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7 / 0348 ----------------------------------------------
[외전] 시그69-천기정의 봄날
이 이야기를 하려면 좀 돌아가야 한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시그96이 여러 사람의 손을 타면서 좀 돌았기 때문이다.
익스트림 헌터에 볼 일이 있어 간 김에 지우는 채준형에게 인사나 하려고 채준형의 연구실에 찾아갔다.
거기에 가면 지연도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연은 바디 펌에 나가 있었고 연구실은 채준형이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아이쿠. 여기까지는 웬일이십니까?”
채준형이 지우를 반겨주었다.
“일이 있어서 왔다가 인사나 드리고 가려고요.”
지우 역시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했다.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데도 언제나 예의를 갖춰서 대해주는 채준형 때문에 지우는 몸둘 바를 몰랐다. 편하게 대해달라고 해도 채준형은 클랜 마스터에게 그럴 수는 없는 거라면서 깍듯하게 대했다.
"정말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채준형이 다시 물었다.
"정말로 다른 일로 왔다가 인사나 드리고 가려고 온 건데요?"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공격 증폭률 좀 올리라고 압박하시려는 거죠?”
채준형이 말하자 지우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압박은요. 무슨. 마스터님이 알아서 잘 해 주시는데요.”
그러면서도 빨리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채준형의 넓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카메라 렌즈가 박힌 것 같은 구체가 책상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지우는 반가워하면서 그것을 알아보았다.
“이거. 저도 알아요. 헌터 타투가 나타났을 때 강현이랑 이걸 같이 샀었죠. 강현이가 사고 제가 나중에 돈을 같이 낸 거지만. 시그81이죠?”
“아. 이걸로 연습하셨어요? 이건 시그96입니다.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죠.”
“시그81도 정말 대단했는데요. 저희가 쓰던 건 나중에 중고로 팔아서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훈련을 할 때 시그81 덕을 많이 봤었죠.”
그러면서 지우는 회상에 잠겼다.
사체 운반 헌터 시절의 지우와 강현.
강현은 익스트림 헌터에서 시그81을 샀다.
매장에서 나와 카페테리아에 가서 그것을 잠깐 보겠다고 꺼낸 후에 강현은 시그81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을 사는데 그동안 사체 운반 일을 하면서 모아왔던 돈을 거의 처박았다.
장비 하나에 2억 8천만원이라는 말을 듣고 지우는 강현을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한동안 고민을 했다.
아직 스무살도 안 된 녀석이 경제관념을 못 가져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헌터라고 사체 운반을 80세가 될 때까지 보장받고 계속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건데 미래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강현은 그동안 충분히 고민을 했다는 듯이 단 번에 질러버렸다.
“해보죠.”
강현이 말했다.
“지금? 여기서?”
지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사람들이 놀랄 걸?”
“처음부터 너무 세게 시작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강현은 시그81을 작동시켰다.
강현이 마지막 버튼을 누르고 시그81을 손에서 놓아주자 작은 야구공 모양의 카메라가 공중에 떠올랐다.
공간의 여기저기에서 작은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일었다.
카페테리아에 있던 사람들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현은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 안 들려?”
“그러게.”
사람들의 반응은 대충 그 정도였다.
지우는 강현을 말릴까 하다가 그냥 놔 두었다.
시그81은 작은 몸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소리를 쏘아 보내거나 영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있는 이곳에서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시그81이 만들어내는 영상이라는 것은 그동안 늪에서 발견되었던 괴수들이나 맵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그81은 헌터들의 차크라 운용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비였다. 시그81을 이용하면 실제 늪에서 발견됐던 괴수를 가상공간에 끌어내서 녀석들과 싸울 수가 있다. 물론 실제로 데미지를 입힌다거나 괴수로부터 실제 공격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공간 안에 괴수의 실체를 형상화시키고 현실감 있게 연습을 할 수는 있었다.
시그81을 작동시키면 어느덧 이것이 연습이라는 느낌은 사라지게 된다. 그만큼 현실감 있게 만들어진 탓이었다.
시그81이 만들어내는 바람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는 탓에 사람들은 서서히 불편을 느꼈다.
“그만하자. 정말로 그만해야겠다.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든지 놀이터나 공원으로 가든지 한적한 곳으로 가자고.”
지우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강현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말을 안 듣고 버텨도 괜찮을지 살펴보려는 수작인 것 같았는데, 지우의 표정이 단호한 것을 보고는 그대로 일어섰다.
시그81이 강현을 따라왔고 강현은 시그81을 회수해 가방에 집어넣었다.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은 자기가 말을 안 들어서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강아지처럼 지우의 뒤를 따라갔지만 지우는 시그81로 괴수의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디로 갈까? 너희 집 근처에 괜찮은 장소 있어? 일단 내가 사는 곳 근처에는……. 음.”
“도봉산 둘레길 어때요? 호젓하고, 걷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조용하고 괜찮을 것 같은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현이 말했다.
“그랬다가 만에 하나, 트래킹을 하려는 사람이 괴수를 보고 놀라기라도 하면?”
“산책로에서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장소가 나올 거예요. 제가 가끔 가서 운동하는데가 있어요.”
“그래?”
“네. 항상 그 코스를 정기적으로 돌면서 체력 관리를 하거든요.”
“그럼 그리로 가자.”
지우는 한 번 말을 한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형도 아직 차 없죠?”
뒤에서 강현이 물었다.
“응, 차부터 사야 하려나?”
“사체 운반만 하는 거면 모르지만 레이드를 할 생각이라면 있는 게 좋죠. 사체 운반은 레이드가 끝나기 전까지만 해당 늪에 도착하면 되니까 장소 이동에 여유가 있지만 레이드를 하는 헌터한테 차가 없으면 기동성이 문제가 되겠죠. 출동 명령이 내려지면 바로 갈 수 있는 게 좋으니까요.”
“그렇긴 하겠다.”
“형. 시그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건, 가면서 들어도 되지 않을까요? 이것도 훈련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덮어놓고 안 된다고 할 생각은 없었다.
지우가 머뭇거리는 동안 강현은 벌써 시그81을 작동시켰다. 작은 구체는 허공으로 올라가더니 강현의 속도에 맞춰서 움직이면서 제 주위에 소리를 쏘아댔다. 어디에서 소리가 나는지 점점 거기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아주 집중을 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그런 소리들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소리와 소리의 간격이 불규칙적이기는 하면서도 점점 좁혀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혹시 너. 레이드를 하려는 생각이야?”
지우가 물었다.
그냥 체력 관리를 위해서 이런 장비를 샀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워서였다.
“언젠가는요.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랑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건 차이가 크잖아요.”
김강현이 말했다.
전에 말하는 걸 들어봤을 때는 괴수 운반해서 버는 수입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것 같더니 레이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거기에 맞게 미리 자신을 준비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무기도 있어?”
“무기도 지금 계속 보고 있긴 해요.”
“구체적이네. 계획이.”
지우는, 이렇게 어린 김강현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차곡차곡 설계를 하고 준비를 해나가는데 자기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뭐. 그냥 장비 하나를 산 것 뿐이지 제가 형보다 앞선 건 전혀 없어요. 어차피 산 거니까 앞으로 훈련은 열심히 할 생각이고. 형도 같이 해요.”
지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의 말이 옳았다.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과 자유 의지로 안 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니까.
“내가 반은 부담할게. 형이니까 조금 더 많이 부담하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은 여유가 없다.”
“아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건 제가 필요해서 산 건데요. 정말로 안 그러셔도 돼요.”
“아냐. 도움만 받을 수는 없지.”
지우는 말이 나온 김에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계좌번호 알려줘.”
강현은 한참을 더 거절하다가 지우에게 몇 대를 얻어맞고서야 고집을 꺾었다.
돈을 이체하고 훨씬 편해진 마음으로 지우는 시그81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집중했다.
이제는 그 소리가 아주 미약해졌다.
그런데도 들렸다.
“무기를 정하게 되면 그 훈련도 있거든요. 시그81이 공이나 구슬이나 낙엽 같은 걸 띄우고 우리는 그걸 공격하는 거예요. 동체인식 훈련인데 그걸 하려면 일단 무기가 있긴 해야 돼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레이드나 무기 구입하는 것에 혹하는 중이었다.
“형. 괴수를 만들어내면 사람들이 놀랄지 모르니까 가면서 우선 늪이라도 만들어서 볼까요?”
“그럴까, 그럼?”
비싼 장비를 샀는데 하고 싶은 것을 뒤로 미룰 이유가 없었다.
“5급으로 먼저 해 볼게요.”
“응. 5급.”
시그81은 두 사람이 걷는 속도에 맞춰서 움직이면서 바닥에 5급 늪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보였는지, 그게 시그81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모두 깜짝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근데 강현아. 시그81이 보이는 이 영상 있잖아. 이게 괴수한테도 보이나?”
“제가 괴수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대답을 못 해주겠는데요?”
“그런가?”
“형이 그걸 왜 물었는지 알 것 같아요. 이게 괴수한테도 보이면 괴수를 공격할 때 시그81을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겠네요.”
“그럴 것 같지? 괴수한테도 보이면 좋겠다.”
그때 시그81이 만든 늪에 몇 몇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그것을 눈치챈 강현이 조용히 시그81을 향해 버튼을 누르자 늪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분명히 눈 앞에 있었던 늪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에 더 당황한 것 같았다.
“사람들 있는데서 하면 안 되겠네.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시그81이 만든 허상이라는 걸 모르고 헌터 협회에 당장 신고를 하겠네요. 늪이 나타났다고.”
강현이 말했다.
“그렇겠지. 늪이 나타났다는 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두 사람은 마침내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냈고 그곳에서 시그81로 괴수의 영상을 불러냈다.
시그81은 늪과 괴수를 생생하게 만들어냈고 그 후로 두 사람은 시그81이 만들어내는 괴수의 영상을 보면서 그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훈련을 하곤 했었다.
"혼자 하는 생각이 아주 깊습니다?"
채준형이 말했다.
"아!"
지우는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혼자만 옛날 생각에 빠진 것을 미안해했다.
“시그96은 어떤 성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우가 냉큼 물었다.
“이건. 헌터들 훈련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니라 다른 버전입니다.”
채준형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버전요?”
“네. 동료들이 있는 곳에서 작동을 시키면 굉장히 난감해질 수 있으니까 조심하셔야 돼요.”
“뭔데 그러십니까? 설명을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시그81을 사용해 보셨다고 하니까 사용법을 아실 테고요. 그러면 그걸 들고 이제 나가 주시겠습니까? 저도 할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요.”
채준형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뭔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채준형처럼 진중한 사람이 이상한 장난을 치려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우는 채준형이 케이스에 담아주는대로 들고서 그의 연구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