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인턴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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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뭔가 관련성이 있는 이름 석 자를 간단히 받아놨다.
나중에 다시 찾아가서 확인할 생각.
정말 그 새끼가 자신을 방해한 거라면 그 새끼 때문에 잔금 3억 원을 날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야, 주태야.”
어느새 씻고 나온 남자.
눈빛이 무척 냉혹한 남자다.
“씻으면서 다시 생각해 봤는데, 우리 이렇게 하자. 이번엔 형이 하자는 대로 하자.”
‘주태’라는 남자는 ‘형’이라는 남자를 쳐다봤다.
“뭐 어떻게 하자고?”
“시발, 우선 당분간 잠수 타고. 돈도 있으니까 지방에 내려가서 좀 쉬자. 그러고 나서 좀 잠잠해지면 다시 올라와서, 니가 본 그 귀신이라는 새끼! 조져버리자고.”
“조지는 거야 좋지. 그런다고 돈이 나오나?”
“시발, 돈은 못 받아도 우리가 얼마나 지랄 맞는 개새끼들인지, 우리 고객들은 다 알 거 아냐?”
“그래서?”
“명예 회복은 해야지. 시발! 안 그래?”
“아이씨!”
“인마! 병원은 우리도 첨이라서 좀 힘들었잖아. 주사기는 무슨? 우리 잘하는 거 있잖아! 칼 있잖아!”
손에 칼이 없어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제압하는데.
칼이 있으면 아무도 무섭지 않다.
이때, 주태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 회복이라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든 것이다.
“주호 형! 근데 이 새끼가 맞는지 모르겠어. 좀 전에 내가 이름 하나 땄어.”
“뭐? 이름? 시-바!!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전화.”
“조용히 있으라니까! 웬 전화질!!”
“괜찮아, 멍청한 년한테 언론사 기자 사칭했으니까.”
“그래서?”
“그 새끼 이름이···.”
곧이어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내 보여주는 주태.
주호는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확실해? 갑자기 니 앞에서 사라진 그 새끼. 근데 요즘 너, 뽕 맞고 다니는 거 아니지?”
“조또! 내가 언제 뽕 맞을 시간이 있나?”
“알았다! 새꺄! 암튼 그 새끼, 꼭 잡아서 조져보자.”
그러고는 씩 웃는 두 사람.
한편 잠시 뒤.
어느덧 깨끗한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각각 야구 모자를 썼고.
또한, 각각 백을 메고서.
자신들 외에는 손님이 없는 듯한 아주 허름한 여관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큰길에 이르자 택시를 잡아탔고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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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로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는데.
어느덧 다음 날 저녁 6시.
이제 어둑어둑해지는 시각.
물론,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병동 전체 움직임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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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한편, 나는 스테이션 간호사들과 김재호 선배 등에게 꾸벅 인사한 뒤, 흉부외과 병동에서 나왔다.
어느새 수술복과 가운까지 벗은 모습. 그런 모습으로 나는 병원 1층으로 내려왔고.
좌우를 훑어본 뒤, 성큼성큼 걸어 1층 입구 쪽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병원 밖으로 나온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위쪽을 쳐다봤다.
아주 높이 치솟아 있는 성국대 병원 본관의 모습
특히, 본관 20층, 최상층.
그 스카이라운지, VIP실 병동.
그러고 보면, 어제 한유나를 저기서 만났고.
또한, 윤 실장이라는 분과 꽤 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한유나의 그룹 지분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편, 나는 윤 실장과 나눴던 그 대화를 잠시 생각해 보다가.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렸다.
참!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병원에서 나가자.
아버지 때문에 얻게 됐던 얼마 전의 갑작스러운 오프.
그러나 이번엔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오프다운 오프가 나한테 다시금 주어졌다.
어제 병원장, 아니 부총장과의 면담 때.
혹시 필요한 게 있냐는 부총장의 질문에 하룻밤 정도 쉬고 싶다고 말했고.
그래서 다시금 ‘낙하산(?)’ 오프가 날아든 것이다.
김완기 흉부외과 과장님도 흔쾌히 그걸 승인하다 보니.
그래서 나는 유유자적하며 별관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주 낯익은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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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집에 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본관 1층 건물 옆 흡연 구역.
이 구역에 자주 출몰하는.
응급실 조은하 선배. 바로 그녀다.
내가 다가서자.
담뱃불을 끈 뒤, 의사 가운 양쪽 깃을 쭉 잡아당겨 늦가을의 찬 바람을 막아내는 그녀.
“야! 10분 뒤에 나도 나갈 건데, 내가 태워줄까? 집이 어디야?”
나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차 있어? 항상 택시만 타고 다니던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과거, 인턴, 레지던트 때 웬만해서는 택시를 타고서 이동했다.
그게 가장 쉬웠고. 택시를 타는 동안 잠시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다.
“저도 잘 안 쓰는 차가··· 있습니다. 방전될까 봐, 운전도 해야 하고.”
“아,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근데, 인턴!”
“네?”
“음, 하나만 묻자.”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대체 너··· 정체가 뭐야?”
“네?”
“···그냥 뻔한 녀석인 줄로 알았는데 요즘 보면 그게 아닌 것 같고.”
나는 의아해하며 계속 쳐다봤고.
조은하 선배는 또 말했다.
“그 환자도 그렇고, 오늘 일도 그렇고. 저번 앰뷸런스 타고 올 때 그 모습도 그렇고···.”
그러고는 빤히 쳐다보다가 휙 시선을 돌린다.
“아니다. 아냐. 내가 그런 거 알아서 뭣 하게. 암튼 오프나 잘 보내!”
그러고는 조은하 선배는 등을 돌렸고.
그렇게 걸어가며 등진 상태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뭐야? 저 모습?
항상 보면, 말투가 뭔가 해탈한 사람 같다.
회귀 전 나이를 갖고 있는 내가 봤을 때도 의아할 정도.
보통 나이답지 않는 모습을 갖고 있으면 그만큼 인생 역정이 많다는 말인데.
슬쩍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달리 떠오르는 생각도 없어 나는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도착한 곳.
별관 지하 3층, 지하 주차장.
주차장 관리실에 전화까지 해서 간신히 찾아낸, 내 오래전 애마가 있는 곳.
E구역 63번 위치까지 오게 된 나는 자동차 리모컨을 눌렀고.
그러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차량의 앞 헤드라이트에 밝은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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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어둑어둑해진 도심 도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방전됐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간신히 시동이 걸린 이 중고 소타나. 이 차량을 타고서 달렸고.
그리고 도착한 곳.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도심 속 오피스텔이다.
본과 4학년 때 아버지로부터 거의 독립한 뒤, 내가 살게 된 임시 거처.
몇 년 전에 신축한 곳이라 제법 깨끗했고 위치적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도착했으나 비번 때문에 시간을 좀 소비한 뒤, 비로소 1207호 안으로 들어섰다.
<48>
불을 켜자, 뭔가 기분이 이상해진다.
내가 바라보는 오피스텔의 모습.
기억 속, 오래된 사진 속에 있는 듯한 그 모습.
예전에 내가 이곳에서 지냈고 의대 본과 4학년 내내 이 집에서 보냈다.
물론 인턴 과정 동안엔 너무 바빠 이곳에서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고.
과거엔 인턴을 마치자마자(아마 내년 2월쯤) 이곳을 정리했다.
구태여 매달 월세를 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흉부외과 레지던트 생활이 바빴기 때문.
이후 레지던트 과정 땐 오프가 있을 때마다 외부 숙소를 예약해야 했고.
그곳에서 나는 이런저런 시간들을 보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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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근데 이 인형이 아직도 있네.
나는 웃으며 다가가 접이식 침대 소파에 몸을 기대며 앉았다. 그리고 그 인형을 손에 쥐었다.
오래전, 숙면 시간마다 대충 내가 안고 자는 둥근 인형 쿠션.
그 녀석이 아직도 여기에 있다.
푹신푹신한 이 녀석.
가만히 쳐다보며 만지다가.
문득 소박한 오피스텔 내부를 쭉 훑어봤다.
의대 본과 4학년부터 내가 있었던 곳.
접이식 침대 소파에서부터 책상, 데스크탑, 냉장고 등등, 있어야 할 것들은 다 있었다.
그러다가 내 시선은 갑자기 멈칫하며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한쪽 벽면, 그곳에 걸려 있는 오래된 가족사진 하나.
웃고 있는 10년 전 가족들의 모습.
그 사진을 나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짧게 탄식하며 고개를 숙였다.
탁! 탁!
가볍게 두 볼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억지로 우울한 기분을 떨쳐냈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 하얀 커튼을 옆으로 완전히 치웠다.
그리고 작은 거실 창을 활짝 열자.
와아! 시원하다!
차가운 바람이 스르륵 불어 들어온다.
어느덧 겨울을 앞둔 늦가을, 11월.
그 차가운 바람에 눈과 코가 약간 시립기도하지만, 한편으론 너무 시원하기만 하다.
먼저 샤워부터 할까?
저 너머 반짝이는 도심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망설이다가, 그 전에 아주 익숙했던 저 소파에 그냥 눕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인형을 안고서 그곳에 누웠다.
와, 근데 왜 이렇게 마음에 편해지지.
아주 익숙한 곳이라서 그런가.
사방이 조용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흉부외과 스테이션의 분주함도 보이지 않아, 수술대의 강렬한 무영등도 보이지 않아, 저절로 마음이 무척 편해진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이런저런 상념들이 잔잔한 물결이 되어 스르륵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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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역시 한유나는··· 쉽지 않겠다.
불현듯 그 생각이 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사실, 어떤 왕조든 왕좌에 눈이 먼 왕자들이 나타나게 되면 치열한 골육상쟁이 일어나게 된다.
형제, 자매들의 피가 왕좌를 벌겋게 적시게 되고.
그 핏속에서 새로운 군주가 탄생하는 법이다.
그런데 현재의 신라그룹 한태산 회장 가문은 그와 다를 바가 없다.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는 경영권 분쟁 위기.
강지연 검사가 이야기해준 것들도 있고.
어제 윤 실장한테서 들은 것들도 있다.
특히 나는 윤 실장이 했던 말들을 주목하며 다시금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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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그룹 한태산 회장.
그는 아주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신라그룹의 설립자이자 신라그룹을 반석에 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 위대한 기업인!
그러나 그의 성공한 인생과 다르게 가정사는 무척 굴곡이 컸다.
한태산 회장은 3번이나 결혼했다.
첫째 부인으로부터 3남 2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한테서 한유나를 낳았다.
그리고 그는 셋째 부인과 다시 결혼한 상태다.
우선, 첫째 부인과 결별하게 된 이유는 당시엔 흔치 않았던 합의 이혼.
듣기론, 젊은 요리사와 바람이 났던 첫째 부인, 그 여자의 뜻을 존중해서 이혼을 결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한유나의 엄마와 재혼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분 구조에서 큰 변수가 발생했기 때문.
당시, 한유나의 엄마는 당대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던 영화배우였고.
지성까지 갖춘 그녀는 결혼 직후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한태산 회장의 회사에 투자했다.
그리고 그때 받게 된 지분 대다수를 한유나가 열살이 되던 해 한유나에게 모두 증여했다.
그런데 사실, 첫 투자가 시작되었던 당시만 하더라도, 신라전자는 크게 두각을 드러냈던 그런 회사가 아니었다.
즉, 신라그룹 내, 주요 회사가 아니었고 단순한 2진급 회사였다.
그러나 이 회사는 눈부시게 성장했고, 한유나가 가진 지분 가치는 어느 순간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첫째 부인과 그 자녀들은 거침없이 늑대 같은 본성을 드러내며 나날이 변하기 시작했다.
신라그룹이라는 어마어마한 거탑!
이 거탑을 손에 쥐고 싶은 강렬한 욕망!
그런 욕망에 휩싸인 이들은 자신들의 어머니, 한태산 회장의 첫째 부인이 암으로 사망하게 되자, 그때부터 더없이 흉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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