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의 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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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다면, 회장님께서 추가 지분 정리 없이 돌아가시게 되면··· 그때 법적 유산 상속이 발생할 거고. 그렇게 되면 지분 구조상 아가씨가 당연히 신라전자의 최대주주가 됩니다. 물론, 근소한 차이로 최대주주가 되는 겁니다. 만약 저쪽이 의결권들을 모두 합친다면 다시 지분 순위가 바뀌겠지만··· 그게 마냥 아쉬울 따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유나가 이번에 큰일을 당했다면 그 지분은 가문으로 흡수됐을 테고. 이후 한태산 회장이 사망할 경우, 한유나의 지분은 죽은 한태산 회장을 통해 결국 직계 자녀들과 셋째 부인한테 배분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소파에 누운 채 팔짱을 꼈고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면, 회귀 전, 신라그룹의 차기 총수가 누구였던가.
잠시 기억을 헤집던 중, 나는 이내 쓴 미소를 지었다.
그땐 별다른 감흥 없이 뉴스에서 봤던 일.
그러나 지금은 확연히 그 느낌부터가 다르다.
그래, 회귀 전에 내가 봤던 신라그룹의 차기 총수!
그는 바로······.
한태산 회장의 장남, 한윤기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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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화들짝 놀라며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차!
다시 요란하게 울리는 삐삐 진동 소리.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파에 누워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
황급히 일어났다.
아, 삐삐!
서둘러 몸을 돌려, 대충 벗어놓은 옷에서 삐삐를 꺼냈다.
근데 왜 이렇게 춥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거실 작은 창문이 열려 있다.
거실 불도 환하게 밝혀져 있고.
다만, 창밖을 쳐다보니 어두컴컴하다.
아직 밤이라는 말인데.
그러나 삐삐 호출 확인이 급선무라 먼저 삐삐 호출을 확인하던 중,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삐삐에 찍힌 번호가 흉부외과 스테이션 전화번호였기 때문.
서둘러 내 개인 휴대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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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지금 당장 오실 수 있으세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아주 다급한 목소리.
나이트근무 중인 김선화 간호사, 그녀였다.
“가능합니다! 근데 혹시 어떤 상황이죠?”
“응급환자가 조만간 이송될 예정인데, 아직 상대쪽 병원에서 출발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서둘러서 준비할 필요성이 있고··· 환자가 현재 혼수상태이고 윤미연 교수님이 선생님 호출을 직접 지시하셨습니다.
윤미연 교수님?
그리고 혼수상태?
그럼 응급 수술, 즉 심장 수술이 예고되는 상황인가.
“당장 가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황급히 이것저것 챙긴 뒤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곧이어 중고 소나타를 몰며 병원으로 빠르게 달리면서 뒤늦게 현재 시각도 확인했다.
새벽 2시 12분.
젠장!
그럼 그렇지!
흉부외과에 적을 두고 있는 이상, 장시간 휴식은 과분할 따름이다.
한편, 도로엔 차량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좀 더 힘껏 액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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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로 그 무렵.
신라병원에서 1km 떨어진 왕복 8차선 대로(大路).
위용! 위용! 위용!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과속으로 달리는 앰뷸런스는 단 한 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 뒤를 바짝 추격하듯 뒤쫓는 3남 한윤형의 차량.
현재, 벤츠 차량 조수석에 탑승하고 있는 한윤형 전무는 현재 두 눈에 섬뜩함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일부러 조수석 쪽에 앉은 한윤형 전무.
그는 끊임없이 좌우를 살피며 혹시라도 누가 따라붙을까 무척 전전긍긍해 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별다른 문제 없이 앰뷸런스는 성국대 병원을 향해 번개같이 달리고 있었고.
한윤형의 차량 역시 심하게 과속하며 그 뒤를 뒤쫓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일단의 검정 SUV 차량들이 도로 곳곳에서 튀어나왔고.
한윤형 전무의 차량 앞뒤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순간, 뭔가를 깨달은 한윤형 전무.
그의 입에서 순간 욕설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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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정 기사! 더 밟아! 빨리 밟아!!”
“네!”
“앰뷸런스 끝에 바짝 붙어 달려! 더 바짝!!”
끊임없이 앞쪽, 좌우를 가로막으려는 검정 SUV 차량들.
벤츠 운전사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새벽에 마치 속도 경쟁, 추격전이 벌어진 것 같다.
순간 과속이 크게 붙으며 삽시간에 시속 120km를 넘어서고 있다.
새벽 일반 도로에서 시속 120km?
심각한 과속이다. 그러나 한윤형 전무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일단의 검정 SUV 차량들 역시 일제히 속도를 높인다.
그 때문에 도로 상황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앞선 일반 차량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지그재그로 운전하는 벤츠차량과 SUV 차량들!
대략 3km가량을 그렇게 그들은 시속 60km에서 120km를 오가며 위험한 질주를 이어나갔다.
우우우우웅···!!
특히, 새벽 시간대라 행인들의 발길이 뜸해져 번번이 교차로 신호등을 무시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들은 그렇게 달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던 앰뷸런스가 쌩! 하며 큰 교차로를 지나갔고.
이때, 신호등의 불이 황색을 지나 어느새 적색으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특히, 각 차선, 교차로에 막 진입한 차량들은 더 속도를 냈는데.
검정 SUV 차량들도 마찬가지다.
한윤형 전무는 힘껏 외쳤다.
“속도 더 높여! 정 기사! 상관없어! 그냥 달려!! 가자!! 가!! 통과해!!”
운전사는 그 지시에 따라 액셀을 더 힘껏 밟았다.
우우우웅!
격렬한 엔진음 소리와 함께 속도는 더 높아졌는데.
교차로를 더 빨리 통과하기 위해 속도를 더 올린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반대편 차선 두 번째 열.
그곳 노란 마티즈 차량이 먼저 U턴을 하려고 황색 신호등 점멸만 보고서 한발 먼저 움직였다.
문제는 1차선을 달리고 있던 한윤형의 차량은 너무 과속하고 있어 즉시 제동을 걸어 멈출 수가 없다.
지금 상황에선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면 차량이 전복될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
아스팔트와 난장판처럼 부딪히고 반대편 차량들 속으로 날아가 십중팔구 떡이 될 것이다.
순간, 너무 놀란 한윤형 전무는 거의 미친 듯이 외쳤다.
“야! 중앙선 너머로 역주행해! 빨리!”
그러나 속으로···.
‘시발, X됐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달리 상황상 운이 좋았다.
새벽 시간대. 반대편 차선엔 차량이 별로 없었고.
역주행을 시작했으나 특별한 충돌도 없이 잠시 후 원래 차선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앰뷸런스 뒤를 바짝 따라붙었는데.
그 순간, 한윤형 전무는 씩 웃었고.
그사이, 검정 SUV 차량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대체 누굴까?
분명, 자신을 위협한 것 같았는데.
아무튼, 잠시 뒤.
성국대 병원 입구로 들어선 벤츠 차량은 좌회전 차선 가장 앞쪽까지 미끄러지듯 도착했고.
천천히 성국대 병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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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습니다. 전무님.”
응급실 바로 지척에 멈춰선 운전사.
잠시 후, 한윤형 전무는 차량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강영균 상무를 쳐다보며 즉시 말했다.
“빨리 들어갑시다. 곧 큰형도 올 텐데.”
장남 한윤기 부사장도 이곳에 올 예정이다.
사실, 아버지의 세번째 와이프, 손미희 여사 때문에 아버지는 전격적으로 신라병원이 아닌, 성국대 병원에서 수술이 결정되었다.
물론, 자신과 손을 잡은 손미희 여사가 자신의 말을 적극적으로 들어준 결과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게 자신한테 유리했다.
형제들 중에서 한유나와 가장 친한(?) 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49>
한편, 그로부터 약간 시간이 지나서.
병원에 도착한 나는 후다닥 뛰었다.
새벽의 찬 기운이 코끝으로 파고드는데.
막 별관에서 나와, 본관 쪽으로 뛰어가던 중.
문득 나는 의아해하며 응급실 쪽을 잠시 쳐다봤다.
갑자기 척! 척! 척! 나타나는 일단의 중대형 외제차 행렬.
그런데 그 구역은 정차할 수 없는 구역이다.
그럼에도 그곳에 정차한 외제차량들.
그곳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아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좌우를 둘러보던 남자.
곧이어 비서진들이 옆으로 붙자, 그는 즉시 응급실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그가 타고 온 차량은 병원 앞 도로를 순회하며 사라졌고.
그사이 남자는 응급실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나는 두 눈에 이채를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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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전, 아무리 내가 병원밖에 몰랐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신라그룹 한윤기 회장을 모를 수 없다.
무척 젊어진 한윤기 회장의 모습.
그런데 그런 한윤기 회장이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다.
문득 나는 강지연 검사의 말이 떠올랐고.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 설마 그 환자가 한태산 회장인가.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속도를 내서 응급실 쪽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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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의사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빙 둘러 서 있고.
간호사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한 상태다.
응급실 한쪽 중앙.
두 개의 베드가 놓여 있던 곳이 지금은 하나의 베드로 합쳐져서 그 구역이 좀 더 넓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곳엔 인공호흡기를 낀 노인이 누워있다.
그런 베드 앞에 서서 무언가 설명을 하는 의사들.
저번에 봤던 한윤형 전무 외에도 좀 전에 안으로 들어갔던 한윤기 회장의 모습도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한편, 나는 유심히 베드 위의 노인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저 노인.
저 날렵한 턱선, 날렵한 콧날.
바로 저 노인은 대한민국 경제계의 거물!
바로 한태산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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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나는 응급실을 바로 나왔고 흉부외과 의국에 들러 서둘러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후다닥 뛰어서 다시 응급실로 돌아왔다.
그사이 조금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곳의 사정은 변함이 없다.
박윤후 교수님을 포함하여 윤미연 교수님 등 흉부외과 교수들이 서 있고.
저번에 잠시 면담을 하느라 만났던 박인환 부총장님, 병원 기조실장 정태석 교수 등도 그 무리에 끼어있었다.
그러고 보면, 저 자리는 인턴 짬밥으로는 도저히 낄 수 없는 자리다.
그래서 조금 물러서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일단의 고위직 무리에 서 있던 윤미연 교수님이 날 알아본 듯 갑자기 나한테 손짓했다.
빨리 오라는 제스처!
흠칫 놀라다가 황급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즉시 그 무리에서 나온 윤미연 교수님은 나한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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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 할 일이 있어.”
“네? 제가 할 일이 있다고요?”
좀 당황해서 묻자,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그런 표정을 짓는 윤미연 교수.
“당연히 있지. 그래서 부른 거잖아.”
그렇기야 하겠지만.
수술 상대가 너무 거물이지 않은가.
이런 건 초호화 수술진을 꾸려 수술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 인턴에 불과하지 않은가.
“수술팀이 곧 꾸려질 거야. 우리는 갑자기 연락을 받은 거라 준비가 덜 돼서 좀 그렇지만. 그래서 말인데! 각자 파트를 나누기로 했어. 나랑 최현호 교수님이 메인 집도를 맡고, 최현호 교수님 수술은 김효정 교수님과 최고은 선생이 돕기로 했어. 최현호 교수님이 먼저 수술하고, 우리는 후반부 수술을 하기로 했어.”
그런데 우리?
우리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더 놀랐다.
“우리 팀은 양종규(펠로우) 선생과 김정민 선생이 날 좀 도와줘. 그리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수술 모든 과정은 녹화될 거야.”
이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김재호 선배가 아니라 내가 들어간다고?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근데 교수님, 진짜··· 제가 들어가는 거 맞습니까? 전 인턴인데요?”
“김 선생! 아무 말 말고 그냥 들어와. 이번 수술은 병원 명예와도 관련 있어. 최고 조건에서 수술해야 돼. 그건 어쩔 수 없어.”
“그럼 제가 어떻게?”
“나랑 호흡이 가장 잘 맞잖아. 김정민 선생은 내 의도를 누구보다도 빨리, 가장 정확히 알아주는 것 같고. 암튼 준비해봐!”
그렇게 말한 뒤, 윤미연 교수님은 그쪽 대화 자리로 돌아갔지만 나는 좀 얼떨떨했다.
미션 때문에 수술자리에 서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수술의 당사자가 바로 한태산 회장이다.
당사자가 재계 거물이다 보니, 수술 역시 대형수술로 변해 버린 상태.
일명, 성국대 병원 심장 수술 분야, 탑 수술진! 이번 수술은 그런 사람들만 낄 수 있는 자리다.
근데 벌써 내가 낄 수 있을까.
비록 세컨 어시라고 해도.
그저 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고.
이내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모든 게 바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잠깐 응급실에 있었던 한태산 회장은 응급실 검사 기기와 영상실 기기 등을 통한 초스피드 검사 뒤 바로 수술실로 이송하기로 결정됐다.
그러고 보면, 한태산 회장의 막내딸 한유나가 과거와 달리 소생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과거엔 없었던 한태산 회장 수술이 그렇게 성국대 병원에서 시행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아침 8시 무렵, 나는 후반부 수술을 위해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은 것 같은 저 수술방에 드디어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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