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해태와 우산
"흑검 형님!"
"날 말리지 마!"
"안 됩니다, 형님. 이대로 공격을 나가면 같은 결과만 되풀이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냐. 저 600명도 안 되는 것들을 두 눈 벌겋게 뜨고 지켜봐야 하는 거냐!"
흑검과 강토가 서로 실랑이를 벌이면서 싸우자 우산 길드의 간부들이 둘을 뜯어말렸다.
"둘 다 왜 이러십니까!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작전을 짜야 합니다. 이대로 무모한 돌진을 해서 얻은 게 뭡니까!"
한 간부가 목청 높여 이야기하자 다들 그 말에 수긍을 하면서 조용해졌다.
"그럼 쓸 만한 작전 하나만 내놔봐라."
흑검은 명색이 우산 길드의 간부들이 작전 하나 못 세울 정도로 무식한 머리를 가지지는 않았을 거라 여겼다.
"그럼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우산 길드에서 간부직을 맡고 있는 성만이라는 유저였다.
"그래, 성만아. 말해봐."
"저 산을 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산을 넘어?"
"네. 저들은 저 산을 성벽 삼아 방어를 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저희가 조금만 추격을 해도 멀리 쫓아오지 않고 서서히 진군하는 것도 거기에 있을 겁니다."
성만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더듬으면서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나갔다. 이에 그걸 듣고 있던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산을 넘으면 방법이 있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저들의 뒤통수를 친다면 오늘 같은 전투는 절대로 다시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만이가 내놓은 작전을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가?"
"찬성입니다."
"찬성입니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택된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너무 단순해서 적들이 알아차리기 쉽다. 특히 스파이가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찍찍.
우산 길드 간부들이 하는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듣고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쥐였다.
"그럼 작전은 오늘 새벽 1시에 시행한다."
"알겠습니다."
작전 회의가 끝나자 모든 내용을 들은 쥐는 이를 보고하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엄마- 쥐야! 쥐!"
"쥐! 어디 있어!"
"저기다!"
여성 유저들 중에서 쥐를 특히나 징그러워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 쥐를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파이어볼!"
화르르, 콰쾅!
"겨우 쥐 때문에 소란 피우지 마라. 시끄럽다."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쥐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마법사의 화끈한 파이어볼에 제대로 구워져서 말이다.
이제 범려는 쥐들의 정보를 듣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려가 쉽사리 당해줄 인간도 아니다.
* * *
"루이, 쥐들에게 들어온 정보가 없나?"
"없습니다."
루이는 쥐들을 통해 들어온 정보만 보고하기 때문에 명령을 내린 쥐의 생사 여부는 알지 못했다.
"음, 우산 길드 녀석들이 절대로 가만히 있을 녀석들이 아닌데 조용하단 말이지. 뭔가 이상해……."
범려는 아무리 기다려도 쥐들의 소식이 들어오지 않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왠지 수상해."
범려는 이대로 있으면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함에 급하게 스승님을 찾았다.
"스승님."
"무슨 일이냐."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자리를 옮기다니 무슨 말이냐?"
"제가 적 진영에 정보를 듣기 위해 스파이를 잠입시켰는데 소식이 없습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궁귀는 범려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너에게 작전권을 일임했으니 그리해라. 난 널 믿는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궁귀의 절대적인 신뢰에 범려는 고개를 숙인 후 병력을 이끌고 자리를 떠나 전투 지역을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고, 산 위에 자리 잡은 사람들도 같이 대피시켰다.
발리스타는 아르테미스를 불러내어 영혼의 세계로 보내버렸다.
"밤이라서 그런지 잘 보이지 않지만 골짜기로 들어왔군."
해태 길드는 우연하게도 근처에 있는 골짜기로 들어오게 되었다.
* * *
해태 길드가 골짜기로 들어간 상황에서 우산 길드는 텅 비어 있는 적들의 진영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무도 없잖아."
"아무래도 적들이 저희들의 작전을 눈치 채고 도망을 친 건 아닐까요?"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요 몇 개월 동안 새로운 길드원을 받은 적이 없어."
비밀리에 해태 길드를 기습하기 위해 나왔던 우산 길드는 허탈한 마음으로 진영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거냐."
"해태 길드 녀석들은 이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없어? 우리의 작전을 아는 녀석들은 없을 텐데."
길드마스터인 흑검은 이 사실을 듣고 상당히 의아해했다. 아무도 작전 내용을 발설한 사람이 없는데 그들이 사라진 것이다.
"마스터, 아무래도 저쪽에 은신에 능한 인물이 있는 건 아닐까요?"
"은신이라니 말도 안 된다. 은신이 가능한 직업은 도적이나 암살자 계열인데 해태 길드는 전원이 궁수들로 이루어진 길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해라."
흑검은 해태 길드의 길드 구성원을 잘 알고 있었다. 은신이 가능한 직업이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 저들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 챈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용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우산 길드에 스파이가 있지 않는 이상 말이다.
'스파이라…….'
흑검은 스파이라는 것도 잠시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작전을 구상하고 토론하는 것은 간부들과 함께 한다.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작전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해태 길드만의 정보를 얻는 방식이 있는 건가.'
흑검은 이곳이 게임이라는 것을 감안해 특별한 방식이 있다는 생각까지 들자 간부들과의 대화 방식을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어.'
흑검은 당장 길드의 간부들을 소집하더니 그들과 조용히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우산 길드의 간부들이 이런 비밀스런 대화에 빠져드는 동안 범려는 골짜기의 출구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후, 이제 녀석들을 불러와야겠군."
범려는 우산 길드 녀석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해골마를 타고 직접 나섰다.
"형님! 같이 가요!"
"그럼 어서 따라와!"
취선이 다급하게 해골마를 타고 따라나섰고, 두 사람은 골짜기를 가로질러 우산 길드가 있는 진영에 다가갔다.
"아직도 저기서 죽치고 있네."
병력이 많은 길드다 보니 이런 전시의 상황에도 여유가 넘쳐났다.
"병력 많다, 이거지."
범려는 적의 상황을 망원경으로 살피더니 취선에게 말했다.
"취선아, 중요한 일거리가 생겼다. 저것들한테 가서 욕 신나게 퍼붓고 와라."
"네? 욕해서 화살 날아오면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쳇!"
취선은 범려의 말대로 우산 길드 진영으로 다가가 그래도 화살이 무서운지 사정거리 바깥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이 씨벌것들아! 굼벵이처럼 웅크리지 말고 이리 나와서 나랑 한판 붙어보자!"
취선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서 우산 길드 진영에 똑똑히 들렸다.
"누가 욕을 하는 거야!"
그 욕을 듣고 길드원들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취선 혼자서 무식한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한판 붙을 배짱 좋은 녀석 없나!"
"아니, 저게 미쳤나!"
끼이익!
역시나 누군가 활 사정거리까지 다가와서 화살을 날렸다.
"흥!"
취선은 가볍게 도끼를 휘두르더니 그 화살을 쳐내버렸다. 워낙 정직하게 날아온 화살이라 그 궤도를 보고 쳐낸 것이다.
"간사하게 화살 날리지 말고 나와 한판 붙어보자!"
취선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동안 우산 길드마스터인 흑검이 앞으로 나왔다.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 거냐."
"흑검 형님, 저기 보이는 녀석이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습니다."
"저놈은!"
흑검은 취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은 생각보다 곱상하게 생겼는데 말하는 거나 싸움하는 모습은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으로 말이다.
"아무도 없나! 이런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내가 상대하지!"
취선과 같이 무식한 양손 도끼를 들고 있는 녀석이 앞으로 나서더니 말을 한 마리 불러냈다.
"허접스럽게 그냥 준마구나!"
취선은 상대가 불러낸 말이 저번에 업데이트되었던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네놈이 어떻게 해골마를 얻었는지는 모르나 내 말과 다를 바는 없다!"
"어서 덤벼라!"
두 무시무시한 인간들끼리 격돌을 하자 곧 시원한 싸움이 펼쳐졌다.
"으아-!"
"하압!"
캉! 캉! 캉!
전투는 투박하며 단순했지만 순수하게 힘만을 가지고 겨루는 모습에 모두들 매료되었다.
"순수한 힘 대결이라니 대단해."
범려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취선은 맹장(猛將) 스타일이라서 은근히 적에게 위압감을 준다. 더군다나 이처럼 순수한 힘 대결을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네놈의 이름이 뭐냐."
"난 취선이라고 한다. 넌 누구냐!"
"성만이라고 한다!"
우산 길드의 간부인 성만이었다. 그리고 야간 기습 작전을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성만! 잘 기억해라. 널 죽인 녀석은 이 취선이 될 거다!"
"누가 할 소리!"
힘찬 도끼질이 다시 시작되면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취선의 실력이 조금 더 위에 있었다.
"하앗! 태풍 몰아치기!"
캉! 캉!
"크윽!"
성만은 도끼를 잡던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힘차게 도끼를 휘두르지 못했다.
"흥! 그따위 실력으로 날 상대하려고 하다니 죽어라!"
콰득!
취선은 성만의 머리를 강타하면서 생명력을 0으로 만들고는 눈앞에 보이는 적들에게 다시 외쳤다.
"다음에 나와 싸우고 싶은 녀석은 저기 보이는 골짜기 너머로 오너라. 나 취선은 그곳에서 기다리마!"
우렁찬 소리에 다들 무덤덤했지만 우산 길드의 간부인 성만이 당했다는 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취선은 말 머리를 돌려 범려와 함께 골짜기를 가로질러 갔다.
"흑검 형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서지 마라. 성만이가 다시 부활해서 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때 움직인다."
흑검은 성만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도시에서 부활한 성만이 우산 길드 진영까지 오는 데 2시간이 걸렸다.
"가자!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우산 길드는 해태 길드가 있는 곳으로 살기를 내뿜으면서 움직였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형님, 저기 오는데요."
범려는 망원경으로 녀석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살짝 걱정했다.
'취선이 너무 녀석들을 자극했나. 얼굴 표정이 살벌한데.'
적의 기세가 너무 강하면 숫자가 적은 해태 길드는 위험하다.
"취선아, 너 녀석들을 너무 자극하고 온 거 아니야?"
"저 정도가 딱 적당하지 않나요?"
범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도 모르겠다. 일단 발리스타를 소환해놓았으니 저 기세를 꺾는 데 도움은 되겠지."
아르테미스를 통해서 발리스타와 투석기를 소환해 배치시켜 놓았다.
"용병들 앞으로!"
범려는 병력들을 앞세워 이번 전투에서 끝장을 볼 계획이었다.
"우산 길드 녀석들이 앞에 있다! 준비!"
"해태 길드가 눈앞에 있다! 돌격!"
"궁수 공격!"
골짜기 입구에서 쏟아지는 화살은 장대비처럼 몰아쳤고, 그 사이에 숨어 있는 발리스타의 투창은 벼락처럼 떨어졌다.
후우웅! 후웅!
"바위가 날아온다! 방패를 들어라!"
투석기에서 날아온 바위를 막기 위해 우산 길드원들은 방패를 들 수 있는 직업은 전부 다 들어 그 육중한 바위를 여럿이 뭉쳐서 겨우겨우 튕겨 냈다.
"젠장! 바위가 너무 가벼웠어."
범려는 바위를 튕겨 내자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계획대로 한다면 바위가 뒹굴면서 상당한 타격을 줘야 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바위를 막았다-!"
"와아-!"
이와 동시에 우산 길드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자 진군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버텨라! 이곳이 뚫리면 모두 다 죽는다!"
범려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용병들과 길드원들을 독려했다. 아군의 사기를 다잡기 위한 행동이었다.
쾅!
양측 병력들이 동시에 충돌하자 쇠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어어!"
서로의 방패가 충돌하자 몇몇이 균형을 못 잡으며 넘어지려고 할 때 범려가 소리쳤다.
"젠장! 이 악물고 버텨!"
범려는 언제 말을 타고 달려왔는지 그 넘어지려는 사람을 붙잡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너지지 마! 끝까지 버텨서 적을 물리쳐라!"
각오를 다지는 한마디에 모두들 힘을 얻었는지 우산 길드의 무지막지한 충돌에도 밀리지 않고 버티기 시작했다.
"흑검 형님, 저기 보십시오. 해골 제작자입니다."
"어떻게 된 거지. 해골 제작자가 왜 여기 있는 거냐?"
흑검은 강토가 가리키는 유저를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놈의 병사들은 어디 있나!"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형님. 녀석이 있다면 해골 병사들도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아무래도 놈에게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강토의 말에 흑검은 수긍했다.
"그렇지. 놈이 지금까지 해골 병사들을 꺼내지 않았다면 강토 네 말이 맞겠지. 이대로 밀어붙여라."
"네, 흑검 형님."
강토는 길드원들에게 앞으로 계속 밀어붙이도록 명령했고, 동시에 마법사나 궁수들에게 후방 사격을 지시했다.
"화살이 날아온다! 방패를 들어라!"
해태 길드 용병들이 방패를 들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균형이 조금씩 어긋나며 해태 길드의 용병들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헬렌 누나! 제마야!"
"기다리고 있었다. 정령 폭탄!"
"블리자드!"
2개의 범위 기술이 터지자 반대쪽에서도 범위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썬더스톰!"
"퀘이크!"
좁은 구역에서의 범위 마법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크악!"
"살려 줘!"
용병들이 학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헬렌의 경우 범위 마법이 많아서 우산 길드의 마법사들 서너 명 몫을 해내고 있었다.
"플레어 윈드!"
"피닉스 소환!"
방금 떨어진 2개의 마법은 이전에 있던 마법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낳았다. 그리고 헬렌이 죽지 않게 뒤에서 로즈가 지속적으로 힐을 해주었다.
"토네이도!"
마지막 마법까지 터지자 그 많던 용병들이 사라져 버렸고, 헬렌은 모든 마나를 없애버렸는지 인벤토리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더니 거침없이 들이켰다.
"후우, 프리징!"
이번 싸움으로 모든 마나 포션을 다 써버릴 작정인지 무제한에 가깝게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서 모든 마법이 쿨 타임에 걸려 버렸다.
양쪽의 마법사나 궁수들이 적 용병들을 무참히 학살한 결과 모든 용병들이 다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맨몸 승부인가."
궁수로만 조직된 해태 길드원들은 각자 활을 들며 적들을 향해 겨누었다.
"하하하, 너희들은 이제 끝이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항복한다면 살려 줄 의향도 있다."
"후후후, 그래봤자 남는 게 뭐가 있다고. 그냥 한판 시원하게 싸우다 죽는 게 최고지."
어차피 게임 속 세상에서의 죽음은 잠시 동안의 휴식. 궁귀가 조용히 활을 들어 화살을 재자 모든 길드원들도 똑같이 활에 화살을 메겼다.
"발사!"
슈우욱! 슈우욱!
"돌격!"
우산 길드와의 전투는 정말로 치열했다. 아무리 궁수들로 이루어진 길드이지만 상위 랭킹을 자랑하는 우산 길드와 팽팽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산 길드 녀석들을 저승 길동무로 삼자!"
"와아-!"
해태 길드는 활을 쏘다가 적들이 가까이 붙으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별 쓸모도 없는 장검을 꺼내들면서 적들을 맞이했다.
해태 길드원들은 우산 길드의 전면에 선 전사들에 의해서 도륙이 되고 뒤에서 무시무시한 마법과 화살이 빗발치면서 하나 둘씩 죽어갔다.
"크악!"
"으윽! 두고 보자."
"젠장!"
범려는 해골마를 타고 말 위에서 섬전의 창을 휘두르며 혼자서 고군분투할 뿐이었다.
"회색의 빛! 환영섬!"
두 스킬이 연달아 터지면서 범려 앞에 다가오려던 자들이 순간 주춤했다.
"하앗!"
범려는 그 주춤거리는 틈을 이용해 바로 앞으로 달려들더니 몇몇 녀석들 몸에 구멍이 뚫릴 정도의 치명상을 남겼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갔냐! 같이 죽자!"
물귀신처럼 여러 사람을 붙들고 죽으려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둘러 공격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범려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던 유저들은 뒤로 물러나 도망을 치려고 해도 다른 유저들 틈에 끼어 도망도 못 가고 죽었다.
"동료를 죽였다!"
"죽이자-!"
우산 길드원이 하나 죽자 범려 주변에 있는 유저들은 광분을 하면서 범려에게 달려들었다.
"제길! 해골 병사들만 있었어도!"
범려는 이 말을 끝으로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무런 아이템도 떨어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죽었다."
범려는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온 영혼 세계의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부활 비용은 10골드입니다."
언제나 화사한 미소로 여러 사람들에게 10골드를 받고는 부활시켜 주는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정말 대단하다.
진짜 사람이라면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지겨워서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범려는 그런 아르테미스를 향해 웃으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더니 그대로 누웠다.
"어머, 범려 님."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모습을 보아하니 죽으신 것 같은데요."
"뭐, 그렇죠. 게임을 하다가 죽는 일이야 종종 있는 거니까."
"지금 돈 주고 부활하실 건가요? 아니면 자동 부활을 원하시나요?"
"그냥 자동 부활 할래요. 바로 간다고 해서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범려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공짜로 부활 안 시켜 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요. 그럼 자동 부활 하세요."
범려가 아르테미스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한 번쯤은 공짜로 부활시켜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녀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음, 공짜로는 안 해주네."
잠시 아쉬움을 뒤로하고는 바로 용의 심장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했다.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17일 13시간 10분 08초.
"전쟁을 하면서 시간이 훌떡 가버렸네. 해골들이 돌아올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 기다리면 되겠지."
범려는 해골들이 돌아올 날이 보름 조금 넘게 남자 눈에 이채를 발했다.
"17일 뒤에 보자."
마지막 말을 남기고 범려는 로그아웃을 했다.
* * *
"하하하!"
"흑검 형님, 저희가 이겼습니다!"
지금 우산 길드는 해태 길드와 싸워서 이겼다는 승리의 기쁨으로 인해 다들 축제 분위기였다.
"형님, 이제 저희 길드의 무서움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태 길드는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해 준비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역시 강토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흑검은 강토의 말대로 해태 길드가 이번 전투에서 졌다고 완전히 물러날 거라 생각지 않았다. 해태 길드에는 해골 제작자가 있어서 언제 또 부활해서 길드를 위험에 빠트릴지 알 수 없었다.
"흑검 형님, 해태 길드가 잠잠한 이때에 비밀 길드를 만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비밀 길드?"
강토는 아무도 모르는 우산 길드의 분신인 길드를 하나 더 만들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길드와 감춰진 길드를 만들 생각인 것이다.
"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길드라……."
흑검은 미소를 지으면서 강토를 향해 미소 지었다.
"실행해라."
"알겠습니다, 흑검 형님."
이후, 우산 길드의 하위 길드인 양산 길드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 * *
희성은 보름간 게임에 접속을 하지 않고 아주 평범한 생활을 즐겼다. 친구들과 만나서 놀기도 하였고 지금은 미진과 같이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자, 아 해봐."
"아~"
미진은 희성의 입에 스파게티를 넣어주면서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야, 언제까지 게임 접속을 안 할 거야?"
"해골들 깨어나기 전까지. 그리고 우산 길드 녀석들이 우리를 잊을 때까지는 조용히 지내야지. 그래야 복수를 할 수 있지."
"방법은 있는 거야? 아무리 해골들이 있다고 하지만 저번에 싸우는 것 봐서는 해골 병사들이 상당히 죽어나가겠던데."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희성은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스파게티를 포크로 둘둘 말아 한입에 집어넣었다.
"자기야, 나 방송일 그만둘까?"
"응?"
미진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VJ라서 공중파 방송은 아니지만 게임 방송국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녀가 방송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 있었어? 한참 일 잘하고 있었잖아."
"그렇긴 한데 요즘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이상한 소리?"
"그게 말이야……."
미진이 말하기를 꺼려하자 희성은 이후에도 재차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고 몇 번 뜸을 들이더니 미진이 결국 입을 열었다.
"뭐! 그룹 회장이 스폰서를 해줄 테니 하룻밤을 같이 보내달라고!"
로즈는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으응……."
"당장 그만둬!"
희성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얼굴 표정이 악귀처럼 변해버렸다.
"그런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말을 들었지 실제로 내 주변에, 그것도 애인한테 이런 소리를 듣게 되다니."
둘 사이는 잠시 동안 적막이 흐르더니 희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둬.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어."
"알았어."
미진은 희성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음 날 바로 방송국에 사직서를 내버렸다.
다행히 미진이 VJ를 보던 프로그램은 개편 시기에 맞물려서 방송국에는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고, 다른 연예인이 와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아, 이제 백조가 됐네."
"시간 많은 백조가 된 걸 축하해!"
희성은 미진의 손을 잡으면서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소리 질렀다.
"내가 무슨 백조 된 게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면 어떻게 해!"
미진은 창피한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뭐, 아직 20대잖아. 백조가 됐다고 해서 좌절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어.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고 그중 하나가 VJ일 뿐이야. 그러니 전혀 걱정할 것 없어. 앞만 보고 가도 벅찬 세상이야."
희성은 미진에게 희망을 주었고 더 멋진 직업을 얻길 바랐다.
"역시 내가 남자 친구 하나는 잘 골랐다니까."
"흐읍!"
미진은 희성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더니 그대로 입술을 덮쳐 버렸고, 희성은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미진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곧 서로의 품에서 떨어지더니 두 손을 꼭 잡고 희성의 집으로 향했다.
"아자! 이제 접속을 해보실까!"
"……."
미진은 집에 도착해서 약간의 로맨스를 기대했지만 그걸 여지없이 무너트린 희성의 말에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더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게임밖에 모르는 바보……."
희성이 캡슐에 들어가자 미진은 화를 내야 할까 생각을 하면서도 같이 게임에 접속했다.
"범려야?"
로즈가 먼저 게임에 접속을 했지만 범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누군가 접속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음?"
게임에 접속해 있는 상태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로즈의 몸을 향해 뻗어오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로즈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잠시 기다리자 범려가 접속을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너, 너."
지금 범려와 로즈가 쓰고 있는 캡슐은 커플용이라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두 사람만 알고 있다.
"어어, 점점 이럴 거야?"
"내가 뭘?"
게임에서는 두 사람이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만 현실에서는 같은 캡슐 안에 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로즈의 표정은
'왜 이리 엉큼해!'
였다.
반대로 범려는 실실 웃으면서 반쯤 정신 나간 표정을 짓다가 게임상에서 두 사람의 행동이 멈추고는 마네킹처럼 서 있기를 1분, 그리고는 로그아웃을 했다.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 글을 쓴 본인도 모른다.
* * *
희성이 게임에 제대로 접속을 했을 때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난 후였다.
"이제 해골들을 찾으러 가자!"
활기찬 목소리로 외치는 범려 뒤에 로즈도 접속을 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범려를 따라서 해골마를 타고 해골들이 봉인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이곳이다."
게임 시간으로 1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이곳이 그곳인지 헷갈릴 정도로 변해 있었다.
"어디 용의 심장 시간을 한번 확인해볼까."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1분 08초.
……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58초.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57초.
그동안 게임에 접속해 있지 않아서 그런지 벌써 17일이라는 시간이 다 지나 있었고 이제는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10초.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9초.
……
-용의 심장 완성까지 남은 시간 1초.
-용의 심장이 완성되었습니다.
"문을 열어볼까."
범려가 자신의 오른손을 봉인된 입구를 향해 내밀자 그동안 감추어졌던 동굴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즈야, 들어가자."
"응."
두 사람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해골 병사들은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주인을 봐서 반가운지 몸을 웅크리고 있던 벽에서 튀어나와 범려를 맞이했다.
"장군님!"
제일 먼저 범려를 맞이한 녀석은 해골 부장이었다.
"그동안 문제는 없었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 용의 심장을 구경해야겠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범려는 해골 부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마법사들과 대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용의 심장을 보았다.
"다이아몬드인가?"
용의 심장은 순수한 마나의 결정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결정체라서 겉보기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처럼 보였다.
"어머나, 아름다워라."
로즈는 용의 심장을 보더니 그 영롱한 빛에 매료되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단 심장을 인벤토리에 넣어야지."
-용의 심장 3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용의 심장
1천 년간의 길고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마나를 주입해서 만들어진 결정체이다. 진짜 용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데 있어서 주의를 요한다.
"헉! 용의 심장을 3개나."
비법서에는 분명 무작위로 1~3개 획득한다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 용의 심장이 3개가 나올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후후, 이제 용을 만들어볼까?"
범려는 지금도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져 있는 용의 뼈를 보면서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지만 그걸 방해하는 존재가 하나 등장했다.
"범려 님!"
범려는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찾는 아르테미스의 목소리에 잠시 손을 놓았다.
"안녕하세요, 아르테미스 님. 무슨 일이십니까?"
"큰일 났어요."
"큰일이요?"
게임에서 NPC가 다급할 일은 거의 없다. 그것도 게임에서 부활을 담당하는 NPC가 황급하게 움직일 일은 전혀 없다.
이런 상황에 범려를 찾는 거라면 안 봐도 뻔하다.
'퀘스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