우스와 그의 휘하 흑마법사들을 모두 다 잡은 범려는 마고스의 저택에 도착해서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돌아왔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저택으로 돌아온 범려는 마고스와 다른 일행들의 환영을 받았다.
"형님은 정말 대단해요. 탑주를 사로잡다니."
"허허, 정말 대단해."
"마고스 님, 잠시 저랑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음? 알았네. 저택으로 들어가지."
마고스는 범려의 말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 둘만이 있을 조용한 공간을 찾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날 찾은 거지?"
"이것 때문에 마고스 님을 찾은 겁니다."
마고스는 봉인된 문서를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에 걸려 있는 봉인을 풀어달라는 소리군. 하지만 난 이걸 풀 수 없네. 이것은 드래곤이 걸어놓은 봉인이네. 같은 동급의 능력을 가진 존재나 혹은 그 윗 단계의 존재를 찾게."
범려는 마고스의 이야기를 듣고 답은 딱 하나밖에 없음을 알았다.
'드래곤들이 어디론가 가버렸으니 남은 건 아르테미스밖에 없군.'
아르테미스가 이런 봉인을 풀어줄지 의문이었지만 주변에 딱히 부탁할 만한 존재가 없으니 답이 없었다.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드래곤이 걸어놓은 봉인이라면 마고스 님이라도 쉽지 않겠죠."
마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고 방에 혼자 남은 범려는 이 봉인을 풀어줄 유일한 존재를 불렀다.
"아르테미스!"
"안녕하세요, 범려 님."
언제나 화사한 미소를 보이며 등장한 아르테미스였다. 범려는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봉인된 문서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혹시 이것에 대해서 아시나요?"
"봉인된 문서군요. 이걸 풀어달라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딱!
아르테미스가 손가락을 한 번 딱 튕기자 봉인된 문서 위에 빛이 내려앉으면서 메시지가 보였다.
-봉인이 풀렸습니다.
범려는 봉인이 풀리자 바로 문서를 펼쳤다. 순간 문서 안에서 찬란한 빛이 발하면서 문서의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비법:용의 심장
인공적으로 용의 심장을 만듭니다. 심장은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걸 결정체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조건:해골 대마법사와 마법사들이 1천 년 동안 마나를 끊임없이 주입해야 합니다. 도중에 그 어떤 누구의 방해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조건:제작 시 무작위로 1~3개 용의 심장이 만들어집니다.
획득 아이템:용의 심장
범려는 웬만한 건 다 이해를 했는데 1천 년의 시간이라는 부분에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르테미스 님, 이 천 년의 시간은 뭔가요? 진짜 천 년의 시간 동안 마나를 주입해야 한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용의 심장을 만드는 데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죠."
범려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게임에서 어떻게 1천 년의 시간을 기다린단 말인가 차라리 안 만들고 말지.
"그럼 이걸 어떻게 만들라는 겁니까."
"범려 님, 여기가 지금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범려는 아르테미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그걸 참고 대답했다.
"과거 시대죠."
"그래요. 과거죠."
범려는 과거라는 말에 머리가 갑자기 맑아짐을 느꼈다. 지금 시대가 미래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지, 지금 몇 년이나 거슬러 온 거죠?"
"999년 11개월을 거슬러 올라왔죠."
아르테미스의 말은 여기서 용의 심장을 제조하기 시작해서 미래로 돌아가면 딱 1개월 뒤에 그 심장을 직접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음, 천 년 동안 마력을 불어넣으려면 적당한 장소가 필요한데."
"나머지 부분은 대마법사 마고스 님과 이야기를 해보세요."
아르테미스는 마고스와 이야기를 해보라더니 영혼의 세계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당장 이야기해봐야겠군."
범려는 아르테미스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마고스를 찾아 봉인이 풀린 문서의 내용을 보여 주었다.
마고스는 드래곤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봉인을 풀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범려가 그걸 풀어가지고 오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물론 아르테미스가 봉인을 풀어주었지만 그런 사실을 마고스가 알 리 없다.
"어떻게 봉인을 푼 거지?"
"설명하자면 긴데……."
"아무리 길어도 듣고 싶네."
마고스의 눈빛에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이유를 듣고 말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범려는 마고스에게 아르테미스와의 존재와 그녀와의 관계를 모두 털어놓았다.
"음, 그러니까 자네는 미래에서 왔다는 소리군. 그것도 영혼의 천사 아르테미스가 직접 이곳으로 보내줬다는 거고."
"그렇습니다."
"이야기해줘서 고맙네."
마고스는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범려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서 일어나지 않고 뭐 하는가. 용의 심장을 만들기 싫은 모양이지?"
"아! 당장 만들어야지요."
범려는 마고스를 따라서 바깥으로 나왔다.
마고스는 저 멀리 보이는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산이 보이지? 저곳에 가면 작은 동굴이 있네. 그곳에 용의 심장을 만들 장소로 정하고 싶은데 자네는 어떤가?"
"저는 무조건 찬성입니다."
"알겠네. 그럼 저곳으로 가지."
범려와 마고스 둘은 산을 향해 달려갔다. 마법으로 날아가도 되지만 마고스는 말 타는 재미가 붙어서 말을 탈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허허허."
범려는 마고스 때문에 말이 산에 오르기 힘든 곳까지 타고 올라가서는 그곳에서 말을 멈추고 걸어서 갔다.
마고스가 말한 동굴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여기가 내가 말한 동굴이라네. 어떤가? 자네 해골들이 이곳에 들어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네."
"확실히 넓군요."
범려는 동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입구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안은 굉장히 넓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후우."
범려는 장소를 발견했어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고스는 그 한숨 소리를 듣자 범려에게 물었다.
"무슨 근심거리가 있기에 그런 한숨을 쉬는 건가?"
"다른 게 아니라 용의 심장을 만들 때 끊임없이 마나를 주입해야 한다고 해서요."
"하하하!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마나를 갑자기 많이 모으는 것도 아니고 조금씩 끊임없이 모아야 하는 일이라면 충분히 내 능력으로 해결이 가능한 부분이네."
대마법사 마고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당장 보여 줄까?"
마고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앞으로 나가더니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신비함으로 가득 찬 세상이여, 세상의 모든 근원이 되는 생명이여, 나 여기 그 힘을 이용해 이곳에 축복을 내리고자 한다!"
쾅!
마고스가 지팡이로 땅바닥을 강하게 찍자 동굴 바닥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하고 일어나더니,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아주 화려하고 멋진 마법진이 그려졌다.
-풍요의 지대가 형성됩니다.
-대마법사 마고스가 만든 풍요의 지대 위에 있을 경우 마나 회복률이 400% 상승됩니다.
마나 회복률 400퍼센트라는 메시지를 보자 범려는 갑자기 머리가 멍해져 버렸다.
"이거면 이 마법진이 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마나가 모여들게 할 걸세.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해골 마법사들이 마나를 계속 회복할 수 있을 거야."
"가, 감사합니다, 마고스 님."
범려는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일을 해준 마고스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아니, 오히려 내가 더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이 늙은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고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범려가 보기에는 아무리 늙었어도 마고스 정도의 실력이면 어디를 가도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였다.
"이제 해골들을 데려오게. 가능한지 실험을 해봐야 하지 않겠나."
"네, 그러죠."
범려는 당장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는 흑마법사들이 절망에 빠져 신음하면서 우울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뭐지? 이 침울한 기운은……."
"자기야,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아스타우스가 자살했어."
"뭐!"
흑마탑의 주인인 아스타우스가 스스로 마나를 역류시켜 자살을 하자 그걸 보고 있던 흑마법사들은 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탑주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구심점을 잃은 흑마법사들은 절망에 빠져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오랜 세월 탑주의 명령만 듣고 살아온 이들이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흑마법뿐이었다.
"쯧쯧, 안됐군."
범려가 혀를 차자 흑마법사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 때문이야! 네놈이 아니었으면 우리 탑주님이 자결을 하실 이유가 없었어!"
"왜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평화롭게 살고 있는 세상에 돌을 던진 건 너희들이야.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
범려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흑마법사들을 상대했다.
"억울하면 나와 일대일로 붙어볼래? 그것도 주먹으로."
"좋다! 저 병사들이 없다면 너 따윈 아무것도 아니지!"
흑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 앞으로 나왔다.
범려는 그 덩치 큰 흑마법사를 보면서 썩은 미소를 지었다.
"너냐? 나하고 한판 뜨자는 녀석이."
부우웅!
흑마법사가 주먹을 크게 휘두르자 범려는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녀석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설퍼!"
범려의 오른 주먹은 힘차게 녀석의 옆구리에 틀어박히면서 몸 전체를 뒤흔들었다.
"컥!"
"또 간다."
연속적으로 그 덩치의 몸에 주먹이 꽂히면서 숨을 못 쉬게 만들었다.
"끄르륵."
결국 덩치 큰 흑마법사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쓰러졌다.
"퉤! 덩치만 크지 별것도 아니잖아. 다음!"
범려는 당당하게 '다음'을 외치면서 도전자를 기다렸지만, 저런 덩치가 주먹 몇 방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자 다들 기가 죽어버렸다.
"뭐야, 이거. 다음 녀석 없어? 싱겁군."
이후에는 흑마법사들이 생각보다 고분고분해졌다. 그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병사들을 부릴 줄 아는 녀석으로 보였는데 그런 범려가 그 덩치를 쓰러트리자 생각이 바뀐 것이다.
범려는 흑마법사들이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해골 병사들을 이끌고 동굴이 있는 곳으로 왔다.
"마고스 님, 병사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 왔는가."
마고스는 동굴 곳곳에 무슨 장치를 하다가 범려가 오자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뭐 하고 계셨습니까."
"별거 아니네. 이곳에 용의 심장을 만들기 시작하면 천 년간 봉인을 할 생각이야. 천 년 동안 누군가 이걸 건들면 안 되니까 말이야."
마고스의 세심한 배려에 범려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마고스 님, 감사합니다."
"허허, 나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네. 그러니 그렇게 감사할 필요는 없네. 그것보다 어서 해골들을 이 안에 세우게. 의식을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별로 넓지 않은 동굴인데 그 많은 해골들이 들어가자 주변이 빽빽하게 들어차게 되었다.
"이거 좁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범려와 마고스가 좁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옆에 있던 해골 부장이 큰 소리로 외치며 해골들에게 명령했다.
"벽으로 들어가라!"
해골들은 부장의 명령을 듣자 곧바로 벽을 파헤치고 그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가 버렸다.
"이거 완전히 납골당이 됐어."
해골 병사들이 벽 속으로 들어가자 수백 년간 뼈를 모아놓은 납골당처럼 변해버렸다.
특히 마법사나 대마법사는 자신들이 알아서 동굴의 가장 중심부에서 둥그렇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음, 다들 말하지 않아도 이곳이 무엇을 위한 곳인지 눈치는 챈 모양이군."
"그럼 심장을 만들어볼까요."
범려는 조심스럽게 해골 대마법사들에게 다가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의 심장을 만들어라."
"크르릉……."
해골 마법사와 대마법사들이 낮게 으르렁거리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마나를 실처럼 뽑아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마법사와 마법사들의 마나가 한가운데로 모이며 그게 한데 뭉쳐지기 시작했다.
-용의 심장을 제조합니다.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999년 11개월 29일 23시간 59분 59초.
"크윽, 겨우 1초 지났네."
범려는 제조 시간이 긴 메시지를 보자 절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이제 나가지."
마고스는 일이 끝나자 동굴을 빠져나왔고 범려도 따라서 나왔다.
"이제 이곳을 천 년간 봉인하지."
쾅!
마고스가 다시 지팡이로 내려치자 동굴 입구가 땅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자네 손을 이리 줘보겠나?"
"여기."
범려는 손을 마고스에게 내밀었다.
마고스는 작은 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범려의 손바닥에 마법을 부여했다.
"이건 자네가 이곳을 다시 찾아왔을 때 문을 열 수 있도록 주문을 걸어놓았네."
마고스의 말이 끝나자 범려의 눈앞에는 작은 메시지가 하나 떴다.
-봉인된 동굴의 입구를 열 수 있는 마법의 키를 받으셨습니다.
"좋아. 이대로 미래로 돌아가면 된단 말이지."
범려는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저택으로 다시 돌아오자 로즈 남매와 헬렌이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동시에 입을 열었다.
"미래로 돌아가자!"
퀘스트가 끝났으니 이제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알았어. 아르테미스!"
범려가 아르테미스를 부르자 그녀는 주변을 찬란하게 비추는 빛을 뿌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 천사다!"
흑마법사들은 아르테미스를 보자 자신들을 구원해줄 천사가 나타난 걸로 착각을 일으켰는지 '천사다'라면서 그녀 앞에 다가가 무릎 꿇으며 기도했다.
"어머, 저분들은 누구죠?"
"흑마법사들요."
"오! 천사님, 저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이렇게 강림해주셨군요!"
이 정도 착각이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지만 아르테미스는 밝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여러분은 죄를 많이 지어서 구원보다 지옥에서 먼저 벌을 받아야 하는데요."
"헉!"
밝은 미소로 대답하는 아르테미스의 말에 흑마법사들은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데 어디 몸들 안 좋으세요? 표정이 하얗게 질려 있네요."
"크크크, 제대로 한 방 먹이는데."
범려는 흑마법사들의 얼굴에서 좌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동시에 그렇게 좌절한 흑마법사들이 너무나 웃겼다.
"아, 범려 님, 그러고 보니 일은 다 끝나셨나요?"
"네, 다 끝났어요."
"그럼 준비되셨죠?"
"네!"
"그럼 갑니다."
번쩍!
범려와 다른 동료들이 순간 빛으로 휩싸이면서 시간의 틈으로 이동되었다.
"여기를 또 지나가야 하는구나."
전에도 와봤지만 참 적응하기 힘든 곳이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해골들이 없어서 주변이 조금 썰렁하다는 것이다.
"다들 빠지신 분들 없죠?"
"네!"
다 같이 시간의 틈에 들어온 아르테미스는 다시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범려 일행들을 원래의 시간대로 돌려보냈다.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999년 11개월 29일 23시간 59분 59초.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999년 11개월 29일 23시간 59분 57초.
……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100년 8개월 28일 10시간 30분 40초.
원래의 시대로 돌아오자 수많은 메시지가 주르륵 나타났고 범려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는 눈이 댕그래졌다.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1개월 1일 1시간 1분 40초.
"우와, 천 년이라는 시간이 딱 한 달로 줄어버리네."
솔직히 한 달도 많은 시간이지만 1천 년보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후후후, 그래도 한 달 뒤에는 용의 심장을 얻고 용을 만드는 거야."
혼자서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뒤에서 로즈가 다가와 범려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웃음이 그렇게 음침해?"
"헛!"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허리를 찔려서 그런지 헛바람을 들이켜며 옆구리를 감쌌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범려는 로즈에게 적당히 얼버무렸다. 나중에 용을 만들면 로즈와 같이 하늘을 날고 싶어서였다.
"형님, 그런데 해골들은 어디 갔어요?"
"해골들은 거기에 남겨 뒀어."
"아, 과거에 놓고 오셨군요. 엥? 해골들을 거기다 놓고 오셨다고요?"
"엉, 거기에 놓고 왔어."
일행들은 범려의 말을 듣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해골 병사들은 범려의 힘이자 상징이다. 그런 것들을 과거에 놓고 왔다는 소리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병사들은 지금 칠흑의 데보라 지역에 있어. 그리고 나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 몰래 감춰두었으니 걱정 마."
범려는 일행들에게 안심하라고 했지만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냥도 해골들이 없어서 몰이사냥은 힘들지만 일반적인 부분은 전혀 걱정할 게 없어."
"그렇기는 하죠. 그래도 해골들이 있으면 얼마나 편한데."
해골 병사들 덕분에 가보기 힘든 곳, 혹은 난이도 높은 던전을 클리어했었다. 그런 이들이 없다는 자체만으로 중요한 전력이 사라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당장 칠흑의 데보라 지역에 가서 해골들을 찾아도 병사들을 부릴 수가 없어. 한 달 동안은 말이야."
"무슨 이유가 있나요?"
"그건 내 직업 때문에 생긴 일이야. 그러니 그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가."
일행들은 범려가 굳이 입을 열려고 하지 않으니 집요하게 따지지는 않았다.
"자기야, 나중에 꼭 설명해줘야 돼."
"알았어."
범려는 꼭 설명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자신의 인벤토리에 있는 용의 뼈를 한번 보았다.
"후후후."
그는 혼자서 조용히 웃더니 이내 웃음을 지우고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해골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그냥 파티 사냥을 한다고 생각해.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한 달은 금방 가잖아."
"뭐, 한 달이야 금방 가지."
범려에 말에 다들 수긍을 하더니 이제는 남들이 다 하는 똑같은 사냥을 하게 되었다.
조금 남들과 다른 게 있다면 해골마를 타고 사냥을 한다는 것이다.
"이랴! 몬스터가 도망간다!"
"어딜 도망가려고!"
쉬이익!
범려는 해골마를 타고 종횡무진 사냥터를 누비고 다녔다. 특히 활을 들었을 때의 범려의 위용은 아무도 넘볼 수 없었다.
"취선! 앞으로!"
"네!"
범려는 비록 4명이라는 인원을 가지고 파티 사냥을 하지만 마치 해골 병사들이 있는 것처럼 거침없는 행동으로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형님은 대단해요. 병사들이 없어도 이런 전투를 보이시다니."
"칭찬 고맙다."
범려는 취선의 칭찬을 받아주고는 몬스터를 찾으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판게아 월드』 전체적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판게아 월드』입니다. 업데이트를 위해 서버가 잠시 후 다운될 예정이오니 안전한 로그아웃을 해주십시오.
자세한 업데이트 사항을 원하시면 『판게아 월드』 공식 홈페이지에 기재된 업데이트를 확인해주십시오.
"아,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업데이트라니."
"이번에 업데이트되는 게 병사 & 용병이었던가?"
다들 이번 업데이트에 대한 소문은 알고 있었고 그 내용도 대략적으로 공개가 된 상태였다.
"조금 있으면 업데이트를 시작한다고 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래, 취선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같이 하자."
다들 로그아웃을 하자 희성도 로그아웃을 한 후 『판게아 월드』 공식 홈페이지에 가서 정확한 업데이트 내용을 확인했다.
-병사 & 용병
병사와 용병 시스템은 모든 유저들에게 조금이라도 쾌적한 환경의 플레이를 돕기 위해 만든 저희들의 야심 찬 프로젝트입니다.
먼저 용병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용병들은 용병 길드라는 곳에서 이들을 고용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상당히 높은 레벨을 가지고 시작하며 계약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한번 계약하게 되면 계약 기간 동안은 열심히 활동하지만 계약이 기간이 끝나면 사냥 중이라도 길드로 돌아가 버립니다.
돈이 곧 충성심의 척도가 되는 용병입니다.
병사들은 용병들과 반대로 처음 시작하는 레벨이 용병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고용하려면 많은 돈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용병들의 계약과는 달리 주종관계를 맺기 때문에 용병과 다르게 돈이 곧 충성심으로 반영되지 않습니다.
또한 병사들은 자신이 섬긴 주군을 평생 따르기 때문에 배신을 하지 않습니다.
희성은 업데이트 내용을 보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병들이나 병사들의 차이는 별로 없었다. 시작하는 레벨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나중에 병사들을 키운 유저들이 늘어난다면 버려질 것들은 용병들이다.
'싼 맛에 빠르게 성장하고 싶다면 용병을, 지구적으로 미래를 생각한다면 병사를 선택해야 하는 거군.'
희성은 천천히 홈페이지 내용을 보고는 다른 패치 사항이 있는지 확인을 했지만 해골 제작자와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군. 오랜만에 휴식 시간이 찾아왔으니 푹 쉬어볼까."
게임 안에서의 시간은 알아서 흘러갈 테고 해골들을 데려오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하암, 왜 이렇게 졸리지."
희성은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언제나 침대 대신으로 사용하는 캡슐인지라 그대로 캡슐 문만 열어놓고 잠이 들어버렸다.
탁탁탁!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 발소리가 들려오자 한창 단꿈에 젖어 있던 희성은 잠이 깨버렸다.
"무슨 소리지?"
혹시 도둑이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주먹을 말아 쥐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풀며 그 소리를 내고 있는 근원을 보고 머리를 살짝 긁적거렸다.
"미진이었네……."
그렇게 확인을 하고 돌아서려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분명 문은 잠갔는데."
희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관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은 생각보다 멀쩡했지만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헛! 문고리가 바뀌었다."
문을 여는 손잡이나 기타 잠금장치들이 전부 다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아, 일어났어. 그거 내가 돈 좀 들여서 싹 바꿔버렸어."
"언제 바꾼 거야?"
"자기가 자고 있을 때."
희성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어서 문고리나 그에 관한 잠금장치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크, 그럼 열쇠는 어디 있어?"
"열쇠? 그냥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면 돼. 번호는 5XXXX니까."
"정말 대단하다."
희성은 미진의 행동에 대단함을 느꼈다. 동시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이리 와서 밥 먹어."
"엉, 어? 밥? 너 밥도 할 줄 아냐?"
"당연한 거 아니야, 요즘 기본적인 요리는 남자 여자 구분 없다고."
"아, 그래. 하지만 난 그 기본에서 빼주라. 기준 미달 남자다."
희성은 요리에 관해서는 젬병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부분일 것이다.
"어서 먹기나 해. 국 식어."
"국?"
희성은 국이라는 말에 무슨 국인지 봤다. 미역국이었다. 분명 집에 미역이 없었을 텐데 시장에서 장을 봐온 모양이었다.
"오늘 자기 생일이잖아."
"…내 생일은 언제?"
희성은 단 한 번도 미진에게 생일을 말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다. 누군가에 물어봤다는 것이다.
"집에 전화했지."
"서, 설마 우리 집?"
"엉."
아주 간단한 대답이다!
"아, 집에 전화했으니 너의 정체를 물어봤을 수도 있겠군."
"내 목소리만 듣고도 알던데. 아주머니야 워낙 어릴 적에 날 예뻐해주셨으니까."
희성은 오늘 일어난 사건이 며칠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되고 구성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물증이 없어서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미진이 희성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엇! 이 맛은?"
희성은 미진이 끓여 준 미역국 맛에 감동을 받았다. 너무 맛있었던 것이다.
"우와! 정말 맛있다."
"정말!"
미진은 희성의 말에 눈이 초롱초롱 빛나면서 너무나 좋아했지만 그 말을 한 인간은 정작 미역국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희성은 생일날 결국 미역국 하나로 끝나게 되었지만, 그런 미역국 하나라도 끓여 주는 여인이 있다는 걸로 행복할 뿐이었다.
"이제 게임에 접속해보실까!"
"나도 나도."
"여기서 하려고?"
"그럼, 커플용 캡슐인데 당연하지."
그렇다. 희성이 가지고 있는 캡슐은 특수하게 커플용으로 제작된 물건이다.
"그래. 같이 하자."
둘은 같이 게임에 접속했다.
혹 취선이나 헬렌 누나가 접속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음, 아직 안 왔나."
"그러네. 어디 놀러갔나 보지."
"로즈야, 오랜만에 둘이서 놀아볼까."
"어디로 갈 건데?"
범려가 어디로 갈까 곰곰이 생각할 때 스승님에게 귓속말이 들려왔다.
[제자야.]
"스승님, 안녕하세요."
[오냐, 너 지금 어디 있냐?]
"저는 지금 창공의 페이셔에 있는데요."
[지금 당장 칠흑의 데보라로 올 수 있겠느냐?]
"네,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