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 회 -- >
최현주는 그를 믿고, 안 믿고는 떠나서 카리스마에 질릴 정도였다.
‘뭐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민우 선배에게 관심을 보일 이도 없겠지만......’
“하아, 알았어요.”
“그러면 그냥 지켜 봐.”
이것이 다였다.
조민우는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원서 책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특히 김경민이 그에게 남겨준 조언은 그에게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존에는 그냥 단순히 암기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암기 수준을 넘어서서 책을 완벽하게 이해해서 응용할 정도의 수준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흐음, 이거 정말 대단하잖아?’
더욱이 최현주가 말해준 공통 프로젝트 관련해서 시뮬레이션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회로 이론 책에서 그런 소소한 부분에 다시 한 번 더 집중해 보았다.
역시 암기한 것과 이해한 것은 여기서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그냥 머릿속에 두고 넘어간 것도, 외부에서 자극을 받자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특히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이기에 실제적인 계산에 관한 것, 시뮬레이션 관련되는 것 역시 이제는 확연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랬던가?’
흥미가 생겼다.
당연히 시간은 더욱 빨리 흘러만 갔다.
다들 간이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는 이들 조차 자신의 여왕님이 한 추례한 복학생 선배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들 최현주 성격은 아는 탓인지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휴우, 부럽다고 해야 하나? 그 콧대 높은 현주가 저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었다니!’
더욱이 최현주도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정도로 예민한 여자는 아니었기에 더욱 손살같이 시간이 흘러갔다.
조민우도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무시한 채 계속 회로 이론에 몰입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서 대충 다 보았다고 판단한 순간에 이런 상황을 깨닫자 계속 여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눈을 크게 떤 채로 계속 올망돌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그제야 부담스럽게 느낀 탓이다.
힐끗.
그는 따가운 시선을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 계속 변화가 없자 간간히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오히려 최현주는 모른 척하고는 원서만 쳐다볼 뿐이다.
도대체 과연 제대로 이해를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니 저런 식으로 봐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모습이었다.
조민우는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그냥 포기해버렸다. 지금 당장은 그녀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먼저였다.
그렇다고 계속 보다가 한 마디 툭툭 혼자 중얼거리는 그녀를 무시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정말 민우 선배는 저게 이해가 되나?
“으음, 도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해?”
“아, 그냥요. 그런 식으로 원서를 읽는 것이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냥 내용만 이해하는 것만 해도 어렵거든요. 만약 이해가 되지 않는 글을 그런 식으로 계속 붙잡고 있다면 정말 시간 낭비잖아요? 영어 공부만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다른 것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남이야 원서를 보던, 말던 제3자가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녀에게 잔소리 늘어놓기도 참 곤란했다.
“그럭저럭 볼만은 해.”
“그래요? 그러면 정말 그 내용이 이해가 된다는 말이에요?”
조민우는 그냥 이대로 놔두면 다시 계속 물고 늘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응.”
“헉? 지, 진짜요? 우, 우와 선배님 영어 실력 짱인가 봐요?”
짱까지야 하겠냐? 그냥 몽땅 머릿속 암기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인데. 그렇다고 이런 말을 하면 괜히 잘난 척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대충 놔두면 두고두고 귀찮을 것이 너무도 뻔했다.
“그냥 하는 편이야.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좀 마. 너는 할 일 없어?”
“저요? 지금 당장은 한가한 편이에요. 민우 선배 공부하는 거나 도와주려고 했는데, 원서로 그냥 보는 중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이는 중.”
“.......”
그는 무슨 의도로 저런 소리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다시 힐긋 쳐다봐야 했다. 하지만 두 눈에 힘을 꽉 주고 개구리 왕눈이처럼 쳐다보는 고집쟁이 여인의 모습에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럭저럭 눈에 들어와.”
최현주는 생각보다 좀 철저한 편이었다.
“이 부분은 무슨 뜻이에요?”
조민우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꼭 찍어서 지적한 부분을 보고는 쭉 한 번 설명해주었다.
“The time which elapses between t1 and the time when the diode has nominally recovered is called the transition time tr. This recovery interval will .......이 부분 말하는 거야? 뭐 별로 어려운 내용이 아니지 transition time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니까. 사실 어떻게 보면 이런 부분이 쉽지가 않아. 옆에 보면 시뮬레이션에도 보면 이런 특성을 어떻게 주었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확연이 달라진다고 되어 있지? 아마 의미를 모르면 이런 특성을 반영하기가 어렵겠지?”
“.......”
최현주는 입을 살짝 벌리고는 다시 한 번 원서를 힐끗 쳐다봐야 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고야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조민우는 물론 무의식중에 자신이 잘난 척했다는 것을 알자 다소 겸연쩍었다.
“크흠, 뭐 대단한 것은 아냐. 다른 애들도 이 정도는 하잖아?”
다들 애들도 이 정도는 한다고? 그런 식이면 회로 이론을 날려먹는 애들 머리는 돌인가? 말을 해도 참 심하게 했다.
“하아, 선배님, 그것은 아니에요. 이 부분이 사실 이 과목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니까. 그래서 대부분 개념만 잡고 다들 넘어가잖아요? 이런 식으로 무식, 아니 세세하게 하게 전부 알 필요는 없죠.”
조민우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말투에 잠깐 째려봐주었다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거 뭐 계속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시시콜콜 다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물론 이렇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소 귀찮아 보이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 그만큼 관심을 가진 것이니까.
하지만 너무 지나친 관심은 역시나 부담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딱 부러지게 말하기도 어렵고 그냥 자신의 신념대로 말해주었다.
“그것은 하기 나름 아닐까? 나는 그래도 이번 공통 프로젝트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이론적인 계산과, 시뮬레이션적인 계산을 최대한 적용해서 그 관점의 차이를 알고 싶은 것이니까.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시뮬레이션 툴에서 이 매개분수 각각을 전부 설정을 해 줄 수가 있거든. 그런데 그 세세한 팩터에 따라서 전체 데이터 값이 미묘하게 차이가 나. 그런 점을 하나하나 보완해주면서 항목별로 체크해주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에 뭐라고 해야 할까? 최현주는 잠깐 무슨 말인지 해석부터 하고 나서야, 결국 수긍하고야 말았다.
“그것은.......맞아요.”
하지만 최현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힐끗 그를 째려봐 준에 내심 한 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을 누가 모른다는 말인가? 그런 식으로 회로 이론을 공부하면 아마 한 과목만 해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조민우가 이것을 모르느냐?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사업 시작 전만 해도 이런 사소한 것에서 그는 대학 교육의 한계를 느꼈으니까. 다만 그 때는 능력이 되지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지금은?
금반지가 이런 점을 해결해준 것이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자신의 말이 너무 원론적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크흠, 아니 뭐 내가 꼭 이런 식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 아냐. 사실 한글 번역본으로 공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나는 그렇게 하는 것도 귀찮고, 그냥 이대로 해도 크게 무리가 안 되니까. 그냥 하는 거야!”
“하아, 알았어요.”
최현주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지나친 간섭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고는 더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떠났느냐? 그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이 유심 있게 보는 능력 있는 남자 친구, 아니 어쩌면 만에 하나이지만 혹시라도 미래의 남편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계속 딱 달라붙어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아 이것이 얼마나 또 가시방석인가?
조민우는 원서에 집중하기 위해서 신경을 썼지만 옆에서 계속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자 영 껄끄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또 말을 걸면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알기에 일단 보는 회로 이론에 집중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이전에 시뮬레이션 툴을 잠깐 확인해본 결과에 따른 여러 가지 설정에 따른 것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회로 이론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자 눈에 확 들어온 탓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이 정도의 의미일 뿐이었느냐?
그것은 또한 아니었다.
조민우는 계속 회로 이론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귀여운 방해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서 결국 컴퓨터실로 향했다.
물론 최현주는 마치 귀여운 애완용 강아지 마냥 쪼르르 그를 따랐다.
“민우 선배, 어디 가는 거에요?”
이제는 일일이 이런 사소한 것까지 묻는 그녀가 귀찮기 보다는 귀엽기만 할 뿐이다.
“컴퓨터실.”
“어? 거기 왜요?”
“그거야 공용 프로젝트 관련해서 툴을 한 번 사용해봐야지.”
“아, 하긴 당연한 일인가요? 그러면 pspice를 해볼 생각이군요.”
“응.”
Pspice.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전기, 전자 및 디지털 회로를 설계할 경우에 회로 특성을 평가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회로를 직접 제작하여 실험가능 하지만, 여러 가지 회로 구성, 회로 해석, 계측장비, 및 경비로 인한 한계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해서 계산, 측정,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조민우는 자신이 봤던 원서에 적혀 있는 내용 일부 중에서 pspice 관련되는 소소한 내용마저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회로 설계에서 필수적인 사항이지.’
하지만 최현주는 이런 것까지는 확연하게 잘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시뮬레이션 결과 그 자체만 궁금한 탓이다.
“선배님은 Pspice를 잘 알아요?”
그는 물론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뭐 그것이 중요한가? 이미 회로 이론 책자 구석구석에 이런 내용 관련해서 언급된 것이 있었고, 그런 점은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확연히 이해한 상황이니까.
다만 간단하게 거기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녀를 위해서 소개해줄 필요는 있었다.
“회로 설계 관점에서 전자회로 시뮬레이션을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 바로 SPICE, 즉 Simulation Program with Integrated Circuit Emphasis이야. 이것을 통해서 어떻게 보면 트랜지스터의 동작, 과도 특성, 주파수 응답 등과 같이 너무 복잡해서 다양한 해석에 한계가 있는 복잡한 회로도 쉽게 해석할 수가 있으니까.”
최현주는 물론 건물 하나를 빠져나와서 다음 실험동 건물 계단을 오르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듣자 당혹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요?”
조민우는 뭐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는 상황이기에 머릿속에 떠오른 회로 이론 책자 내용 일부를 쭉 발췌해서 설명해주었다.
“저항, 콘텐서, 인덕터의 수동 소자와, 다이오드, Tr, FET의 능동소자에 대한 모델 역시 마찬가지야. 그렇게 해서 회로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손쉽게 할 수가 있어.”
“.......”
그는 그녀가 입을 다물자 힐끗 쳐다보았다.
“왜 이해가 안 돼?”
“아, 아니에요.”
그는 최현주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보이자 고개를 갸웃하고는 잠깐 회로 이론 책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짐작 가는 바는 없었다.
“뭐가 궁금해?”
최현주는 결국 자신이 의문을 가진 바를 털어놓았다.
“그, 그냥 좀 그런 이야기는 처음인 것 같아서요.”
“아 그것은 회로 이론 내용에 잘 찾아보면 전부 나오는 내용이야. 뭐 부분적으로 다 흩어져 있어서 문제지만 참고로 원래는 워크스테이션 이상 대형 컴퓨터에서만 사용 가능했지만 1984년에 MicroSim가 PSpcie를 소개하면서 PC에서 회로 해석이 가능해졌어. 특히 평가 버전은 노드 수가 64개로 제한은 하지만 꽤 유용하지. 이런 사실 정도는 알아야지. 이번 프로젝트는 쉽게 할 수가 있겠지?”
물론 워낙에 두꺼운 전공 서적이고, 교수가 해준 강의 중심으로 만 공부해서 학점만을 최고 목적으로 하는 최현주는 이렇게 불필요한 부분은 전부 건너뛰었기에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 그런 내용도 회로 이론 책에 나와요?”
조민우는 당연히 회로 이론 책 구석구석을 전부 암기해서, 이제는 거의 어느 단계 이상 이해를 한 수준이기에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당연하지.”
“.......”
하지만 최현주는 달랐다. 그녀는 아는 복학생은 상식적으로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으니까.
물론 조민우 역시 대충 자신이 말하고서야 너무 지나치게 주절거렸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발걸음 속도를 더 올렸다. 그녀 역시 도저히 호기심을 숨기지 못해서 후다닥 그의 뒤를 따랐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