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신경외과 02
<63>
늦은 퇴근길.
이 시각, 크고 작은 가게마다 각종 직장인들이 한데 모여 어수선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사실, 가을은 깊어지고 있었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지만.
오히려 운치가 있는 그런 느낌인 탓일까.
병원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가게.
화덕통 삼겹살 구이집에도 이 시각 사람들은 그렇게 가득 모여 있었다.
“저기 앉자.”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삼겹살 냄새가 진동한다.
바깥엔 가을비까지 내리고 있어 삼겹살을 구워 먹기엔 뭔가 분위기도 제격인 듯하다.
사실, 이럴 땐 소주에 맥주를 타서 소맥이라도 마시고 싶지만.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언제 응급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
잠시 후, 우리는 구석진 테이블, 다행히 앞선 손님들이 막 나간 터라 비어있는 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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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님, 삼겹살 6인분 하고 콜라 2병, 사이다 1병, 공깃밥 3개, 비냉 둘, 물냉 하나, 이렇게 주세요. 그리고 저희가 바빠서 그런데, 한 번에 다 갖다 주세요.”
앞선 손님의 테이블을 아주 빠르게 정리하던 40대 중반의 아주머니.
그녀가 정리를 마치자마자 방지현은 앉기 무섭게 바로 주문을 넣었는데.
우리는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고.
괜히 먹고 나서 다음 걸 시키기엔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부담스러워, 그렇게 한 번에 다 주문을 넣은 것이다.
“자, 수저 받아요.”
한편, 방지현은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티슈 한 장과 함께 빠르게 돌렸고.
그사이 나는 세 개의 물컵에 각각 물을 따랐다.
모든 게 척척.
순식간에 세팅은 완료되었다.
“근데 괜찮겠어? 이럴 땐 더 좋은 데 가서 한우 등심을 먹는 게 낫지 않아?”
팔짱을 낀 김재호 선배는 우리를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여길 택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괜히 눈치 보지 않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대학 때의 추억을 회상하는 마음도 있어 그렇게 주장한 건데.
방지현 역시 쿨하게 오케이한 터라 이곳으로 오게 된 거다.
마음씨 좋은 김재호 선배는 그저 우리의 말을 따라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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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삼겹살이 더 좋은데요.”
한편, 방지현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곧이어 콜라와 사이다가 나오자 그녀는 나한테 즉각 넘겼다.
아직 이 시대에는 음료병에 든 콜라와 사이다가 흔했고.
나는 즉시 숟가락으로 팡! 팡! 소리를 내며 음료 뚜껑을 땄다.
“역시 다들 진짜 빨라.”
김재호 선배는 씩 웃는다.
음료수 분배까지 순식간에 마친 우리.
사실, 의대에 다닐 땐 그 공부량이 엄청났다.
며칠 공부를 미뤄뒀다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놓이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빨리빨리’ 근성이 몸에 배이게 되었고.
인턴 과정 중엔 그 습관이 더욱더 몸에 익숙해진 것 같다.
잠시 후, 음식들이 잇달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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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서비스입니다.”
뚝배기에 들어있는 노오란 계란찜 그리고 얼큰한 선지국.
선심 같은 그런 서비스를 받게 되자, 다들 기분도 좋아진다.
“나왔다. 빨리 먹자.”
“네, 잘 먹겠습니다.”
치이이익!
잠시 후, 불판 위에 삼겹살을 바로 올리자, 요란한 소리가 났고.
한편으론 빠르게 우리는 숟가락을 움직였다.
계란찜을 한 움큼 떠서 먹었고.
선지국으로 해장을 하듯 연신 국물을 입으로 퍼 날랐다.
그리고 이때, 가게 문이 한 번씩 열릴 때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빗소리.
그 빗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는, 그런 풍미가 또한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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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이걸 먹으니까 소주가 참 그립기도 하네.”
어느덧 삼겹살이 노릇노릇해지자, 단숨에 쌈장에 찍어 입으로 가져가던 김재호 선배.
그는 그렇듯 아쉬운 듯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흉부외과는 특성상 술을 마시는 게 무척 어렵다.
물론, 날 잡고 회식 겸 술을 마실 수도 있겠지만.
그때도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걱정을 마시는 거나 다름없게 되고.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술을 마시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근데, 너희들 얼마 안 남았지? 전공 신청하는 거?”
이때 나는 방지현을 쳐다봤고, 방지현은 날 쳐다봤다.
“너흰 인턴 모임 했어? 다들 이야기들은 해 봤고? 어디 갈지 대충 까야 괜한 실수도 없지.”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인턴 모임이 하나둘 열리게 된다.
각 진료과를 돌며 턴을 하고 있는 인턴들.
각자 어느 전공을 택할지, 모여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고.
이때 아주 중요한 정보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특히, 인기있는 전공은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런 정보가 아주 중요하다.
그런 정보 없이 대충 원서를 냈다간 향후 상황이 무척 힘들어질 수도 있다.
피 터지는 경쟁 끝에 레지던트 선발에서 탈락하게 되면, 결국 엄한 곳으로 레지던트를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이 시기는 의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방지현, 너는 결정했나?”
구수하게 잘 구워진 삼겹살.
그걸 상추 위에 올려놓고, 잘 익은 김치, 마늘, 쌈장을 넣고 쌈을 싼 뒤, 곧장 입에 넣던 김재호 선배.
그는 그렇게 물었고.
한편, 양쪽 볼이 부풀어 오른 채 정신없이 먹던 방지현은 이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즉시 티슈로 입 주변을 닦았고, 잠시 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는······.”
한편,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씩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뻔하지 뭐!
CS, 흉부외과!
그녀는 무조건 흉부외과를 택할 것이다.
지금 인턴 상태인 그녀는 갈수록 빛이 날 거고.
나중에 성국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가 될 것이다.
비록 불운하게도 원인 미상의 심장마비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되겠지만.
그런데 바로 그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정말 날벼락 같은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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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로 갈 생각입니다.”
“어? 산부인과?”
흠칫하는 김재호 선배.
그런데 그 순간, 정작 내가 더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집고 있던 삼겹살마저 놓치고 말았는데.
“넌 흉부외과잖아!!”
순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힐끔 날 쳐다보는 방지현.
이때,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비전이 안 보이잖아.”
“비전? 대체 그게 뭔데?”
“너 흉부외과 갈 거 맞지?”
그 순간, 나는 잠시 멍해졌는데.
도대체 내가 흉부외과 가는 거랑 자신의 비전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곧이어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지현은 훗날 이곳 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회귀 전의 나는 성국대 병원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러고 보면, 같은 병원, 같은 동기에서 두 명의 교수가 나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그걸 이야기하는 거였다.
과거, 방지현과 나는 나란히 흉부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지만.
비록 서로 돕는 사이이긴 해도 은근히 서로 경쟁자 관계였다.
좀 더 편한 진료과에 가겠다며 피부과를 택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하고 끝내 일반외과를 택했던 이동욱.
그 녀석은 어쩔 수 없이 일반외과를 택하게 됐지만.
그런데 과거의 경쟁자였던 방지현은 처음부터 산부인과를 가겠다고 한다.
그게 나 때문이라고?
나 때문에 비전이 없다고?
휴우.
순간, 나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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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산부인과로 결정한 거야?”
“네. 아기 출산하는 거나 부인병 치료하는 것,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산부인과도 메이저 진료과잖아요.”
김재호 선배는 방지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방지현을 쳐다봤다.
그녀는 과연 앞으로 대한민국 출생률이 극악할 정도로 줄어든다는 걸 알기나 할까.
물론, 산부인과 의사가 꼭 출산만을 책임지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산부인과 여자 의사라면 부인병에 특화되어 나름 인기를 끌 수도 있다.
물론, 산부인과 남자 의사는 갈수록 기피 대상이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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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갑자기 변수가 생긴 거다.
가장 중요한 것.
바로 방지현의 생명과 관련해서.
대체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듯 뭔가가 확 바뀌게 된다면, 그녀의 인생도 완전히 바뀌게 될 텐데.
그래서 모든 게 알쏭달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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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그럼 너는 결정했어?”
그리고 잠시 뒤.
김재호 선배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나한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방지현 역시 날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내가 어떤 결정을 하는지 무척 궁금한 표정이다.
당연히 나는 흉부외과를 택할 생각이었고, 그 외의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갑자기 ‘방지현’이라는 변수가 내 눈앞에 나타났고.
그건 회귀 이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런 변수이기도 했다.
특히, 방지현의 강렬한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자, 뭔가 쌔한 느낌이 내 몸을 휘감았는데.
설마 내가 그녀의 간절한 꿈을 망가뜨린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문득 들었다.
또한, 그녀가 향후 산부인과 전공을 택하게 된다면, 과연 그녀는 (회귀 전) 죽음의 숙명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도 불쑥 들었다.
사실, 내가 아는 사신의 특성.
[사신의 낫 B등급]
[예고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죽음을 회피하는 순간 새로운 죽음의 저주가 주어집니다]
그렇듯 인간의 생사는 절대 단순하지가 않다.
알 수 없는 엄격한 룰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았고.
그 숙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용기로선 쉽지 않다는 것도 대략 깨닫게 되었다.
[사신의 낫 A등급]
[예고된 죽음을 피하고 싶습니까? 아직 당신에겐 기회가 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는 순간 새로운 죽음의 저주와 싸워야 합니다]
그렇듯 진정 강력한 용기가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그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문제는 모든 게 이상해졌다.
특히, 내가 어느 시점에서 그녀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을지 그것도 흐릿해지는 것 같았고···.
물론,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이고 운명이다.
내가 그저 외면하면 될 일이고.
그냥 모른 척하면 지나갈 일들이다.
그런데도 얄궂게 나는 절대 그런 놈이 아니었다.
내가 잘 났다며 속으로 자찬하면서도,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넘어지는 꼴을 도무지 쳐다볼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토록 증오했지만.
그 영정 사진을 보면서 끝내 울지 않았음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선 이미 미친 듯이 울고 있었다.
억지로 그 감정을 이겨내려고 이를 악물며 노력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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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결정 못 했습니다.”
“어? 진짜?”
이때, 김재호 선배보다 먼저 방지현이 그렇게 되묻었다.
내 대답에 그녀는 무척 의아해하는 눈빛이다.
이미 나는 흉부외과 교수님들한테 눈도장도 받았고, 신뢰를 한 몸에 안고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닌가.
그러니 아직 내가 결정을 못 했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특히, 교수님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건, 다른 곳도 아닌 이곳 흉부외과에서 교수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성국대 병원 흉부외과 교수 자리다!
그 타이틀이 갖는 무게감도 상당한데.
그래서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그런 반응이었다.
사실, 개업해서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의대 교수는 그 나름의 큰 명예를 갖게 된다.
비록 아주 잘나가는 성형의과 개업의들에 비하면 연봉 수준이 한참 낮지만.
그렇다고 그 수준이 꼭 나쁘지도 않다.
대학교수 월급 외에도 각종 수당이 잡히게 되고.
때로는 국가연구과제를 수주하거나 제약회사와 연계하여 각종 용역사업을 할당받을 수도 있다.
특히, 민간회사의 용역과제 프로젝트비는 그 내역 중에 합법적으로 교수 인건비가 책정될 수도 있고.
그런 인건비는 마치 보너스와도 같이 교수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게 된다.
어떤 교수는 이런 프로젝트비로 교수 월급을 제외하고도 매년 수억 원의 추가 수익을 낼 수도 있다.
거기다가 평생 안정적인 면도 있겠고.
노후를 대비해서 사학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가장 큰 것은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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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그때부터 때아닌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뭐든 방향이 틀어지게 되면 수많은 무질서 속에서 수많은 변수가 생겨나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런데 그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순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보니 나로선 무척 난감하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엄한 곳에서.
방지현은 젊은 나이에 죽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삼겹살을 먹으면서.
김재호 선배가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꺼냈지만.
그때부턴 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물론, 아직 결정하기까진 시간이 남아 있다.
과연 방지현을 산부인과로 보내는 게 맞을까.
아니면 친구 방지현을 위해 차라리 내가 다른 과를 택해, 그녀한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게 맞을까.
무척 고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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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로부터 대략 30분 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병원에 도착했다.
몸과 옷에 삼겹살 냄새가 배여 있어 재빨리 숙소에 들러, 초간단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었고.
그 뒤, 늦지 않게 흉부외과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한편, 그사이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는 어느새 조용히 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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