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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세멘노프
“심장을 요구하는 일은 없을 거야. 다만.”
야로슬라프가 아나스타샤를 향해 천천히 돌아서면서 말했다.
“어떤 때가 왔을 때 아샤. 나를 위해서 이 말만 기억해 주면 고맙겠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입장이라는 게 있다는 거.”
아나스타샤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떤 입장이 있다는 건지, 야로슬라프가 말하고 싶은 게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 건지 알지 못한 채로 아나스타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들썩거리더니 야로슬라프에게 다가와 충동적으로 야로슬라프를 안았다.
“고마워요. 정말로 많이요. 어떻게 말을 해야될지 모르겠어요. 나한테 이런 것들을 해 주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 고마워요.”
“아샤. 나에 대해서 네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알게 됐을 때. 아니야. 나를 미워하지 말아달라는 말은 못 하겠다.”
아나스타샤는 걱정스런 눈으로 야로슬라프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야로슬라프를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너는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몰라.”
“야로슬라프는 경솔하게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유가 있었겠죠. 야로슬라프에 대해서 나도 듣고 있어요. 사람들이 하는 말들요. 우리는 단순히 야로슬라프를 실력있는 헌터로서만 좋아하는 게 아니예요. 야로슬라프의 인간적인 면모를 믿고 좋아하고 존경하는 거예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야로슬라프도 그때에는 어느 정도 포기를 해 버렸다.
아나스타샤와 오래 연결될 것도 아니었다.
러시아에서의 일정만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꽤 오랫동안 러시아에는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다.
러시아에서 남은 일정 중에 헌터 아카데미에서의 일정은 더 짧았다.
고작 이틀이나 사흘.
그 시간 동안 아나스타샤와 몇 번 더 만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게 전부일 것이다.
시간을 내서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레이드를 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헤어지고 나면 다시는 아나스타샤에게 연락할 일도, 누군가에게 아나스타샤의 안부를 묻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에게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가 자기 차로 새 저택에 데려다 주었을 때 어디로 가는 건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야로슬라프는 그 집과 차를 아나스타샤에게 주고 싶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였다.
이걸 받아준다면 고맙겠다고 날림으로 말해버렸을 때 아나스타샤는 모욕받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야로슬라프. 갑옷이랑 무기랑 장비를 사 준다고 했을 때만 해도 이건 너무 과하지만 그래도 헌터한테 필요한 물건들이니까 염치가 없더라도 고맙게 생각하면서 받겠다고 다짐했어요. 이것들을 가지고 내가 제대로 레이드를 하고 실력을 키우면 야로슬라프에게 언젠가는 갚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야로슬라프에게 그게 더 의미가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건. 말도 안돼요. 이런 걸 받으려면 평생을 야로슬라프의 노예로 살아야 할 거예요. 그렇게 한다고 해도 100분의 1도 충당을 못할 거예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예요.”
아나스타샤는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하지만 야로슬라프도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냥. 받아주면 좋겠어. 그래준다면 고맙겠어.”
“나한테 뭘 원해요, 야로슬라프?”
숙명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한 가지 사실을 가정하고 있었다.
야로슬라프가 러시아에 왔다가 자신을 보았고 젊고 괜찮은 용모인 헌터인 자신에게 마음이 흔들려서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야로슬라프라면 러시아의 모든 여자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 환영하고 사랑하고 싶어할텐데 그런 야로슬라프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고마웠다.
아니. 고맙다기보다는 황당했다.
자신의 미모가 다른 여타의 헌터들을 찍어누를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둘러보면 아나스타샤만큼이나 예쁜 헌터들이 널린 곳이 러시아였다.
극한의 미모가 유지되는 시간이 짧고 곧 퇴색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평균적인 미모의 수준들이 높다보니 외모에서 독보적인 수준을 지킨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가진 무엇이 야로슬라프를 그렇게 달아오르게 만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만한 돈을 쓰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러프 스톤만 봐도 그랬다.
누가 그런 것을 예쁜 조약돌을 주워 주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민다는 말인가.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를 새 집에 들이기 위해서 갖은 설득을 해야했고 마침내 아나스타샤도 고집을 꺾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가 잔뜩 들뜬 표정으로 새집을 구경하고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너무 호화로운 내부를 보면서 점점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가 그 시간을 결코 즐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나스타샤. 유리는 나한테 좋은 스승이었고 나는 유리한테 많은 걸 빚졌어. 유리가 살아있다면 유리가 너를 직접 가르쳤을 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리는 지금 우리 곁에 없지. 유리를 대신해서, 내가 유리한테 갚았어야 했던 걸 너한테 갚고 싶어한다는 걸 이해해주면 좋겠어.”
결국 야로슬라프는 완곡하게 설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야로슬라프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안은 충분히 따뜻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둘이만 있는 것은 어색하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다.
장작 타는 소리가 공격적으로 들려왔고 내부가 곧 따뜻해졌다.
아나스타샤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것을 보고 놀랐다.
가끔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이건 정말 말도 안 돼.’라고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유리에 대해 묻는 바람에 야로슬라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야로슬라프는 화재를 다른 것으로 바꿨다.
이익헌과 같이 있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화술이 습득되었던 것 같았다.
유리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는 야로슬라프가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다름이 없었다.
절대로 그가 풀 수 없는 난제, 증명할 수 없는 명제였다.
세멘노프를 원망하는지 누가 묻는다면 야로슬라프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레오니드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리와 야로슬라프 중 살아남은 사람은 야로슬라프였다.
야로슬라프는 유리 세멘노프에게 사랑하는 친구들을 잃었지만 지금은 유리를 향한 원망이 완전히 퇴색되어 원래의 감정을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야로슬라프가 벽난로 앞에서 장작 사이에 틈을 만들면서 불이 더 잘 타오르게 만드는 동안, 바닥으로 옷자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철렁해져서 야로슬라프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부드러운 러그를 밟고 아나스타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기척을 느끼면서 야로슬라프는, 일이 이렇게되기 전에 아나스타샤를 두고 떠나야 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야로슬라프가 일어서자 아나스타샤가 그를 바라보았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의 곁을 스쳐서 지나가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어려울 것은 전혀 없었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앞으로 옮기고 다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앞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 순간은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황홀한 나신이었다.
아나스타샤를 말리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입은 가만히 소리를 침묵으로 바꾸어버리기만 했고 야로슬라프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제 옷을 벗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머리카락 몇가닥이 아나스타샤의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야로슬라프가 옷을 벗는 동안 아나스타샤는 힘을 얻은 듯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탐욕스럽게 아나스타샤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흠잡을 곳이 없는 아름다운 몸이었다.
여신의 모습을 상상한 적은 없었지만 아나스타샤의 몸을 보고 있자니 굳이 그런 걸 상상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운 몸이었다.
절대로 이 아름다움이 퇴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구가 저절로 피어오를 정도였다.
야로슬라프는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저역시 완전한 나신이 되어버렸고, 러그 위에 몸을 누인 채 한쪽 팔로만 지탱을 하고서 아나스타샤를 기다렸다.
아나스타샤가 다가와 야로슬라프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야로슬라프는 팔을 튕겨 일어나며 아나스타샤의 입술을 머금었다.
벌어진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아나스타샤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엿보였다.
아나스타샤도 야로슬라프가 곧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열 두 시가 되면 이 모든 마법이 야로슬라프와 함께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실이 야로슬라프의 부재라는 사실을.
아무도 자신을 관심있게 바라보지 않을 때 야로슬라프만이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이 그의 시선을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받고 싶어서 열망하고 있을 때 그가 고개를 돌려 아나스타샤를 바라봐 준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멈춘 것처럼, 그 멈춰버린 세상에 아나스타샤만이 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에게는 그의 눈에 새겨진 자신이 보였다.
아나스타샤의 벌어진 아랫입술을 야로슬라프가 부드러운 입술로 머금었다.
그의 키스에 반응해 주고 싶었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벅찬 감격 때문이었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를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누워서 아나스타샤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그는 감정을 닫아버렸다.
그 순간 그는 아나스타샤라는 여왕의 노예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