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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아키라-레이카
“그러길래 내가 항상 말하잖아요! 왜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먹질 않다가 항상 그렇게 뒤통수를 처맞고 다니냐고요!”
레이카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레이드 노예가 돼서 레이드만 하고 다니려다보니 심사가 틀어진 모양이었다.
레이카는 자기들이 카르마 클랜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땠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르마 클랜에 있더라도 레이드를 하기는 하겠지만 그곳이었다면 사람들이 아키라를 신처럼 떠받들면서 아키라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면서 아키라를 두려워하고 경배했을 텐데.
카르마 클랜에 있는 동안 레이카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아껴주고 있다는 사실을 즐겼다. 지금도 아키라가 자신을 아껴준다는 사실이 여전히 고맙고 자신도 아키라를 사랑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을 떠나서 그건, 약간 다른 문제였다.
무리의 수컷중에 독보적인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아키라는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아키라가 지금은 그저 이익헌에게 속아서 주구장창 레이드만 하고 있는 신세라니.
아키라는 레이카가 화를 낼 때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을 하는 게 다였다.
네 안에 있던 괴수 차크라가 폭주했고 그대로 놔두면 네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그럼 내가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냐고 말하면서 아키라는 레이카의 화가 풀리기를 바랐다.
“레이카. 그냥 너는 여기에서 쉬고 있어. 저런 괴수는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내가 사냥을 하는 동안 여기에서 쉬고 있어. 뭐라도 먹을래? 늪 밖에 나가서 먹을 걸 사가지고 다시 들어올까?”
아키라는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됐어요! 누가 배가 고파서 이러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나가면. 지금까지 기껏 떨어뜨려 놓은 체력 20만이 그냥 날아가 버리잖아요. 아키라. 나는 아키라가 제발 좀 합리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큰 힘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게 문제예요. 자기가 가진 힘으로 언제든지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제대로 생각할 줄을 모른다고요.”
오늘은 레이카의 잔소리가 쉽게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키라는 웬만하면 이익헌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밀약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실수를 했다.
처음부터 이익헌이라는 인간과 거래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심각하게 불공정했다.
아키라는 이익헌에게 계약의 불공정성을 이유로 무효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익헌은 그런 말을 들어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클랜 A 덕분에 간신히 레이카의 목숨을 구하고 레이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이익헌이 아키라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레이카는 어떠냐는 물음을 듣고 아키라는 이익헌이 생각보다 정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웬걸.
레이카 없이 잠깐 자기와 둘이서만 만나자고 했을 때 낌새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아키라가 우물쭈물거리자 이익헌은 채준형 마스터가 아키라에게 갑옷과 무기를 선물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아키라는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런 말을 그냥 흘려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채준형인데.
그건 페라리 본사에 가서 닥치는대로 아무거나 타고 가라는 말과 비슷한 걸 텐데.
아키라는 이익헌에게 달려갔다. 채준형은 보이지 않았다. 마스터는 어디에 있는 거냐고 이익헌에게 묻자 오는 중이라고 말하면서 이익헌은 아키라와 자기 사이에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익헌에게 캐츠 아이 스톤을 넘기고 이익헌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을 거의 싹 양도받은 아키라는 이익헌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익헌은, 클랜 A가 레이카의 몸에서 차크라를 빼내준 일은 숭고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말했다.
아키라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준 캐츠 아이 스톤도 있었기에 비용을 추가적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키라가 그렇게 말하자 이익헌이 고개를 저었다.
“아키라. 그게 아니지. 그건 재료비라고 해야 되는 거지.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뭐지? 나는 나하고 상관도 없는 일에 내 캐츠 아이 스톤 한 개를 썼잖아.”
“그렇긴 한데. 그렇다면. 얼마를 원하는 건데?”
이익헌이 어느 순간부터 말을 놓는 것을 보고 아키라도 그에게 말을 놓았다.
“레이카의 목숨 값. 당신이 정하게 해 줄게.”
이익헌이 말했다.
레이카는 아키라에게 유일하게 남은 여자였다.
아키라가 선택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의 목숨값을 정하라는 말은 굉장히 큰 고민을 아키라에게 안겨 주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이익헌은 거지가 아니었다.
캐츠 아이 스톤을 사기 위해서 아키라에게 지불했던 모든 것을 다시 찾은 것은 물론이고 추가로 일 년 동안 러프 스톤 30개를 더 받기로 했다.
아키라는 지금도 자기가 어떻게 이익헌의 농간에 그대로 넘어가 버릴 수 있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카는 그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었다.
카르마 클랜을 떠나면서 레이카에게는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키라가 캐츠 아이 스톤을 카르마 클랜에 남겨두고 떠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사람에게도 캐츠 아이 스톤은 절실했다. 두 사람 역시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이었고 캐츠 아이 스톤을 사용해서 레벨을 올리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세상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던 이 샌님이 사기꾼 같은 이익헌에게 캐츠 아이 스톤을 모두 털리고 온 것이다.
이익헌이라면 레이카도 모르지 않았다.
이익헌이 한 번 입을 열어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예 처음부터 귀를 닫아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것도 알았다.
일단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카가 가장 화가 나는 부분은, 이익헌이 아키라의 착한 마음을 건들었다는 것이었다. 아키라에게 있는 얼마 안 되는 착한 마음을 잘도 찾아서 건들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향한 아키라의 마음을 이용해서 아키라와 자신을 거렁뱅이 신세로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레이카는 화가 났다. 아키라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이익헌에게 화가 난 거지만 이익헌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렇다고 클랜 A를 상대로 싸움을 걸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키라는 속으로 그 일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가 레이카를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카는 아키라에게 더 미안하고 화가 나고 이익헌을 찢어 죽이고 싶고.아무튼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나는 내가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데. 평화롭고 여유롭고 즐거워. 레이카 너랑 이렇게 어디든 다니면서 쉬고 일하고 하루를 넘긴다는 게 좋아. 너는 그게 싫은 건가?”
아키라가 말했다.
레이카가 이제 그만좀 화를 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긴. 살아났으니 화도 내는 거고 잔소리도 하는 거라서, 잔소리를 듣는 게 귀찮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시간동안 잔소리하는 것 말고 보다 더 창의적인 것을 하면서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레이카는 한숨을 쉬었다.
“아키라. 당신은 세상을 다스릴 사람인데 그런 아키라가 이러고 다니는 거. 당연히 싫어요.”
“세상을 다스리는 건 누구를 위한 건데? 내가 누구를 위해서, 왜 왕이 돼야 하는 건데? 당신을 위해선가? 내가 왕이 되면 레이카 너한테도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릴 거고. 너는 그게 좋아서 내 곁에 남아 있으려고 했던 건가? 그래서 나한테 배신감이 느껴지는 건가?”
아키라가 말했다.
레이카는 화가 난 얼굴로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레이카는 단 한 순간도 그런 것을 원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경원의 대상이 되는 아키라를 보는 게 좋았지만 자기가 같이 그것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대단한 아키라가 자기를 아낀다는 것이 좋았던 것 뿐이었다.
가장 높은 계단으로 아키라가 올라가기 위해, 자신을 밟고 올라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기꺼이 그의 발 아래에 엎드려서 그의 계단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가 올라가는 것,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르러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보게 되는 것으로 족했다.
아키라의 곁에서 아키라와 같이 사람들의 조아림을 받고 싶었던 거냐니.
감히 그것을 탐한 적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레이카는 웃어버렸다.
그 역시 자신의 마음을 오해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의 왕이 된 아키라를 멀리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그를 곁에 두고 그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지금의 처지가 얼마나 황송한지 레이카는 생각했다.
아키라는 레이카의 화가 풀렸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나한테 화가 나지는 않아요? 나 때문에 그 사기꾼한테 걸려든 거잖아요.”
레이카가 말했다.
“그거 말인데.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야. 우리한테 캐츠 아이 스톤이 필요하게 되면 언제든지 클랜 A에서 해결해 주기로 했어.”
아키라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나쁘진 않네요.”
“그렇게 나쁘진 않네요가 아니라. 아주 괜찮은 거래잖아.”
“아키라. 우리한테 있었던 캐츠 아이 스톤이 몇 개였는데요. 그걸 우리가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 우리는 클랜 A한테 캐츠 아이 스톤을 하나만 달라고 구걸할 필요도 없는 거였어요.”
레이카가 말했다.
아키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알아. 손 안에 담기에는 너무 많았지. 믿을만한 금고에 넣어두고 하나씩 꺼내 쓴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아키라의 말에 레이카는 걱정이 됐다.
아키라의 진면목을 볼 기회가 없었을 뿐, 사실 아키라는 그냥 바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바보가 싫지 않았다.
자신의 바보력을 총동원해서 자기가 레이카를 살렸다고 믿는 이 남자가.
괴수는 늪 안에 뛰어들어온 두 헌터가 제대로 공격을 하지는 않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소리에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지들끼리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든지 할 것이지, 한 말을 또 하는 거면서 전혀 새로운 논리로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는 것처럼 굴었다.
레이카는 사랑과 존경이 가득 담긴 눈으로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키스해 주고 싶다는 얼굴이군. 좋아. 허락한다.”
아키라가 말했다.
아키라가 레이카의 허리를 거칠게 꽉 안는 순간 괴수가 달려왔다.
들소의 형상을 한 괴수는 뿔을 아래로 하고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이제 키스를 하는 동안 레이카의 얼굴이 사라지면서 네머티나가 나타나는 일은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레이카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끝에, 네머티나의 액체가 손에서 나오도록 연마를 한 탓이었다.
아키라는 그 전의 모습도 크게 싫지는 않았다고 말했지만 레이카의 얼굴에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아키라는 네머티나가 위력적인 2급 들소 괴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 의심을 하면서도 일단 레이카에게 맡겼다.
그러나 레이카는 가능성이 낮은 일에 괜한 만용을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키라.”
쿨하게 아키라에게 괴수를 넘긴 것이다.
들소 괴수는 멍청한 헌터가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등을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한 방에 끝내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들소 괴수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키라의 등에서 거미줄이 튀어나갔다.
규칙적인 거미줄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튀어나간 거미줄이 들소 괴수의 입을 감았다.
1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동안 들소 괴수의 머리는 번데기처럼 변했다.
들소 괴수는 그 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거미줄이 얼굴로 날아가는 동안 같이 날아갔던 몇 가닥의 거미줄이 들소 괴수의 몸을 파고 들어가 혈관 독을 퍼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