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 더 나쁜 놈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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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인가.
입 단속하라는.
나는 쓴 미소를 짓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그 요청을 받아주기로 했다.
결국, 재벌가라서 나쁜 풍문이 도는 걸 절대 무시할 수 없나 보다.
그 일이 좋은 일도 아니고.
소문을 낼 이유도 전혀 없다.
그래서 그 제안에 받아들인 뒤, 나는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봤다.
“근데, 왜 연회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겁니까?”
그러자 한윤형 전무는 잠시 내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날 쳐다보며 대꾸했다.
“유나한테 평소에 어지럼증이 있었는데, 약물 처방도 꽤 오래전부터 받았고. 운이 좀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시선을 돌리는 한윤형 전무.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입꼬리가 꿈틀거리며 작은 고소를 머금었다.
어지럼증?
정말?
그 호텔, 테라스 발코니는 무척 높았다.
누군가 일부러 오르려고 하지 않으면 쉽게 오르기도 힘들고 뛰어내리기도 힘든 그런 높이.
그런 데도 어지럼증이 이유라고?
“참! 우리 유나, 1주일 정도만 여기 입원했다가 신라병원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1주일?
그렇게나 짧게?
“수술 병원에서 바로 빼면 상황대처가 힘들다고 하고, 그 때문에 1주일 정도만 있고 신라병원으로 데려갈 생각입니다. 저희 입장에선 신라병원이 더 편하니까요.”
뭐, 자기 가족이니까 자기 병원에 데려가는 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말했고.
나로선 그저 수긍할 뿐이다.
잠시 후, 나는 간단히 인사했고.
곧장 흉부외과 스테이션에 다시 복귀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시간 뒤,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미션 완료 알람이 뜨면서 곧이어 새로운 미션 알람도 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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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완료 ······100%!]
[축하드립니다!]
[미션, 아름다운 그녀의 지옥(클래스 B)을 완벽히 완수하셨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베살리우스의 눈(B) 특성이 영구 개방됩니다]
이건 바로 한유나의 GS수술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는 의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생명을 구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곧이어 또 다른 알람도 떴다.
[새로운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미션: 아름다운 그녀의 지옥(클래스 A)!]
[새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어? 근데 이건 등급이 상향된 동일 미션인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고.
무언가 묘한 느낌을 탐색하다가 서둘러 ‘네’를 외쳤다.
그러자 바로 이어지는 미션 정보.
[아름다운 그녀의 지옥(클래스 A), 킬러로부터 한유나를 구하세요!]
[특전: 검은 고양이(B)]
[검은 고양이(B): 어두운 곳에서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습니다. 밝은 곳에서도 10초간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특전: 이격 블레이딩(S)]
[이격 블레이딩(S): 공간 장벽을 격해 조직을 절개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m 범위, 1회 사용]
[특전: 사신의 웃음소리(S)]
[죽음을 부르는 자(킬러)가 목표(희생자)를 향해 다가옵니다.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한 존재(킬러)를 인식합니다. 제한 조건: 100m 거리 이내, 100시간 이내, 1회 사용]
[업적 보상: ??????]
[특전 사용 후 패널티: 사신의 방문]
[실패: 등급 하락]
그렇듯 갑자기 새로운 미션이 떴다.
어? 근데 확실히 난이도가 높아 보인다. 클래스 A?
더군다나 등급이 상향된 미션이다.
동일 명칭의 미션!
근데 한유나?
또다시 킬러의 등장?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말인데.
내 머릿속이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왜냐하면, 좀 전에 만난 두 사람.
공손하게 나한테 인사했던 두 사람.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유나와 한윤형은 전혀 닮지 않았고.
전혀 남매라고 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킬러’라는 단어가 대입되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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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시각.
아주 어두컴컴한 도심 간선도로를 빠르게 질주하는 S클래스 벤츠 W220.
그리고 그 벤츠의 뒷좌석.
“최 실장님! 재떨이로 쓸만한 게 있을까요?”
뒷좌석에 몸을 기댄 한윤형 전무. 그는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고.
운전석에 있던 최지철 비서실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재떨이가 될 만한 컵 하나를 재빨리 건넸다.
잠시 후, 신호등 앞에 잠시 정차하자, 탁! 소리를 내며 라이터 불을 켠 최지철 비서실장.
그는 인상을 팍 쓰고 있는 젊은 재벌 2세 한윤형 전무의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조용히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곧이어 한윤형 전무는 차량 뒷문 유리창을 내린 뒤.
담배 연기를 후! 하며 거칠게 뿜어낸다.
미간에 심한 골이 파인 채 인상을 팍 쓰던 한윤형 전무는 담뱃재를 작은 컵에 톡톡 털어낸 뒤 최지철 비서실장을 다시 쳐다봤다.
“근데 자살을 시도한 게 맞죠?”
“네! 우선은 그렇게 파악됩니다.”
“시발, 존나 아쉽네.”
순간, 욕설하며 한윤형 전무는 다시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잠시 뒤, 한윤형 전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년은 죽으라고 할 때 안 죽더니 이제 와서. 시발! 사생아 주제에.”
근데 왜 하필 이 시기에 그 짓을 저질렀을까.
아버지 한태산 회장은 현재 횡령 및 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그런 횡령 및 배임 자체는 결국 자신과 형들에게 지분을 넘기기 위한 일종의 쇼가 아닌가.
그저 자신은 아버지한테 약간 미안할 따름이다.
“그럼 저는 내일 뭘 하면 됩니까?”
“우선, 날이 밝으면, 상문그룹 서용준 상무 등등, 관련자들을 직접 뵙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 비서실에서 이미 움직였고 따로 부탁해 뒀지만, 뒤탈이 없어야 합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날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서 그냥 덮는 게 맞습니다. 언제고 소문이 나겠지만 최대한 딜레이 시켜야 합니다. 회장님, 지시사항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한윤형 전무는 잠시 후 외투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쳐다봤다.
현재, 20건의 부재중 통화가 있다.
발신자를 확인했더니 20건 모두 고태진 대표가 자신한테 전화한 거다.
“근데 오늘 한성화학 쪽에 압수수색 영장이 나왔다면서요?”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고태진 그 새끼, 그 때문에 전화했을까.
그러나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는 고태진을 자신보다 낮은 계층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최 실장님! 최 실장님은 확실히 제 편에 서신 거죠?”
그러자 긍정하는 최지철 비서실장.
“네! 전무님. 여사님께서도 정말 원하시는 데다가···.”
“하하, 좋습니다. 그럼 우리 앞으로 잘 해 봅시다!”
점점 더 깊어져 가는 새벽.
그리고 내려진 창을 통해서 불어오는 바람은 유난히 찼다.
<39>
2001년 11월 3일 토요일 새벽.
새벽 3시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시커먼 밤하늘에서 내려오는 빗방울.
검은 창문을 톡톡 두드린다.
“뭐 하고 있어?”
밤늦게까지 간단한 폐암 수술에 투입되어 일을 마치고 의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동욱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앉은 자세도 약간 흐트러진 모습인데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다.
내가 바짝 옆으로 다가갔음에도 모르다가 뒤늦게 놀란 표정을 짓는 녀석.
그리고 뒤늦게 입을 열었다.
“수술 끝났어?”
“어. 끝났어. 뭐해?”
“음악 좀···.”
우아아. 흉부외과 인턴이 이제 음악 들을 시간도 있나.
아니지. 그게 아니라 이틀 전부터 인턴 생활이 조금 편해졌다.
왜냐하면, 흉부외과 교수들의 집요한 요청 끝에 펠로우(전임의) TO 두 자리가 올여름쯤에 추가 확정되었고.
드디어 두 달 전에 펠로우 두 명을 뽑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펠로우들은 이틀 전 11월 1일 자로 출근했던 것.
그렇듯 단 두 명이 충원되면서 갑자기 수술 스케쥴에서 숨통이 트이는 중이었다.
내가 아는 회귀 전 과거에도 그랬는데, 나는 그때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될 거라고 믿고서 덜컥 흉부외과 전공의에 지원했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순간은 겨우 석 달간 지속됐을 뿐. 이번에 충원된 펠로우들은 단 석 달 만에 다른 병원으로 가 버렸다.
이렇게 수술 많고 시간 없는 병원을 그들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특히, 흉부외과 병동은 최악 중의 최악이니까 말이다.
“야, 지금 스테이션 조용하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어떤 거 듣고 있어?”
“그냥···.”
“보자! 2001년이니까 누가 유명하지?”
나는 턱을 만지며 생각했으나 알 턱이 없다.
이놈의 직업병!
회귀도 한 마당에 아직도 이 치열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르겠다.”
나는 대충 웃고는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이곳저곳 경직된 근육을 풀었다.
조만간 나는 신라그룹 총수의 막내딸 한유나 때문에 생면부지의 킬러랑 싸워야 한다.
킬러로부터 도망칠 [특성]도 있고.
그를 공격할 [특성]도 나한텐 있다.
하지만 틈틈이 체력을 확보해 둬야 한다.
아버지가 저번에 보내준 보디가드들도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근데 그러고 보면 나도 인생이 참 다이내믹하다.
의사가 무슨 킬러랑 싸울 생각이나 하고.
미션이 없었다면 한유나를 만나지도 못했을 거고.
신라그룹과 인연을 맺지도 못했을 것이다.
킬러의 위협 역시 없었을 테고.
“그럼 지현이는?”
스트레칭하다가 내가 묻자, 이동욱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지현이? 아까 수술 끝나고, 머리 감으러 간다던데?”
“머리?”
“일주일 동안 못 감았대.”
아! 나도 지금 머리나 감을까.
문득 그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요란하게 울리는 의국 전화벨 소리!
순간, 나는 녀석을 쳐다봤고.
녀석은 날 쳐다봤다.
결국, 먼저 움직인 건 나였다.
나는 전화기를 잡았고.
스테이션 김선화 간호사의 요란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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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콜 들어왔어요!”
응급실 콜?
“박지영 쌤이 확인하고 바로 노티(notice)해 달랍니다! 그 전에 박지영 쌤이 내려갈 수도 있고, 어쨌든 많이 급해요!”
“혹시 김재호 선배님, 옆에 계세요?”
“아뇨. 좀 전에 최병근 교수님 콜 받고 바로 가셨습니다.”
오늘 당직 교수는 최병근 교수님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놨다.
그리고 이동욱과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그것도 잠시.
나는 후다닥 뛰어나갔다.
이게 바로 인턴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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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도착한 응급실.
환자 채혈을 막 마치던 조은하 선배는 내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그리고 바로 표정이 조금 변하더니 나한테 손짓했다.
“인턴 선생! 빨리 와! 급하니까 빨리! 저 환자야!”
그리고 곧바로 도착한 한쪽 베드.
그녀는 즉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좀 전에 흉부 CT 결과가 나왔는데, thoracic aortic aneurysm(흉부 대동맥류), 즉 distal(원위부) 쪽에 rupture(파열) 소견이 있어. 그 때문에 spinal cord infarct(척수경색) 증상이 있는 것 같고. 급성 상태라서 점점 더 바이탈이 처지고 있어. 응급으로 O형 수혈했고,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참! 다 이해했어?”
“네!”
간단히 대답하고 나는 환자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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