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트-348화 (346/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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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세멘노프

하지만 그는 끝내 유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어두운 과거라면 저 혼자 아는 것이 낫다고 야로슬라프는 결정을 내렸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가 떠날 때까지 늘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것은 야로슬라프가 원한 일이기도 했다.

야로슬라프가 떠나기 전, 그가 파티에 초대되었다.

야로슬라프가 거기에 가겠다고 하자 야로슬라프를 초대한 호스트조차 놀라워할 정도였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갔다.

야로슬라프가 파티에 나타날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모두가 두 사람의 등장에 놀랐다. 사람들은 야로슬라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를 지키는 아나스타샤에 대해 관심을 품었다. 야로슬라프에게 영향력을 가진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파티에서 돌아온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에게 몇 군데의 공대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제는 레이드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경험치도 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들뜬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에게도 이별이 힘들 거라는 것을 야로슬라프는 알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계산적으로 굴지 못했다.

야로슬라프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한 재산을 두둑하게 뜯어낼 생각을 품을 줄도 모르는 여자였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에게 바보같다고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기꺼이 바보처럼 굴겠다고 말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났을 때 나에 대해서 떠올렸을 때 좋은 기억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을까봐서 겁이 나요.”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나야말로.”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절대로 그 말의 온전한 뜻을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하루를 남겨놓고 야로슬라프는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꼭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들은 모두 마쳐놓은 상태였다.

남은 일정은 중요한 자리에 있는 중요한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고 악수를 해 주고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인상을 주는 일이었는데 야로슬라프는 도무지 그 일이 내키지 않았다.

야로슬라프는 마지막 날을 온전히 아나스타샤를 위해 써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지상에서 맞이하는 최후의 날인 것처럼 그 날을 아꼈다.

너무나 자주 눈물이 났고 그가 견딜 수 없이 그리워질까봐서 겁이 났다.

아나스타샤와 헤어지기 전, 야로슬라프는 벽난로 앞에서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의 부드러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국으로 가는 것도 안 돼요?”

“와도 만나기 힘들 거야.”

“혹시. 내가 귀찮아요?”

“그게 상관있어? 내가 너를 원한다면 나는 네가 나를 귀찮아하는 걸 상관하지 않을 걸?”

“나도 그렇게 해도 돼요?”

“그건 잘 모르겠군.”

야로슬라프가 짓궂게 웃었다.

“나쁜 남자네요. 야로슬라프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야로슬라프는 그 날을 떠올리면서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밤중에 레오니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야로 형!”

“형?”

“응. 형이라고 부를 테니까 이번에만 내 대신 가 줘.”

“뭘? 어디에?”

“러시아.”

“러시아에 왜?”

“가기로 돼 있었는데 완전히 잊어버렸어. 아짐한테 절대로 잊어버렸다고 말을 할 수는 없어. 아마 나를 죽일 거야. 아주 기쁜 마음으로 죽일 거라고.”

“아짐이라면 그러겠지.”

“제발 형. 형이 대신 가겠다고 했다고 말해줘. 부탁이야!”

“…….”

“삼촌이라고 부를까?”

“울어봐. 그러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혀으어어어헝. 혀어어엉!”

이런 바보한테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하면서 야로슬라프는 후회했다.

언젠가 러시아에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다.

모스크바에.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했을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3년만에 다시 찾은 모스크바는 그가 그 도시를 알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늪의 영향이 가장 컸다.

멀쩡하게 건물이 서 있던 곳이 그냥 나대지로 변해 있는 곳이 많았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가 살던 곳도 사라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이렇게 그리움이 절절하게 쌓일 거라는 걸 알았으면 아나스타샤의 연락을 그렇게 철저히 막는 것이 아니었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그는 오만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다행히, 아나스타샤의 집은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잠겨진 문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그 안으로 넘어갔다.

현관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2층 침실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야로슬라프는 자기에게 어떤 권한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로 올라갔다.

복도 끝에 아나스타샤의 침실 문이 보였다.

문은 조심성 없이 열려있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이미 안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웃으면서, 하지 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아나스타샤는 사라졌다는 것을 야로슬라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걸음 소리를 죽인 채로 침실에 다가가 조용히 열려져 있던 문을 밀었다.

창백한 허벅지 사이로 남자의 거친 손이 들어가 아무렇게나 그곳을 휘젓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전율하면서 짧은 비명들을 이어서 내고 있었다.

하얀 두 다리가 탐욕스럽게 남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남자는 절정의 순간을 향해 내달았다.

야로슬라프는 차라리 이게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나스타샤와는 처음부터 잘 될 수가 없는 사이였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 담을 넘었을 때 한 여자가 길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추운지, 목을 옷깃에 깊게 묻은 채, 고개는 뒤로 돌리고서 걷고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여자의 시선을 집요하게 붙잡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야로슬라프의 차였다.

여자는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그의 차를 바라보았다.

차가 세워진 곳에서 점점 멀어지자 뒤돌아 보는 것이 버거웠는지 아예 차가 있는 쪽으로 돌아선 채 뒷걸음질로 걸었다.

야로슬라프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길게 흐르는 은빛 머리카락.

코트 아래로 드러난 날씬한 라인.

야로슬라프는 몸을 숨겼다.

아나스타샤는 포기한 듯 고개를 젓고 돌아섰다.

그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걸어오는 아나스타샤는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야로슬라프의 환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한 얼굴 위에서 의지있게 빛나는 깊은 푸른 눈을 바라보면서, 야로슬라프는 제 몸을 드러냈다.

아나스타샤는 힐끗 그를 바라보고 냉큼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그에게 무관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던 단 몇 초뿐이었다.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변화무쌍하게 변했다.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더니 분노를 이기고 그리움을 드러내다가 좌절과 슬픔을 동시에 겪는 것 같았다.

야로슬라프는 아나스타샤가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안타까웠다.

다가가는 야로슬라프를 거부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오히려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개새끼. 나쁜 자식! 죽어버리지! 다시 또 사라져 버릴 거면서!”

아나스타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정신을 멍해지게 만들 정도의 깊은 키스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의 키스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아나스타샤는 고통스럽게 울었다.

“울지마. 아샤. 돌아왔잖아.”

“다시 떠날 거잖아요.”

“그래도 도망치지는 않을게.”

“숨지… 않겠다는 말이예요?”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야로슬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준형을 찾아가 자신의 깊은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채준형은 야로슬라프에게 말했다.

“야로는 야로 몫의 고민을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아샤의 고민은 아샤가 하게 놔두고 말입니다. 아샤가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야로를 용서하지 못할까봐 걱정이라는 거지 않습니까? 아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 일이 닥치기 전에는요. 그리고 아샤가 그 일을 알게될지도 모르는 거고요. 내 생각에 아샤는 그 일을 모르고 지나가기가 쉬울 겁니다. 가끔은 자기 손은 내려놓고 운명에 맡겨야 할 때가 있는 거예요.”

운명에 맡긴다는 것은 엄청나게 불편하고 불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채준형의 말대로 때로는,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야로슬라프도 알고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뭐야?”

“내 하숙생들요. 집이 크면 괜한 낭비잖아요. 나는 거의 대부분 레이드를 하고.”

“돈이 필요해?”

아나스타샤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을 하면 되는데.”

“내 연락은 피하기만 한 사람이.”

“무슨 일인지 용건을 남겼으면 연락했을 거야.”

“됐어요. 돈 때문에 연락한 것 아니었어요.”

“그렇겠지……. 알아. 미안하고. 그런데 돈은 왜?”

“야로슬라프가 돌아오면 머물다 갈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싶었어요.”

“여기는 왜?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야로슬라프라면 헷갈릴 것 같았거든요. 야로슬라프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고 돈도 많고 강한 헌터니까 당신이 가진 그런 것들을 좋아해서 내가 당신을 탐내는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걸 내 나름의 방식으로 알려주고 싶었어요.”

“아샤.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어.”

“알아요. 그런 사람을 사랑하면서 기다리는 게 내 운명인가 보죠. 그래도 영원히 기다리겠다는 말은 못해요.”

야로슬라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나스타샤는 야로슬라프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감격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가요?”

“일 주일 정도 걸릴 거야.”

“계속 바빠요?”

“부지런히 하면 이틀에 끝낼 수도 있겠지.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지만 그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얘길 하면 빨리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몰라. 안 될 것도 없지. 그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만나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그러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그러면 그렇게 하지 말까?”

“아뇨. 그렇게 해요.”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하고 싶은 일 있어? 가고 싶은 곳이나. 내가 오면 뭘 하고 싶었어?”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물어볼 것도 없죠.”

아나스타샤가 야로슬라프의 목에 과감하게 팔을 감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말해봐.”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나올 말은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나스타샤의 허리를 바짝 끌어 당기며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야한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레이드요.”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어?”

“레이드요. 당신이 떠날 때하고는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야로슬라프는 고개를 저으면서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선은 저 안에 있는 바퀴벌레들을 내보내자. 그리고 우리가 뭘 해야될지 천천히 생각하자고. 놀란 걸 생각하면. 아휴!”

“왜요?”

“아샨줄 알았어. 침실에 있는 여자가.”

“사샤를 본 거군요?”

아나스타샤는 상상이 된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내 심장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면 이렇게 웃을 수 없을 걸?”

“내가 당신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다려달라고 말한 적 없잖아요.”

“그래. 말한 적 없었지. 정말로 무책임하게 굴었고. 아샤한테 나를 믿어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야로슬라프를 이해해요. 레이드를 할수록 야로슬라프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어요.”

“왜? 위험한 일이 많았던 거야? 이제 몇 급이야? 헌터 타투 좀 보여줘.”

헌터 타투를 보여주기에는 위에 입은 옷들이 너무 두꺼웠지만 열정적으로 소매를 끌어올리고서 아나스타샤가 헌터 타투를 보여 주었다.

C급이었다.

야로슬라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승급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칭찬을 기대하는 얼굴로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잘 했는데? 정말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나스타샤는 그 말만 기다리면서 레이드를 해 왔던 사람처럼 좋아했다.

“좋아. 침실과 늪. 어디로 더 먼저 가고 싶은 거야?”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내가 어떤 괴수를 먼저 상대해 주면 좋겠어요?”

“나.”

“그러면 달리 물을 것도 없네요.”

아나스타샤가 야로슬라프의 목에 팔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말은 장난스럽게 했지만 그 그리움의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야로슬라프도 모르지 않았다.

‘그건 아샤의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라면 그 문제로 괴로워하는 건 야로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샤가 꼭 그 일을 알아야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야로슬라프는 채준형의 말을 듣고도 정말로 그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 품 안의 아나스타샤를 보면서 그는 마음을 굳혔다.

그것은 아샤의 몫이 아니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제 가슴에 끌어 안으며 야로슬라프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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