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7 회 -- >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은 그냥 다 잊어 버렸다는 말인가? 불과 일 분 전만해도 다짐만 받는다고 했지 않은가? 그런데 뭘 시작해! 정성일 부장님 도대체 이것은 좀 아닌 것 아닙니까? 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정성일 부장 역시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인지 말을 살짝 돌렸다.
“크흠, 뭐 제가 사장님을 너무 압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하는 것 보면 너무 감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뭔가 좀 해야 할 일이라도 있으면 이러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조민우는 그렇지 않아도 한 가지 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결국 털어 놓았다.
“하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알아봐주시기 바랍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상대가 싫어해야 할 일건만 정성일 부장은 달랐다.
“오! 뭐, 뭡니까?”
그는 어차피 성격을 아미 알고 있기에 그냥 그런가 하고 넘겼다.
“혹시 캐드 툴에 대해서 들어보셨어요?”
“캐드 툴요?”
“전자 회로 해석 시뮬레이션 툴입니다. 보통 많이 사용하는 툴이 Pspice라는 툴입니다.”
“Pspice?”
정성일 부장은 생판 듣도 보도 못한 아이템이기에 의아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의 직장 경륜이 있고, 경험이 있기에 이것이 뭔지 정도는 어림짐작이 가능했다.
“아, 혹시 건축에서 흔히 사용하는 AutoCad같은 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정확합니다. 다만 그 용도가 건축이 아니라, 회로 설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겁니다.”
“?”
정성인 부장은 무슨 말인지는 알았지만 생뚱맞은 표정을 한 채 그를 잠깐 쳐다보았다.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다만 설마 했다.
“서, 설마 캐드 툴을 제작하자는 말씀은 아니겠죠?”
조민우는 방긋 미소 지었다.
“바로 그것입니다.”
“.......”
정성일 부장이 사업 제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엄연히 가능한 일에 한했다. 캐드 툴이라니? 그것이 가능한 지가 의문이다. 아니 만들었다고 하자. 과연 잘 팔릴까?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조민우가 이런 눈치를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아, 정성일 부장님 생각은 대충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저도 일해가 됩니다. 사실 지금 완전히 이것으로 하겠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늘부터 알아볼 생각입니다.”
“하, 하지만 그것을 누가 만든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정성일 부장님이 한 번 알아보셔야죠.”
알아보라니? 뭘 알아보라는 말인가? 캐드 툴이 뭔지를 알아야 알아 볼 것이 아닌가?
“네?!”
조민우는 물론 그제야 아차 했다.
“아, 제가 말한 것은 전문 프로그래머를 말하는 겁니다. 캐드 스펙이나, 상세한 개요에 관한 것은 제가 따로 조사를 할 겁니다. 문제는 제가 그 방향을 잡아도, 누군가 그대로 구현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가 혼자 그것을 다할 수은 없으니까요.”
다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큰 문제가 빠져 있었다. 정성일 부장은 역시 경험이 많아서인지 그것을 정확히 짚었다.
“다 좋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캐드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설마 지금부터 캐드에 대해서 공부해서 만들겠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아니 그럴 리가 없죠. 사장님도 이제는 몇 년 동안에 회사를 경영해보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환상을 할 리가.......”
조민우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는 손으로 그의 입을 가로 막았다.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정성일 부장님은 제가 되지도 않는 일을 할 정도로 설마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그것은.......”
“이제까지 저와 같이 일을 했지 않습니까? 제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애들처럼 환상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물 흐르듯이 쭉 이어진 대화였다. 그렇다고 상대를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상대를 묘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정성일 부장은 당연히 그것을 느끼자 조금 전과는 달랐다.
설마 했다.
“저, 정말 그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하, 하지만 캐드는 그렇게 단순하게 개발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요?”
조민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로 단언했다.
“네!”
“.......”
정성일 부장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가 저것이 말이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그에 대해서 잘 알았다.
당연히 일단 이 시점에서 그를 믿어야 했다.
“으음,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사장님이 원하는 대로 괜찮은 인력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조민우는 이상하게 마음이 살짝 흥분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런 감정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였다.
어떻게 보면 별 다른 것이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대화는 조민우에게 지금과는 달리 한 가지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사업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자세로 임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럴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조민우도 이제는 그냥 자신의 기분대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 했다.
이런 태도는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한 생수 배달에서도 나타났다.
이제까지는 대충 대충 아르바이트 차원에서 일을 했다면 지금부터는 달랐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업이라는 생각을 한 탓이다. 생수 영업에 대한 기본자세나, 배달에 대한 아주 세세한 것에도 신경을 썼다.
당연히 이런 자세는 생수를 받는 편의점 사장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가 기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역시 빼놓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평소와는 다른 변화 한 가지가 생겨났다.
끼익.
“여기 있습니다.”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지런 하구만.”
조민우도 이제는 늘 하는 일이지만 그다지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록 작은 돈이라고 해도 이렇게 편의점에게 영업할 수 있는 것에 고마워했다.
“이렇게 생수를 구입해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따름입니다.”
“흐음, 그런가?”
조성수 편의점 주인은 말을 하면서도 유심히 그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늘 지역 편의점 업주 모임에 가면 항상 조민우 부친을 통해서 자식 자랑에 대해서는 과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내 자식이 말이야! 사장이란 말이야! 사장! 곧 있으면 코스닥에 등록한 기업체 사장이 된다고!
다만 최근 사업 실패로 인해서 다소 조민우 부친의 기가 죽었다고 해도 주변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도 채 안 된 나이에 경험한 관록이기에 생각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 지금 자신에게 보이는 태도만 봐도 그것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신뢰가 갔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그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과연 이 친구를 도와주면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지게 될까?
뭐 솔직히 친구 자식이 너무 잘되면 배가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속이 좁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도 업체 통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바.
결국 그는 조민우가 보여준 신뢰를 믿었다.
“이봐, 조 사장.”
조민우는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조성수 사장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인지요?”
물론 조성수 역시 힐끗 차에서 내려서 이리저리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서 ‘마법같은 물’재고나, 아니면 다른 생수 상품 확인에 여념이 없는 최현주를 힐끗 살피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잘 적응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미모였다. 더욱이 뒤태는 솔직히 말해서 나이가 일 년(?)만 더 젊었어도 그냥 강제로 당장 덮치고 실을 정도였다.
‘하여간에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니까!’
“한 가지 제안한 것이 있는데.......”
조민우는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반응에 귀를 쫑긋했다. 이제까지 사업적인 경험 때문에 갈고 닦은 감각에 뭔가 느껴진 탓이다.
“무슨 제안인지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가능하면 무엇이라도 들어 들리겠습니다.”
결코 자존심을 숙이지 않는 당당한 태도였다. 그렇다고 오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이 보인다고 해야 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 도로 맞은편에 보면 E마트 보이지?”
조민우는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항상 이 편의점을 지날 때마다 보는 곳이 바로 저 E마트이니까. 그도 솔직히 저 쪽 마트와 같은 곳을 공략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측면에서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했었다.
그것은 일단 E마트 영업하는 것도 어렵고, 전혀 인맥이 없으면 판로를 뚫기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아, 마침 내가 저쪽 E마트 내부에 있는 커피 자판기에 대한 관리를 내가 해.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저 쪽 사람들과 좀 알거든.”
조민우는 대화를 거듭해갈수록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설마 했다.
“무슨 말씀인시지요?”
“허어, 이 친구가, 척하면 모르겠나? 저 쪽에서 새로운 생수 관련해서 좀 물건을 받고 싶은 가 봐. 그러다가 나온 이야기가 바로 ‘마법같은 물’이야. 그래서 제안을 했지. 그 쪽에서 물을 한 번 먹고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허? 그게 정말입니까?”
“자네 정말 나에게 고마워해야 돼.”
그는 그제야 대충 상황을 알아채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그 쪽에서 마법같은 물을 공급받고 싶다는 의사를 보인 겁니까?”
“하하하, 맞아. 이제 좀 아는군.”
“......”
조민우는 설마 이런 제안을 편의점 사장에게서 받을지 몰랐기에 가슴 한 구석이 찡해서 입을 다물었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 지 어느 정도 느끼는 바가 있는 탓이다.
하지만 입을 먼저 연 것은 조성수였다. 그는 생각보다 눈치가 빨라서 이런 점을 눈치껏 헤아리고는 부드럽게 한 마디 더 해주었다.
“뭐 자네를 생각해서만 하는 것은 아니야. 워낙 제품이 좋으니, 이런 식으로 추천을 하는 것뿐이니까. 다만 자네도 알겠지만 E마트 쪽에서 공식 허가서나, 이런 형식적인 것이 있어야 하네. 혹시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그런 것을 좀 알아보는 것이 좋아.”
하지만 조민우가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은 너무도 확연했다.
“아, 그것은 걱정 마십시오. 이미 공식 허가를 받은 상황이니까요.”
이번에는 그가 깜짝 놀랐다. 생수를 받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두 달 째에 불과한 탓이다.
“허어, 벌써?”
“하하하, 네, 이미 만약을 대비해서 그 정도는 인가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저희 아버지 친구 분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설마 허가도 받지 않는 생수를 공급할 수도 없겠죠?”
하지만 생수를 공급한 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 짧은 기간에 허가를 받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한국 공무원 정서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거 참 대단하이. 자네는 뭘 해도 그냥 대충 하지 않는 군.”
“아뇨. 오히려 제가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러면 내가 연락처 줄 테니까. 지금 가서 한 번 만나 보라고.”
“알겠습니다.”
조민우는 이렇게 간단하게 마무리 한 후에 그가 준 연락처를 받아서는 곧 E마트로 봉고차를 향했다.
물론 최현주는 옆에서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었기에 호들갑을 떨었다.
“서, 선배님, 그러면 생수 판매량을 지금에서 더 늘린다는 이야기에요?”
그는 피식 웃었다.
“응.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그, 그러면 얼마 정도 더 늘어나는 거에요?”
“글세, 그거야 지금은 알 수가 없지. 하지만 이 블록 내에 영업권을 가진 E마트이니까. 대략 하루에 400개 정도를 받지 않을까?”
“400개라면.......40만원이군요. 그렇다면 기존에 600개를 공급해 왔으니, 결국 하루에 1,000개를 판매가 가능하다는 말이잖아요. 그, 그렇다면 한 달이면 3천만 원이 된다는 말이잖아요?!”
한 달에 3천 만 원이라니!
그것도 거의가 순이익이 아닌가?
솔직히 피티에 들어가는 비용 해봐야, 피티하고, 라벨하나가 붙는 것이 다였다. 그런 것은 감안하고도 말고가 없는 비용이었다.
일 년이면 무려 36억이라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긴 좀 많기는 해.’
하지만 조민우는 그다지 대수로울 것이 없는 듯 겸연쩍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그는 이전에 사업하면서 억 단위 돈을 거의 매일 단위로 만져봤기에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다.
“뭐 얼마 되지 않잖아?”
“어, 얼마라니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달에 3천 만 원 이라고요. 그 정도면 평범한 월급쟁이 일 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