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리는 권좌 01
<60>
잠시 뒤.
이 가방을 어쩌지?
가방을 들고 빠르게 숙소 쪽으로 걷던 중.
나는 잠시 혼란과 당혹감을 느꼈다.
왜 이걸 받았을까.
뒤늦은 후회.
아이씨!
결국, 내가 뭔가에 이끌려서 나도 모르게 받게 된 게 분명하다.
그래도 어쨌든 이것 덕분에 메인 미션이 떴으니까.
최초의 메인 미션!
그래, 이 가방은 그 매개체니까 우선 놓치지 말자.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인간처럼 점점 더 내 호기심은 증폭되었고.
특히, 과거엔 큰 거리감이 있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나한테 무언가 도움을 주려고 한다는 사실에 비록 그게 어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
잠시 뒤.
대체 어떤 기밀일까.
딱!
소리가 나더니 검정 철제 가방이 드디어 열렸다.
병원 숙소.
내 침대 옆, 작은 책상에 앉은 나는 가방에서 서류들을 하나씩 꺼내 잠시 살펴봤다.
물론,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서 눈으로 쓱쓱 훑어내리다가.
잠시 뒤, 고요하던 내 눈동자는 몇 번이고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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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따로 빼고···.
저것도 따로 빼고.
그러다가 이것저것 묶어서 다시 펼치던 중.
나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잠겼고.
버릇처럼 턱을 만지며 쓰다듬었다.
사라락!
한편, 서류들을 빠르게 넘기며, 중간중간 스킵하면서 후반부 내역도 살펴봤는데.
휴우!
근데 놀랍다.
놀랍기만 하다.
비록 시간이 없어 초스피드로 봤지만.
역시 세간의 평가대로 신라그룹은 도저히 평범한 그룹이라고 할 수가 없다.
신라그룹 한태산 회장!
수술대 위에 누운 그 노인은 그저 생사가 위태로운 가련한 노인으로 보였지만.
쉽게 동정할만한 노인이 절대 아니었다.
그 서류에 적힌 수많은 일들을 기획하고 또한 실제 행한 거라면.
한태산 회장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강심장한테 어쩌다가 심장 문제가 발생했을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고.
한태산 회장의 자식들에 대한 경계심이 저절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문득 손목시계를 쳐다보니, 시간이 꽤 경과된 상태다.
그럼에도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니, 메인 미션에 대한 호기심은 더 커져 버렸는데.
이 서류들과 새로운 메인 미션은 서로 연관성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생각을 마친 뒤, 즉시 두 개의 미션을 모두 수락했다.
#
[피 흘리는 권좌(클래스 S)! 메인 미션을 수락하셨습니다!]
[잔혹한 인간(클래스 A) 일반 미션도 수락하셨습니다!]
[두 개의 개별 미션이 메인 미션으로 병합됩니다]
[메인 미션: 피 흘리는 권좌(클래스 S)······]
[이 미션은 총 6개의 세부 연계 미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션 병합 결과에 따라······]
[<피 흘리는 권좌> 연계 미션(1): 잔혹한 인간(클래스 A)의 정보가 공개됩니다]
[연계 미션(1)······]
[한성클린 고태진 대표를 보호하세요! 그는 식물인간이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특전: 깨끗한 피]
[혈액을 완벽히 정화합니다. 제한 조건: 효력 1분 지속, 1회 사용]
[업적 보상: 깨끗한 피 2병]
[실패: 경험치 -200포인트]
그렇듯 메인 미션 내, 첫 번째 미션이 튀어나왔는데.
하필, 첫 연계 미션에서 만인의 공적이 되고 있는 고태진이 언급되자 나는 기분이 좀 언짢았다.
앞서 나는 고태진 대표의 수술을 거부한 바가 있는데.
메인 미션과 병합된 이런 미션에서, 고태진 대표를 보호하라는 미션이 바로 뜨자 당혹스럽기도 했다.
근데 대체 이게 왜 이렇게 나왔지?
이성적인 판단 또한 좀 혼란스러워졌는데.
이때, 연속으로 알람이 또 들려왔다.
#
[특기 사항 발생!]
[<피 흘리는 권좌> 잔혹한 인간(클래스 A) 미션은 최종 실패했습니다!]
[침입자가 독수에 성공했습니다!!]
[현 시각, 고태진 대표의 회생은 불가합니다]
그 순간, 나는 황당해하며 귀를 쫑긋 세웠는데.
[<피 흘리는 권좌> 연계 미션(1): 잔혹한 인간(클래스 A)은 즉시 폐기되며 연계 미션(2)로 연결됩니다]
그렇듯 괴상한 알람이 계속되고 있었다.
#
아주 조용한 숙소 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멍해 있었다.
좀 전에 미션이 공개됐고.
그런데 곧바로 실패 처리가 된 것!
첫 메인 미션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상당히 중요한 시작이 될 상황에서, 갑자기 난데없이 날아온 실패 알림.
이게 대체 말이 되나.
미션 시작과 동시에 침입자가 발생하다니!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싸한 느낌이 들며.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대체 누가 침입자를 보냈지?
나는 인상을 팍 썼다.
아이씨!
근데 그럼에도 실패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문득, 강한 아쉬움도 생겼다.
[깨끗한 피: 혈액을 완벽히 정화합니다. 제한 조건: 효력 1분 지속, 1회 사용]
이건 분명 제독(除毒) 기능을 가진 특전.
이 미션이 성공했다면···.
특전 [깨끗한 피] 2병이나 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
아쉽다.
아니, 내가 좀 더 빨리 미션 수락을 하고, 또한 대처했어야 했나.
특히, 고태진의 역할이 이번 메인 미션 내에서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이때 또 다른 알람이 곧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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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연계 미션이 자동으로 공개됩니다!]
[<피 흘리는 권좌> 연계 미션(2)!]
[연계 미션(2): 광란의 질주(클래스 A), 신라그룹 윤혜선 실장의 생명을 구하세요!]
[전용 특성 일시 개방: 은밀한 수술자(S)]
[은밀한 수술자(S): 수술방 공간이 당신의 권역이 됩니다. 수술 참여자들의 기억이 조작되며 당신 홀로 수술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권역으로의 외부인의 침입은 불가하며, 외부인이 이 권역을 인식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해집니다. 제한 조건: 유효 시간 30분 이내, 쿨타임 24시간]
[전용 특성 일시 개방: 6일 유효(2001.11.18.~2001.11.23.). 해당 시간 경과시 일시 개방된 특성은 사용이 불가합니다]
[업적 보상: 성좌 특별 보상]
[실패: 사신의 위험한 방문]
[해당 미션은 거부할 수 없는 미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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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연계 미션(2)가 공개된 뒤, 나는 다시금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한유나의 비서실장 격인 윤혜선 실장의 생명을 구하라는 미션.
이건 뭔가 중요한 포인트인가.
어쨌든 거기다가 [은밀한 수술자(S)]라는 아주 매력적인 특성이 튀어나와, 나는 바로 반해 버렸다.
나 홀로 수술이 가능하다는 건 지금 내 상황에선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건 뭐, [혼미] 특성보다도 좀 더 상향된 것 같고 좀 더 세련된 느낌마저 든다.
또한, 업적 보상으로 성좌 특별 보상이 주어지는 게 무척 궁금하기도 했고.
실패시, 사신이 ‘위험한’ 방문을 한다는 건 마음을 조금 무겁게 한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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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클래스B 업적에 대한 보상도 공개됩니다······]
[업적 보상!]
[······특성 등급 상향]
[이번 업적 보상은 메인 미션과 연계하여, ‘사신의 낫’ 특성이 등급 상향됩니다]
[사신의 낫 특성, 등급 상향]
[사신의 낫 등급이 A등급으로 상향됩니다]
[예고된 죽음을 피하고 싶습니까? 아직 당신에겐 기회가 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는 순간 새로운 죽음의 저주와 싸워야 합니다]
[당신의 반경 10m 거리 이내, 24시간 카운트다운 사망자 식별 가능, 제한 조건: 없음]
그렇게 미공개됐던 업적 보상도 튀어나왔다.
뭔가 신기한 특성들이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고.
특히, 메인 미션이 나오면서 특성도 더 다양해진 것 같다.
본래, [사신의 낫(B)] 특성은 어딘지 모르게 벗어날 수 없는 족쇄 같기도 하고, 음침했는데.
그러나 [사신의 낫(A)] 특성은 뭔가 달라졌다.
‘예고된 죽음을 피하고 싶습니까?’라는 설명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으니까.
그렇듯 이것저것 업적 보상과 특성 부여 등이 끝나자, 나는 잠깐 전체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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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내가 보유한 [특전] 목록부터 확인해 봤다.
[특전]
은빛 바늘
은빛 성수(3병)
천사의 눈물
천사의 깃털
거짓 없는 입(일시 특전)
근데 그러고 보니, [거짓 없는 입] 특전도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
앞서, 다음 미션에 [특전] 사용을 넘겼던 건데, 이게 아직도 유효하다.
이것도 꽤 재밌는 능력이 될 것 같은데···.
[특전: 거짓 없는 입]
[대상자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그리고 다음으로 [전용 특성]도 확인해 봤다.
[전용 특성]
혼미(B)
갈렌의 나이프(B)
이격 블레이딩(C)
예술자의 손(B)
사신의 낫(A)
베살리우스의 눈(A)
검은 고양이(C)
춤추는 메스(B)
수처 마스터(C)
은밀한 수술자(A) (일시 특성)
근데 생각보다 [전용 특성] 숫자가 많아진 상태다.
그렇게 확인을 마친 뒤, 개인 사물함으로 쓰는 한쪽 철제 캐비닛을 열었고.
그 안에 그 가방을 집어넣고 즉시 자물쇠를 채웠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서, 나는 천천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본관 쪽으로 걸으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들었는데.
사실, 이번 미션의 일시 개방 특성은 2001년 11월 18일부터 2001년 11월 23일까지 유효하므로, 새 미션의 시작도 아마 그 시점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 여유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잠시 뒤.
나는 흉부외과 스테이션에 비로소 도착했다.
<61>
“송구합니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심정이지만 국민 여러분께 거듭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아들의 잘못된 언행과 행위로 인하여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미 독립한 자식, 허나 아들이 저지른 죄 역시 아비된 자로서 그 책임을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 역시 깊이 무릎을 꿇고,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합니다.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서 저 고상중!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저의 부덕의 소치이자, 저의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국민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2001년 11월 10일 토요일 아침 10시.
한성화학 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이틀 뒤,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고상중 의원은 그렇게 기자회견을 열었다.
검은 넥타이에 정장 차림인 고상중 의원.
그는 심각한 표정을 하면서 거듭 90도로 머리를 숙였고.
자신의 개인 소견 발표를 계속 이어갔다.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과 유가족 분들에 대해선, 직접 찾아뵙고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또한, 아들의 죄과는 오로지 엄정한 법에 따라 처리될 것임을 저는 약속드립니다! 다만, 자신의 과오로 인해··· 이제 뇌사 판정을 앞두고 있는 저의 못난 아들··· 그 못난 아들이 앞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칠 기회가 없을까 봐, 그것이 무척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죄송합니다. 국민 여러분! 아비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죄송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진행된 고상중 의원의 발표가 끝났고.
기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며 질문들을 던졌다.
“의원님! 뇌사 판정을 앞뒀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입니까?”
“의원님! 그럼 의원님은 고태진 대표의 범행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까?”
“의원님! 이번 한성화학 사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고태진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 그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까?”
특히, 이 기자회견을 통해 고상중 의원의 차남 [한성클린] 고태진 대표가 뇌사 판정을 앞둔 식물인간 상태라는 게 알려지자.
주요 방송국 외에도 각 신문사의 기자들은 더 열띠게 취재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날, 그의 기자회견 소식은 각 지상파 방송국 뉴스를 통해 퍼져나갔는데.
거의 TV를 틀 때마다 고상중 의원의 기자회견 모습이 나왔고.
머리를 깊이 숙이는 고상중 의원의 모습은 전국적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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