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3 / 0348 ----------------------------------------------
[외전]세멘노프
야로슬라프는 아직 혼란스러울 아나스타샤에게, 자기가 유리와 친했었다고 말해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는 않겠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말을 해도 된다.”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에게 갑자기 다가온 행운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헌터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의 학비를 익스트림 헌터에서 지원을 해 주기로 하고 아나스타샤의 무기와 장비, 갑옷 일체를 제공하겠다고 말하자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기절이라도 해 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사사로운 것에 아나스타샤가 감격하는 것을 보고 야로슬라프는 오히려 미안해질 정도였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가 갖추고 있는 것들이 또래 아이들의 것보다 훨씬 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옷이나 신발, 가방, 모자와 머플러. 모든 것이 그랬다.
유리 세멘노프가 죽은 후에 생활이 어려워졌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가 헌터가 된 이후에도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체 운반을 하든 공격대에 들든, 무언가를 해야 헌터로서 돈을 벌 수가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기회를 얻지 못하니 헌터가 된 후에도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헌터 타투를 볼 수 있을까?”
야로슬라프가 말하자 아나스타샤는 부끄러운 듯 헌터 타투를 내밀었다.
F급 딜러에 경험치는 3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경험한 레이드가 세 번뿐이었던 모양이었다.
야로슬라프가 놀란 얼굴로 자라보자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헌터 아카데미에서 하는 실습만 제대로 했어도 이보다는 경험치가 더 쌓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로슬라프는 따돌림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리 세멘노프는 아카데미에서 밀교(密敎)의 수장처럼 평가받고 있다는 총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 교수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사람들이 아나스타샤와 엮이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와서 일이 이렇게 된 거라는 것을 야로슬라프는 깨달았다.
결국 아나스타샤에게 생긴 일은 자기가 시작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있는 동안 내 가이드 노릇을 해 줄 수 있어?”
야로슬라프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에게서 그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나스타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 거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러시아 최고의 유력자라고 할 수 있는 헌터였고 러시아에 괴수가 출몰하면 클랜 A를 데리고 와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클랜 A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클랜 A의 핵심 전력으로서 세계적으로 활약을 하면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클랜 A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클랜 A의 클랜원인 사람이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비단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이름이 높은 사람이 헌터 아카데미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그 야로슬라프가 자신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제안해 오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꿈만 같았다.
원래 자신의 오빠가 누렸어야 할 것들을 야로슬라프가 훔쳐가서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채였다.
야로슬라프는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황홀해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아나스타샤를 돌려보내지 못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몫이고, 아나스타샤가 원래 누렸어야 했을 것들을 충분히 누리게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바에도 익스트림 헌터 매장이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를 그리로 데리고 갔다.
그러다가 자기가 아나스타샤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헌터에게 관심이 있는 돈 많은 남자라면 무조건 비싸고 좋은 것들로 턱턱 안길 수도 있겠지만 야로슬라프는 전문가였다. 어떤 게 필요할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조언이야말로 아나스타샤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랑 레이드를 하러 가자.”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네?”
아나스타샤는 너님, 혹시 미치셨어요? 라고 묻고 싶은 것 같은 표정으로 야로슬라프를 바라보았다.
“아샤라고 불러도 되나?”
“네.”
“좋아. 아샤. 나하고 같이 레이드를 하는 거야. 둘이서만. 그래야 아샤한테 뭐가 필요한지 제대로 알 수 있지.”
야로슬라프는 러시아 헌터 협회에 연락을 해서 근처에 있는 5급 늪에서 레이드를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기와 F급 딜러 두 사람이 레이드를 할 예정이니 작고 아담한 괴수가 있는 곳으로 골라달라고 말하자 헌터 협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야로슬라프야말로 러시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였으니 야로슬라프의 부탁은 그게 아무리 사소하다고 하더라도 잘 들어주어야 했다.
야로슬라프와 아나스타샤가 지정된 늪에 갔을 때 그곳에는 스컨데르가 있었다.
체력이 400만도 되지 않는 녀석이어서 딱 적당했다.
아나스타샤도 스컨데르가 있는 늪이라는 말에 별다른 긴장감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컨데르는 그만큼 자주 나타나는 괴수였다.
“혹시 괴수의 차크라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
야로슬라프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레이드를 하면서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에게 괴수의 차크라 같은 것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샤. 차크라를 숙련하지 않았구나.”
야로슬라프의 질책에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홍당무가 돼 버렸다.
야로슬라프는 스컨데르가 아나스타샤를 직접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아나스타샤가 스컨데르에게 데미지를 입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절대로 훌륭한 헌터도 아니었고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나쁜 수준이야.”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한숨을 지었지만 야로슬라프는 그렇다고 포기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헌터로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돼. 다른 사람이 너한테 기회를 주지 않으면 네가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괴수를 공격할 기회도 마찬가지고 레이드를 할 기회도 마찬가지야. 네가 스스로 강해지기만 하면 그런 것들은 네 힘으로 만들 수가 있어.”
야로슬라프가 말했지만 그 말들이 아나스타샤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야로슬라프 정도의 수준에 올라가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에게 그런 말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야로슬라프가 아나스타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을 붉혔다.
“좋아. 내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지. 일단. 검은 이렇게 잡는 게 아니다. 괴수를 찌를 생각이라면. 네 체중을 다 실어서 찌를 생각을 해야지. 고기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알아 보려는 게 아니잖아.”
야로슬라프가 아나스타샤의 등 뒤에 선 채 아나스타샤의 팔을 감싸고 검을 다시 쥐게 했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의 묵직한 체중을 느끼면서 그가 가르쳐주는 것들을 따라했다.
스컨데르는 잠시 쉬어가는 타임인가 하면서 자기도 숨을 고르려고 했다.
짝짓기를 하는 것 같은 자세로 자신을 공격해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달리는 거다. 그리고 공격하는 거야. 해 봐. 네 뒤는 나한테 맡기고.”
-뒤를 맡기라는 말은 엄청나게 순수한 의미였다.
아나스타샤는 심호흡을 했다.
야로슬라프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자기를 믿어주는 야로슬라프에게 그의 믿음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때였다.
아나스타샤는 전력으로 달렸다.
차크라를 실어서 달릴 정도로 능숙하지는 않았다.
그런 아나스타샤를 보면서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이 산더미 같다고 생각했다. 헌터 아카데미의 교수들에게도 그런 부분들이 보였겠지만 그들은 아나스타샤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해버렸던 듯했다.
이런 식으로 헌터 아카데미에 남아서 계속 배워봤자 아나스타샤에게는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거라는 것이 확실했다.
스컨데르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헌터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저를 향해 달려오던 헌터들과 속도가 너무 달랐다.
스컨데르가 아나스타샤를, 초저속 타구를 처음 상대해보는 타자처럼 멍하니 보고 있는데 뒤에서 야로슬라프가 달려왔다.
아나스타샤의 몸이 한 순간에 사라졌고 스컨데르의 몸에 칼이 들어왔다.
스컨데르에게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칼이 빠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상처가 회복되었다.
애초에 상처가 났을 것 같지도 않은 공격이었다.
스컨데르는 갈수록 심란해졌지만 헌터는 그 공격 한 번으로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았다.
정보창에서 스컨데르의 체력이 소소하게 깎여나갔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게 쌓이고 쌓이다보면 괴수는 결국 쓰러지고 너는 괴수의 러프 스톤과 경험치를 챙겨서 늪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거야.”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차크라를 실어서 달리는 게 기본이다. 지금처럼 해서는 괴수가 쫓아오는 걸 피하지도 못하겠어. 탱커가 같이 레이드를 하는 게 기본이기는 하겠지만 탱커가 너를 지켜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라. 한 번은 그렇게 할 수 있어도 다음 기회라는 건 영영 사라질 거다. 아무도 너처럼 뛰는 애를 레이드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을 거거든.”
따끔한 질책에 아나스타샤는 어디로든 숨고 싶어졌다.
그동안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탓만 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기본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실전에서는 연습할 때 잘 안 되는 것들이 갑자기 터득되기도 하지. 다음에 연습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해 봐. 차크라를 다리로 보내는 거다. 다리와 발에. 차크라를 흘리고 분산시켜. 그렇게 달려가서 차크라를 이동시키는 거다. 칼을 찔러 넣는 팔과 힘을 밀어넣을 허리에. 반복하는 거다. 할 수 있겠어?”
누구 말이라고 토를 달겠는가.
아나스타샤는 당장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