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칼잡이(외과의사) 02
<6>
오전 7시 30분부터 시작된 병동 회진이 끝난 직후, 갑자기 나는 바빠졌다.
오전 9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수술 준비 때문이다.
환자는 급성 폐동맥 혈전 색전증(acute severe PTE)을 앓고 있고.
35살의 남성으로 청담동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전문 요리사라고 한다.
갑자기 그 증상이 발생한 이후, 갈수록 환자 바이탈은 악화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술 스케쥴은 3일 앞당겨졌고.
그래서 흉부외과 전체 수술 스케쥴도 또 꼬이게 되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흉부외과 수술은 언제나 응급을 요하는 수술들이 많고.
모든 스케쥴이 루틴하게 돌아가지 못하는 건 당연하니까.
#
“인턴! 너 정신 똑바로 차려! 명심해! 내 손에 죽기 싫으면.”
레지던트 1년차 윤세진.
안경을 끼고 있고 날렵한 눈매에 동공이 짙고 강렬하다.
현재 1년차이지만 수술 어시가 부족한 흉부외과에서 그는 종종 퍼스트 어시를 맡고 있다.
오늘 수술 역시 퍼스트 어시를 맡게 된 상황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곳 병원 흉부외과 수술 집도의, 교수 숫자는 16명.
그러나 전체 레지던트 숫자는 고작 3명에 불과하다.
즉, 여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데 너, 저번 수술 중에 졸았다며? 이 새끼가! 재호 형이 아니라 나한테 걸렸으면 넌 죽었어. 인마! 오늘 응급수술이야! 알지?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 빨리빨리 움직여! 야, 시간 없다.”
윤세진의 사나운 재촉에 나는 쓴 미소를 감추며 얼른 움직였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장 간단한 거지만 가장 필수적인 일.
즉, 수술 동의서 여부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입원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환자 침대를 끌고 수술실로 향했다. 이때 침대 카트 바퀴와 내 발 위치는 적절하게 조정했다.
여기서, 인턴들이 실수를 많이 한다. 허둥대다가 이 바퀴에 발가락이 깔려 발톱이 빠지는 경우가 예사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사히 수술실에 도착하게 되면, 이후 마취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환자 마취 업무도 보조해야 한다.
“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 제대로 해! 새꺄!”
그런데 수술방에 들어오자마자 레지던트 1년차 윤세진은 저렇듯 발광을 시작했다.
사실, 저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할까.
수술방 간호사들은 그 때문에 날 힐끔힐끔 쳐다봤다.
인턴이 수술 준비에 참여한 터라 무슨 실수가 없을까 이것저것 따져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작된 ‘드랩’ 작업.
이것은 마킹된 수술 부위와 주변 부위에 대한 소독 작업인데.
인턴이 먼저 소독을 진행하고.
이후 레지던트가 다시 소독을 진행하여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윤세진은 내가 진행한 소독 부위를 쏘아보더니 인상을 팍 썼고, 전체적으로 다시 소독을 했다.
“인마! 사람이 좀 꼼꼼하게 하든가. 너는 이것도 못하냐?”
아이씨, 지랄.
지랄 짓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똑같은 위치, 똑같이 소독하는 윤세진의 모습.
왜 저렇게 사람이 꼬였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난 인턴이었지.
윤세진은 지금 자신만의 기강을 잡으려고 나름 노력하는 거다.
본래 선배도 바로 윗 기수 선배가 제일 무서운 법.
그 의도가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 웃음이 나왔지만.
나는 웃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저기, 선생님! 교수님께 전화 드리고 올게요.”
윤세진은 마취과 펠로우 진경희 선생한테 귀띔한 뒤 곧바로 전화하러 갔다.
그렇게 윤세진이 전화하러 간 동안, 나는 잠시 여유를 갖고서 수술대 풍경을 가만히 살폈다.
중앙 수술대가 있고, 환자가 누워있다.
젊은 남자다.
그리고 수술대 근처에 있는 메이요 스탠드(Mayo stand)가 바로 눈에 띈다.
스테인리스 쟁반 위에 멸균포를 덮었고 그 위에 수술용 기구들과 물품들이 펼쳐져 있다.
그 뒤쪽으로는 백테이블(back table)도 있다. 여분의 물품들을 두는 곳.
한편, 수술대 위쪽은 무영등이 아주 강렬한 빛을 쏘아내고 있다.
띠. 띠. 띠. 띠.
그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환자 바이탈을 확인하는 전자 장치들.
마취과 의사는 벌써 환자 바이탈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흐음! 이 수술방의 분위기란···.
그때 왜 내가 사표를 냈어야 했을까.
좀 더 참아야 했나.
그러나 그땐 쪽 팔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전처의 채권자들은 병원으로 몰려와 행패를 부렸다.
악랄한 전처의 가족들은 익명 투서를 던져 날 무진장 괴롭혔다.
그렇게 내 명예가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 나는 서둘러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다시 수술방이라니···.
물론 회귀 당시에 내가 수술방에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때와는 기분이 다르다.
세계를 보는 눈과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야! 인마! 뭐해? 야! 야! 교수님 들어오신다.”
근데 이 인간은 왜 나만 쳐다보지?
아 놔, 저 인간은 쉴 새 없이 사람을 귀찮게 한다.
한편, 어느새 수술장으로 돌아와 퍼스트 어시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는 윤세진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레지던트 1년차가 퍼스트 어시 역할을 맡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수술방에서 레지던트 1년차는 집도의의 시야 확보를 위해 주변을 벌려주거나 피 닦기, 봉합사 잘라주기 등등 아주 쉬운 일들만 맡게 된다.
그런 1년차가 수술 집도의와 가장 많이 소통하면서.
수술 집도의의 수술을 보조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 일임이 틀림없다.
지금 떨고 있어.
윤세진이 떨고 있다.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수술이다
익숙지 않으니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로부터 잠시 뒤.
이번 수술을 집도하게 될 박윤후 교수가 드디어 들어왔다.
62살의 노교수.
흉부외과 교수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박윤후 교수.
그가 소독한 두 손을 들고서 수술방으로 들어서자, 수술방의 모든 사람들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몇 년 전, 병원 기조실장(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으며.
최근엔 의대 부총장감으로 물망이 오르내리고 있는 박윤후 교수.
그런 사정 때문에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교수님. 준비 다 됐습니다.”
“어, 잠깐만.”
박윤후 교수는 이때 앞서가려는 윤세진을 즉시 제지한 뒤 좌우를 가만히 살펴봤다.
수술방 전체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점검하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술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절대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된다.
수술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최소화하는 게 수술자의 의무다.
“자네는?”
박윤후 교수가 날 쳐다봤다.
“교수님, 인턴입니다.”
“이 봐. 윤 선생, 내가 자네한테 묻는 게 아니잖아.”
긴장된 윤세진이 즉시 대답했고.
박윤후 교수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순간, 얼굴이 상기되는 윤세진.
박윤후 교수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인턴이라고? 그럼 이름이 뭔가?”
“김정민입니다.”
“학교는?”
“성국대 의대 나왔습니다.”
“아, 그래? 내 수업은 들었나?”
“네. 들었습니다.”
“음. 근데 자네 위치를 보니까 세컨 어시인데, 할 수 있나?”
“네!”
“몇 번 해 봤나?”
역시 교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재적인 위험 변수가 바로 내가 될 수 있다.
물론, 저 노교수의 눈에는 말이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이 처음? 그래도 보긴 많이 봤을 테고?”
“네.”
“그래도 실제 하는 것과 보는 것은 달라. 세컨 어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인데, 정말 할 수 있겠나?”
“네. 교수님.”
박윤후 교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흉부외과 사정이 열악하다는 것을.
수술 어시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할 수 없이 인턴마저 교육시켜 수술방에 투입해야 한다.
집도의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바로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 몇 달 뒤에 전공을 택할 건데 어디를 택할 건가?”
박윤후 교수가 다시 물었다.
“아직 결정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외과 쪽에 흥미가 있습니다.”
“어, 그래?”
순간, 표정이 좀 밝아지는 박윤후 교수.
“잘 생각했네. 그건 마음에 드네.”
그러고는 박윤후 교수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취과 의사와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입을 열었다.
“집도의로서 한마디만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수술이 갑자기 스케쥴 조정된 수술이지만, 우리 사명은 언제나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흘리는 피땀들,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자! 자! 시작합시다!”
그리고 드디어 수술은 시작되었다.
이때, 뭔가 펑! 펑! 하며 터지는 듯한 느낌이 내 가슴속에서 일어났고.
묘한 감흥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러고 보면,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회귀 전의 내가 첫 세컨 어시를 맡았을 때도 저 박윤후 교수님이 집도하던 바로 그 수술이었다.
그렇듯 그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우연처럼 기억해 낸 뒤 나는 씩 웃었고.
이렇게 반복되는 상황 앞에 기분이 좀 묘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새로운 과거의 기억들이 나한테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실, 회귀 이후 내 일신상의 일에 집중하느라 환자와 관련된 일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수술대 앞에 서게 되자 생각지도 못한 기억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로부터 잠시 후, 나는 인상을 팍 쓰며 수술대 위의 젊은 남자를 쳐다보게 되었다.
믿기 힘든 기억.
그게 갑자기 휘몰아치듯 들어왔는데.
사실, 흉부외과 특성상 환자가 사망하는 예를 나는 수없이 겪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게 바로 그 첫 사례였다.
다시 말해서, 눈앞의 저 남자.
저 남자는 오늘 이 수술대에서 죽게 된다.
테이블 데스(table death).
수술 중 사망.
그러고 보면 나는 과거의 그 격렬했고 끔찍했던 첫 세컨 어시 현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순간,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