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트-344화 (34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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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세멘노프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았지만 발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야로슬라프는 스컨데르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다 썰어낸 고기를 접시에 담아서 아나스타샤에게 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전혀 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뒤에 있다는 걸 믿고 달려가 봐. 그리고 네 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공격을 성공시켜 봐라. 그 후에는 너에 대한 믿음이 달라져 있을 거야.”

야로슬라프의 말을 듣고 아나스타샤가 달려갔다.

칼을 잡은 손도, 괴수를 향해 달려가는 팔도 여리여리하기만 했다.

강한 헌터의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야로슬라프는 그 위에 켜켜이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신세진이나 임정만큼 막강한 헌터로 거듭나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린 헌터는 패기가 넘쳐났지만 스컨데르도 바보는 아니었다.

한 번 넘어가 주었더니 이제는 동네 바보로 알고 계속해서 공격을 해 오니 스컨데르도 자존심이 상했다.

스컨데르는 아나스타샤를 노리고 맹렬한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스컨데르의 시야에서 얼쩡거리던 헌터가 다음 순간 폭풍에 먼지가 날아간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스컨데르가 두리번거리는 동안 아나스타샤의 공격이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는 환호했다.

곧바로 야로슬라프에게 혼이 나고 다시 시무룩해졌지만.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를 충분히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놓고 아나스타샤에게 다음 작전을 신중하게 지시내렸다.

“할 수 있겠어?”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야로슬라프가 웃으면서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스컨데르는 초저속 타구가 이번에는 똑바로 오는 대신 제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속도와 방향을 바꾸어 사라져버렸다.

기습적으로 엉덩이를 찔린 것처럼 불쾌한 공격이 거듭되었다.

“아샤. 조금 더 빨리 해 봐. 아까보다 훨씬 빨라졌어.”

야로슬라프의 질책은 이제 칭찬으로 변해있었고, 아직도 자주 질책이 나오기는 했지만 칭찬의 빈도가 점점 높아졌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가 시키지 않은 것들 중에 자기에게 쉽게 느껴지는 것을 몇 번 시도해보았고 야로슬라프가 알려준 것보다 그게 자기한테 더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것은 본인이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인지 남이 알려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몸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방향, 각도, 지점.

그런 것들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본인 스스로가 알아내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같은 동작을 수 천 번, 수 만 번 반복해서 완전히 익힌 무용수처럼 점점 그것을 자연스럽게 몸에 담아냈다.

“좋아. 방금은 아주 괜찮았어. 아샤. 이제부터 기억할 건. 너는 7초만에 차크라를 다시 채워서 공격할 수 있다는 거야. 지금부터는 효율적으로 공격하자고. 공격을 한 번 성공시키고 바로 도망치지 말고 다음 공격으로 연결시켜. 상대가 스컨데르라면 할 수 있어야 돼. 네가 F급 딜러라도. 너는 세멘노프니까.”

너는 세멘노프니까.

그 말이 주술같이 들렸다.

그동안 아나스타샤는 자기가 세멘노프라서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경계하고 멀리하고 배척하는 것이 자신이 세멘노프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빠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은 오빠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도 꺼리는 것 같았다.

오빠를 잃은 상처가 낫기도 전에 아나스타샤는 오빠를 원망하게 됐다.

그런 아나스타샤에게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너는 세멘노프니까 할 수 있다고.

아나스타샤는 검을 잡은 손에 시선을 주었다.

나는 아나스타샤 세멘노프다.

아나스타샤는 검을 보고 소리없이 말했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성공을 할 수도 있을 테고 실패할 수도 있을 거였다.

스컨데르한테라면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경험이 많지 않은 F급 딜러에게 그것은 쉬운 주문이 아니었다.

야로슬라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강하게 아나스타샤를 시험하고 가르치고 싶은 욕심뿐이었다.

세멘노프라는 이름을 들은 이후로 아나스타샤의 집중력은 높아졌다.

차크라를 분산하고 이동시키는 속도도 빨라졌다.

야로슬라프는 그동안 아나스타샤의 뒤에서 지켜오기만 하던 것을 바꿔서 아나스타샤의 곁에서 같이 스컨데르를 공격했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의 공격을 보면서 자기가 뭘 배울 수 있는지, 자기가 뭘 잘못 하고 있었던 건지 깨우쳐갔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을 따라할 수는 없었지만 야로슬라프가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정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아나스타샤가 도달해야 할 경지였다.

야로슬라프의 공격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그때 스컨데르가 아나스타샤를 노리며 공격해 왔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에게 공격을 피하라고 말했다.

자기가 나서서 아나스타샤를 피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하면서 감을 익히기를 원했다.

아나스타샤는 스컨데르를 피한 후에 계속해서 스컨데르를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차크라의 숙련이 너무나 안 되어 있던 상태라 차크라가 급격히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동안은 막연하기만 했던 것이, 지금은 눈 앞에 가득했던 안개가 걷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가 어떤 점에서 부족하다는 것과 어떤 점을 보강해야 한다는 것, 어떤 부분을 발전시키면 되겠다는 것들이 깨달아졌다.

차크라가 소진된 헌터를 몰아세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기에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를 안전한 곳에 세워놓고 레이드를 펼쳤다.

아나스타샤에게는 훌륭한 현장 학습이 되었다.

스컨데르는 쉬지 않고 몰아치는 야로슬라프의 공격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 번이라도 더 공격해 볼 수 있을 것 같으면 해볼래?”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아나스타샤도 진심으로 하고 싶었지만 지금 바로 쓰러지지 않는 것이 스스로 대견할 정도로 차크라의 소모가 컸다.

“정말로 그러고 싶지만 안 될 것 같아요.”

야로슬라프는 아쉬워하면서도 아나스타샤의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그의 검이 스컨데르의 목을 갈랐고 몇 번의 공격이 반복적으로 더 들어가자 정보창에서 스컨데르의 체력이 0을 찍는 것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아무리 클랜 A라고는 하지만 도움이 거의 되지 않은 자신을 데리고 스컨데르의 공략에 혼자서 성공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질적으로는 야로슬라프의 솔로 레이드와 다름이 없었다.

야로슬라프는 스컨데르가 떨군 러프 스톤을 아나스타샤에게 안겼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지만 야로슬라프는 끝내 그것을 아나스타샤의 손에 쥐어 주었다.

“말도 안 돼요.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네가 싸운 첫 레이드를 기념하라고.”

“첫 레이드는 아닌데요?”

“거짓말 하지 마. 앞에 했던 것들은 레이드라고 할 수준이 안 됐을 것 같아.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그렇게 듣고 보니 또 틀린 말도 아니어서 아나스타샤는 수긍했다.

그래도 러프 스톤을 덜컥 받아도 되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야로슬라프가 아나스타샤를 안아들었다.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겠지?”

“그럴 것 같긴 해요.”

아나스타샤는 이렇게 하는 게 적절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야로슬라프를 바라보았다.

야로슬라프는 아무런 감정 없이 유리 세멘노프의 여동생을 안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나스타샤를 안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힘에 부치는 레이드로 힘이 빠진 상태였고 자기가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나가 줄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를 안아 가까이에서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의 목에 팔을 감았다.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미 목에 안긴 코알라 새끼처럼 얌전히 그의 목을 안은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 가깝기는 했다.

경고음이 켜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야로슬라프는, 그런 경고음 같은 것은 무시하고 싶었다.

“너무 못하더라. 아무 준비도 돼 있지 않았어. 그게 헌터 아카데미의 평균 실력이라고 한다면 정말 실망이 클 것 같아.”

야로슬라프는 괜한 소리를 해댔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화를 돋우려고 그랬던 거라면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나스타샤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야로슬라프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고, 그의 몸에서 나는 진동을 느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아나스타샤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다가 아나스타샤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푸른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품안의 어린 헌터가 자신을 경배하듯 바라보는 것을 보는 것이 이렇게 두려운 일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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