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인간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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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내가 뭔가 변곡점을 바로 찍었나?
특히, 지금이 중요 시기라서 이런 알람이 뜬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실제 내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조금 전 경찰관들이 응급실을 찾아왔는데.
이번 사고의 피의자가 바로 고태진인 것이 밝혀졌다.
권철수씨 사망 사건과 연관성이 있고.
또한, 이번 교통사고의 직접적 관련성이 있는 사람.
의사가 환자를 선별해서 치료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 머저리도 아니다.
좀 전엔 태아를 잃은 젊은 부부의 비참한 모습을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나는 의사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절대 그들의 불행을 외면할 수 없다.
나는 즉시 ‘아니오’를 속으로 외쳤다.
그러자 즉시 시스템 알람이 떴다.
[미션, 잔혹한 인간(클래스 B)를 완수하셨습니다!]
[업적 보상: ???????]
[고상중 의원이 당신을 이제 주목하게 됩니다!]
[고태진의 생명이 극도로 위험해집니다]
[과감한 선택을 한 당신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냅니다!]
[연계 미션으로, 새로운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잔혹한 인간(클래스 A)]
[새 미션을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렇듯 클래스 B 미션이 클래스 A 미션으로 바뀌며.
진짜 본 게임이 시작되듯 시스템 알람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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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나는 3층 중앙수술실에 도착했고.
12시간짜리 긴 수술을 마친 윤미연 교수님과 함께 최문영 환자 수술에 투입되었다.
반면, 고태진의 수술은 최현호 교수와 최고은 선배가 맡게 되었다.
박숙자 환자의 수술은 한재준 교수와 김재호 선배가 맡게 되었는데.
그리고 잠시 뒤.
아주 바쁘게 모든 일들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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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이. 띠이. 띠이.
고성능 환자감시장치에서 들려오는 전자음들.
규칙적이지만 은근히 적막을 깨는 그 전자음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수술대 위에 누운 최문영 환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머리, 흉부, 복부, 그리고 태아.
또한, 온몸 전체에서 발생한 다발적인 골절상 등.
사고 충격이 그만큼 엄청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술 부위 접근 용이성을 위해, 가장 먼저 산부인과 의료진들이 투입되어 자궁 내, 사산 태아를 적출했다.
20번 나이프를 쥐고서, 복부 절개가 진행된 후.
제왕절개술(Caesarean section)을 통해 사산 태아를 적출했는데.
이미 분만 직전에 이른 태아이기 때문에 형상이 영아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의료진 모두, 침통하면서 숙연한 모습이 되었다.
그렇게 최문영 환자로부터 사산 태아가 적출된 뒤.
복부를 닫지 않고 그대로 오픈된 상태에서.
윤미연 교수와 나는 다음 수술을 위해 바로 수술대로 다가섰다.
곧바로 개흉술이 시작되었다.
이때 얼굴이 딱딱히 굳은 윤미연 교수님은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았고.
수술방 간호사들도 조용히 수술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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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골절된 늑골은 3, 4, 5, 6번 늑골. 심전도 검사에서 Q파와 T파 역위 소견이 있으며 우관상동맥 근위부 쪽이 완전폐쇄된 상태입니다. 그로 인해 하벽 심근경색이 급성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심방, 상대정맥, 하대정맥 연결부 등에서 각각 파열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렇듯 나는 간단히 브리핑했고.
윤미연 교수는 바로 지시를 시작했다.
“10번 메스 주세요.”
“김 선생, 바로 지혈해!”
“수처 주세요.”
“석션!”
“다시 석션!”
“bone wax!”
“포셉!”
“2-0 black silk 주세요.”
“15번 메스!”
“U-tape!”
“김 선생, 지혈 좀!”
“모스키토!”
“수처합니다!”
“다시 수처합니다!”
“모스키토 주세요.”
“11번 나이프!”
그렇듯 윤미연 교수는 차분하게 수술을 이어나갔다.
오늘따라 윤미연 교수님의 태도가 무척 차분하다.
이미 12시간 대수술을 한 터라 몸이 고단해서인지 되도록 말을 아끼고 있었고.
그사이 수술은 느린 듯 차분하게 진행된 끝에 어느덧 완전순환정지 준비 단계까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심폐 바이패스가 시작되었다.
중간중간 윤미연 교수님은 나한테 메스를 맡겼고.
그 와중에 주변 조직 박리 작업이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prolene 4-0 수처 주세요!”
그리고 잠시 뒤.
윤미연 교수는 파열된 각 심장 부위에 대한 직접 봉합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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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수술이 꽤 길어지는군?”
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하는 시각.
중앙수술실 앞, 통로 벤치에 앉아 수술 종료를 기다리던 고상중 의원은 긴 한숨을 내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기 중인 수술 환자 가족들이 자신을 한 번씩 쳐다보는 걸 그는 일부러 의식하는 듯하다가.
박광재 보좌관에게 슬쩍 눈짓했다.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난 고상중 의원은 그러고는 통로 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보좌관은 바로 뒤에서 그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뒤 도착한 곳.
본관 지하 3층 주차장.
주차된 국산 대형 세단 뒷자리에 앉은 고상중 의원은 좌석 머리 받침대에 뒷머리를 바짝 붙이며 몸을 뒤로 조금 눕혔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
“박 선생.”
“네. 의원님.”
운전석에 앉은 박광재 보좌관.
그는 완전히 고개를 돌려 응시했고.
고상중 의원은 다시 눈을 떴다.
“박충식 검사장 그 새끼, D-day가 오늘이라고 하던데?”
“음.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몇 시라고 했지?”
“예정 시각은 오후 5시입니다만, 스케쥴은 유동적입니다. 아마 그때쯤 수원지검에서 중간 수사 결과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럼 밤 8시 뉴스, 9시 뉴스에 도배가 되겠군. 허허. 세상이 날 죽이려고 하는군.”
잠시 허탈하게 말하는 고상중 의원.
“곧 여기도 기자들이 몰려오겠지?”
그 순간, 박광재 보좌관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의원님! 절대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절대 이 정도 일에 당황해서도 안 됩니다!!”
어느덧 지천명(50살)의 나이에 가까워지는 박광재 보좌관. 그의 주름진 눈매가 조금씩 더 얇아지고 있다.
“의원님! 대검(대검찰청) 김학신 부장검사마저도 덮지 못할 정도라면, 박충식 검사장 배후엔 확실히 누군가 있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배후를 파헤쳐야 합니다. 이런 기획 수사에 의원님께서 절대 당해선 안 됩니다!”
“허나 나한테 모든 게 불리해. 하필, 아들놈의 새끼도 날 도와주질 않고 지멋대로 깽판을 쳐 버리니··· 참! 아까 경찰관이 다녀간 건 어떻게 됐나?”
“음, 혈중 알코올 수치 정보 같은 걸 따 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음, 대충··· 그런 거라고 들었습니다.”
“씨! 개새끼! 내가 그렇게 자중하라고 했는데···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코앞인데! 새끼, 술이나 처먹고 여자나 끼고서···.”
순간, 고상중 의원은 이를 득득 갈았다. 두 눈엔 무시무시한 안광이 표출되었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자, 그는 억지로 화를 다스리려고 관자놀이 거칠게 문질렀다.
“근데 의원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죄송합니다만, 사태를 더 악화시킬 게 아니라, 이젠 역전시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역전? 어떻게?”
“사실, 이번 사고가 오히려 잘 일어났다고 저는 봅니다.”
“뭐? 이게 잘된 일이라고?”
고상중 의원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진다.
그리고 역정을 내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상중 의원은 고개를 들었다.
이때, 얇아진 눈으로 고상중 의원을 쳐다보는 박광재 보좌관.
평소 냉정하면서도 아주 합리적인 친구라, 고상중 의원이 아주 아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뭐가 잘 됐다는 거야?”
“의원님! 고태진 대표가 사고를 일으켰고 지금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크게 다친 게 사실입니다. 그 사고로 여자 동석자 사망 상황까지 발생했고. 듣기론 임신부 한 명이 사산했다고 합니다. 이게 언론에 보도되면 여론이 더 나빠질 겁니다. 거기다가 좀 전에 문자가 왔는데, 여자 동석자가 아마도 룸살롱 출신 아가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룸살롱 아가씨? 으으으.”
분개해하는 고상중 의원.
“그래서?”
“보시다시피 심한 화상 때문이라도 앞으로 정상적으로 살기 힘들어 보이고. 앞서 자기 관리도 못 해 장부까지 털렸습니다. 본격적인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 고태진 대표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박충식 검사장한테 날개를 달아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야! 박 선생! 하고 싶은 말이나 해!”
“그래서 제 생각은··· 안타깝지만··· 으음··· 아시다시피··· 제 동생들 중에···.”
“잠깐.”
이때, 고상중 의원은 잠시 박광재 보좌관을 제지한 뒤 눈을 감은 채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한참 생각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고상중 의원의 눈빛 세기가 달라졌다.
“그 동생··· 그 동생 말이야. 몸값이 얼마라고 했지?”
“보통··· 인당 다섯 장입니다. 특수한 경우엔 그 두 배입니다.”
“다섯 장?”
“그러나 반드시 비밀은 지켜집니다. 그리고 최소 3년간··· 식물인간 상태가 유지될 겁니다. 아드님이 절대 죽는 게 아닙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고상중 의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때 늘 가려져 있던 가면 속의 그의 섬뜩한 눈빛이 잠시 표출되었다.
정치를 한다는 건 권력에 대한 지독한 욕심이 있어야 한다.
뭔가 사회 개혁을 하겠다, 약자를 돕겠다 등의 좋은 마음도.
대체로 어느 순간부터 퇴색되는 게 바로 정치판이다.
어마어마한 욕망을 이겨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욕망에 굴복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얼굴에는 하나의 가면이 생기게 된다.
그 가면 개수가 많아질수록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되고.
정치 백단을 자처하며 사람들 위에서 군림할 수 있게 된다.
아직 자신은 부족하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할 때.
본래, 정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
자신은 그런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기획 수사를 통해 자신을 압살하려고 한다.
이 수작에 자신이 당하는 순간 모든 기반은 우르르 무너지게 될 터.
절대 물러설 순 없다.
어떻게 쌓은 입지인데···.
대중적인 정치인, 인자한 아버지 상의 정치인 모습.
그 모습을 자신은 계속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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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
박광재 보좌관은 백미러를 통해 쳐다봤고.
고상중 의원은 어느새 감정이 사라진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박광재 보좌관은 희미하게 웃으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박광재 보좌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원님, 평소 제 소신이 뭔지 아십니까?”
“······.”
“의원님이라면 반드시 대한민국 대통령··· 대통령이 되실 분입니다. 아드님의 아픔은 기필코 그 토양이 되실 겁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이때 고상중 의원의 얼굴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저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이내 무표정해질 뿐.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고태진에 대한 수술이 끝나고 그가 회복실을 거쳐 중환자실로 들어갈 무렵.
어느 평범한 중년 남자가 선물용 음료수 상자 하나를 들고서 흉부외과 병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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