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1 회 -- >
조민우도 여기까지 듣자 이해는 하지만 분노를 참기가 쉽지는 않았다.
“정 부장님, 솔직히 말씀 드려서 당시 마음고생을 가장 심하게 한 것이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그,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정도가 아니었다.
회사가 부도난 상황에서도 조민우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덕분에 채권단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어야 했다.
인격적인 비하는 기본이었다.
심지어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자신이야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막상 자신이 당하는 입장이라면 그 고통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만약 L 그룹, 아닌 L 전자가 부도라도 나면 국가 경제가 휘청 일수도 있었던 것이다.
“사장님.”
“말씀 하세요.”
“이런 자리에서 제가 이런 말하기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분명히 과거에 저에게, ‘여러분의 도움은 잊지 않겠습니다. 만약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약속드릴 수가 있습니다. 제가 다시 사업에 재기할 수 있다면 여러분을 다시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에게 마지막까지 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건.......”
“네, 저는 보상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겨우 몇 사람과의 일 때문에 L 그룹 전체를 공격하는 것은 자제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아.”
그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자 자리에 풀썩 앉고는 이마에 손을 살짝 대었다. 지난 아픈 시절이 새삼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시에 그 고통은 지금도 상상하기 쉽지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데 정성일 부장은 자신에게 그 고통을 참으라고 하고 있었다.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다른 직원이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냥 묵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좀 달랐다.
자신이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묵묵히 옆에 있어 준 유일한 사람. 자신이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 했을 때, 아무 조건 없이 믿어준 사람.
그의 이야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 아픔 역시 쉽게 잊혀 지지가 않았다.
“제가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조민우는 이 문제 때문에 며칠을 고민을 해봐야 했다.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성일 부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승승장구하던 시절.
그리고 회사가 부도난 시절.
그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들.
그리고 한강 다리 위에서 까지 올라가서 자살을 하려고 했던 시간들.
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다시 우뚝 선 나날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침 꿈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이 이렇게 심난한 것을 보면 말이다.
다만 L 전자에 대한 심적 증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성일 부장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해야 했다.
남아일언 중천금.
자신이 했던 말을 최소한 지키고 싶었다.
시간이 가자 서서히 감정이 가라앉았다.
눈을 조용히 감았다.
조민우는 순간 모든 것을 떨쳐버린 채 멍하니 명상에 잠겨 들어갔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주변의 일도.
자신의 일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속으로 깊이깊이 파고 들어갔다.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그 순간.
꿈틀.
뭔가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곧 이어서 마치 생명이 태동하듯이 점점 그 움직임이 커져가더니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바로 마나 코어였다.
기존에 이미 크기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압축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서서히 그 크기가 다시 더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크기가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외부의 기가 점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대기에 숨어 있던 기운이 유동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봐서는 바람처럼 보였다.
바람 한 점 없는 조민우 집무실에 회오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휘이잉.
아니 단순한 회오리가 아니었다.
그 압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집기들조차 그 회오리 때문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상태에서 급격하게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기는 곧 조민우의 마나 고리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실로 급격한 대기의 움직임.
휘이잉.
그리고 그것들은 마나서클이 미치는 테두리에 도착하자 서서히 그 껍질을 벗고는 마나로 바뀌었다.
그것은 곧 마나서클 중심을 천천히 돌면서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지구를 도는 달이 생성되는 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또 다른 소우주의 탄생처럼 신비하기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그 기운들은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로 나누어졌다.
그 외각 마나는 들어오는 마나를 족족 끌어당겨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마나 코어는 이런 마나의 압력 때문인지 더욱 점점 크기가 작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나 총량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축되면서 오히려 강한 힘을 주변에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마나 코어 중심으로 새로운 마나의 영역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
조민우도 처음에는 이런 현상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이 보다는 지금 L 전자 때문에 자신의 상념에 깊이 빠져 있는 탓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달랐다.
‘응? 뭐지? 가만 이놈들은.......마나구잖아?’
그런데 그 크기가 너무 작았다. 자신의 심장 한 쪽에 걸쳐 있는 마나 서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담겨 있는 마나양을 어느 정도 느끼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마나가 외부로 방출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외부에서 마나가 계속 유입이 늘고 있었다.
바로 마나 코어와, 외부 마나가 서로 평형을 이룰 때까지 그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자 움직임이 천천히 멎었다.
휘이익.
타탕.
곧 집무실주변을 돌던 집기들도 그제야 집무실 바닥에 떨어졌다.
조민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엉망이 된 집무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보다는 자신의 변화에 더욱 집중했다.
그리고 알아챘다.
‘이, 이럴 수가, 2, 2서클에 올랐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결과.
이제까지 그 개고생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았다.
정신력을 고름 짜면서 지금까지 해온 일.
생각하면 할수록 갑갑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일단 자신의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육체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느낌이 좀 달랐다.
‘마나가 느껴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대기에 존재하는 마나가 너무 작아서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대기 속에 존재하는 미세 마나를 어느 정도 느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조민우는 자신의 집무실 한 편에 서가 있는 책을 향해서 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마나가 손짓에 따라서 책을 향해서 휘몰아쳤다.
휘이익.
물론 공기 이 마나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같이 딸려갔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책 주변에 모이고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보자 이상하게 될 것만 같았다.
딱히 이유라기보다는 본능이었다.
“떠올라!”
둥실.
책은 곧 허공으로 떠올랐다.
무려 450페이지가 넘는 물리학 전공서적이었다.
그런데 그 무게가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대기 중에 흩어진 마나가 서로 그물처럼 얽혀서 책을 받치고 있는 보았다.
‘정말 놀랍구나!’
스스로 하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곧 바로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이런 일이 어째서 가능한 지 말이다.
초능력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과는 좀 많이 달랐다.
초능력은 일종의 뇌파를 이용해서, 그것을 증폭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뇌파를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마나 서클이구나!’
바로 마나 서클을 돌려서 거기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주변 마나를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는 마나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 마나 서클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진 힘의 영역, 바로 마나장 내부에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 영역 내부에서는 마나를 이용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었다. 비록 신의 능력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마나서클이 가지는 에너지에 준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다른 의미도 있었다.
지금이야 한계가 있다.
‘만약 7서클에 도달한다면.......’
아마 상상하기 힘든 이적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
조민우는 뜻밖의 상황에서, 재수 좋게 2서클에 오르고 나서야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증오, 분노였다.
그 감정을 포용하는 순간에 마나코어가 반응한 것이다.
다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추측만 하자면.......
‘뇌파의 속성 때문이겠지. 아마 마나코어와 맞는 주파수 대역이 있을 거야. 그것이 증오, 분노의 감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내가 그것을 포용하게 되자 마나 코어 역시 그만큼 성장한 거야.’
이렇게 되자 L 전자에 대한 증오심은 그다지 생기지 않았다. 그 보다는 자신에게 보다 충실한 것이 우선이었다.
일단 2서클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일에 비하면 전자의 몇몇 이들에 대한 것은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곧 바로 정성일 부장을 불렀다.
“그렇게 하시죠.”
“네?”
“L 전자와 협상을 하는 것으로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사, 사장님, 저, 정말 이십니까?”
“쯧쯧, 아니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 아니 사장님이 며칠 전에 반응과는 너무 달라서 말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 자들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을 텐데........”
“하하하, 정성일 부장님이 약속을 지키라고 했는데, 제가 싫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아요?”
“사, 사장님.......”
정성일 부장은 이내 머뭇거렸다. 그도 지금 조민우를 보고 나서야 그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같이 있으면서 가장 그의 큰 단점 중에 하나가 고집이 너무 강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것이 고쳐진 것이다.
“자자, 그러지 말고 빨리 그 사람이나 한 번 불러 오세요.”
“알겠습니다.”
***
최경호 차장은 협상을 하러 대구에 내려왔다가 무려 1주일이나 호텔에서 지내게 되자 화가 잔뜩 났다. 설마 아예 대면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문전박대당할 지는 몰랐다.
‘빌어먹을 이거 정말 너무하는 군. 아니 싫다면 최소한 사람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하잖아?’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냥 본사로 올라가서 보고를 하고 끝낼까 그런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이대로 올라가서 보고해봐야 욕만 잔뜩 들을 것이 분명했다. 최소한 사람 얼굴을 보고 상대의 의사를 분명히 듣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는 덕분에 거의 매일 DS 본사로 갔다.
그리고 어제까지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했다.
“아니 일단 조민우 사장님을 뵙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계약은 아주 중요한 겁니다. 왜 조민우 사장님 입장만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름 항의를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지쳐서 그렇게 말할 의욕이 없었다.
“휴우, 오늘도 아니겠죠?”
그런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희 사장님이 뵙자고 합니다.”
“저, 정말입니까?”
“하하하, 물론이죠.”
곧 바로 조민우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들은 사실.
“아 좋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서로 얼굴 붉힐 때가 있으면, 웃을 때도 있지요. 무조건 상대를 공격해서는 좀 그렇겠죠? 즉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지요. 일단 그 쪽 제안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기까지는 화해의 멘트.
“가, 감사합니다. 역시 조민우 사장님의 인덕은 너무도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 그건 감사합니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양산 물량이겠죠? 그런데 아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DS SX 같은 경우에 생산하는데, 단가가 아주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에 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 회사 측에서는 굉장히 많은 손해를 보고 제품을 팔고 있습니다.”
이건 낚시 성 멘트.
“.......”
최경호 차장은 이내 입을 다물고는 붕어처럼 뻐끔뻐끔했다. 차마 욕을 못하겠고, 그렇다고 이 좋은 상황에서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곧 이어진 마지막 결론.
“그 쪽에서 원하시면 공급은 해드리겠습니다. 다만 2L 기준으로 2천 만 원은 좀 그렇고.......으음. 천오백만원 정도면.......아 역시 좀 그런 가요? 좋습니다. 서로 좋은 게 좋다고, 제가 천 만 원 까지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수량은 기본 만개 베이스입니다. 사실 이런 말하기는 좀 그런데 많이 손해보고 파는 겁니다.”
“.......”
‘개 같은 새끼, 지랄 염병하고 자빠졌네.’
조민우는 힐끗 한 쪽에서 기괴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정성일 부장을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저도 나름 화해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죠?”
“끄응.”
정성일 부장도 결국에는 말을 하려다가 두 손을 들고야 말았다. 협상을 하는 것까지고 뭐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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