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인턴 02
<45>
한윤형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유나는 의식을 되찾은 상태다.
그러나 몽롱한 눈빛.
하긴,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 눈빛에서 삶의 의지를 찾을 수가 없다.
시발!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저 한유나가 살아난 게 무척 억울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또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저년의 지분이 바로 문제다!
저년이 죽으면 그 지분은 모조리 공중 분해되어 흩어지고 만다. 누구한테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미 없는 지분이 되어버린다.
‘에이씨, 개X년! 할 수 없이 궁한 소리라도 하는 수밖에.’
한윤형은 억지로 웃었다.
이내 아주 선한 모습으로 바뀌는 한윤형.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겉으로만 선한 체하는 건 한윤형의 특기이기도 하다.
“음, 이제 괜찮아?”
부드러운 시선.
정감이 어린 말투.
그러고는 답을 기다리며 계속 쳐다봤으나 저 한유나의 눈빛은 한결같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저 멍하니 창밖만을 쳐다보고 있다.
어느덧 비가 그치고 조금씩 햇빛이 들어오는 11월 초순의 하늘.
아직 먹구름이 다 가시지 않아 가을 특유의 높은 하늘은 보이진 않지만.
조만간 먹구름이 다 흩어지고 나면 이곳 스카이라운지 2002호 입원실에서 바라보는 저 하늘은 무척 청명할 것이다.
“아직 힘들지?”
“······.”
“음, 말 안 해도 다 알아. 그리고 미안하다···.”
“······.”
“내가 신경 못 써 준 거 미안해.”
“······.”
“유나야.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주라. 형제, 자매들 중에서 너한테 관심 있는 건 항상 나였어.”
“······.”
“우리 힘내자.”
그러면서 다시금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한유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스듬하게 머리맡이 올라가 있는 침대.
그 침대의 경사 덕분에 그저 창밖만을 쳐다보는 그녀는 여전히 한윤형을 쳐다보지 않았다.
‘시발년, 존나 멋있는 척하네. 니년 엄마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시발! 내가 왜 몇 년째 손미희 여사 그년한테 알랑방귀를 뀌는 줄 알아? 시발! 무조건 신라그룹은 내가 가질 거다! 시발!’
한윤형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 한태산 회장이다.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 손미희 여사! 한유나의 엄마에 이어서 저택의 새로운 안주인이 된 여자!
그런 여자한테 자신은 몇 년째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 덕분에 최지철 비서실장의 지원까지 받게 됐지만.
그래서 무조건 이 손에 저 그룹을 쥐어야겠다.
그리고 그걸 얻기 위해선 뭐든지 하겠다는 게 한윤형의 각오였다.
“아무튼, 힘내. 다시 올게.”
그러고는 그는 등을 돌렸다.
곧장 문 쪽으로 걷다가 그는 잠시 멈칫했고.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좌우를 한번 쓱! 훑어봤다.
그러고는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
그런데 바로 그때······.
‘시발, 저거 누구야?’
2002호실을 막 나오던 한윤형은 순간 정색하며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문 앞에 서 있는 보디가드들.
자신이 데려온 이들도 있고.
한유나의 새로운 보디가드들도 있다.
그런데 그 앞에 다소곳하게 서 있던 중년 여자.
작은 브로치가 달린 회색 재킷에 분홍색 꽃무늬가 있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중년 여자. 그리고 단아한 정장 바지 차림이다.
한윤형이 쳐다보자, 이때 여자는 바로 머리를 숙였다.
“전무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러나 한윤형의 얼굴은 더 차가워진다.
꿈틀거리는 듯한 그의 입.
그 입에서 금방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 같다가도.
표정이 다시 싹! 변하는 한윤형.
그는 여자를 쓱 쳐다본 뒤 어떤 대꾸조차 하지 않고 쌩! 하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럼에도 여자는 공손하게 다시 머리를 숙였다.
이때, 보디가드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시죠.”
그는 문을 열어줬고.
여자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
“아가씨! 접니다!”
그러나 바로 격앙되는 여자.
2002호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있다.
잠시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다가.
주춤거리며 다가갔고.
여자는 아주 떨리는 손으로 한유나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한유나의 시선이 갑자기 움직였다.
한유나는 그 여자를 쳐다봤다.
“아가씨, 흐흑흑. 아가씨···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 했습니다. 아가씨, 용서해주세요. 아가씨··· 흑흑흑.”
한유나의 가냘픈 손을 잡았고.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울고 있는 여자.
이때, 한유나는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이때, 한유나의 두 눈엔 습기가 가득 찼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
“윤··· 윤 실장님···.”
그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다.
마치 작은 바람에도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런 작은 목소리.
그러나 윤 실장, 아니 윤혜선 실장은 그 순간 고개를 들었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한유나를 쳐다봤다.
놀랍게도 한유나 역시 하얀 볼을 타고서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윤혜선 실장.
“아가씨··· 절대 다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늘에 계신··· 사모님, 사모님께서 얼마나 억울하시겠어요? 흑흑흑.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절대······.”
그런데 그 말을 듣자, 창백한 얼굴의 한유나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윤혜선 실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가씨··· 흑흑흑··· 아가씨, 이젠 제가, 제가 지켜드릴게요. 제가 무조건, 제가 무조건 지켜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울었고.
그러고는 서서히 감정을 추스르듯.
한유나의 충혈된 두 눈.
그곳에는 약간의 온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근데··· 누··· 누군지··· 아세요?”
“네?”
“···누군가······.”
“누군가?”
“···계속··· 손을··· 잡아······.”
한편, 윤혜선 실장은 한유나의 힘없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갑자기 ‘아!’ 하며 짧은 탄성을 질렀다.
막 귀국을 했고.
정신없이 성국대 병원으로 달려오면서.
윤혜선 실장은 상문 그룹 서용준 상무와 다시금 긴 통화를 했다.
한유나가 호텔에서 뛰어내렸고.
당시, 김윤상 의원의 아들 김정민 군이 한유나를 구했다는 말이 기억이 났다.
더군다나 그는 이 성국대 병원에 일하는 의사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인턴, 인턴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한유나의 심장 수술 때, 그때 수술에도 들어갔고.
이래저래 한유나의 생명을 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래, 바로 그거다!
바로 그거다!
아가씨는 지금 그 김정민 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가씨! 혹시 기억나세요?”
충혈되었지만 우수에 가득한 새카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한유나.
윤혜선 실장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서 회장님 연회장에서··· 처음 뵌 거라고 하던데··· 그래도 혹시 기억나세요?”
그러나 한유나는 가만히 자신을 쳐다볼 뿐이다.
“김윤상 의원의 아드님이신 김정민 군! 혹시 기억나세요?”
이때,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리고 신음하듯 이름을 되뇌는 그녀.
“네! 아가씨! 김정민 군입니다!”
윤혜선 실장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순간, 눈빛이 약간 모호해졌다가 이내 눈을 감는 한유나.
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다.
이때, 눈 주변엔 약간의 꿈틀거림이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런 모습.
“지금 이 병원에 의사로 있습니다. 제가 지금 불러드릴까요?”
그러자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다가, 다시금 눈빛이 조금 밝아지는 그녀.
이때, 윤혜선 실장은 다른 경로를 통해 듣게 된, 오늘 아침의 살인미수 사건에 대해, 지금 당장 말할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의식을 차린 그녀.
그런 그녀한테 너무 가혹한 이야기될 것 같았다.
자살 시도 자체만으로도 가슴 아픈 일인데.
의식을 잃고 있던 자신을 누군가가 죽이려고 했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얼마나 비통한 일이 될까.
그래서 절대 말할 수가 없다.
지금은! 지금은 말이다!
‘하아, 가여운 우리 아가씨! 어쩜 좋을까. 아아, 미치겠어.’
윤혜선 실장은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왜냐하면, 살인을 사주한 이들이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아서.
한태산 회장의 장남 한윤기!
2남 한윤수!
그리고 좀 전에 섬뜩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봤던 3남 한윤형!
바로 이들 중에, 이들 세 명 중의 한 명이다.
그래서 더 억울하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한유나는 반드시 살아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윤혜선 실장은 소리 없이 이를 악물었다.
“···아가씨. 그럼 제가 그 의사한테 연락해서···.”
윤혜선 실장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빛을 잘 살펴봤다.
원치 않으면 절대 강요할 생각이 없다.
오로지 한유나의 뜻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그녀는 지금 눈을 살짝 깜빡이며, 무언의 긍정을 표하고 있다.
그 순간, 윤혜선 실장의 눈빛도 바로 밝아졌다.
“아가씨,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가씨를 구한 남자다.
상당한 힘을 갖춘 김윤상 의원의 아들이라고 한다.
정계와 재계.
수많은 교집합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곳!
놀랍게도 아가씨를 구한 남자는 정계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다.
사실, 가련한 아가씨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재계의 인물이 아니다.
이미 신라그룹은 도달하기 힘든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간 상태.
그래서 재계의 힘으로는 절대 아가씨를 지킬 수가 없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가진 4선 국회의원, 김윤상 의원!
검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김윤상 의원.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이며, 또한 얼마나 권력 지향적인 사람인지는 윤혜선 실장도 잘 알고 있다.
한태산 회장 가문으로 들어가, 한때 그 저택에서 실장까지 했던 게 바로 자신이니까.
그래서! 또 모른다.
김윤상 의원의 아들! 그리고 아가씨가 혹시라도 연결된다면! 정말 또 모르는 일이다.
아가씨가 살 수 있는 길이 어쩌면 열리지도···.
그리고 잠시 후.
윤혜선 실장은 병동 스테이션으로 뛰어갔고.
그곳 간호사한테 부탁했다.
“저기 혹시··· 김정민 선생님,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부탁 좀 드릴게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듯 윤혜선 실장은 간곡하게 말했고.
스테이션 간호사는 놀란 듯 쳐다보다가.
대충 상황 파악을 한 뒤 전화기를 잡았다.
그리고 잠시 뒤.
스테이션 간호사는 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지금 부총장님 면담 중이라고 하셔서. 우선, 콜은 넣어 뒀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윤혜선 실장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연거푸 표한 뒤, 서둘러 2002호실로 뛰어갔다.
이제 자신은 한시라도 한유나의 곁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그게 바로 자신의 역할이니까.
한편, 그로부터 대략 한 시간 뒤.
2002호실 문밖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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