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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세멘노프
야로슬라프는 서둘러 아나스타샤를 내려 놓았다.
아나스타샤는 충실하게 야로슬라프의 곁을 따라왔다.
늪을 나오고 그들은 사체 운반 헌터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곳을 떠났다.
야로슬라프의 가슴 속에서 거대한 갈등이 일어났다.
아나스타샤는 유리 세멘노프의 동생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야로슬라프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아나스타샤의 가슴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남게될지 그는 상상할 수 있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아샤. 익스트림 헌터에서 사고 싶은 게 있는지 봐둬. 그리고 내일 다시 만나자. 원하는 게 있으면 사줄게.”
원래의 계획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에게 어떤 무기와 장비가 필요한지 알아내서 그것을 사 주려고 레이드를 같이 하자고 제안한 거였는데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와 이대로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위험하다고 여겨졌다.
“……. 저한테 왜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네 오빠한테 빚진 게 있다고만 해 두자.”
“……. 오빠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입장이라는 게 있어.”
차에 오르고도 야로슬라프는 한동안 차를 출발시키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이대로 아나스타샤와 헤어지는 게 좋을지 같이 있는 게 좋을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았다.
“오빠는. 내가 헌터가 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아나스타샤의 말에 야로슬라프가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헌터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유리의 마음을 아나스타샤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서 헌터 타투가 나타날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자신이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였기에, 아나스타샤에게도 헌터 타투가 나타난다면 아나스타샤 역시 괴수 차크라를 갖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헌터 타투가 나타나면 오빠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 했던 때가 있었는데. 헌터 테스트 때 그 일이 일어났는데도 나한테 실망할 오빠가 곁에 없었죠.”
“…….”
아나스타샤는 모르고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가 영영 모르기를 바랐다.
그가 죽은 이유를.
야로슬라프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없이 아나스타샤를 익스트림 헌터에 데려다 주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사 줄 테니까 실컷 둘러보고 내일 만나자면서 떠나는 야로슬라프를 보면서 아나스타샤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큰 선물들을 척척 안겨줄리는 없다.
아나스타샤는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러프 스톤을 쓰다듬었다.
이런 행운을 자기가 누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나스타샤는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에 들어가자 세련된 용모의 직원이 아나스타샤를 향해 다가왔다.
“아나스타샤 세멘노프 헌터님이시죠?”
직원이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놀란 얼굴로 직원을 바라보며 그렇다고 말했다.
어떻게 자기를 알고 있는지 신기했다.
“헌터님이 편안한 쇼핑을 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저는 그냥 둘러보기만 할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고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저희가 물건을 배송해 드릴 겁니다.”
“아뇨. 제 말씀은. 오늘은 사지 않는다고요.”
“이야기는 전부 되어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야로슬라프가 곧바로 계산을 해 주기로 익스트림 헌터 측과 얘기를 한 거라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뒤늦게 깨달았다.
“가장 시급한 건 갑옷인 것 같군요. 시간이 걸리는 아이템이기도 하고요. 갑옷을 고르고 칫수를 재신 후에 무기와 장비를 보시죠. 그러면 그 사이에 제작이 돼 있을 겁니다.”
“갑옷이 그렇게 바로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우선 순위에서 앞당겨지면 꼭 그렇지도 않죠.”
“제 일을 가장 먼저 봐 주시겠다고요? 꼭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저희가 저희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지시받은 사항입니다.”
직원은 그렇게 말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는데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갑옷은 클랜 A의 임정 헌터님이 입으시는 걸로 보여드리라고 하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직원이 갑옷 매장으로 안내하고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말도 안 돼요. 그게 얼마짜린데요!”
“백 억이 넘는 가격이죠.”
“그걸……. 저기. 제대로 알고 계신 것 맞는 건가요?”
“편안한 쇼핑을 원하시면 VVIP룸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편하게 물건을 보실 수 있도록 저희가 적당한 물건들을 가져다 드릴 수 있으니까요.”
“아뇨. 정말로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나스타샤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는데.
아나스타샤는 갑옷을 입어 보았고 치수를 쟀다.
직원도 아나스타샤에게 어떻게 이런 행운이 찾아든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나스타샤의 차림이나 아나스타샤가 착용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나스타샤의 생활 수준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냥 운 좋고 얼굴 예쁜 신데렐라인 걸까 하면서 직원은 부지런히 아나스타샤를 훔쳐 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세멘노프라는 이름이 부린 마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스무살 짜리 여자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보여달라는 말을 듣고 모스크바 시내의 고급 의류 매장 직원들은 어떤 것부터 보여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했다.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이 야로슬라프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은 야로슬라프와 어떻게든 친목을 다져보고 싶은 생각이었는데 야로슬라프는 그렇게 낭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듯 매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챙겼다.
아나스타샤의 신체 사이즈를 알지 못하는 야로슬라프는 매장 직원들의 몸을 면밀하게 스캔을 하고 그중에 가장 아나스타샤의 체격과 비슷해 보이는 여자에게 옷을 입어봐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몇 번이라도 입어봐줄 수 있다는 말에 야로슬라프는 닥치는대로 안겼다.
그런 것들을 전부 안겨도 사실, 아나스타샤가 원래 가졌어야 하는 것을 돌려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주고도 모자랐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나스타샤의 눈빛이 자꾸만 야로슬라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행운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야로슬라프에게 물었다. 야로슬라프의 사랑을 받게 된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조금이라도 야로슬라프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야로슬라프는 이익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채준형을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아니, 이럴 때는 채준형을 만나야 하는 건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남자가 동생을 죽인 남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물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집착과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가 목에 그 칼끝을 겨누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나스타샤에게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야로슬라프의 번민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야로슬라프는 쇼핑을 끝내고 그것들을 아나스타샤의 기숙사로 보내려다가 아나스타샤의 기숙사에 그만한 것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야로슬라프는 총장에게 연락을 해서 아나스타샤 세멘노프의 주소가 어딘지를 알아냈다.
총장은 약간의 호기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야로슬라프가 유리 세멘노프와의 옛 정을 생각해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간단히 넘겼다.
아나스타샤의 집은 두껍게 쌓인 눈 아래에서 초라한 행색을 겨우 숨기고 있었다.
만일 그런 날을 택해오지 않아서 민낯을 전부 보여야 했다면 피차간에 민망함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얗게 쌓인 눈이 건물의 초라한 행색을 가려주려고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대충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것들을 했다.
익스트림 헌터의 지점장에게 연락을 해서 러시아에 있는 동안 지낼 집을 구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클랜원들이 사생활 보호에 얼마나 강박적으로 신경을 쓰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야로슬라프의 주문을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정보 외의 것에 관심을 갖는 것도, 호기심을 두는 것도 일체 삼간 채 야로슬라프의 지시를 받아 집을 샀다.
야로슬라프는 그 안의 인테리어도 대충 꾸며 달라고 부탁을 하고 헌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차종으로 해서 차도 한 대 마련해 달라고 했다.
야로슬라프가 그런 요구를 해 왔던 적이 없었기에 주위 사람들이 바빠졌다.
그리고 그들은, 평소에 그런 요구를 해 오는 적이 없던 사람이 부탁을 해 왔을 때 감동해 버릴 정도로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고 싶은 욕구를 가졌다.
결과는 그들이 노렸던 것에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야로슬라프는 정말로 감격했다.
조용한 곳에 홀로 서 있는 대저택은 아나스타샤에게 어울렸다.
유리가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누릴 수 있었을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아나스타샤에게 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야로슬라프의 눈 앞에는 바로 그런 것들이 놓여져 있었다.
유리가 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환경.
그동안은 유리 세멘노프에 대한 제 감정을 정리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망하고 적대했지만, 야로슬라프가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던 것처럼, 모두에게 저마다의 입장이 있었던 것 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야로슬라프는 저택 구입까지 마쳐놓고 아나스타샤를 찾으러갔다.
아나스타샤는 하루만에 일어난 일에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채로 연신 제 머리를 만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로슬라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예요. 이런 것들을 전부 받을 수는 없어요.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야로슬라프가 나한테 뭘 원하는지 모르지만 내 심장을 꺼내놓으라고 요구할 생각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과해요.”
그 말을 했을 때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집이나 차에 대해서, 그리고 그 집안을 꾸미고 있는 옷과 소품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