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보상 04
<18>
신라 컨피덴셜 호텔.
호텔 내 2층 오사카 일식점.
“이쪽인 것 같은데. 아, 저기 있군.”
약속시각인 12시 30분보다 5분 정도 일찍 우리는 도착했다.
그 일식점으로 들어선 뒤 예약자 이름을 이야기하자 곧장 VIP룸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VIP룸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는데.
우리는 약간 일찍 도착했지만, 상대편은 좀 더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고! 박 교수님!”
중후한 인상의 남자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섰고.
좌우의 동석자들도 일어섰다.
“이거 참 큰 신세를 졌습니다.”
즉시 다가가 박윤후 교수의 손을 잡는 남자.
“하하, 아닙니다. 저희 병원에 오셨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구하지 않고 뭘 하겠습니까.”
“그래도 우리 수호가 정말 큰일날 뻔한 거 저도 잘 압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최 사장님, 감사 인사는 이제 충분합니다. 제가 너무 민망해집니다. 하하하.”
“아이고, 전혀 민망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 집안 은인이신데 어찌 제가······ 어? 근데 교수님! 이 분은···?”
중년 남자는 날 쳐다봤다.
박윤후 교수는 즉시 날 소개했다.
“저희 병원 김정민 선생님입니다. 최수호 군 수술 때 같이 참여했습니다.”
“아아, 그러세요?”
갑자기 표정이 바뀌는 중년 남자.
“제가 따로 말씀도 못 드리고 데려왔는데 괜찮겠습니까?”
“하! 무슨 말씀입니까! 당연히 괜찮습니다. 마음 같아선 흉부외과 모든 교수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까지 다 대접하고 싶은데, 그건 너무 과하겠죠? 하하. 반갑습니다. 저는 최상호라고 합니다.”
나는 악수하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김정민입니다.”
“자자, 앉으시죠.”
중년 남자는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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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뵙게 되네요.”
최수호 환자의 동생 최수진.
그녀는 새카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날 쳐다봤다.
이목구비가 확실히 부드러우면서도.
특히 고개를 돌릴 때 보이는 옆얼굴이 유난히 매력적인 여자다.
살짝 부드럽게 튀어나온 이마 라인, 그리고 우아한 코 선의 라인 등등.
한편,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바로 말했다.
“어제 제가 가져간 빵은 혹시 드셨어요?”
아, 맞다. 어제 양손에 파리바게뜨 빵들을 가득 사 왔던 게 기억이 난다. 그러나 너무 바빠, 나는 빵을 먹은 기억이 없다.
“죄송합니다. 어제 밤늦게까지 수술이 있어서.”
“아, 괜찮습니다.”
시선을 약간 내리며 조금 아쉬워하는 그녀.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아버지 최상호 사장이 박윤후 교수와 날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럼 박 교수님! 여기 김 선생님은 레지던트 과정에 계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현재 인턴입니다. 내년 3월이면 그때부터 레지던트 과정이 되겠군요.”
“오! 그럼 아주 젊으신 분이신데. 우리 수진이하고도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겠군요. 수진아, 네가 97학번이라고 했지?”
이때, 최수진은 가볍게 ‘네’ 라고 대답했다.
“그럼 김 선생님께선?”
그는 날 쳐다봤고.
할 수 없이 바로 대답했다.
“95학번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이때, 박윤후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최 사장님, 이 친구는 정말 똑똑한 친굽니다. 수술 중에 cardiac tamponade(심낭압전) 가능성을 예상한 게 이 친굽니다. 참, cardiac tamponade(심낭압전)란 게 뭐냐 하면···.”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 김정민 선생이 거기 없었더라면 그때 수술은 무척 힘들어졌을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근데 박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누가 뭐래도 대단한 인재가 아닙니까. 김 선생님! 정말 잘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 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앉은 자세에서 머리를 공손하게 숙이는 최상호 사장. 그의 아내와 최수진 역시 머리를 숙였다.
놀라며 박윤후 교수도 머리를 숙였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하, 하하하!”
그리고 그때부터 크고 작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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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일식 요리를 먹으며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실 무렵.
간단히 약주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박윤후 교수와 최상호 사장은 좀 더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저희 병원이 앞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병원으로 올라서기 위해, 대대적인 시스템 개혁 외에도 암센터와 같은 대형 건물 증축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큰 사업에는 큰 예산이 필요하죠.”
이때 최상호 사장은 경청하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정부 측 예산 지원을 끌어오는 것 외에도 저희 재단 측과 협의해서 내년도 재단 전입금을 500억 원 정도 늘리기로 합의했습니다. 근데 부족하죠. 그래서 동문회 외에도 여러 사회단체 등과 협력해서 병원 발전 기금 모집에 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입니다.”
거기까지 설명이 끝나자 최상호 사장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은 일이군요! 그리고 그런 좋은 일에는 큰 예산이 필요하겠죠. 저는 성국대 병원이 앞으로 국내 최고가 아니라 세계 최고가 된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하하! 박 교수님! 혹시 그렇다면 저희 대현물산에서 무슨 도움을 줄 방법이 있겠습니까?”
최상호 사장은 진지하게 말했고.
박윤후 교수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해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직 병원의 대표자 위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뇨. 별말씀을요. 성국대 병원이 어디 남입니까? 우리 대현그룹이 성국대 재단을 인수했고, 그래서 성국대 병원도 대현그룹의 한 핏줄이 아닙니까?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최 사장님!”
두 사람은 계속해서 그런 발전 기금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는데.
대화가 다소 지루한 부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내 앞에 앉아 있는 최수진, 그녀가 간간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한테 걸어주어 크게 지루하지 않았고.
그렇게 식사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시간은 흘러갔고.
잠시 후 디저트를 먹은 뒤 어느덧 파장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최상호 사장은 다시금 나한테 큰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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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김 선생님, 제가 너무 말이 많아 결례가 많았습니다. 지루하셨죠?”
“아,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제가 괜히 더 죄송합니다. 참! 식사는 어땠습니까?”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많이 먹었습니다.”
최상호 사장은 환하게 웃었다.
“근데 이쯤 되니까 제가 결례인 줄 알지만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내 눈을 빤히 쳐다보는 최상호 사장.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그는 지금 무척 진지한 눈빛이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우선은 그렇게 대답했는데.
“사실, 이런 건 질문드리면 안 되는 건데, 하하, 하하하!”
갑자기 유쾌한 웃음까지 터트리더니 그는 드디어 질문했다.
“혹시 김 선생님 아버님께선··· 혹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좀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하하, 하하하.”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나한테 모든 시선들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근데 왜 그런 질문에 다들 관심을 가지지?
정말 개인적인 질문인데.
그러나 모두들 크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약간 당황했고.
슬쩍 박윤후 교수를 쳐다봤다.
그런데 박윤후 교수 역시 호기심을 보이며 날 쳐다보고 있다.
젠장.
다들 왜 저러지?
왜 남의 집안일에 관심을 가져?
하지만 지금껏 분위기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나는 더는 내색을 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그냥··· 평범하게··· 그냥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순간, 이곳엔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는 듯했다.
순전히 내 느낌이겠지만.
“아, 그래요? 뭐, 저도 평범합니다만. 그럼 김 선생님, 혹시 아버님께선 회사를 다니시거나?”
“아뇨. 그냥 뭐 이것저것···.”
그렇듯 다시금 내가 얼버무리자 최상호 사장은 더는 묻지 않았다.
간단한 병원 인턴 생활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갔으나.
그 와중에 나는 그때부터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사실, 내가 회귀한 뒤, 무척 바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껏 날 낳아준 부모님께 전화 한 통화 하지 않았다.
회귀 전, 내가 겪은 이혼 때문에 수많은 스트레스가 쌓였다고 해도.
이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반응일 것이다.
아버지?
내 아버지?
문득 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몇 번이고 실소를 날렸다.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면서 점점 더 아버지와 멀어지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턴 연락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그의 사망 보도가 있었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고.
부자간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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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일식점 앞.
어느덧 식사가 끝나고, 작별 시간이 되었다.
“그럼 선생님, 혹시 나중에 시간 되신다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브런치 카페에 한번 같이 가시겠어요? 분위기가 너무 좋아 꼭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룸에서 먼저 작별 인사를 했고.
다시 음식점 앞에서 악수하며 서로 헤어질 때.
최수진은 슬쩍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새카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렇게 묻는데.
왜 나한테 저러지? 하는 생각이 앞섰으나.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야 뭐 감사하죠. 근데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인턴 신분이라서. 아!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그 말에 애매한 미소를 짓는 최수진.
곧이어 최상호 사장 부부와도 작별 인사를 다시 했고.
이후, 나는 박윤후 교수와 함께 호텔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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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이보게.”
“네, 교수님.”
점심 중에 약주를 하게 된 박윤후 교수.
그 때문에 박윤후 교수님을 대신해서 나는 운전대를 잡게 되었고.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성국대 병원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어때? 괜찮았나? 식사는?”
“네, 괜찮았습니다.”
“그럼 말이야. 아까 봤던 최상호 사장은 어떻게 봤나?”
“네?”
순간, 내가 의아해하며 즉시 반문하자, 박윤후 교수는 조금 설명을 보탰다.
“그 최상호 사장은 생각보다 능력이 아주 출중해. 제법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네. 다만, 대현물산이 대현그룹 계열사이긴 하나, 이래저래 많이 부족하지. 그래도 IMF 시국을 거치면서 살아남았잖아. 회사가 무너지지 않고 그냥 버티는 게 중요한데 어쨌든 잘 버텼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IMF 시국과 관련된 말에는 적극 동의하기 때문이다.
“근데 저 최상호 사장은 대현그룹 총수와 육촌 관계야. 그룹 계보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지. 그래서 IMF 전에는 ‘대현물산’이 아니라 ‘세종물산’이라는 회사명을 갖고 있었어. IMF를 지나면서 ‘대현’자를 받게 된 건데, 그룹 측 투자가 들어와서 계열사가 된 거지.”
그랬구나.
그러나 크게 관심은 없다.
“근데 아들 최수호 군이 회사 운영에 관심이 없어. 요리사가 되겠다고 프랑스 유학을 가더니 요리사가 됐잖아. 그래서 대현물산은 나중에 최수진 양한테 넘어갈 가능성이 커. 대학 전공도 경영 쪽이라고 하니까.”
아, 그렇구나.
그러나 역시 나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사윗감으로 말야. 좀 조용한 사람을 원한다고 하더라고. 딸 아이가 결국 경영에 나설 거니까 조용히 후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뭐 조용한 대학교수나 의사 같은 직업이 딱이라고 하더군.”
이때, 나는 슬쩍 백미러로 뒷좌석의 박윤후 교수를 쳐다봤다.
근데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시지.
TMI 같이.
난 별로 관심도 없는데.
근데 저 말인즉슨, 바로 데릴 사위를 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회귀 전에는 이런 기회가 오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왜 저럴까.
하긴, 그땐 내가 박윤후 교수와 이런 자리를 갖지도 못했다.
“참, 한 가지만 더! 그렇다면 자네 아버지··· 대체 어떤 일을 하신다는 건가?”
갑자기 박윤후 교수가 다시 그 질문을 던졌다.
백미러를 통해 슬쩍 눈이 마주치던 나는 이때 시선을 내리며 이번에도 간단히 대답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뭐 그냥 평범하게 사십니다.”
“평범하게?”
“네. 그렇습니다.”
“근데, 자네 집 주소가··· 으음, 보통이 아니던데?”
어?
그 순간 나는 흠칫하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근데 저건 대체 어떻게 알았지?
아니지.
박윤후 교수님은 그걸 알 수가 있겠구나.
내 인사 정보가 병원 데이터 베이스에 들어가 있으니까.
“교수님, 그건···.”
순간, 내가 바로 대답을 못 하자 박윤후 교수는 바로 말을 바꿨다.
“혹시 자네··· 재벌 같은 건 아니지?”
“네! 절대 아닙니다!”
“절대?”
“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아, 그래? 하하, 미안하네. 내가 너무 과했군. 그냥 자네한테 갈수록 관심이 생겨서. 똑똑한 인재가 나중에 커서 우리 병원을 위해 큰일을 하게 될 텐데, 그러니 저절로 관심이 생기는 법이네. 미안하이. 양해해주게.”
그러고는 잠시 대화가 끊겼다가.
우리는 마침내 병원에 도착했다.
한편, 나는 스테이션에 복귀하자마자 다시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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