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신경외과 01
<62>
“선생님, 감사합니다.”
깔끔한 외투에 잘 생긴 훈남의 모습.
박윤후 교수의 집도하에 수술을 받았던 최수호 환자다.
수술을 받은 지도 어느덧 한 달가량의 시간이 지났고.
수술 직후 RICU(호흡기계 중환자실)에 있다가 1인실로 옮긴 그는 차근차근 건강을 회복한 뒤 퇴원했다.
그리고 한참 소식이 없다가.
오늘 흉부외과 병동을 다시 찾아준 것이다.
급성 폐동맥 혈전 색전증(acute severe PTE)으로 생사의 고비가 있었던 사람.
그러나 그런 사람답지 않게 그는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고.
함께 나타난 동생 최수진 역시 표정이 무척 밝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생글 웃는 그녀.
예전에 나한테 맛있는 브런치 카페를 소개해주겠다고 하던 그녀.
그런데 그때 이후 시간은 꽤 지나버렸고.
그 시간 탓에 약간 어색함도 생겨나 버렸다.
근데 그 이후 왜 연락이 없었지?
당시 나한테 뭔가 관심이 있었던 표정이었는데.
그러다가 나는 아차! 싶었다.
지금 날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무척 담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내 나는 그 생각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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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 아직도 많이 바쁘시죠? 박윤후 교수님을 통해 간간이 이야긴 들었습니다. 교수님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으시다면서요?”
“제가요? 아, 아닙니다.”
나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때, 입가에 미소를 짓는 그녀는 두 눈을 더욱 반짝이고 있었고.
그녀가 한 발 앞으로 다가오며 뭔가를 내밀자.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상큼한 향수 향은 더 진하게 내 코에 와 닿았다.
“이거 작은 선물인데 받아주시겠어요? 오빠랑 저랑 같이 고른 겁니다.”
최수진은 오빠 최수호를 쳐다봤고.
이때 최수호도 입을 열었다.
“박윤후 교수님한테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과한 게 절대 아니니까, 꼭 받아주십시오.”
그러면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최수호.
무척 예의 바르고 진심어린 모습이라.
하는 수 없이 선물이 들어있는 백화점 종이백을 건네받았다.
“선생님, 그럼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웃으며 최수호는 다시 머리를 숙였고.
내가 바로 맞인사를 하자, 최수진도 인사했다.
“선생님, 담에 또 뵙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간단히 말했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나한테 뭔가 말을 할 듯 말듯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입을 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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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아직도 비가 그치지 않은 병원 밖, 바깥 모습.
그 모습을 나는 병동 창문을 통해 잠시 쳐다보다가.
터벅터벅 걸어 의국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선물을 열어봤다.
“누가 준 거야? 선물 맞지?”
순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와 인기척.
바로 고개를 돌리자, 수술 모자까지 쓴 상태로 방지현이 나타났다.
그녀는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순간, 약한 땀 냄새가 풍겼으나 이내 희미해지며 코끝에서 사라진다.
“좀 전에 최수호 환자, 아니 최수호씨가 다녀갔어. 음료수랑 빵도 사 왔고···.”
“아! 그··· RICU(호흡기계 중환자실)에 있던 환자?”
“기억하네. 그 최수호씨! 그새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 보기도 좋고, 표정도 밝고. 이것도 줬어.”
나는 은은하게 반짝이는 포장지를 잠시 만지다가 곧이어 단숨에 벗겨냈다.
그리고 열어보자 그 안에는 수입 초콜릿들과 아주 우아한 작은 펜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특히, 금빛 같으나 은은한 황동 빛의 작은 볼펜!
어딘지 모르게 우아하기로 하고.
또한, 아주 간편해 보이기도 한다.
“저 제품, 나도 아는데.”
잠시 호기심을 보이던 방지현.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떼고서 수술 모자를 벗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슬쩍 쳐다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수술 잘 끝났어?”
“대충.”
“문제는 없었고?”
“그렇긴 한데, 최현호 교수님이···.”
“왜 무슨 일 있어?”
“좀 이상해. 아직 컨디션이 안 돌아왔나 봐.”
내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방지현은 좀 더 설명했다.
“836호 환자(고태진), 식물인간 되고 나서 젤 충격받으신 게 최현호 교수님일걸.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시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인상을 팍 쓰게 되었다.
하필, 고태진을 수술했던 사람이 바로 최현호 교수다.
다만, 내가 시스템을 통해 알게 된 건, 당시에 침입자가 있다고 했고.
고태진이 저렇게 된 건, 최현호 교수의 수술 잘못이 아니라 누군가가 고태진을 저렇게 만든 거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귀신같이 그 침입자는 사라졌고.
직접적인 증거 역시 남겨진 게 하나도 없다.
혹시나 해서 병원에선 고태진의 혈액을 뽑아 검사까지 했으나 특별한 뭔가를 찾아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당시 현장에서 무언가 수상쩍은 사람들을 발견한 것도 아니고.
다만, 보안팀에 연락을 넣어 흉부외과 중환자실 복도 쪽 CCTV를 좀 더 세세히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특이 사항이 없다는 그런 단순한 메시지만 날아왔다.
근데 방지현의 말을 듣고 보니 이걸 그냥 내버려 둘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땐 내가 현장에 없었고, 그래서 제삼자가 된 터라, 직접적으로 나서는 건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
그래서 나는 그 일을 직접 확인하는데 시간을 조금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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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아, 우리 저녁 식사, 몇 시에 하기로 했지?”
“8시? 아마 8시가 맞을 거야.”
나는 즉시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한 뒤, 황동빛 볼펜을 내 의사 가운 가슴주머니 쪽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의국 밖으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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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나는 직접 보안팀 사무실에 들러 그날 CCTV 영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결국, 직접 보는 게 훨씬 더 깔끔하니까.
그러고는 2배속 내지 36배속 등으로 녹화본을 빠르게 감아서 봤고.
쉴 새 없이 이상 상황을 확인했으나 역시 별다른 게 없다.
그저 몇몇 수상쩍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긴 했으나.
하나같이 아주 평범한 옷차림에 평범한 모습들이다.
특히, 선물용 음료수 상자 하나를 들고서 기웃거리다가 중환자실에 잠시 들어갔다가 나온 남자.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기 무섭게, 바로 걸어 나왔기 때문에 뭔가 일을 했다고 추정하기도 힘들다.
단순히 실수로 거기 들어갔다가 나온 그런 모양새이기 때문.
그렇다면 저 사람도 아닐 테고.
과연 대체 누굴까.
어렵네. 어려워.
결국, 머리만 긁적이다가, 다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러다간 늦겠다!
그래서 황급히 그곳에서 나왔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잠시 후 6층 신경외과(NS) 병동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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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로부터 잠시 뒤.
신경외과 스테이션을 지나, 중환자실 복도 쪽으로 접어드는 순간.
이때, 저 멀리서 유난히 빠르게 뛰어오는 한 인영이 눈에 띄었다.
병동에서 저렇듯 바삐 뛰어가는 사람을 보게 되면, 누구든 당연히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인영은 무척 급한 듯 정신없이 뛰어오고 있었고.
그 바람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병동에선 의사나 간호사는 응급 사태가 아니고선 절대 뛰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그걸 바라보는 환자들이 더 불안해지기 때문.
그러나 그 인영은 그런 것에 상관없다는 듯 무척 바쁜 모습이었고.
이때, 그 인영이 무척 낯익어 계속 쳐다보던 중.
나도 모르게 이내 작은 탄성이 튀어나오게 됐다.
수술복 차림에 수술 모자를 꾹 눌러쓴 모습.
특히, 수술 마스크 위로 보이는 짙은 눈썹과 선명한 눈동자.
그 순간, 나는 바로 누군지 기억해냈다.
“하영아! 박하영!”
곧장 날 지나치던 중, 깜짝 놀라며 멈춰서 뒤돌아보는 그녀.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의대 동기.
다행히 그 이름이 생각났고.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던 거다.
순간, 박하영의 두 눈이 약간 커진다.
“너 살아 있었어?”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뜻밖의 말에 나는 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바로 대꾸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살아 있다니?”
“우리··· 언제 서로 얼굴 본 지 기억은 나?”
그러고 보면, 그녀와 턴이 다르다 보니 서로 얼굴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극악한 환경의 흉부외과에서 턴을 하고 있다 보니 더 시간이 없는 상태다.
“지금 어디?”
“흉부외과.”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중환자실 최문영 환자, 확인 좀 하려고.”
“최문영? 그 TA 환자?”
“너도 아네?”
“알지. 어제 얼마나 심각했는데.”
박하영의 그 말에 나는 의아해져 빤히 쳐다봤고.
그녀는 새카만 눈썹을 꿈틀거리며 좀 더 설명했다.
“어젯밤에 의식 회복하고 나서 한바탕 난리 났어. 충격이 무척 컸나 봐. 하긴, 태아가 그렇게 됐으니 마음이 오죽 아프겠어. 보는 내가 눈물 나더라.”
“그럼··· 지금은 어때?”
“일부러 수면 상태 유지하고 있어. 그게 더 낫다고 판단돼서.”
순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근데 넌 왜 그렇게 뛰어다녀?”
잠시 후, 좀 전의 모습이 의아해서 그렇게 묻자, 바로 인상을 찡그리는 그녀.
“바쁘니까! 넌 모르겠지만··· 여기 분위기 지금 최악이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고 보면 앞선 10월에 신경외과 인턴이었던 박유리도 그런 말을 슬쩍 흘렸다.
대체 다들 왜 저러지?
무슨 사정이 있는 걸까.
신경외과 치프 윤정화 선배, 그리고 신경외과 레지던트 2년차 이소정 선배도 뭔가 이상하긴 했는데.
“아니, 담에! 담에 이야기하자. 얼굴 봐서 좋긴 한데, 나 지금 바빠!”
그러고는 얼른 움직이는 그녀.
이때, 나는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봤는데.
아주 오래전, 의대를 다닐 때 잠시 캠퍼스 커플까지 했던 그녀.
그때 잠깐 사귄 적도 있는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걸 다시 기억하는 게 어색할 정도다.
나는 계속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내 중환자실 쪽으로 바삐 걸어갔다.
그러고 보면, 회귀하고 나서 다시 만나게 되는 대학 친구들의 모습.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기도 하지만.
오래된 추억이 되살아 나는 듯 그 오묘한 기분 탓에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게 된다.
그리고 잠시 뒤.
최문영 환자 확인을 마친 뒤 나는 곧장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왔고.
마침 스테이션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재호 선배, 방지현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게 됐다.
사실, 저번 한태산 회장의 수술 성공 덕분에 병원장 명의로 회식비 2백만 원이 내려왔고.
간호사들한테도 별도의 회식비가 지급되었다.
그래서 주말 중엔 서로 돌아가면서 회식을 하기로 한 건데.
먼저 우리 세 사람부터 병원 밖으로 나가게 된 거다.
그리고 우리는 모처럼 숯불구이 집에서 조촐한 회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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