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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시그69-천기정의 봄날
지우의 다음 코스는 천기정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천기정은 바디 펌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것을 피하려다 발목이 접질려 입원중이었다. 자신의 부주의로 물건을 떨어뜨리고 천기정을 다치게 한 바디 펌의 탑차 기사는 온갖 걱정을 다 했지만 천기정은 치료받으면 다 나을 거라고 안심을 시키고 혼자 병원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다.
임정이 고쳐주면 금방일텐데 천기정은 자기한테까지 차크라를 사용하게 할 수 없다면서 고집을 부렸다. 차크라를 사용해서 치료를 하고도 얼마간 쉬기만 하면 다시 차크라가 회복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천기정은 혹시 모르니까 자기는 그냥 병원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천기정이 말하는, ‘혹시 모르니까.’라는 것은 임정도 모르는 동안 차크라가 소실되거나 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런 이유로 천기정은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고 지우는 아주 오래 전에 천기정이 입원해 있는 동안 병문안을 갔었던 것을 떠올리면서 다시 천기정을 찾아갔다.
천기정은 지우를 보게 된 게 퍽이나 반가웠는지, 종종 이렇게 다치기도 해야겠다고 말했다.
천기정과 같이 있는 동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하게 됐고 몇 시간동안이라도 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사이에서는 할 말이 끊기지 않았다. 나중에 임정이 전화를 해서 어디냐고 물었을 때에야 지우는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돌아갔다.
“이건 심심하실 때 보시라고 가져온 거고요. 쉴 수 있을 때 푹 쉬세요. 일 하느라고 그동안 쉴 틈도 없었잖아요.”
책은 책상 위에 책을 여러 권 꺼내 놓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건 입 궁금할 때 드실 간식."
이것 저것 꺼내놓고 보니 짐이 한 가득이었다.
천기정은 고맙다고 말하고 지우를 배웅했다.
“뭐야, 이건?”
시그96을 보고 천기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찬찬히 누워서 설명서를 읽고 천기정은 그것을 작동시켰다. 언젠가 시그81에 대해서 지우가 흥분하고 떠들어대던 것을 들은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이런 걸 놓고 가도 되는 건가? 다시 찾으려 오려나? 심심할 때 보라고 준 거라고? 나한테 이런 걸 왜? 심심하다고 괴수를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라고.”
그러면서도 천기정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헌터가 되고 싶지 않은 일반인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가 헌터라고 생각하면서 가상의 적을 향해서 빗자루를 휘두르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천기정은 영상을 불러냈다.
그런데 허공에 떠오른 영상이 오묘했다.
실물 크기의 여자의 나신이었다.
“어…….”
영상 속의 여자가 바닥에 천천히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현실의 여자 같았다.
익스트림 헌터의 채준형 작품인데 두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천기정은 다른 사람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끄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게 정상적으로 출시된 제품이 아니라 시제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끄려고 해도 몇 분 간은 꺼지지 않고 멋대로 작동이 되는 것이다.
채준형이 지우에게 그것을 줄 때부터 이미 그렇게 조작이 되어 있었다. 혼자서 야동을 보다가 다른 사람이 들어올 때 순발력을 발휘하면서 야동을 부리나케 끄던 경험을 되살려 채준형은 시그96을 처음 사용하는 사람이 평생 못 잊을 흑역사를 만들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원래는 이익헌에게 주려고 했던 거였는데 지우를 보자 지우에게 주고 싶어졌다. 이익헌에게 줄 건 하나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
하지만 지우에게 그것을 줄 때 채준형은 시그96이 꺼지는 시간을 자기가 조작해 놨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남들이 예상치못한 시점에서 갑자기 혼자 진지빠는 클랜 마스터를 상대로 그런 장난을 하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던 천기정이 채준형의 희생양이 될 찰나였다.
천기정은 시그96이 꺼지기 전에 사람이 들어올까봐 긴장이 되는 와중에도 시그96이 만들어낸 생생한 영상 때문에 극도로 흥분되었다.
영상 속의 여자는 한 손을 뒤로 짚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면서 다리 사이를 자꾸 천기정에게 보여 주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천기정은 애가 탔다.
문을 잠그고 싶었는데 몇 주 전에 병원에서 자살 소동이 일어나면서 안에서 잠그는 장치를 모두 제거해 버렸다.
여자는 두 팔을 앞으로 하고 가슴을 내보였다.
손으로 만지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고, 영상 속의 여자가 대신 스스로 만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뜻이 통했는지 여자가 자신의 가슴을 주물렀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이 여자의 손 안에서 튀어오르다가 튕겨졌다.
천기정은 혀에 고인 침을 재빨리 삼켜야 했다.
여자는 자기 유두를 스스로 비틀었다.
정말로 바람직한 여자였다.
그래놓고 느긋하게 가슴을 감상할 시간도 다시 주었다.
정말로 예쁜 가슴에 바람직한 유두였다.
딱 알맞은 크기에 딱 알맞은 색깔.
가슴도 전혀 처지지 않고, 과하게 크지도 않고 지금이라도 넘어뜨리고 무릎으로 누르고 마구 주무르고 싶은 욕구를 생기게 만드는 가슴이었다.
천기정은 발기된 페니스를 만져 확인했다.
그리고 시그96 기기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꺼짐 버튼을 눌렀고, 꺼짐 버튼을 눌렀을 때 전원 버튼에서 선명하게 빛나던 연두색 불빛이 점진적으로 약해지고 있었다.
곧 꺼질 거라고 생각을 하니 좀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렇게 해뒀다가 나중에 안전한 곳에서 다시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지우가 그걸 찾으러 오면 애초에 받은 적이 없었다고 우기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발명품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천기정은 화면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영상에 몰두했다.
영상 속의 여자는 이제 자신의 질에 스스로 손가락을 집어 넣고 등을 완전히 바닥에 붙인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천기정은 이불을 목까지 덮고 그 아래에서 환의를 풀었다. 허리춤으로 손을 집어 넣고 페니스를 잡고 흔들면서 시그96이 만들어낸 영상에 시선을 주었다.
여자가 손을 빼고 팔을 들어 올리더니 근처에 있던 딜도를 쥐었다. 대단한 준비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천기정은 골이 띵 해지는 것을 느꼈다. 흑형 고추를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커다란 것이 여자의 아래를 뚫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천기정은 금방이라도 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그96은 곧 꺼질 것 같았다. 연두색 불빛이 이제 거의 수명을 다하고 꼴딱 꼴딱 넘어가는 중이었다.
천기정은 거기에서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갈등을 했다.
저녁 식사도 끝났겠다. 의사들이 회진도 다 돌았겠다. 11시쯤에 간호사가 들어와서 주사를 놔 주는 것만 남았겠다고 생각하면서 천기정은 플레이 버튼을 다시 눌렀다.
딜도를 질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여자가 손을 빨았다.
여기에도 남는 손이 있고 남는 페니스가 있는데 사람 것도 아닌 걸 넣고 자기 손을 빨고 있는 여자가 안쓰럽고 원망스럽고 막 그렇게 복합적인 감정이 일었다.
어느새 이불도 치워버리고 좀 더 편한 자세를 찾아 과감하게 페니스를 흔들 때였다.
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입은 여의사가 들어왔을 때 천기정의 자세는 한마디로 대략난감이었다.
한 손은 자기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고 다른 손은 바지 위로 꺼낸 페니스를 열심히 훑는 중이었다.
천기정은 부리나케 손을 떼고 뒤돌아 누우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썼다.
이불 속에서 천기정은 시그96의 영상이 계속 나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천기정은 손을 뻗어 시그96의 리모콘을 찾았고 손만 빼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역시나 정지 버튼은 곧바로 먹히지 않았고 몇 분은 혼자 더 재생이 되다가 끝날 것 같았다.
“소독을 하러 왔을 때 병실에 안 계셔서 못 하고 갔거든요.”
“아. 네.”
넘어지면서 팔을 같이 다쳤는데 별 것도 아닌 것이 소독할 때마다 눈물이 찔끔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파서 소독 시간을 맞춰서 도망갔던 건데.
도망쳤던 사람 성의라도 좀 생각해 줄 것이지 그걸 잊지도 않고 다시 찾아오고 하필이면 딱 그런 타이밍을 맞춰서 온 것이다.
“소독 제대로 안 하면 안 돼요.”
의사가 말했다.
천기정이 차마 얼굴은 못 보이겠고 팔만 이불 밖으로 뺏더니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자세 잡아 주시죠.”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내밀자 그때까지도 영상은 계속되고 있었다.
여자는 혼자서 절정으로 치닫는 중인지 고개를 꺾고 헉헉거리는 중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천기정이 몸을 일으켜 팔을 내밀자 의사가 소독을 마쳤다.
그 후로는 서로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천기정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 누워 있었다.
천기정은 지우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화를 냈다. 지우는 천기정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천기정은 지우의 해명을 들은 후에야 그것이 채준형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우를 골탕먹이려고 했던 게 어쩌다가 그 골탕을 자기가 먹게 된 꼴이었다.
지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화가 나신 거냐면서 계속해서 물었다.
내가 말을 해 줄 것 같냐고 하면서 천기정은 끝까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지우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지우는 잊어버리지 않고 천기정에게 병문안을 와 준 죄밖에 없었다.
천기정은 조금 후에 지우에게 톡을 보냈다.
[미안해요. 와줘서 고마웠고. 엄청 난감한 상황이라 좀 화가 났습니다만 나한테 화가 난 겁니다.]
지우는 궁금증이 도져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톡을 순식간에 열 댓개나 보내왔다.
천기정이 절대로 얘기를 해 줄 것 같지 않자 이번에는 채준형에게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채준형에게 시그96의 정체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시그96이 시그96이 된 것은 시그69라는 이름이 너무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어서 그렇게 한 거라는 말까지 듣고 나자 지우는 천기정이 저를 쫓아와서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 일 이후 천기정은 시그96을 아주아주 잘 챙겼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작동시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외로운 밤들을 시그96과 함께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아직 퇴원을 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병실에서만 있는 것도 지겨워서 천기정은 목발을 짚고 운동 삼아 복도를 걷다가 비상구까지 쭈욱 걸어갔다.
여기엔 뭐가 있나, 궁금증이 들어서 무겁게 닫힌 철문을 밀어 보았다. 그냥 다른 건물의 비상계단과 다를 것이 없는 곳인 것을 알고 돌아서려는데 계단 위에 쓰레기 봉투처럼 기대서 누군가 선잠을 자고 있는 게 보였다.
유난히 하얗다 하면서 봤더니 의사 선생이었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문제의 여의사였다.
천기정은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는 여의사를 바라보았다.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걸 들었을 때는 레지던트인 것 같았다.
간호사가 정소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천기정의 친척 중에도 의사가 많아서 의사라는 직업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굉장히 고되고 힘들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천기정은 정소은이 자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정소은은 환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꿈길을 거닐고 있었다.
그렇게 무방비로 자고 있는 동안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엄청 창피해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천기정은 정소은이 잠에서 깼을 때 즉시 사라질 수 있도록 거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