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트-339화 (33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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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시그69-천기정의 봄날

정소은의 머리카락이 창백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데 그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관심이 가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병실에서의 그 황당한 해프닝이 아니었다면 수많은 의료진들 중의 몰개성한 한 사람으로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자기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드레싱을 하고 상처를 소독해주는 동안 손가락 끝이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었던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몰라. 변태야? 잠든 여자를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게.’

그러면서 천기정은 휙 돌아섰다.

그러나 조금 후에,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소은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평화롭게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천기정은 그 단순하고 무의미한 동작에 자기가 왜 그렇게 빠져드는지 의문을 품었다. 천기정은 단추를 풀고 손을 집어넣고 정소은의 가슴을 주무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계단 아래 칸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정소은을 완전히 벗겨내고 정소은의 그곳에 얼굴을 박고.

'아. 그만하자. 현기증 난다.'

천기정은 말 그대로 핑 돌아서 벽을 손으로 짚고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주위의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려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식성이 이대로 초식성으로 굳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천기정은 정소은이 깰 때까지 그 곳에 있었다.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본다면 그 사람들은 자신처럼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소은이 깰 때까지 천기정은 옆에서 충실한 개같이 정소은을 지켰고 정소은이 멍하니 자기를 올려다보는 동안 문을 열고 사라졌다.

퇴원을 할 때까지 정소은과는 계속 그렇게 서먹서먹한 관계가 계속 되었다.

그리고 퇴원을 하는 날.

천기정은 그동안 고생해주었던 의료진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정소은에게 따로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정소은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보지 못하고 가게 되나보다고 생각을 하면서 퇴원 준비를 마쳤다.

혼자서 운전을 할 수가 없어 택시를 불러 타고 나가는데 정소은이 퇴근을 하는 게 보였다.

가운을 벗고 정장차림을 하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할 뻔 했지만 혹시나 하면서 고개를 돌리면서 바라보니 정소은이 맞았다.

“잠깐만요. 차 좀 세워주세요.”

천기정이 택시를 멈춰놓고 차에서 내렸다.

정소은이 걸어오다가 천기정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퇴원하시는군요.”

정소은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환자가 완쾌돼서 퇴원하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당연히 헤어져야 하는 건데도 헤어지는 것은 언제나 힘이 들었다. 깊이 정이 들지 않았던 환자라고 해도, 속만 썩이던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네. 덕분에 무사하게 퇴원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천기정이 말했다.

환의를 벗고 수트를 차려입은 천기정은 근사해보였다.

성공한 남자 특유의 자신감과 매력이 엿보였다.

“뭘요. 다행이예요.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정소은은 택시가 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가시는 길이면 같이 타고 가시죠?”

천기정이 말했다.

“걸어서 가도 금방이예요.”

“타고 가면 더 금방이겠죠. 괜찮다면 앞으로 어떤 것들을 조심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얘기도 좀 듣고요.”

“그 얘기는 이미 충분히 들으셨을 것 같은데요?”

정소은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더이상 버티지는 않고 천기정과 함께 택시에 탔다.

“뭐라고 부를까요? 정 선생님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겠죠?”

천기정이 물었다.

“뭐라고든. 부를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대화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는 말인 건가?

천기정은 아리송해 하면서 말을 멈췄다.

정소은은 자기 집으로 천기정을 데려가는 대신에 중립 지역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천기정 역시 정상적인 여자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선 남자를 자기 집으로 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천기정은 자기가 그 만남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게 흐르는지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 만남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천기정 자신도 알지 못했다.

만나기로 약속되었던 시간이 거의 다가왔을 때 정소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 가 봐야한다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약속 시간이 다 돼서 일이 생겼다고 말하며 약속을 깨는 사람들에 대해서 천기정은 냉정했다. 그러나 정소은이 하는 말은 핑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핑계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미안해서였는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정소은.

이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소중한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전혀 쓸모없는 것을 진지하게 알려준 것이다.

천기정은 마음에 담을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 소은을 용서해 주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지 않냐면서.

소은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꼭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 날 만남이 어긋나지 않았고 천기정이 정소은을 가볍게 만나고 헤어졌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쉽게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만남이 거기에서 어긋난 덕에 천기정은 자꾸 정소은을 떠올리게 됐다.

정소은과 곧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할때마다 정소은에 대해서 생각했다.

잠을 자려고 누울 때는 정소은이 상처를 소독해 주던 것을 떠올리면서 잠을 청했다.

정소은이 천기정의 상처를 지나서 등을 어루만지고 점점 더 아래로 손을 내려 천기정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그 사이를 자극하다가 그 앞에 숨겨진 것까지 더듬어 만지는 상상을 하면서 자위를 하기도 했다.

천기정이 생각했을 때 정소은은 컥 소리가 나올 정도로 대단한 미인인 것은 아니었다.

바디 펌에는 미인들이 넘쳐났다.

그런데도 정소은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딱 꼬집어서 설명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정소은은 구태여 다른 곳에서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정소은은 자기 집에서 천기정을 맞으면서 몇 시간 후에는 다시 병원에 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소은이 서두르는 바람에 괜히 천기정도 다급해졌다.

천기정이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었다.

버클이 풀리는 소리에 정소은은 고개를 떨구었다.

감정이 만들어지지 않은 위에서 육체만을 나누는 것이 천기정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또 정소은이 호출당해서 그대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지금은 그런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급한 것은 정소은도 마찬가지였다.

어긋났다고 깨닫는 것은 지겨웠다.

일단은 저지르고 후회하는 것이,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생각했다.

정소은은 여유롭고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면서 천기정을 애무했다.

미개척지로 남아있던 천기정의 몸이 정소은의 손길 아래에서 희열을 느끼며 달아올랐다.

천기정은 정소은이 만들어내는 세계에 빠져들었다.

주어진 시간이 2초라면 그 시간을 4초로 늘리고 싶었고 주어진 시간이 3분이라면 6분으로 늘리고 싶었다.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고 정소은을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정소은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싫다고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생각 같아서는 정소은과 같이 있는 시간을 천천히 즐기고 싶었지만 서로에게 여유가 없었다.

정소은이 천기정의 가슴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쓸어올리는 동안 천기정은 정소은의 허벅지 안쪽을 문질렀다.

정소은은 제 몸의 비밀을 천기정으로부터 배웠다.

한 번도 풀리지 않았던 비밀이 정소은의 앞에서 열리고 있었다.

비상구에서부터 천기정의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왔던 그 상상을 천기정은 빠짐없이 실현했다. 정소은의 옷을 벗기는 행위가 만족스러워서, 순전히 옷을 벗기기 위해 다시 입혔다. 하얀 가슴이 제 앞에서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거칠게 주무르며 젖꼭지를 입안에 머금었다. 해소되지 않았던 욕망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천기정은 정소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면서 정소은의 다리를 벌리고 들어갔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고 숙취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천기정은 정소은이 자신의 처녀성과 결별하는 것을 확인했다.

첫경험의 순간은 정소은에게 쾌감보다는 무거운 감정만 잔뜩 안겨 주었다.

천기정은 정소은의 안에서 흥분하고 절정에 이르고도 정소은의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고 큰 과제를 떠안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얼굴을 보고, 좋았냐고 묻는다면 자기가 바보라고 인정하는 것밖에는 안 될 터였다.

다행히 삽입과 사정 이후에 이루어진 후희에 대해서만큼은 정소은도 완벽한 만족을 느꼈다.

천기정이 손톱을 세워서 엉덩이를 쓰다듬는 동안 정소은은 몇 번이나 오르가즘의 문턱에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갔다. 그러면서도 아기를 재워놓고 급하게 일을 치르는 사람처럼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천기정은 이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소은은 천기정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커피를 준비해 주었다.

천기정은 다음에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었고, 언제든지 자기하고 연결이 될 수 있는 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정소은은 천기정이 자기에게 완전히 실망한 것은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안심했다.

정소은과의 만남 이후 천기정은 시그96을 가지고 익스트림 헌터에 찾아갔다.

채준형은 지우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은 후라서 천기정을 보자마자 자기가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채준형은 그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면서 한 가지를 부탁했다.

시그96에 나오는 영상을 바꿔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모르는 여자가 유혹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유혹하는 걸 보고 싶다면서 천기정은 정소은의 얼굴을 거기에 합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채준형은, 자기는 포르노 제작자가 아니라고 일단 버텨봤지만 먹히지도 않았다.

천기정은 그 후로 시그96을 엄청나게 아꼈다.

정소은도 시그96에 나오는 여자가 자기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그96은 채준형이 처음에 생각했던 이름대로 시그69라는 이름을 달고 출시되었다.

여성부에서 시그69의 유통을 금지시키려고 한다는 말이 나올 때부터 익스트림 헌터에서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로비를 펼쳤다.

값비싼 시그69를 여성부 관계자들에게 무상 제공을 하고 수령장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시그69의 소비자는 남성 헌터들만이 아니었다.

여성 헌터들에게도 시그69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채준형은 천기정이 모델의 얼굴을 정수은의 얼굴로 바꾸고 싶어했던 것에 착안해서 모델의 얼굴을 고를 수 있게 옵션을 만들었다.

채준형은 장난 삼아 자기 얼굴도 넣었는데 채준형의 얼굴은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채준형의 얼굴을 빼고 차라리 다른 얼굴을 넣어 달라는 항의가 한동안 익스트림 헌터에 쇄도했다.

천기정은 정소은과의 관계를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는 진행중이다.

외전 천기정편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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