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 회 -- >
조민우는 보통 같은 전공의 다른 대학생이 한국 번역본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과는 달리 그냥 원어로 된 전공 책을 넘기면서 꼼꼼하게 책 내용을 보았다.
옛날 같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공 문제는 둘째였다.
일단 해석이 잘 안 되니까.
그것이 더 큰 문제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얼마나 머리를 심하게 혹사(?)시켰는지 보는 족족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아니 솔직히 이렇게 책으로 볼 필요조차도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니까.
그냥 관조? 완미? 한다는 것이 보다 정확했다.
‘그렇다고 정원에 누워서 잠만 잘 수도 없잖아?’
하지만 조민우는 순간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다가는 욕만 잔뜩 들은 것이 분명하기에 그냥 지금 하는 것처럼 책에만 몰두했다.
당연히 요즘 들어서 그를 아는 이들이 간간히 아는 척 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 선배님, 열심히 공부하시네요.”
그는 힐끗 자신의 옆에 떡 하니 와서는 가방을 툭 올려놓고는 아예 얼굴을 들이밀고는 자신이 보는 책 내용을 쭉 흩어본 후에 고개를 질색했다.
“아, 끔찍하네요. 도대체 민우 선배님은 왜 이렇게 이상한 책(?)을 자꾸 보는 겁니까? 한국 사람이 한글로 된 책을 봐야죠! 제가 복사본 하나 빌려줄까요?”
김민우는 힐끗 자신에게 툴툴거리는 김경민을 잠깐 쳐다본 후에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그래도 저놈은 그나마 자신을 제대로 선배대접해주는 후배 중에 하나이기에 뭐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공부하는 옆에 와서 이렇게 겁 없이 행동하는 것을 그냥 두기에는 좀 그랬다.
“경민아, 실없는 소리는 그만 좀 하고 저쪽으로 좀 물러가라. 훠이, 훠이, 경민아 물러가거라!”
드르륵.
하지만 김경민은 오히려 의자까지 떡 하나 가져와서는 그의 옆에 턱까지 받치고는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하나하나지적해주기 시작했다.
“물론 선배가 기본적인 원리부터 보려고 앞부분을 보는 것은 이해가 되요. 하지만 그런 부분을 시험에 절대로 안 나옵니다. 특히 최준 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아예 문제를 자신이 만들어 냅니다.”
조민우는 생각도 못한 지적에 그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흐음, 그래?”
“제가 선배님이 딱해 보여서 정말 조언하는 겁니다. 거기 나오는 대로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물론 시험 치면 3-4개 문제는 나옵니다. 하지만 점수 할당이 그렇게 높지 않아요. 기껏해야 5점, 8점 정도일 걸요?”
뜻밖의 이야기였다.
아직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해서 알게 된 상황이기도 했다.
또한 김경민은 다른 녀석과는 달리 꽤 실력이 있는 것도 한 몫을 차지했다.
“그런 경우에는 사실 오히려 그런 개념적인 것보다 뒤에 연습문제 위주로 자꾸 푸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감이 쉽게 오거든요. 실제로 그런 문제가 꽤 많이 나와요.”
조민우도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무시할까 생각했지만 그냥 흘려듣지는 않았다.
그도 사실 연습문제를 어차피 풀려고 한 마당이었기에 이제는 호기심을 가지고 한 번 쭉 흩어보았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를 느끼고는 이내 눈빛을 반짝였다.
연습문제가 분명히 앞 장에 나오는 내용과는 틀린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출발은 기본적으로 앞 장의 기본 개념에서 시작한 것이다.
만약 기본 개념을 수박 겉핢기로 이해하고 있다면 오히려 김경민의 이야기가 정확히 맞았다.
실제로 대다수가 이런 경우에 들어갔다.
그것은 그만큼 반도체 소자의 근원을 들어가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은 탓이다.
하지만 조민우는 달랐다. 이미 앞부분에서 다룬 반도체 소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완벽하게 암기와, 더불어서 이해력도 일정 수준을 넘어간 지가 오래였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도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본 내용 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을 보완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 탓이다.
‘신기하네!’
물론 전공책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다만 전공 책에 전체에 걸쳐서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부분들이 하나 둘씩 모여서 그런 것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책 저자가 전하고자하는 그 지식이었다.
바로 행간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경민은 물론 이런 그의 심사를 알 리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자신의 조언에 따라서 하나 둘 따라가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도 신바람이 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떻게 보면 노하우 일부를 하나 둘씩 털어놓았다.
“여기 연습 문제에 3-13에 보면, For a pnp transistor in the active region, what is the sign of Ie, Ic, Ib, Vcb, and Veb? 같은 문제를 잘 보면 이것은 방향을 의미하죠. 하지만 이것만으로 좀 부족합니다. 다음 문제가 실제적인 계산 더불어서 그런 감각을 좀 더 보완하는 것이니까요.”
“흐음.”
조민우는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닌 그는 말을 할 정도로 머릿속이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앞 장을 완벽하게 이해한 부분에 다시 한 번 필요한 지식들을 찾는 작업이 반복되자 골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암기하는 작업과, 그것은 다시 검색 후에 적용하는 작업은 엄밀히 말해서 별개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꽤나 의미가 있었다.
전공 책에 담겨 있는 아주 세밀한 뜻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것은 곧 지금 과제로 하고 있는 공용 프로젝트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회로 해석과, 시뮬레이션이라는 작업을 잘 보면 그렇다는 의미이다.
정확히 수작업을 통해서 회로 해석이 가능해야, 그 시뮬레이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니까.
그래야 시뮬레이션에서 필요한 매개 변수 값을 정확히 적용해서 필요한 결과 값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랬던가?’
조민우가 딱히 이런 결과를 알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김경민 덕분에 수월하게 이런 사실을 깨닫자 복잡한 시선으로 의기양양해 있는 그를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이놈이 자신이 자기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준 것인지 알고 저런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이런 모습이 마냥 좋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야아, 경민아, 너 선배님한테 너무 한 것 아냐?”
옆구리에 떡 하나 손을 얹은 채 자신을 구박하는 최현주의 모습을 보자 김경민은 찔끔해서는 자리에서 곧 바로 일어나버렸다.
“무, 무슨 소리야?”
최현주는 평소와는 확연히 달라진 쌀쌀한 얼굴로 냉정하게 소리쳤다.
“아무리 민우 선배님이 복학생이라서 앞부분을 좀 모르는 것이 있다고 그런 식으로 놀리는 투로 말하는 것은 아니잖아?!”
“미, 미안하다!”
“.......”
조민우는 솔직히 딱히 김경민에게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어떤 의도에서든 자신이 공부하면서 얻은 지식 일부를 전해주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그렇다고 저렇게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최현주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물끄러미 그녀가 하는 행동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김경민이었다. 그는 그녀가 두려운 것인지, 부담스러워서인지 잔소리를 몇 번 듣고 나더니 도망치듯이 휑하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옆에서 힐끗 지켜보는 이들 역시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현주에게 조심해야 지. 저 자식 된 통 걸렸다니까.
-경민이도 어쩔 수강 없군. 하긴 우리 과 여왕님에 함부로 대들었다가는 그냥 매장이니까.
-그나저나, 아니 우리 여왕님이 왜 저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거지.
-야아, 넌 보고도 몰라? 딱 보면 감이 안 오냐?
-뭐? 민우 선배? 설마? 이렇게 따끈따끈하면서 참신한 나 같은 애를 두고, 복학생 늙다리 선배에 관심을 가진다고?
“.......”
조민우는 옆 테이블에 앉아서 한창 다른 사람 리포터를 카피하고 있는 주제에 잘도 자신을 씹어대는 이들을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그는 굳이 그들을 구박할 필요가 없었다. 최현주가 이런 그를 대신해서 쌍심지를 켜고는 잔소리를 늘어놓은 탓이다.
“야아, 정석민!! 너 자꾸 헛소리 할 거야? 감히 하늘같은 선배님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 한 것 아냐?!!!”
“.......”
그들은 남자 망신을 다 시킨 후에 독기마저 가득한 소리에는 다들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는 쥐 죽은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원래 하던 리포터 표절(?)에 집중할 따름이다. 다들 최현주 성깔을 아는 지 꽤나 몸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조민우가 이런 최현주를 슬쩍 쳐다보고는 놀랄 정도였다. 그는 이제까지 그렇게 조신했던 그녀가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몰아치는 성격인지는 몰랐던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그녀의 반응은 조금 전과는 백팔십, 아니 삼백 육십도(?) 달랐다.
“선배님, 애들이 너무 버릇이 없어서 그래요. 좀 이해를 해주세요.”
“아, 그, 그래.”
조민우는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녀가 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최현주는 이런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 지 조금 전에 김경민이 앉았던 자리에 엉덩이를 떡하니 걸치고 앉아서는 그가 보는 전공책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 선배님은 원서로 공부하는 거에요?”
“응.”
“우와! 역시 선배님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보통은 다른 한국 번역본으로 공부하거든요.”
“흐음, 그래?”
“아무래도 원서는 영어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잖아요? 다들 그래서 일단 이해하기 쉬운 번역본을 구해서 보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하거든요.”
“나는 그것을 잘 몰랐어.”
“제가 한글 번역본 하나 빌려줄까요?”
조민우는 생각보다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는 최현주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거리는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학과 내에서 하는 행동만 보면 오히려 그 반대라서 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내심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법.
“아니 필요하면 이야기할게. 지금은 일단 봤던 거라서 계속 봐야 하니까.”
그냥 부담 없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한글 번역본으로 익숙한 최현주는 전혀 대수롭게만 들리지 않았다.
“우와, 선배님, 그러면 원서로 해서 이해가 하신 거에요?”
“아니 뭐, 이해를 한다기보다는 이해를 하려고 노력한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최현주는 이미 그가 얼마나 바쁜지 아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 입장에서 그가 회사 사장이기에 더욱 절감하는 사실이다. 굳이 저런 식으로 불필요하게 원서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냥 한글 번역본으로 보는 것이 공부하는 시간을 더 줄일 수가 있을 거에요. 성적이 그것도 그렇게 받는 것이 더 좋고요. 더욱이 공통 프로젝트를 하려면 앞 장은 완벽하게 이해를 해야 할 텐데요.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하면 시간이 되지 않을 텐데요?”
아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시시콜콜 이것저것 다 챙겨주는 최현주였다. 그렇다고 뭐 나쁘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녀의 이야기가 전부 맞아 들어간 것이 사실인 탓이다.
하지만 조민우가 지금에 와서 다시 한글 번역본을 본다? 한글로 다시 암기한다고?
‘그럴 수는 없지!’
“아니 지금은 괜찮아.”
물론 최현주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상황이야 어쨌든 그가 지금은 공통 프로젝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그와 개인적인 관계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감안해서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저도 선배님이 실력이 있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지금 그렇게 정석대로 공부해서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을 겁니다. 설마 이번 회로 이론 과목 날릴 생각은 아니겠죠?”
조민우도 지금까지는 그냥 후배들이라서 좀 봐주고 넘어간 것이 있었지만 이 말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도 엄연히 생각하는 바가 있는 탓이다. 더욱이 최현주에게 그런 식으로 의심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현주야.”
최현주는 갑자기 정색한 선배의 말에 찔끔했다. 조용조용해 보이는 조민우이지만 막상 속을 한 꺼풀 넘겨보면 얼마나 대단한 지 잘 아는 탓이다.
“네?”
조민우는 다소 부드러운 눈빛이지만,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분위기를 담아서 그녀의 두 눈을 뚜렷이 쳐다보았다.
“걱정 마.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 하지만......”
“나 못 믿어?”
못 믿냐고? 지금까지 그가 한 행동과, 결과만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고,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진 매력적인 과 선배였다. 가끔 하는 행동(?)도 보면 자신에 대해서도 꽤 적극적인 면모가 있어서 부담스럽기까지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