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그 속에 빛나는
일정 지역에 토템이 박히면서 오크들이 그 주변을 중심으로 진을 구축했다.
"취익! 덤벼라! 정령들아!"
"으하하! 바람의 칼날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마!"
슈리엘은 양손에 엄청난 공기를 모으더니 그걸 압축하고 압축해서 오크들을 향해 날렸다.
"죽어라! 오크들아!"
"취익!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슈리엘이 날린 공격이 오크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맹렬하고도 날카로운 바람이 한 줄기의 산들바람처럼 약하고 힘없이 바뀌어버렸다.
"아니!"
"취익! 오크들이여! 토템 화살을 쏴라!"
오크들은 화살에 기이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화살을 재더니 그 우람한 팔뚝으로 활을 힘차게 당겼다.
쉬이익! 쉬이익!
오크들의 활 실력은 형편없지만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었다.
"흥! 이따위 화살은… 크윽!"
슈리엘은 바람의 힘으로 화살들을 날려 버리려고 했지만 화살에는 무슨 힘이 깃들었는지 정령의 힘을 뚫고 들어와 슈리엘의 몸에 정확히 꽂혔다.
"크악!"
비단 슈리엘만이 아니라 주변에 많은 바람의 정령들이 화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취익! 용맹스런 오크들이여! 적에게 우리의 힘이 통하고 있다. 전진하라!"
"와아-!"
"정령들이여! 후퇴하라!"
슈리엘은 그나마 상황 판단이 빠른지 일단 정령들을 뒤로 물리며 다른 정령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음, 슈리엘이 당하다니. 오크들이 우리와 싸우기 위해 단단히 준비를 했어."
물의 최상급 정령 시큐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클클, 바람의 정령들 덕분에 오크들이 무얼 준비했는지 대략 짐작이 가는군."
다른 정령들은 오크들이 토템을 이용해 정령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토템을 부수는 게 먼저겠어."
"그건 이 클레이한테 맡겨라. 땅속에서라면 그 어떤 마법도 침범하기 힘드니까."
"그래도 조심해, 클레이. 아무래도 저 토템은 단순한 토템으로 보이지 않거든."
"주의하도록 하지."
클레이는 땅의 정령들을 이끌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취익! 용맹한 오크들이여, 토템을 옮겨라! 전진한다!"
"취익! 토템을 옮겨라!"
아만타쉬의 명령이 빠르게 전달되자 오크들은 토템을 전진 배치하며 앞으로 나왔다.
그사이 슈리엘은 진영으로 돌아왔다.
"젠장! 오크들이 이런 무기를 준비해오다니."
"슈리엘 네 덕분에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아냈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나서지 않는 것인데. 다음에는 시큐엘 너와 같이 나가지."
"나도 바라는 바다. 물과 바람은 상성이 나쁘지 않으니까."
우르릉.
"토템을 땅속 깊이 묻어주마."
클레이는 땅의 정령들을 이끌고 오크들이 박아놓은 토템을 없애버리려고 땅을 흔들었다.
"취익! 땅이 흔들린다! 토템을 지켜라!"
오크들은 토템을 자기 목숨처럼 생각하는지 몇 명이 달려들더니 그걸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취익! 이걸 놓치면 우리는 다 죽는다!"
정말 오크들의 단결력 하나만큼은 정령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흥!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칼날 같은 바위에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클레이는 땅속에서 날카로운 바위를 들어올리려 했지만, 토템 가까이에서는 그 힘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이런!"
클레이는 자신의 힘이 토템에 미치지 못함을 한탄했다.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물건인지는 몰라도 정령들에게는 절대적인 위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육탄 돌격밖에 없다."
시큐엘이 모든 정령들을 동원해 육탄전을 펼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하자 다른 정령들도 그 말에 수긍을 했다.
"클클클, 육탄전은 정말 좋은 거지. 한판 신나게 벌여 보자고."
이그니스는 불의 정령답게 화끈하게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럼 쇼 타임을 시작하자!"
모든 정령들이 오크들을 잡기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내자 본격적인 난전이 벌어지고, 땅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령들도 튀어 올라와 오크들의 발목을 잡으며 전투에 참여했다.
"나의 화끈한 불 맛을 봐라!"
화르르!
기본적으로 가장 전투적인 불의 정령들은 입에서 불을 뿜으며 공격을 펼쳤다.
"어디 오크들의 코와 입을 물로 막으면 어떻게 될까."
물의 정령들은 스스로 오크들이 숨을 못 쉬게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취익! 수, 숨이……."
"취익! 다들 목걸이를 걸어라!"
오크 병사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엄지손가락만 한 토템을 목걸이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히, 힘이……."
하급 정령들은 토템의 힘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하지만 중급 이상 정령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취익! 하급은 내버려 두고 중급 이상의 정령들을 처리해라!"
하급 정령들은 아무리 많아도 토템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만 있다면 금방 무력화시켰다.
"취익! 이제 정령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공격!"
전투는 일방적으로 오크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령들이라고 해서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시큐엘, 준비됐어?"
"물론이지."
"그럼 시작하자."
물의 최상급 정령 시큐엘과 바람의 최상급 정령 슈리엘이 하늘 위로 올라가더니 두 정령이 한데 엉키기 시작했다.
우르릉!
두 정령이 힘을 합치니 하늘에서는 검은 먹구름이 생기면서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취익! 대장, 바람이 너무 거세서 움직이기 힘듭니다."
"취익! 정령 녀석들 이런 방법을 생각해내다니."
단 두 정령의 힘으로 인해 오크 군대의 진군이 더뎌졌다. 더군다나 이런 비바람에서는 화살도 날리기 어렵다.
"슬슬 허리케인을 만들어볼까."
"얼음도 만들어야지."
하늘에서 오크들을 바라보고 있던 두 정령은 드디어 오크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취익! 허리케인이다!"
"취익! 우박이다!"
거대한 허리케인과 날카로운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지자 오크들은 정령들의 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토템 주변으로 모여라! 살기 위해서는 토템 주변에 있어야 한다."
아만타쉬는 오크들을 토템 주변에 모이도록 했다. 그래야만 정령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후후후, 그깟 토템은 대자연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거대한 폭풍의 시작은 정령들로부터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순수한 자연의 힘이 결합되어 그 힘이 더욱더 거대해졌다.
"취익! 오크 살려!"
정령들이 만든 허리케인은 정말 대단했다. 허리케인 주변에 있던 오크들은 여지없이 하늘 위로 떠올라 날아갔고 멀리 내던져진 오크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취익! 이건 어떠냐!"
아만타쉬는 갑자기 그 묵직한 토템을 들면서 힘차게 폭풍이 몰아치는 중심부를 향해 던졌다.
던지는 힘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폭풍의 중심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 물과 바람의 정령이 있는 곳으로 정확히 던져졌다.
"헛!"
갑작스럽게 날아온 토템 때문에 두 정령은 황급히 떨어졌다.
"취익!"
아만타쉬가 던진 토템 때문인지 사납게 몰아치던 허리케인과 얼음 덩어리가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나왔다.
"취익! 용맹한 오크들이여! 돌격!"
"와아-!"
콰쾅!
오크들이 돌진을 하려던 찰나 땅이 요동치면서 불기둥이 솟구쳤고 거기서 솟아나오는 용암에 오크들은 기겁을 했다.
"취익! 용암이다!"
"피해라!"
하지만 정령들이 오크들을 몰살시키려고 곳곳에 용암을 분출시키며 길을 막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오크들의 눈에서 결연한 의지가 표출되었다.
"취익! 내가 길을 뚫겠다!"
한 용맹한 오크가 커다란 토템을 하나 짊어지더니 그대로 용암이 불출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클클클, 죽으려고 달려오는구나."
이그니스는 혼자 토템을 짊어지고 오는 오크를 보고 웃었지만 이내 그 웃음이 싹 사라졌다.
"취익! 오크들의 영광을 위해!"
쾅!
그 오크가 온몸을 투신해서 용암이 흐르는 곳을 토템으로 때려 막자 토템의 힘이 발휘되면서 주변에 용암이 순식간에 딱딱한 돌로 변해버렸다.
"취익! 빠져나가자!"
오크들은 동료의 희생을 발판으로 용암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벗어난 후 토템도 회수했다.
"끙!"
이그니스는 오크들의 단결력과 희생정신에 할 말이 없었다.
"취익! 동료들의 복수를 하자!"
"취익! 정령들을 몰아내자!"
오크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정령들을 자극할 정도로 대단했다.
"빌어먹을 오크들! 이런 방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
최상급 정령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
"돌격!"
오크들이 달려오는 사이에 하급 정령들은 삼삼오오 모이더니 최상급 정령의 명령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끼아악! 쾅! 쾅!
"크악!"
"끄르륵."
오크들은 하급 정령들의 자폭 공격에 맥을 못 추고 쓰러지고 말았다.
"취익! 빌어먹을 정령들!"
정령들은 여기서 자폭 공격을 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 몸이 재구성되기를 기다리면 된다.
대신 차원을 넘으려면 정령왕들이 다시 한 번 엄청난 힘을 쏟아내야 하기 때문에 돌아올 확률은 없다고 봐도 된다.
"끙!"
정령들도 이런 방법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크들의 힘이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서로 희생을 치르면서 전투는 계속되었고 이내 하급 정령들은 모두 다 자폭 공격을 하는 데 동원이 되었다.
남은 것은 중급 이상의 정령들뿐인데 그들은 숫자가 겨우 5천이 못 되었다.
"취익! 죽어간 오크들을 위해!"
"취익! 오크에게 영광이 있으라."
오크들은 2만이 조금 넘는 숫자가 남았지만 그 기백은 4만이 있을 때보다 더 강해져서 정령들에게 끝없는 분노를 터트리며 돌진에 돌진을 거듭했다.
"우리도 육탄전이다!"
정령들도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오크들과 같이 육탄전을 벌였다.
정령들은 중급 이상만 되어도 웬만한 전사들 못지않을 만큼의 생명력과 공격력을 자랑한다. 그런 숫자가 5천 정도가 되기에 오크들과는 무리 없이 싸울 수 있다.
"크악!"
"크어어어~"
정령들은 자신의 주변에 오크들의 시체를 쌓아놓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보여 주었고 오크들은 그런 정령들을 잡기 위해 개미 떼처럼 달려들었다.
"처절하군."
대천사 제루엘은 두 종족의 전투가 마치 천사들과 악마들 간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오크들을 정령들과 싸우게 하기를 잘했지. 저 오크들이 천사들과 싸웠다면 이겼을지라도 심각한 피해를 면치 못했을 거다."
제루엘은 전황을 정확히 보았다. 만에 하나 오크들이 천사들에게 적의를 드러냈다면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했을 것이다.
"슬슬 악마들도 정보를 입수하고 우리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을 텐데."
제루엘은 아직까지 가만히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악마들이 걱정이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지금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음, 모르겠군."
제루엘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는지 전투 지역을 벗어나 천사들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돌아갔군."
제루엘이 사라진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둠의 기운이 일어나더니 악마가 나타났다.
"나와라."
그 악마의 뒤로 다른 수많은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아스모테 님,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오크들을 쓸어버려라. 정령들은 살려 주고 말이야.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아군이 될 테니……."
아스모테는 판데모니움에서 보물을 빼앗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발령받은 악마다.
그는 이미 천사들이 오크들을 이용해 정령들을 없애버리고 오크들과 힘을 합쳐 악마들을 토벌하려는 속셈을 눈치 챘다.
"제루엘, 너는 너무 작전을 성급하게 짰어. 차라리 내가 눈치 못 채게 했어야지. 쯧쯧쯧."
원래대로 따진다면 이렇게 될 거라 예상을 한 존재는 범려다. 그리고 천사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로즈가 그들을 설득한 것이다.
결국 모두 범려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악마들이여! 오크들을 쓸어버려라!"
악마들은 오크들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는 닥치는 대로 오크들을 학살했다.
"취익! 악마들이다!"
"취익! 이런!"
오크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악마들에게 제대로 저항을 못해보고 죽어나갔다.
"취익! 진형을 갖추고 악마들을 상대하라!"
"네놈이 이곳의 사령관이구나!"
갑작스럽게 아만타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악마는 기습을 감행했다.
"취익! 더러운 악마 놈……."
"죽어라!"
하지만 아만타쉬는 악마에게 잡힐 만큼 녹록한 오크가 아니었다.
"배쉬!"
한눈에 봐도 묵직한 양손 검을 들고는 악마를 상대하는 데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표현이 안 된다.
"아무리 미개한 오크라도 이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라서 만만치 않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만타쉬 주변에 6명의 악마들이 더 나타나면서 오크들의 사령관을 확실히 죽이려고 했다.
"죽어라!"
악마들의 주변에 둘러싸인 아만타쉬는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취익! 대장이 죽었다!"
오크들은 아만타쉬가 죽자 큰 혼란에 빠졌다. 지휘 체계는 엉망이 되고 그렇게 끈끈한 단결력과 희생정신은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오크들이 무너진다!"
지휘관이 죽은 오크 군대는 정확히 10분도 안 돼서 그 많은 숫자가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클클클, 오크들이 드디어 죽었군."
"이그니스, 하지만 악마들이 나타났다."
"오크들의 토템이 없다면 우리가 해볼 만한 싸움이다. 걱정 마라."
정령들은 오크들의 토템을 다 부숴버려서 더 이상 힘의 제약을 받을 것이 없다.
"악마들아, 어서 와서 한판 붙자!"
"난 너희들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단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러 왔다."
"다들 조용해봐. 이봐, 악마, 중요한 사실이라니. 무슨 말이지?"
물의 최상급 정령 시큐엘은 중요한 사실이라는 말에 다른 정령들을 진정시키며 악마에게 다가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오크들이 너희들을 공격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유? 누군가 오크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건가?"
"당연하지. 그게 누구일 것 같나?"
시큐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천사들이군."
"그렇지. 신의 이름이라는 이유로 가증스러운 위선을 떠는 천사들이지."
"잠시 다른 정령들과 이야기할 시간을 주게."
"물론이지. 마음껏 상의하도록 어차피 결과는 이미 나와 있지만."
시큐엘은 다른 정령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답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와 있었다.
"악마,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당연한 거 아니겠나. 정령들과의 동맹이지."
"좋다. 수락하지."
이렇게 악마들과 정령들의 동맹이 맺어졌다.
"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이렇게 됐나."
범려는 영혼의 천사 레벨 업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상황이 이미 끝나 있음을 확인했다.
"뭐, 악마들과 정령들이 동맹을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
멀리서 망원경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행동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남은 것은 로즈를 어떻게 천사들의 틈바구니에서 빼내오느냐 하는 것인데……."
분명 이번 전투가 벌어지면 천사들의 필패(必敗)다. 저 강력한 일족들을 상대하려면 천사들의 숫자가 부족하다.
"음, 영혼의 천사 레벨이 겨우 170밖에 안 되는데 걱정이네."
남은 3개 종족을 쓸어버리고 와서도 레벨 190이 안 되는 게 아쉬웠다. 더군다나 악마들은 아무리 봐도 레벨이 250은 가뿐하게 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곳에는 더 이상의 몬스터는 없다."
그 많던 40여 종족이 세 종족만 남아 있으며 36개의 종족이 범려의 손에 몰살당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였던 오크들은 악마와 정령들의 손에 당하고 말았다.
"차후에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내가 힘들어지느냐, 아니면 편해지느냐의 차이겠군."
이제 범려는 천사들이 최대한 활약을 해주기만을 바랐다.
"잘돼야 할 텐데."
사실 천사들이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로즈가 끝까지 살아남아 천사들에게 힐을 해주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로즈의 실력이라면 팀원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었으니 아주 끈질기게 버틸 것이다.
* * *
한편 천사들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악마들이 정령들을 도와 오크들을 몰살시킨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이런! 오크들이 몰살당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오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건데!"
천사들은 그제야 후회를 했지만, 그거야 정말 때늦은 후회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 비상 소집령을 내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제루엘이 천사들에게 소집령을 내리자 정찰을 하던 몇몇 천사들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무장을 한 채 대기하게 되었다.
"제루엘 님!"
"로즈 사제, 마침 잘 왔네. 그렇지 않아도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악마들이 정령들과 같이 동맹을 맺어서 온다는 것은 다른 분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만 말씀해주십시오."
"하하하,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지. 후방을 맡아주게.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천사들이 다치면 치료를 부탁하네."
"신을 섬기는 사제로서 당연한 직무입니다."
로즈는 악마들이 몰려오는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사제의 역할이란 게 어디를 가든 똑같기 때문이다.
'후, 범려가 때맞춰서 올까.'
범려는 지금까지 상황을 계속 보고 있는데 때맞춰서 오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시기를 나름대로 재고 있을 뿐이다.
"제루엘 님, 악마들이 왔습니다."
"벌써 오다니, 제법 반응이 빠르군. 지금 당장 악마들을 맞이하러 간다."
"예!"
천사들은 전원 바깥으로 나오더니 악마와 정령 동맹군을 바라보았다.
"캬캬캬, 위선자들이 전부 다 모였군."
"아스모테!"
"캬캬캬, 오랜만이다, 제루엘. 그동안 별 탈 없이 지냈나 보군. 하지만 이를 어쩌지. 오늘은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 같은데."
악마 군대 사령관 아스모테는 날카로운 웃음을 지으면서 제루엘을 비웃었다.
"내 여기서 죽더라도 네놈은 꼭 죽이고 죽을 것이다."
"캬캬캬, 그게 마음대로 되면 나보다 네놈이 먼저 죽었을 것이다."
제루엘은 검을 들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신의 이름으로 널 응징하겠다!"
"해볼 테면 해보라니까."
"공격!"
악마 & 정령들의 동맹군과 천사들의 대결이 펼쳐졌다. 전투는 시작부터 갖가지 마법이 난무하면서 주변이 어지럽게 변했다.
"이런, 전투가 치열하기 그지없네. 이런 데서는 로즈가 조금 위험한데……."
범려는 로즈 걱정을 하면서도 악마들의 뒤쪽으로 조심스럽게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영혼의 천사."
"예, 장군님."
"너 번개만큼 속도를 내는 거 가능하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소리보다 2배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좋아. 저기 사제 보이지? 내가 지시하면 바로 낚아채서 이곳으로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범려는 천사들이 악마들에게 당하는 것보다 로즈가 우선이었다.
"어디 보자. 생각보다 천사들이 잘 버티는데."
천사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동맹군을 상대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래봤자 아르테미스가 데리고 있는 해골들보다 더할까."
지금 생각해도 아르테미스 밑에 있는 친위대는 악마들을 간식거리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다.
"후, 그러고 보니 영혼의 천사가 전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
범려는 영혼의 천사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 후방에서 대기만 시켰다. 그러니 전투 장면은 고사하고 스킬을 쓰는 장면도 구경하지 못한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을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리지, 뭐."
전투가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로즈가 할 일이 바빠졌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힐을 필요로 하는 천사들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힐! 힐! 생명의 샘!"
"크윽!"
"힐!"
정말 사제 중에서 힐 마법을 이렇게 잘하는 사제도 없을 것이다.
"신의 가호! 빛의 숨결!"
-신의 가호가 내려집니다. 체력이 150 증가합니다. 30분간 지속됩니다.
-빛의 숨결이 내려집니다. 모든 공격 형태의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20분간 지속됩니다.
"우오-! 힘이 솟는다!"
로즈의 버프가 터지면서 천사들은 갑자기 몸에 힘이 솟구치는지 함성을 질렀다.
"빛의 구속!"
악마나 언데드 계열 몬스터를 일시적으로 묶는 마법이 발휘되자 잘 움직이던 악마 하나가 우둑 멈춰버렸다.
"이 기술 얼마 만에 쓰는 거야."
대략 오래전에 썼던 기술로 기억한다.
"하앗!"
"크악!"
천사 하나가 구속에 걸려 있는 악마를 검으로 휘둘렀는데 그게 치명타로 터졌는지 녀석의 생명력이 쭉 떨어지고 말았다.
"크악! 천사 살려!"
"힐! 힐! 바쁘다, 바빠!"
로즈는 점점 힐을 하는 게 힘들어지자 속으로 범려를 찾기 시작했다.
'범려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나 힘들어 죽겠는데. 오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둘 거야.'
천사들은 로즈의 힐에 질기게 버티더니 정령들과 악마들을 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누가 신성력을 마구 뿌리나 했더니 이런 도둑고양이가 하나 있었구나."
악마 하나가 로즈를 발견하고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버리려 하자 그 순간 검 하나가 악마를 향해 날아왔다.
캉!
"장군님의 명령에 따라 너를 처단한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황금빛의 반투명한 날개를 가진 영혼의 천사였다.
범려는 로즈가 위험한 것을 보고 급하게 영혼의 천사를 보내어 저 악마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후우, 때맞춰서 도착했네."
범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 악마를 빨리 처단하지 못하면 천사들이 눈치 챌 텐데."
영혼의 천사는 다른 천사들과 확연하게 비교가 될 정도로 반투명한 날개에 전신을 감싸고 있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천사 주제에 감히 날 가로막다니 죽어라!"
"……."
캉! 캉! 쉬아악!
영혼의 천사는 순식간에 악마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크억! 어떻게……."
"신성한 불꽃!"
화르르!
신성한 불꽃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면서 악마를 뒤덮어버리더니 그 뒤로 화려한 불꽃이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 다른 천사들은 영혼의 천사를 인식하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적들과 싸우느라 바빴다.
"이놈!"
캉! 캉! 캉! 화르르!
영혼의 천사는 신성한 불꽃 스킬 쿨 타임이 다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스킬을 또 시전했다. 이것은 소울 블레이드에 달려 있는 옵션으로 발동된 스킬이었다.
"으윽!"
다시 한 번 검을 몇 번 섞더니 이번에는 검을 막았는데 신성한 불꽃 스킬이 시전되었다.
이번에는 방어구에 달려 있는 옵션으로 반격을 하면서 스킬이 자동적으로 시전을 한 것이었다.
이걸 보고 있던 범려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신성한 불꽃 스킬이 이런 거였구나!"
전방 15미터를 부채꼴 모양으로 신성한 화염으로 뒤덮게 만드는 스킬이었다.
방향은 검을 휘두르는 방향으로 잡혀 있지만, 가만 보니 아이템에 달려 있는 능력치 때문에 스킬을 시전하고도 계속 시전되었다.
연이어 터지는 불꽃에 악마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영혼의 천사가 아니었다.
"어딜 가느냐! 장군님의 명령으로 너의 목을 가져가야 한다."
"크윽!"
궁극의 양손 검 숙련 스킬 덕분에 영혼의 천사가 휘두르고 있는 그 묵직한 양손 검은 펜싱처럼 날카롭고 빠르게 움직였다.
"이대로 나 혼자 당할 수 없다."
"동료를 부를 생각이라면 넌 이미 늦었다."
영혼의 천사는 소울 블레이드를 힘차게 악마의 가슴 한복판에 찔러 넣었다.
"컥!"
공격이 치명타로 터졌는지 악마의 생명력이 주르륵 빠져나갔다.
영혼의 천사의 레벨은 170. 능력치는 아이템으로 도배를 해서 200레벨을 조금 넘기기는 했지만 250레벨을 가뿐하게 넘는 악마를 너무나 손쉽게 다루는 모습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여기서 내가 이대로 죽을… 크억!"
"머리는 베었다. 나머지는 필요 없다."
영혼의 천사의 손에는 어느새 악마의 머리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걸 들고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뭐, 뭐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즈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무언가 번쩍번쩍하더니 악마의 머리가 베이고 그 머리를 들고 있던 영혼의 천사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서, 설마?"
로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작은 점으로 보이는 것들이 하나 있었다.
"저기 있잖아. 그런데 왜 안 와!"
로즈는 범려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전투 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음, 이게 악마의 머리인가. 뭐 특별한 것은 없네. 갔다 버려라. 별로 쓸모가 없다."
범려는 악마의 머리를 쓰레기 취급해버렸다. 그래도 해골들은 그 쓰레기를 갈기갈기 찢어서 땅속에 파묻어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로즈가 지금쯤 내가 있는 곳을 발견했을 텐데."
범려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그녀의 응징이다.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살아 있으면 귀찮은 일이 생기니 갈 수도 없고……."
천사들이 있으면 그들은 로즈를 앞세워 범려의 퀘스트를 저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할 범려가 아니기에 지금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로즈야, 미안. 조금만 참아."
범려가 마음속 깊이 사죄하고 있을 때 전황이 점점 동맹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로즈의 마나가 거의 바닥이라는 점이었다.
"마나 포션이 없어!"
그 많던 마나 포션을 거의 다 소모해버리고 남은 것은 텅텅 비어 있는 인벤토리뿐이었다.
"로즈 사제, 힐을 다오!"
천사들은 여기저기서 힐을 달라며 애원했지만 마나가 없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나가 없어요! 혹시 마나 포션 있나요?"
"……."
천사들이 그런 걸 들고 다닐 이유가 없다.
"없어요? 그럼 힐을 어떻게 줘요."
이런 문제는 마나가 문제지 로즈를 탓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천사들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억울하다면 마나 포션을 로즈에게 주면 된다.
결국 마나 포션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천사들은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싸늘한 시체가 되는 천사들이 속출했다.
"가증스러운 위선자들을 죽여라!"
"크윽!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다."
생명력이 거의 다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천사 한 명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마법을 부렸다.
"나의 힘을 동료들에게!"
로즈가 없어서 생명력을 회복할 길이 없었는데 천사 한 명이 동료들에게 희생 마법을 부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흥! 겨우 생명력 회복시켜 줬다고 해서 우리들을 이길 거라 생각하는구나."
악마들은 다시 맹렬하게 몰아붙였고 천사들은 자신이 죽을 때마다 희생 마법을 부리면서 동료들의 생명력을 가득 채우고 죽었다.
"이걸로 좀 버티겠는데."
로즈는 천사들이 동료들의 희생 마법을 통해서 생명력을 채우는 모습을 보고 꽤나 오랜 시간을 버틸 거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천사들은 정말 질기게 버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사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어떤 의미로 마지막 저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범려는 천사들이 죽어가는 데 왜 안 오는 거야!"
로즈는 애가 탔지만 범려는 절대로 천사들이 다 죽을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천사들이 죽어가는 동안 악마들이나 정령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 많던 악마들은 숫자가 겨우 1천을 넘기는 수준이었고 정령들도 1천이 약간 못 되는 숫자였다.
반대로 천사들의 숫자는 대략 300명이 안 되었다.
"오래 버텼다. 하지만 남은 적들과 함께 지옥으로 가자꾸나!"
"신의 이름으로!"
천사들은 마지막 발악을 끝으로 남은 300명도 모조리 죽어버렸다.
"흐흐흐, 이제 네년 하나만 남았구나."
로즈는 악마들의 손에 죽는 게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시 부활하니까. 문제는 범려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나 여기 있다!"
범려는 해골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크게 소리쳤다.
악마들과 정령들은 하얗게 깔려 있는 해골 병사들을 보면서 웃었다.
"하하하! 저 빈약한 해골들은 뭐냐."
아스모테는 해골 병사들을 보면서 별거 아닌 녀석들로 치부했다.
"네놈 눈에는 그렇게 보이냐? 잘됐군. 멍청해서 말이야."
"이놈!"
바로 역습을 가하는 범려의 도발에 아스모테는 발끈하면서 화를 냈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희들은 나한테 안 돼."
"감히! 저런 쓰레기 같은 해골 병사 따위를 믿고 설치다니. 네놈을 여기서 죽여주마!"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 나도 말이야, 한 번쯤 몬스터들한테 죽고 싶었는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단 말이야."
범려는 악마들과 정령들을 대상으로 녀석들의 화를 돋웠다.
"그래, 네놈의 몸뚱이는 내 불덩이를 견딜 수나 있는지 궁금하구나!"
불의 최상급 정령 이그니스가 앞으로 나오면서 땅바닥도 녹일 만큼의 열기를 내뿜었다.
"크크크, 열기만 내뿜으면 뭐 하나. 그걸 직접 나에게 내뿜어야지. 똥 폼 잡기는."
"인간 놈이!"
이그니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범려에게 달려 나가자 뒤에 있던 마법사들이 나오면서 얼음 계열 마법인 프로스트 노바를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