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더니 의사가 능력을 가짐-4화 (4/145)

의사의 의무 02

<2>

“어때? 엄마 괜찮지?”

“네.”

그러나 이미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아이.

얼마나 울었으면 저럴까.

그리고 여전히 아이는 서글픈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고 있다.

“지연아.”

내가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박지연, 초등학교 4학년.

조금 전 알게 된 아이의 정보다.

“엄마 이제 괜찮을 거야. 주사도 새로 놨고. 이제 잘 주무시잖아. 그치?”

“···네.”

여자아이는 내내 조용히 대답하며 엄마를 계속 쳐다봤다.

엄마를 무척 위하는 모습.

아이가 무척 어른스럽다.

한순간 아이는 아이답지 않게 부쩍 성숙해 버린 것 같았다.

“지연아. 혹시 아빠, 아빠는?”

보호자의 존재.

그것에 대해서 궁금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러자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는 아이.

그런데 아이는 이내 고개를 숙인다.

“···선생님.”

“왜? 말해 봐.”

“원래 아빠는···.”

그런데 뒷말 대신, 아이의 눈에 핑! 하며 눈물이 다시 고이고 있었다.

순간, 깜짝 놀라며 나는 즉시 다르게 물어봤다.

“혹시 삼촌이나 이모, 이런 분들은 없어?”

“···선생님, 이모··· 있어요.”

그나마 다행이다.

“언제 오시는데?”

“내일 아침.”

“몇 시?”

그러나 지연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럼 넌 학교는 안 가?”

“이모부가···.”

“그럼 이모 댁에 있었어?”

“네.”

“그럼 오늘은?”

“그냥 엄마가··· 엄마가 흐으응! 보고 싶어서···.”

그 순간, 갑자기 아이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지고 있다.

아이도 아는 것이다. 엄마의 삶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지연아. 괜찮다니까. 엄마 괜찮아.”

그렇게 다시금 달래다가 나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서 일어섰다.

그리고 반대편 베드 쪽을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너무 시끄러웠죠?”

그러자 그 베드에 누워 가만히 있던 환자는 말없이 날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윤정숙 환자, 만 63세. 역시 폐암 환자다.

그러고 보면 의외로 여성 폐암 환자들이 많다.

단순히 흡연 문제가 아니다.

간접 흡연, 공해, 유전적인 문제 등 아주 복합적인 요인들이 빚어낸 결과다.

“감사합니다. 주무세요. 그럼 전 나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공손하게 말했고.

곧이어 윤정숙 환자의 보호자한테도 인사했다.

윤정숙 환자의 막내딸이라는 여대생.

그녀는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누워있다가 즉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나한테 인사를 했다.

좀 전에 김성미 환자 소동으로 인해 취침 시각이 늦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들은 김성미 환자를 전혀 탓하지 않고 있었다.

#

“저기 오네요. 선생님!”

“김정민 선생 왔어요?”

“네, 저기요.”

잠시 후, 의료용 카트를 끌고 스테이션에 도착했을 때, 수간호사와 이야기를 하던 김재호 선배는 김세연 간호사의 귀띔에 즉시 고개를 돌리며 날 쳐다봤다.

그러고는 수간호사와의 대화를 재빨리 마무리한 뒤 그는 내 쪽으로 뛰어왔다.

“어때? 김성미 환자?”

“이제 괜찮습니다.”

“수고했어. 2시간 동안 고생했네.”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급한 게 떴거든. TA(교통사고) 환잔데, 바로 수술 들어갈 거야. 김정민 선생은 지금부터 병동 좀 챙겨봐. 아까 보니까 처치도 잘 하고, 환자 가족도 잘 챙겨주던데. 수술 잘 되면 우리 아침이나 같이 먹자.”

씩 웃으며 어깨를 툭툭 치던 김재호 선배는 바로 후다닥 뛰어갔다.

이때, 김세연 간호사가 간단히 코멘트했다.

“와, 진짜 치프 쌤 저러시다가 역대 기록 깨시겠어요.”

나는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역대 기록요! 오늘 밤까지 수술방에서 보내면 연짱 사흘인데, 누가 최고 기록 갖고 계신지 혹시 아세요?”

최고 기록이라? 그딴 것도 있었나.

“누구신 데요?”

“최현호 교수님! 5일 연짱 기록. 레지던트 2년차 때 세운 기록인데 아직 안 깨졌대요.”

근데 그게 말이 되나.

그러고 보면, 아마 과거에 내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때도 이렇게 놀랐을 거다. 지금 역시 변함이 없고.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최고 기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

그 바람에 나는 도무지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병동 관리가 어렵기도 하지만, 수술방에 비하면 꿀보직이 아닌가.

수술방의 그 텁텁하고 조용한 분위기.

그런 곳에서 밤샘 수술을 한다는 것은 지독한 수마(睡魔)와 미친 듯이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튼, 정신을 차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809호 김성미 환자, 영상 결과 자료 좀 다시 확인하고 올게요.”

김세연 간호사한테 내 행선지를 알려준 뒤, 서둘러 영상실로 내려갔다.

#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새벽이 지나 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나이트 근무를 했던 간호사들은 퇴근하기 시작했고.

낮 근무 간호사들은 시간에 맞춰 출근했다.

그렇듯 스테이션 근무 인원이 새롭게 바뀌었지만.

퀭한 모습의 인턴들, 레지던트들의 모습은 언제나 똑같다.

한편, 탕비실에서 타온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나는 주변을 살펴봤다.

이 시각, 입원실 환자들도 가족들도 하나둘 복도로 나와, 복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이다.

폐 수술이 예정되어 있는 환자들 중에는 아직 거동이 가능한 이들도 있는데.

의사들은 이들에게 되도록 걷는 것을 권장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폐 수술 이후 모든 기능이 많이 쇠약해지게 되는데.

이렇듯 운동이 가능할 때 운동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선생님!”

다시 날 부르는 목소리.

즉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출근한 조혜숙 간호사다.

병원 근무 12년차.

역시 병원 짬밥이 대단한 간호사다.

“아시죠? 7시 30분부터 교수님들 회진하시는 거.”

“네.”

“그리고 아까 잠깐 나가셨을 때, 치프 쌤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홍진훈 교수님 회진 돌 때 809호 환자 좀 맡으시라고.”

“809호 환자? 아, 그 환자는 걱정 마세요.”

아마도 김재호 선배 역시 김성미 환자와 그 아이가 많이 안타까웠나 보다. 이래저래 신경을 써 주는 걸 보면 말이다.

“근데 김재호 선생님 수술은 안 끝났어요?”

“네. 그렇대요. 중간에 어레스트가 오는 바람에 수술 중단됐다고 하더라고요. 기다렸다가 좀 전에 다시 시작했답니다.”

와,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거다.

시간은 시간대로 끌고.

수술은 도대체 언제나 끝날까.

“참, 선생님!”

“네?”

“아침 드셨죠?”

“······.”

“선생님, 대체 뭐 하세요? 빨리요. 빨리 다녀오세요!”

그런데 그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고. 너무 귀찮아서 아침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병원 인턴 생활을 하려면 시간 날 때 일부러라도 뭐든 먹어야 한다.

나중에 뭘 먹으려고 할 때, 도통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다녀올게요. 참, 제 동기들은?”

“방지현 쌤, 이동욱 쌤, 다 수술방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리상 기다릴 것도 없다.

얼른 일어섰고 서둘러 뛰어나갔다.

<3>

“···그래서 검사 결과, VATS 수술(흉강경 수술)은 잘 됐다는 거지?”

“네. 공기 누출이 더는 없어 흉관 제거술을 오늘 중에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잔기침 증상이 조금 있어 그건 좀 더 지켜보겠습니다.”

“갑자기 ARDS(급성호흡곤란 증후군)가 올 수 있으니까 항상 주의 깊게 환자를 살펴야 돼. 특히, 고령 환자는 문제가 갑자기 발생하거든.”

“명심하겠습니다.”

“참, 벌써 다섯 군데 돈 건데···. 자넨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한편,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는 홍진훈 교수님의 회진.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각 수술방에 들어가 있어, 현재 인턴인 내가 홍진훈 교수님을 모시고 회진을 도는 중이었다.

“우리 CS는 바쁠 땐 진짜 정신이 없단 말이야. 그러다 보니 아무리 인턴이라고 해도 인턴에 대한 기대치가 좀 높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현재까진 생각보다 잘 하는 것 같으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환자는?”

“809호 김성미 환자, 윤정숙 환자입니다.”

이때, 나는 조금 긴장하게 되었다.

#

사람이란 건 늘 통하는 법이다

#

“교수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의아해하며 멈춰 서서 힐끔 쳐다보는 홍진훈 교수.

“김성미 환자, 영상 판독 결과가 좀 전에 다시 나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인상을 쓰며 안경테를 고쳐 쓰는 홍진훈 교수.

“죄송합니다만, 혹시나 해서 재판독 요청을 했고. 그 결과가 새로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체 누가 재판독 요청을 했는데?”

“···제가 했습니다.”

“자네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낸 홍진훈 교수는 잠시 날 노려봤다.

눈빛이 뭔가 좀 싸늘하다. 그러나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공손하게 시선을 낮춘 채 기다렸다.

“그래서? 뭐 달라지는 건 있나?”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홍진훈 교수는 다시 물었다.

“그 자료는 나한테 언제 들어오나?”

“아마··· 좀 전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러자 홍진훈 교수는 다시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김 선생.”

“네.”

“내가 지금껏 의사 생활을 하면서 별의별 환자들을 다 봤어.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도 계셨고, 잘 돼서 퇴원하신 분들도 계셨고. 다만, 우리 같은 3차 병원에 오시는 건 그 자체가 그 분들한테 마지막 희망이야. 그렇다고 의사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건 좋지 않아. 명심하게! 의사는 언제나 냉정하고 합리적이어야 해!”

그러고는 홍진훈 교수는 가볍게 내 어깨를 툭! 쳤다.

“어깨 펴! 환자 편에 설 땐 절대 몸을 낮추는 게 아냐. 깨질 거 각오하고 한 거 맞지?”

“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하는 거지만, 교수 일에 태클걸 때는 반드시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돼. 알겠나?”

“죄송합니다. 교수님.”

“가자, 809호 들어가서 보자. 그리고 영상 진단 자료는 좀 있다가 보도록 하고.”

드디어 809호로 들어서게 되었다.

#

“어떻습니까?”

인자하게 웃으며 홍진훈 교수는 먼저 809호실 윤정숙 환자부터 상태를 살폈다.

윤정숙 환자는 현재 폐암 수술을 앞둔 상태다.

“교수님, 간밤에 엄마가 주무시지도 못했고, 갈수록 숨쉬기 힘들다고 하시고, 어지럽기도 하시고···.”

그렇듯 여대생 딸은 엄마를 대신해서 말했다.

“아, 그래요? 그래도 틈틈이 병동을 돌면서 시간 내서 운동하시는 게 좋습니다. 옆에서 부축을 좀 하더라도 몸이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는 체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수술 후 예후도 좋게 나오고···. 잠깐만 볼게요.”

홍진훈 교수는 몇 가지 간단히 검진을 끝낸 뒤 가볍게 인사했다.

“현재까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여대생 딸이 인사했고.

마주 가볍게 인사하던 홍진훈 교수는 이제 김성미 환자한테 다가갔다.

이때, 나는 지연과 눈이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내가 바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너무나도 공손하게 나한테 인사한다.

아이답지 않은 너무 예의 바른 인사.

그 순간, 홍진훈 교수의 두 눈은 강하게 반짝거렸고, 다시 시선을 옮겨 지연의 옆에 서 있는 30대 초반의 여자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보호자님께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좀 있다가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한편, 이때 지연은 날 쳐다보며 계속해서 소리 없이 그저 입 모양으로 ‘이모’라고 말하고 있다.

“교수님, 근데 우리 지연이··· 아침도 먹어야 하고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언제쯤 말씀하시는 건가요?”

홍진훈 교수는 다시 말했다.

“그리 급한 것은 아니라서 편하실 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간호사나 주치의 선생님한테 말씀해 두셔도 됩니다.”

그러고는 홍진훈 교수는 깊은 잠에 빠진 김성미 환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지연에게 다가갔다.

“네가 바로 그 효녀구나?”

이때, 어색한 표정을 짓는 지연.

“학교 마치면 항상 온다며?”

홍진훈 교수는 씩 웃으며 지연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줬다.

“그럼 보호자님. 꼭 연락주십시오.”

그렇게 회진을 마친 뒤, 홍진훈 교수는 밖으로 나왔고.

“참! 김정민 선생, 잠깐 나 좀 따라와!”

#

잠시 후, 홍진훈 교수의 사무실.

한편, 나는 잠깐 소파에 앉아 조금 대기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홍진훈 교수는 나한테 손짓했다.

“어이, 김 선생, 여기!”

그 말에 즉시 다가가자, 홍진훈 교수는 자신이 보고 있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요청해서 보낸 영상 자료들이다.

흉부 CT 조영 영상, MRI T2 강조 영상, PET 영상, 뇌 MRI 영상 등.

그리고 그 영상과 같이 첨부된 의견 중에는 내 코멘트들도 몇 개 섞여 있다.

영상의학과 레지던트 선생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덕분에 간신히 허락된 코멘트들.

“김 선생, 이거부터 잘 봐. 여기, 여기, 여기. 각 바운드리가 좀 더 뚜렷해졌어. 그나마 괜찮긴 한데. 그래도 수술은 여전히 힘들어 보여. 임파선(림프절) 이쪽을 절제한다고 해도 뼈 전이나 간 전이 문제 역시 해결해야 되고. 뇌 전이까진 되지 않아서 그건 다행이지만, 너무 늦게 와서 시기를 놓쳤어.”

그러면서 홍진훈 교수는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근데 이쪽을 보면 폐 부분 절제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분포가 좋긴 해. 하지만 이것들을 다 절제해 봤자 생존 기간이 확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몇 개월일 텐데. 길어야 채 1년도 안 될 테고···. 과연 우리가 수술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렇듯 이번에도 그는 회의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고 보면, 실제 암 치료는 정말 어렵다.

암 덩어리를 제거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기 때문.

미세하게 숨어서 흩어져 있는 작은 암세포들까지 다 추적해서 제거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

표적 항암제 같은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의 치료 효율은 통계적 유의성만 있을 뿐 절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의사는 정말 힘들어진다.

“어쨌든 내 판단은 이 정도야. 김재호 선생도 서둘러 수술하자고 나한테 계속 부탁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아.”

그리고 또 말했다.

“그래서 내 생각은 신약 임상 쪽을 추천해 줄까 하는데. 그건 어떨까? 뭐, 그게 아니라면 아쉬운 대로 수술을 한번 해 볼 수도 있지만···. 하지만 당연히 이런 것들은 환자 가족의 결정 사항이고. 나야 뭐 결정대로 따라야지.”

그러고는 심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홍진훈 교수.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가 커졌다.

“교수님! 수술 불가였는데, 그럼 수술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홍진훈 교수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야 말만 그렇지. 어디 폐암 말기 환자한테 수술을 하나?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항암 화학 치료, 방사선 치료, 이거 효과 없다는 거 자네도 잘 알잖아? 효과 있다고 주장하는 의사들도 있어. 몇몇 괜찮아지는 케이스 갖고 말해봤자 그게 무슨 대순가? 폐암 말기 문제있는 거 다 알아! 차라리 김성미 환자 같은 경우는 밥이 되든 안 되든 수술이 나을 수도 있고. 애가 아빠도 일찍 보냈다고 하더니 하유! 엄마까지 그러면 어떡하나. 참 나!”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홍진훈 교수.

그 순간, 나는 씩 웃으며 드디어 나왔구나 싶었다.

은사이신 홍진훈 교수님은 생각보다 꽤 인간적인 교수다.

그래서 무모하지만, 영상 재판독 신청을 내가 직접 했던 것이고.

미래 지식까지 이용해서 이것저것 코멘트까지 넣은 것인데.

어쨌든 영상 자료를 본 뒤 홍진훈 교수님의 마음이 저렇게 변하자, 교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진행된 내 작은 전략이 생각보다 큰 결과를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의사도 역시 사람이니까.

사람이란 건 늘 통하는 법이다.

물론, 폐암 말기 환자한테 수술이란 건 어림 반푼어치 없는 일이라는 것,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무조건 수술은 해야 한다. 나한텐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말이다.

#

그리고 다음날 오전 10시.

눈밑에 다크 서클이 더 길게 자라난 김재호 선배.

그 선배가 후다닥 스테이션으로 뛰어오면서 나한테 고함을 질렀다.

“김정민 선생! 김성미 환자, 수술 결정됐어! 보호자가 한단다. 끝까지 가겠단다.”

환자 차트 작업 중이던 나는 그 말에 놀라 벌떡 일어서게 되었고.

잠시 멍하니 김재호 선배를 쳐다봤다.

“정말입니까?”

“수술 일자, 10월 12일.”

와, 진짜인가 보다.

이거 뭐야? 갑자기 일이 술술 풀리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건 내 노력만이 아니었다.

지연이의 갸륵한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니까.

그럼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리고 이날 밤.

나는 조용히 본관 지하 2층 의료 기자재 창고를 찾았다.

시스템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아직 제대로 능력을 써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수술장의 사람들을 모두 혼미하게 만들 수 있는 혼미(B) 능력보다는, 미리 사둔 돼지 목살 뭉치를 대상으로 우선 [갈렌의 나이프(C)] 능력부터 연습해 보기로 했다.

#

달달한 능력 개방

<4>

본관 지하 2층 의료 기자재 창고, 탁자 위.

수술용 메스들을 탁자 위에 펼쳐놨다.

그 앞에 놓인 돼지고기.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꼭 요리사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외과 의사답게 메스를 쥐어본다.

다양한 형태의 블레이드(수술용 칼날)들이 연결된 여러 종류의 메스.

그 중에서도 먼저 10번 나이프(메스)를 쥐었다.

10번 나이프(메스). 블레이드가 아주 흔한 크기다. 조직 절개 외에도 염증 조직이나 괴사 조직을 긁어낼 때 사용된다.

11번 나이프. 끝이 아주 뾰족하고 날카롭다. 신경 혹은 혈관 등을 절단할 때 사용된다.

12번 나이프. 약간 한쪽으로 뾰족하게 구부러진 형태. 11번 나이프와 약간 비슷한 형태다.

15번 나이프. 섬세한 절개용. 성형외과 의사들이 주로 쓴다.

그리고 20번부터 블레이드의 크기가 더 커진다. 이것들은 큰 조직을 절개할 때 사용된다.

우선, 나는 10번 나이프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휘저어 봤다.

외과 의사는 칼잡이라고 한다.

사람의 조직, 근육, 혈관 등을 자르거나 베는 일에 특화되어 있다. 물론, 의료용 목적이지만.

한편, 외과 수술용 루페를 수술자가 착용하면 더 섬세한 절개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갈렌의 나이프]는 어떤 절개가 가능할까?

[갈렌의 나이프(C): 비정상적인 조직을 깨끗하게 절개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직경 1cm 범위 내]

근데, 저 ‘갈렌’이란 단어!

기원전 129년에서 201년 사이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 외과의사 클라우디오스 갈렌.

이 특성은 이 천재적인 외과의사의 이름에서 따온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 특성 설명을 봤을 때 이 기술 자체는 거의 완벽한 외과 기술이 아닌가.

#

그럼 먼저 내 실력 발휘부터!

특성 발동에 앞서 나는 오랜만에 칼질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씩 웃으며 10번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칼날을 가만히 쳐다봤다.

정말 예리하다.

뼈마저 잘라낼 듯.

그래서 이런 메스를 다룰 때 주의하지 않으면 수술자가 심각한 외상을 당할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주의하면서 돼지비계 쪽에 블레이드 끝을 가져갔고 스으윽! 하며 잘라봤다.

그러자 아무런 저항 없이 예리한 파선이 생겼다.

곧이어 루페를 착용한 뒤 나이프를 계속 바꿔가며 좀 더 세밀하게 이곳저곳 절개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10분이 지난 뒤, 다시 절개 부위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고 만다.

도대체 이게 얼마만의 환한 웃음인가.

메스를 쥐고 있으니까 이렇게 사람이 행복해진다.

아무래도 나는 천상 외과의사인가 보다.

지난날, 전처 때문에 병원 사표를 내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때 그렇게 우울했는데.

사실, 적어도 전처가 나한테 사과 한마디는 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사과는커녕, 법정에서도 아주 차갑고 아주 경멸적인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녀의 변호사는 미친 듯이 항변했다.

애초에 양심이라는 게 전혀 없는 사람들인가.

#

그럼 이제 [갈렌의 나이프] 실력도 확인해 보자.

이번에는 11번 나이프를 손에 들었고.

먼저 돼지 조직 깊숙한 곳에 칼날을 찔러 넣은 뒤 안쪽을 헤집어놨다.

정상적인 조직 속에 비정상적으로 망가진 조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10번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루페 역시 착용한 뒤, 잠시 절개 포인트에 집중했다.

순간, 저절로 시스템 알람이 떴다.

[갈렌의 나이프, 등급 C]

[비정상적인 조직을 깨끗하게 절개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직경 1cm 범위 내]

[사용하시겠습니까?]

속으로 ‘네’를 외치는 순간, 이상한 기운이 바로 손끝으로 몰려든다.

마치 시원한 듯하면서도 화끈화끈 열기가 샘솟는 듯한 기운.

그 기운을 감지하며 슬쩍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자, 마치 우웅! 우웅!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물론 느낌 탓이다.

입꼬리가 쓱 올라가다가.

다시 집중하며 10번 나이프 끝을 돼지고기 표면에 대고 쑥 밀어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치지직! 하는 미세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놀라며 유심히 쳐다보다가.

10번 나이프를 옆에 내려놓고 돼지고기 표면을 이리저리 쳐다봤다.

그러고는 다시 10번 나이프를 손에 들고서 주변을 빠르게 절개했다.

그로부터 잠시 뒤.

쓱! 하며 조직을 가르자, 그 안쪽으로 길쭉한 홈이 보인다.

즉시 루페를 이용해서 더 자세히 살펴봤다.

앞서 11번 나이프를 이용해서 헤집어놨던 안쪽 조직.

우와, 이거 봐라!

그 조직이 아주 말끔하게 제거됐다.

지금 단계에서 구태여 필요가 없는 지혈 처리까지 완벽하게 되어있는 모습.

이거 생각보다 깔끔한데.

그 순간, 나는 호기심 병이 도져, 더 촘촘하게 주변 조직을 절개해서 그 내부를 더 꼼꼼하게 확인해 봤다.

그리고 점점 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 능력은 다시 없을 전대미문의 절제술, 그런 절제술이 될 것이 틀림없다.

[축하드립니다!]

[경험치 +10]

#

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뛴다.

흥분이 되기도 하고.

긴장감이 밀려들기도 하고.

입술도 바짝 마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아싸! 다시 한번 더 해 보자.

나는 다시 뾰족한 11번 나이프를 쥐었고.

돼지고기 속에 깊숙이 박아넣었다. 그리고 일정한 패턴 형태로 내부 조직을 미세하게 찢었다.

이 정도면 됐고.

그러고는 다시 [갈렌의 나이프, 등급 C]를 발동시켰다.

다만, 이번에는 특성 발동과 동시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과연 이럴 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잠시 후, 서둘러 주변 조직을 절개한 뒤 내부를 살펴봤는데.

오호라!

비정상 조직들이 절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직후 내가 원하는 패턴대로 미세한 금들이 찍찍 그어져 있지 않은가.

뜻밖에도 내가 생각한 바대로 추가 절개가 이루어진 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시스템 알람이 떴다.

[축하드립니다!]

[경험치 +20]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특성을 습득하셨습니다!]

[이격 블레이딩 등급 C]

[공간 장벽을 격해 내부 조직을 절개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공간 장벽 1cm 범위 내]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갈렌의 나이프, 이격 블레이딩의 최초 조합에 성공하셨습니다!]

[갈렌의 나이프 등급이 B등급으로 상향 조정됩니다]

[갈렌의 나이프, 등급 B]

[비정상적인 조직을 깨끗하게 절개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직경 1.5cm 범위 내]

#

와! 와! 와!

이게 대체 뭐야.

갑자기 등급 상승과 보상 같은 게 생겼다.

능력이 저절로 상승된 것이다.

새로운 능력까지 생겼고.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해 본 행동이었는데.

그 결과, 2개의 보상이 투두둑 떨어진 거다.

문득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 6분.

사실, 남들은 자고 있을 시간인데.

지금 나는 이러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 입가에는 어느새 웃음꽃이 가득해졌다.

그래, 시간이 좀 더 남아 있다.

새벽 4시 30분에 딱 맞춰 중환자실을 점검해야 하는데 그때까진 시간이 아직 남은 상태다.

그래서 나는 다시 11번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똑같이 안쪽에 조직 상처를 만들었고.

11번 나이프를 밖으로 빼낸 상태에서 머리를 굴리다가, 이번에는 [갈렌의 나이프B]와 [이격 블레이딩C]를 동시에 발동시켰다.

그 순간, 내 손목과 손가락이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스냅으로 아주 미세하게 허공을 치면서.

그리고 내가 손을 드디어 멈추는 순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시스템 알람이 떴다.

[갈렌의 나이프, 이격 블레이딩의 신규 조합에 성공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특성을 습득하셨습니다!]

[예술자의 손 C등급]

[아주 손쉽게 조직 절개가 가능합니다. 제한 조건: 0.01 mm 이상]

[축하드립니다!]

[경험치 +30]

우와, 와와와!

계속해서 선물 같은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와! 시스템이 이렇게 좋은 거였나.

순간, 머릿속이 점점 더 밝아지는 느낌이다.

사실, 회귀와 함께 이상한 시스템이 나에게 안겨지자 은근히 거북하고 또한 불안하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이건 완전히 꿀단지가 아닌가.

정말 재밌기도 하고.

점점 더 이런저런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어느덧 새벽 4시 20분이 되자, 서둘러 주변을 정리한 뒤 나는 다시 흉부외과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