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리는 권좌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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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검사님, 좀 전, 뉴스 보셨습니까?”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 검사실.
젊은 검사 김덕규.
그는 수북이 쌓여 있는 사건 서류들을 검토하다가 휙! 고개를 들었다.
무척 피로해 보이는 그의 두 눈.
그러나 이때, 그의 눈에선 아주 날카로운 기운이 번득였다.
“개새끼!”
그리고 이때 갑자기 들려온 욕설.
뭔가 말을 이으려던 강용호 계장은 깜짝 놀라며 움찔했고, 놀란 눈으로 김덕규 검사를 쳐다봤다.
검찰 특수부다운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검사실에서, 그럼에도 잘 웃는 모습이던 젊은 김덕규 검사.
그러나 그는 아내와 장모가 사고로 크게 다친 뒤, 입가엔 웃음기가 싹 사라진 상태다.
복중 태아는 남자아이. 그러나 결국 사산되었고.
그 충격에서 아직 그는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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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계장님! 잠시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이 서류 좀, 다시 본 뒤에 정리 좀 해주세요.”
그러고는 바로 일어서는 김덕규 검사.
그는 목에 넥타이를 대충 맸고, 그러고는 바로 검사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특수2부 부장검사실로 곧장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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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대체 왜 고상중 의원 사건! 저희 특수부에서 맡지 않습니까!!”
“고상중 의원 사건입니다!!”
“부장님! 부장-님!!”
특수2부 부장검사실.
젊은 김덕규 검사의 목소리가 유난히 거칠게 울리고 있었고.
한편, 인상을 팍 쓰며 쳐다보던 짧은 머리의 최도훈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잠시 김덕규 검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일개 신임 검사 주제에 감히 부장검사실에서 저렇듯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일까.
한국대 법대 출신, 사법고시 차석, 사법연수원에서 수석까지 차지한 똘똘한 놈.
그래서 이곳 특수부로 바로 데려온 것인데.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벌써 똘끼를 드러내는 것 같아, 갈수록 우려가 생기는 게 사실이다.
저러다가 물불 가리지 않은 악바리 독종 검사 성향이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부장검사인 자신이 더 피곤해지는 게 사실이다.
“김 프로! 그 사건, 박충식 지검장님이 만지고 있어. 몰라?”
“하지만 부장님! 유력 정치인과 대기업이 연관된 사건입니다! 고태진 대표는 지금껏···.”
“야! 너 안타까운 건 다 아는데, 아까 뉴스 봤지? 확실히 냄새가 나! 한데 함부로 못 건드려.”
“부장님, 저라도 하겠습니다! 부장님!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야! 야! 쫌 조용히 좀 해! 아까 박충식 지검장 전화 받았어. 수원지검에서 지금 고상중 의원 쪽도 쭉 캐고 있는 것 같은데, 너도 알잖아! 이번 사건의 본질이 뭔지? 폐기물관리법과 수질환경보전법 위반, 업무상 과실치사가 먼저야. 아직은 특수부 소관이 아냐!”
“그래도 조용히 내사를 시작하는 건, 그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최도훈 부장은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수원지검에서 하는 거 보고, 그때 가서 판단하자! 우리 쪽에서도 한성화학 본사 뒤진 게 있으니까 그거 까서 나올 때까진 좀 기다려. 아까 안 봤어? 고상중 의원, 졸라 운 좋은 새끼인 거? 아들 새끼가 그리되면 동정 여론이 분명히 생길 거야. 지저분한 꼬리가 잘렸으니까, 아들을 잃게 돼도 정치 생명은 유지될 거고. 고상중 그 새끼, 졸라 운 좋은 거야.”
오랜 검찰 생활을 해 온 최도훈 부장검사.
그는 뉴스에서 보도된 고상중 의원의 일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만큼 고상중 의원이 운이 좋다는 평가다.
그러나 김덕규 검사는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두 눈은 이글이글 불탈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덕규 검사로선 달리 방법이 없다.
“좀만 더 기다려! 나도 내 밑에 있는 새끼, 징징 우는 꼴 절대 보기 싫으니까. 어깨 좀 펴! 니가 내 밑에 들어온 순간, 내 식구야! 우선은 기다려! 지금은 기다릴 때야!”
찰나, 날카로운 눈매를 번득이던 최도훈 부장검사.
그는 그렇게 김덕규 검사를 위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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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바로 그 시각, 김윤상 국회의원실!
“···의원님, 이거 어떻게 할까요? 일이 좀 난감하게 됐습니다.”
늦가을, 차가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토요일. 이날, 고상중 의원의 기자회견 사건이 터졌다.
그 때문에 박충식 수원지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 김윤상 의원은 어느새 표정이 굳어지고 있다.
고상중 의원이 뭔가 준비를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사실, 전격적으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한 뒤.
곧바로 고상중 의원을 치기로 했던 전략.
그런데 그 전략의 핵심은 바로 고태진 대표의 구속영장 발부에서 시작된다.
비록 고상중 의원 측에서 적극적으로 법원 로비를 펼쳤고, 구속영장 기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지만.
그럼에도 김윤상 의원은 자신이 있었다.
법조계 쪽은 어쨌든 자신이 더 유리하기 때문.
그런데 구속영장 기각이라는 불발이 터지고 말았다.
수술 직후, 고태진의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고.
갑자기 고태진이 식물인간 상태로 변해 버렸다.
보통, 식물인간 상태는 대뇌 기능 쪽만 정지된 거라 스스로 호흡은 가능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런데 향후 뇌사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즉, 뇌사 상태는 모든 뇌의 기능이 손상되어 환자 스스로 자발적인 호흡조차 불가능한 상태를 이야기한다.
그렇게 된다면, 구속영장 발부가 문제가 아니라 공소권 유지조차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고상중 의원에겐 아주 유리한 상황.
비록 그가 차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고상중 의원은 정치적으로 소생할 활로가 되찾은 거나 다름없다.
“이봐. 증거는 충분하지 않나?”
심각해진 김윤상 의원. 목소리가 약간 거칠어진다.
그런데 이때 바로 들려오는 박충식 지검장의 목소리.
“난감합니다! 의원님! 한성그룹 측에서 나온 자금은 한성화학으로 넘어갔고, 다시 한성클린을 통해 세탁된 뒤 고태진 대표를 통해 고상중 의원한테 전달됐습니다. 한성클린에서 분식회계를 통해 빠져나온 자금들은 모두 현금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고태진의 역할이 무척 큽니다. 고상중 의원의 정치자금 수수 건은 무조건 고태진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중장부를 비롯하여 몇 가지 증거는 확보했으나 문제는 이후 현금흐름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현금 흐름을 잘 알고 있는 고태진.
그가 그렇게 된 것이다.
“박 지검장! 고상중 의원 자택과 국회의원실, 압수수색하는 건 어떤가? 고태진 건도 있으니까 가능할 텐데? 고상중 의원이 기자회견도 했겠다, 바로 밀고 들어가는 건 어때?”
“아! 그렇지 않아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현직 국회의원 신분이라 쉽진 않습니다. 흐음, 그래도 어떡하든 영장을 받아낼 작정입니다.”
“박 지검장! 지금이 기회야! 이 기회를 놓치면 역공을 당할 수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럼 한성그룹 쪽은 어떤가?”
“조만간 사건을 분리, 이첩해서 일부는 서울지검 특수부로 넘길 생각입니다. 고상중 의원이 혹시라도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더라도, 한성그룹만큼은 반드시 피범벅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제 직속 후배인 최도훈 부장검사가 그런 일엔 아주 제격입니다.”
“최도훈 부장검사? 흠, 저번에 봤던 그 짧은 머리 능구렁이?”
“네. 실력도 좋고, 칼잡이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으음, 어쨌든 나는 박 지검장만 믿을 테니, 이번엔 절대 놓쳐선 안 돼!”
그러고는 김윤상 의원은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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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 어떻습니까?”
바로 앞, 소파에 앉아 있던 강제철 실장.
어느덧 백발이 다 된 그는 표정이 잔뜩 굳은 김윤상 의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때, 입을 꽉 다문 채 생각에 잠기던 김윤상 의원.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었다.
“강 실장님.”
“네.”
“정민이한테선 다시 연락이 왔어요?”
“아닙니다. 아직 따로 연락받은 건 없습니다.”
“저번에 그 서류는?”
“네, 직접 전달했습니다.”
“음, 그건 잘 됐고···. 강 실장님, 늦기 전에 일 하나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고는 강제철 실장의 눈을 바라보는 김윤상 의원. 얇게 뜬 그의 눈매는 약간 일그러져 있고, 그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눈빛을 발견한 강제철 실장은 이내 무척 신중해진다.
“강 실장님, 오늘 밤에 조용히 한태산 회장을 만나고 오세요. 듣기론 의식을 차렸다고 하더군요. 그 늙은이, 나한테 뭔가 할 이야기들이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의원님.”
즉시 지시를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이던 강제철 실장.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들었다.
“근데 의원님.”
이때, 김윤상 의원이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강제철 실장은 심각한 표정을 하면서 말했다.
“한태산 회장의 자식들이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더 늦기 전에, 도련님 주변 정리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 정리?”
“네, 도련님께선 저번에 한유나 양을 노리던 칼잡이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다신, 성국대 병원에서 그들이 활개치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경고해야 합니다.”
“흠.”
잠시 생각하던 김윤상 의원.
그러고는 다시 눈매가 얇아졌다.
“할 수 없겠군.”
“······.”
“강 실장님, 그 밑에 있는 박 사장··· 그 애들이 좀 거칠다고 했죠?”
그러자 강제철 실장의 두 눈에선 선명한 기운이 나타났다.
“네. 그렇습니다. 저도 잘 아는 아이들인데, 그쪽 라인에서 꽤 이름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럼······ 그 일은 강 실장님이 알아서 하시고, 그 칼잡이들도 좀 찾으라고 하세요. 한태산 회장과 딜을 할 때 아주 요긴하게 쓸 카드가 될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국정원 윤 국장한테 미리 부탁해둘까요?”
“아! 아닙니다. 의원님. 아직은 아닙니다. 제 손에서 우선, 해결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김윤상 의원.
김윤상 의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복잡했다.
갑자기 아들이 전화를 줬고, 그때 정적을 처단한 방책을 얻었다.
그런데 역시 인간이 벌이는 일에는 언제나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고태진이 그렇게 될 줄이야.
그 바람에 일이 한층 꼬이고 있다.
하지만 변수도 충분하다.
계속 자신의 아들이 변수가 되고 있으니까.
‘신라그룹이라···.’
절대 만만치 않은 한태산 회장.
그러나 만약 자신이 한태산 회장과 손을 잡게 된다면, 또 다른 활로가 열릴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한태산 회장은 현재 뜻밖의 암초를 만난 상태다.
건강 문제 등등.
그래서 과거와 다르게 자신이 내민 손을 잡아줄 가능성도 더 커져 버렸다.
특히, 이번 일만 잘 끝난다면, 이제 자신은 확실히 당권을 장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라그룹이라는 든든한 지원까지 받게 될지도 모르고···.
“의원님, 30분 뒤 의원총회가 있고. 이후 국세청장과의 미팅이 있습니다.”
“······.”
“내일 저녁엔 주한 미국대사관 관저, 저녁 만찬이 있고. 피터 맥도웰 장관이 참석한다는 전언입니다···.”
한편, 김윤상 의원은 강제철 실장의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바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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