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신경외과 03
<64>
쿠르르릉! 콰앙!
11월 13일 화요일 새벽.
간밤에 요란하게 번개가 치더니 다시 우수수 비가 쏟아지고 있다.
겨울이 다가옴을 알리는지 이번 장대비에 단풍은 모조리 쓸려나갈 듯하다.
새벽, 의국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이 들었다가.
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왜냐하면, 아주 조용한 듯 규칙적으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귀에 성가신 소리가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다.
현재, 의국은 대부분 불을 꺼둔 상태이고 데스크 스탠드 하나만 켜 둔 상태다.
그래서 칠흑같이 어둡진 않다.
그럼에도 찡그린 채 고개를 돌리다가, 갑자기 차디찬 냉기가 척추를 타고서 빠르게 올라오며 목덜미를 오싹하게 했다.
순간, 쿠당당! 소리를 내며 나는 뒷걸음질 쳤다.
내가 앉아 있던 의자가 옆으로 넘어졌는데.
그사이 황급히 일어선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 옆에서 훌쩍이고 있는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물기에 젖은 산발한 머리.
내 인기척에 고개를 들다가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에이씨!
진짜 미치겠네.
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야! 방지현! 너 죽을래?”
“왜? 왜 그래?”
“너, 머리 감았어?”
“어. 간지러워서”
“왜 안 닦아? 축축하잖아?”
“닦고 있는 중이야. 이거 안 보여?”
수건 하나를 보여주는 그녀.
“그럼 왜 흐느껴?”
“비염.”
아으으.
나는 늦가을의 귀신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근데 뭐해?”
“논문 좀 읽고 있어.”
슬쩍 보니 스탠드 조명 아래, 그녀는 머리를 바짝 숙인 채 임상 논문들을 읽고 있었다.
어쭈, 쟤 갑자기 왜 저러지?
갑자기 뭔가 필이라도 받았나.
무언가 아주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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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나는 의국 밖으로 나왔다.
좀 전에 너무 놀라 잠이 싹 달아났기 때문.
현재 시각, 새벽 4시.
아마 내가 대충 새벽 2시까지 윤미연 교수님과 함께 소아 심장 이식 수술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
다만, 심장 사이즈가 좀 커서 아이의 흉부를 바로 닫을 수 없었는데.
애초에 소아한테 딱 맞는 심장을 공여받아 수술했다면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아한테 딱 맞는 심장을 공여받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마취과 의사의 이뇨제 처방 등이 계속 이어진 끝에 한참 만에 부기가 가라앉았고.
그리고 마침내 흉부를 닫고 나올 수 있었다.
그 뒤, 이런저런 뒤처리가 이어졌고.
모든 게 끝난 게 대략 새벽 3시 무렵.
장장 12시간 넘게 이어진 수술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겨우 한 시간. 딱 한 시간 잤을 뿐이다.
그래서 몸이 더 노곤하고 더 피곤한데. 사실, 연달아 자는 게 더 좋은데, 결국 방지현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근데 방지현은 대체 왜 저러나. 머리를 감았으면 빨리 말리던가.
아휴!
잠시 후, 나는 병동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살폈고.
드디어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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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선생님! 혹시 NS(신경외과)에 무슨 일 있습니까?”
모니터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나이트근무 중인 스테이션 김선화 간호사한테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저번에 우연히 만났던 의대 동기 박유리, 박하영은 공통적으로 신경외과 분위기가 무척 안 좋다고 했다.
또한, 어제 수술 준비 때 스크럽 널스로부터 이런저런 소문을 듣게 되었다.
요즘 신경외과 수술 중에 잦은 실수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내 귀에까지 들렸다는 건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는 의미.
한편, 나이트근무 중인 김선화 간호사는 날 힐끔 쳐다보더니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은 일도 아닌데, 그래도 궁금하세요?”
그러나 내가 열렬하게 쳐다보자, 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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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병원 본관 6층에 자리 잡은 신경외과.
그 전공 특수성 때문에 신경외과는 나름 인기가 있는 진료과다.
신경외과는 종합병원이 주도하는 뇌수술 외에도 로컬(동네) 병원에서도 강점이 될 수 있는 척추 치료 등도 다루고 있다.
그래서 해가 지날수록 이곳 병원의 레지던트 과정생들은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고.
현재 수술 보조 인력이 충분해져, 레지던트 3년차만 하더라도 완벽한 오프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된 실정이다.
그렇듯 탄탄하게 정상권에 접어든 신경외과.
그런데도 그곳에 생각지도 못한 갈등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
큰 불씨의 시작은 바로 신경외과 중진급 실세 한정미 교수와 박희경 교수의 반목이었다.
평생 동반자이자 경쟁자 관계였던 두 사람.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차기 신경외과 과장 직책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국내 모 제약회사에서 수백억 원을 들여 신약 개발 및 국내 임상 시험을 계획하고 있는데.
내년 하반기로 예상되는 임상 과제 수주 스케쥴을 생각한다면.
내년 3월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차기 신경외과 과장이 그 프로젝트의 총괄연구책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액의 임상 연구비는 일종의 리베이트 성격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만약 총괄연구책임자가 된다면 삽시간에 거액의 연구비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고.
대외적으로 큰 명성 외에도 학내 위치까지 급상승할 거라는 것이다.
이런 명예 외에도 거액의 회사 용역 연구비에는 상당한 떡고물(교수 인건비, 기타소득)이 섞여 있어.
그것 역시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돈과 명예가 걸린 일.
그래서 더욱 사활을 걸고서 신경외과 과장이 되려고 두 교수가 싸우고 있는데.
그 여파가 레지던트들한테도 악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또한, 교수가 은밀히 나서서 레지던트들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했다.
특히, 차기 과장이 결정되는 시기가 내년 1월 말경이어서.
내년 1월까지 신경외과 사정은 갈수록 나빠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한편, 거기까지 듣게 된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저 혀를 찰 수밖에 없다.
내가 봐도 신경외과에는 인재들이 너무 많은데, 너무 똑똑해서 그런지 다들 너무 까칠까칠하다.
싸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이소정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고.
내 인사를 일부러 못 본 척하며 걸어가던 치프 윤정화의 거만한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의대 수석졸업자, 치프 윤정화!
훗날 그녀는 성국대 신경외과 교수가 된다.
의대 차석 졸업자, 레지던트 2년차 이소정!
작은 체구의 그녀는 훗날 한국대 신경외과 교수가 된다.
레지던트 2년차 박시영!
그녀는 훗날 지방대 의대 교수가 된다.
레지던트 1년차 최상진!
그는 한국대 신경외과 교수가 되며,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하는 대단한 명의가 된다.
벌써부터 다 치열하구나.
나는 쓴 미소를 짓다가.
이럴 게 아니라 나도 논문 공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후 의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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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어떡하죠?”
무척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
마침 교수 회진이 끝난 뒤 스테이션 모니터 앞에 앉아 차팅을 하던 중, 간호사 한 명이 달려와 806호실 환자한테 문제가 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 증상 외에도 얼굴이 파랗게 변해가는 증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보호자가 놀라서 간호사를 불렀고, 간호사도 그 증상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즉시 좌우를 살펴보니, 김재호 선배 등은 좀 전에 아침을 먹으러 나간 상태다. 의국에도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없다고 한다.
순간, 이동욱이 나더러 가보라고 눈짓했고. 나는 즉시 일어섰다.
“동욱아, 김재호 선배한테 빨리 콜 날려! 최고은 선배 곧 오실 텐데, 오시면 바로 806호 좀 말씀드려!”
“알았어. 빨리 가 봐.”
잠시 후, 도착한 806호실.
어느덧 아침 기운이 가득해지는 창가 쪽 베드.
그 베드에 누워있는 환자는 경직된 상태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스스로 무척 놀란 모습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환자 보호자의 모습도 보였고.
6인실 내, 입원 환자들도 놀란 눈으로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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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이건 긴장기흉인데···.
보통, 긴장기흉(tension pneumothorax)은 폐 손상 등이 원인이 되는데, 흉강 내에 유입한 공기가 나가지 못하고 쌓이게 되고, 이때 흉강 내압이 증가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렇게 공기가 차오르게 되면 폐를 압박하게 되고. 다른 혈관들까지 압박해버린다. 저산소증 외에도 쇼크가 동반될 수도 있다.
나는 즉시 관련 증상들도 확인했다.
보통, 맥박수가 분당 100회 이상이면 빈맥이다. 일부러 신체가 움직이는 운동이나 작업 같은 경우, 맥박수는 그 이상까지 치솟을 수 있다.
그러나 저렇듯 가만히 누워있는 상태에서 맥박수가 120회까지 치솟은 건 흔히 말하는 빈맥이었다.
또한, 환자의 목 쪽, 목정맥 팽대 현상도 나타났다.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되면 메스꺼움 증상도 발생할 수 있는데, 이건 이 환자 상황과 동일했다.
청진기에서 들리는 호흡음 역시 희미해진 걸 보면, 이건 두말할 것도 없다.
천자를 해서 즉시 공기를 빼 줘야 한다.
즉, 바늘 흉관삽입술(needle thoracostomy)을 서둘러 시행할 필요가 있다.
다만, 혹시 모를 출혈 소견을 확인해야 했는데.
체내 출혈이 있을시, 함부로 흉관삽입술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바이탈 징후를 다시 확인했고 곧이어 혈액검사까지 실행하려던 중, 나는 황급히 외쳤다.
“선생님! 지금 당장 18게이즈 주사침과 주사기 좀 갖다 주세요! 김재호 선생님 오시는지 확인도 해 주시고요!”
부르르 몸을 떠는 환자.
갑자기 환자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고.
청색증은 더 심해졌다.
목정맥팽대 현상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현재의 응급상황을 무시할 수가 없다.
보통, 니들을 이용한 단순 천자 방식은 응급처치 과정 중에 흔히 쓸 수 있는 방법이었고.
좀 더 난이도가 높은 체스트 튜브(가슴관)를 지금 당장 넣을 것도 아니어서.
나는 즉각 그렇게 요청했다.
잠시 후, 나는 환자의 맨살 흉부를 가늠하며 위치를 잡았고.
“여깄습니다. 선생님.”
곧이어 간호사가 가져온 18게이즈 주사침에 10cc짜리 주사기를 부착한 뒤, 간단히 주변 소독을 하고, 늑골 2, 3번 사이 위치를 겨냥하며 주사침을 찔러넣었다.
단 한 번!
정확하게 쏙 밀어 넣었고.
잠깐 기다리자, 스르륵 하며 공기가 새어 나왔다.
그 직후, 삽시간에 상태가 호전되었다.
점점 의식을 잃어가던 환자도 눈을 깜빡이며 날 쳐다본다.
환자 보호자 역시 그제야 안도해 하는 표정.
물론, 이건 단순한 응급처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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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박광수.
나이, 만 47세.
폐암 환자다.
그는 폐암 수술을 앞두고서 입원한 환자였는데. 그는 평생 지독한 골초였다고 한다.
알콜 의존증까지 가지고 있어 간간이 금단 현상도 발생하는데.
특히 어젯밤 간호사들은 무척 피곤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보호자인 와이프가 무척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 그 와이프 때문이라도 간호사들은 어쩔 수 없이 환자한테 좀 더 신경을 써 준다고 한다.
실제, 그의 와이프는 응급처치가 끝나자마자 나한테 90도로 머리를 숙였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잠시만요.”
그리고 그녀는 서둘러 공용 냉장고 쪽으로 뛰어갔고, 음료수 하나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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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부외과? 일반외과? 신경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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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잘 팔리고 있는 비타500.
아주 시원하게 냉장고에 있던 그걸 꺼내서 나한테 건넸고.
내가 바로 사양하자, 그녀는 끝끝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아,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서둘러 검사 몇 개도 바로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근데, 보호자님! 수술날짜가···.”
나는 이 환자의 주치의가 아니다. 그래서 모든 정보를 다 알 수가 없다. 이때, 그 와이프가 즉시 말했다.
“오늘 오후에 2차 수술이 있습니다···.”
아, 그렇지.
보통, 수술을 위해 입원한 환자는 대체로 다음 날 수술이 진행된다. 특히, 폐암 환자이기 때문에 홍진훈 교수님 환자인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전에 모든 검사가 끝날 거고, 이후 모든 조처가 다 취해질 겁니다. 잠시만요.”
이때, 806실에 나타난 김재호 선배.
나는 즉시 다가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김재호 선배는 한번 환자한테 다가가 환자의 상태를 보더니 바로 나한테 눈짓하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잠시만요.”
그러고는 우리는 입원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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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마! 혼자서 잘 할 거면서 왜 콜을 날려? 앞으로 이런 거 콜 날리지 말고 혼자서 해.”
이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아직 인턴인데요?”
그러니 뭐든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눈치를 봐야 한다.
그러나 김재호 선배는 피식 웃는다.
“야! 니가 무슨 그냥 인턴이냐? 퍼스트 어시 자격, 그런 거 쉽게 얻지 못해. 알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네가 뛰어나니까 바로바로 습득해서 좋다만, 우리 흉부외과의 복잡한 사정상, 너 같은 괴물이 또 나올까봐 난 솔직히 두려워.”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인간은 다신 안 나올 겁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참! 너도 좀 있다가 수술 들어가지?”
“네.”
“저 환자는 내가 맡을 테니까, 너도 얼른 내려가서 아침이나 먹어. 오늘 수술 스케쥴 졸라 빡빡한 거 알지. 지금 안 먹으면 한 끼도 못 먹을 수 있어. 빨리 가! 빨리!”
김재호 선배는 손짓하며 어서 식사하러 가라고 했고.
나는 인사한 뒤 재빨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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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빨리 가자. 김재호 선배님이 아침 먹고 오라는데.”
“지현이는?”
“지현이도 곧 온대.”
잠시 후, 우리는 8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기다렸고.
방지현도 곧 나타났다.
정말 모처럼 우리는 함께 식사하러 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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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우리는 즉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때, 이동욱과 방지현은 누군가를 보고서 움찔했고, 그들은 즉시 누군가에게 목 인사를 했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쪽. 유난히 목이 뻣뻣한, 수술복 차림에 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서 있는데.
그는 우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우리 의사 명찰을 보고서 이내 눈살을 조금 찌푸렸고.
거의 1도 각도로 머리를 끄덕였다.
거의 고개를 안 움직였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지하 1층까지 쭉 내려갔다.
띵!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는 가장 먼저 나갔고,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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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지? 저 사람?”
방지현이 먼저 입을 열고 수군거렸다.
“일반외과, 새로 오신 교수님!”
방지현의 그 말에 이동욱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도 들었어. 근데, 성격 안 좋다고 벌써 간호사 쌤들 사이에서 소문이 파다하던데.”
젊은 교수가 성격이 안 좋다고?
“소문이 안 좋아? 얼마나 안 좋은데?”
내가 그렇게 묻자 이동욱이 대답했다.
“부임하자마자 젤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 애꿎은 인턴들부터 잡고, 생난리 블루스를 쳤다잖아.”
“인턴들부터?”
“알잖아. 우리가 가장 만만한 거. 우린 찍소리도 못하잖아.”
“대체 어떻게 했길래?”
“간단해. 애들 말로는, 간호사들 하던 일까지 다 시켰고. 며칠 밤을 못 자게 했대. 그게 어디 교수냐? 아직도 레지던트 때 근성을 못 버린 거지. 일반외과가 인기과도 아닌데, 그런 사람을 왜 교수로 뽑았대?”
그 말인즉슨, 일반외과 사정도 좋지 못하다는 거다.
사실, 인턴에겐 레지던트들은 하늘 같은 존재다.
인턴 근무 평가 점수에 레지던트 평가 점수도 반영되기 때문.
반면, 교수는 그냥 절대적 존재라고 해야 한다.
한편, 이런 점수들을 바탕으로 나중에 인턴은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택하게 되는데. 그래서 늘 비굴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인턴들을 부임 첫날부터 괴롭혔다는 건, 이미 인성이 최악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번 전공 모집 때 아무도 GS(일반외과)에 안 가기로 한 것 같던데. 선배 위에 그런 양아치가 있으면 누가 어떻게 버티냐?”
이동욱은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팍 썼는데.
그 말에 나는 이동욱을 힐끔 쳐다봤다.
회귀 전, 이동욱은 피부과 레지던트 쪽에 원서 냈다가 보기 좋게 낙방했고.
결국, 일반외과로 갔었다.
당시 일반외과는 미달.
즉, 지원자 제로인 상황.
그래서 추가 모집을 해야 했고.
갈 데가 없어진 이동욱은 그 일반외과를 택했던 것이다.
결국, 사람의 일이란 절대 함부로 장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저 교수 이름이?”
“남윤성.”
남윤성?
GS 남윤성 교수.
문득, 나는 잠시 기억을 돌이켜봤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일까.
그러나 기억이 없다.
회귀 전, 나는 흉부외과에서 레지던트를 마쳤고.
이후 펠로우 과정을 다른 병원에서 밟다 보니 내가 아는 병원 상황은 확실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이런저런 소문을 들었을 테지만, 사람의 기억이란 게 한계가 있다.
즉,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그 기억 자체가 오래 지속되긴 힘들다.
물론, 일반외과 레지던트가 된 이동욱 저 녀석한테서 날마다 저 교수 뒷담화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히 듣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확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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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교직원 전용 식당에서 배식을 받은 뒤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한편 문득 좌우를 살펴보니.
이때 가장 눈에 띄는 건, 식탁 중앙 앞쪽 자리에 앉아 있는 그 남윤성 교수다.
그의 앞에는 나이가 지긋한 교수님 한 분이 앉아 계셨고, 한창 무언가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환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남윤성 교수의 그런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나는 이내 신경을 껐고.
밥 한 숟가락에 콩나물국을 정신없이 먹었다.
곧이어 고추장 불고기도 연신 입으로 가져갔고.
그 덕분에 어느새 허기가 좀 가시자, 나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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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아.”
시간에 쫓기듯 쉴 새 없이 숟가락질하던 이동욱.
슬쩍 고개를 들며 날 쳐다봤다.
“근데 너··· 어디 전공으로 갈지 그건 정했어?”
잠시 숟가락질을 멈추며 날 쳐다보던 그는 방지현을 의식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이때, 나는 간단히 부연 설명도 했다.
“지현이는 산부인과로 가겠대. 난 아직 결정 못 했고.”
그렇게 알려진 사실만을 이야기했는데.
그러자 이동욱은 약간 놀란 듯 지현을 쳐다봤고.
순간, 눈동자가 정신없이 좌우를 오가는 모습이었다.
무언가 정신없이 생각하는 모습.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드는 이동욱.
“사실, 난··· 피부과나···.”
역시!
그 간단한 언급에 나도 모르게 입가엔 작은 미소가 생겨났다.
그건 바뀌지 않았다.
과거와 다름없다.
이상하게도 바뀌지 않는 과거의 모습을 보게 되면, 최근엔 약간의 안도감 같은 게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동욱이 정말 뜻밖의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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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사실 정한 건 아냐. 산부인과 같은 곳도 생각하고 있어서. 본래, 내가 애들을 좀 좋아하잖아.”
나는 잠시 멍해졌다.
반면, 흠칫하며 이동욱을 쳐다보는 방지현.
그녀는 약간 놀란 눈으로 이동욱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산부인과에 남자 레지던트들이 없는 게 아니다.
산부인과 역시 메이저이기 때문에 각종 수술을 해야 하고.
그 때문에 남녀 상관없이 이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
실제 산부인과 교수님들 대다수가 남자다.
실제, 레지던트들 역시 이때까진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래서 방지현이 놀란 건, 이동욱이 산부인과를 생각한다는 대목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전공을 생각한다는 것, 그 자체에 놀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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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산부인과? 산부인과가 나쁜 건 아닌데. 근데 넌 거기 전망이 앞으로 괜찮을 것 같아?”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결국 그렇게 외쳤다.
그런 부정적인 내 말투에 이동욱과 방지현은 나란히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나는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 설명도 했다.
“북유럽 같은 경우, 출생률이 아주 낮아. 만약 우리나라도 나중에 그렇게 된다면 산부인과가 과연 괜찮은 전공이 될까? 특히 임신부가 더 귀해진 상황이 되면, 호불호가 생기면서 남자 산부인과 의사는 더 입지가 좁아질 텐데? 부인병 환자들은 더더욱···.”
그러나 반격이 날아왔다.
“야!!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어딨어! 사람 치료하는데 남녀 구분이 어딨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밥이나 빨리 먹어!”
이때, 방지현도 가세했다.
“산부인과 의사들 중에 남자 의사가 얼마나 많은지 넌 그것도 몰라?”
아이고!
하긴, 이 시대에 내 말이 아직 통하겠나.
아주 극악한 출생률과는 거리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훗날 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이 얼마나 구박 덩어리가 되는지 이동욱이 알아야 하는데.
물론, 이동욱이 대학교수가 된다면 그런 건 상관없을 테지만.
어쨌든 방지현과 이동욱과 관련된 일들이 점점 더 내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머리가 더 아파진다.
차라리 둘 다 흉부외과에 집어 넣어버릴까?
그리고 나는 딴 데로 가 버리고?
하지만 태생적인 흉부외과 의사인 나.
그런 내가 흉부외과를 버린다는 건···.
정말 어려운 결정이 될 수밖에 없다.
<66>
성국대 병원 본관 20층, VIP실 병동 2001호.
특급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아주 넓은 곳.
입원실 일반 병상과 확연히 다른 침대에 누워있는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똑같은 환자복을 입고 있는 한유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수척한 얼굴, 아직도 창백한 모습.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같이 가냘픈 모습이다.
노인은 느지막하게 얻게 된 자신의 막내딸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리 봐도 이쁘고. 저리 봐도 이쁘다.
이목구비 자체가 자신의 엄마를 꼭 닮은 것 같다.
그러나 저 눈, 저 눈만큼은 자신을 빼닮은 게 분명하다.
짙은 눈동자.
보통 사람들은 감히 속내를 헤아리기 힘든 그런 지혜가 담긴 듯한 그런 눈동자.
그런데 그 눈동자 속엔 남들이 모르는 아픔과 외로움이 가득한 것 같았다.
저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스스로 몸을 던졌을까. 노인, 아니 한태산 회장은 계속 말없이 고요한 눈으로 한유나를 응시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구태여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서로 눈동자와 눈동자로 마음을 주고받고 있으니까.
“으으음···.”
그러다가 한태산 회장은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젠···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그 말을··· 했다며?”
“······네.”
이때, 조용히 흘러나오는 한유나의 목소리.
“···너도··· 나도··· 어서······ 이곳에서 나가자···.”
한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유나야···.”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태산 회장의 목소리에 한유나는 잠시 힘을 냈다.
“네.”
좀 더 밝아진 목소리.
그러자 한태산 회장은 갑자기 뜻밖의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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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나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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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네··· 오빠들··· 그 녀석들···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그 순간, 그녀는 말없이 한태산 회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선 어딘지 모르게 원망의 기운이 짙게 퍼져나간다.
“···으음··· 쉽지 않겠지··· 허나··· 우리 그룹은 바로 윤기··· 윤수··· 윤형··· 그리고···.”
그때였다.
“아빠.”
어느새 한유나의 목소리가 약간 차가워진다.
한편, 잠시 말문을 닫고 그녀를 쳐다보는 한태산 회장.
이때 한유나 역시 묵묵히 그 시선을 응시했다.
자신이 어떻게 된 줄 알면서도.
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다니.
사실, 저런 아빠 때문에 자신은 그때 그런 시도를 했던 것이다.
가족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이 이룩한 신라그룹이 자신의 모든 것인 아빠, 한태산 회장.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신라그룹이 세상에 우뚝 설 수 있다면, 악마한테라도 몸과 영혼을 의탁할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빠, 한태산 회장이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근성과 욕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신라그룹은 아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부는 언제나 그 거대한 욕망 속에서 싹 트는 법이다. 범인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사악한 욕망의 토대에서 말이다.
문득, 한유나는 깨달았다. 한태산 회장은 바뀐 게 별로 없다. 자신의 엄마와 재혼을 했던 것도 오로지 자신과 그룹을 위해서일 뿐.
“아빠··· 저는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가 마침내 그렇게 말하자, 한태산 회장의 얼굴에선 실망감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꿈틀거리는 한태산 회장의 짙은 눈썹.
그 눈썹 아래, 기세를 숨긴 듯한 늙은 사자의 기운이 슬쩍 드러났다.
“며칠 전, 김윤상 의원이 보낸 사람이 날 찾아왔다.”
이때 그 뜻밖의 말에 한유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두 눈엔 작은 이채가 돋아났다.
김윤상 의원!
사실, 의식을 회복한 뒤 그녀는 그때부터 윤 실장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았고.
그 와중에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자신을 두 번이나 구한 사람이 이곳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의사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가 김윤상 의원의 외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한태산 회장의 입에서 ‘김윤상 의원’이 언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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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한유나는 윤 실장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2001호실을 빠져나왔고.
자신의 2002호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 아주 화사한 병실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는 모조 화병이 아니라 진짜 생생한 꽃들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비록 병실 내 식물을 키우는 걸 금한다고 하지만, 그런 규칙 따윈 자신한텐 아무 것도 아니었다.
특히, 한쪽, 네 개의 하얀 꽃잎 사이 우아하게 뻗어있는 노란 꽃술의 아름다운 향초는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밝게 만들고 있다. 그 향초에서 퍼져나오는 그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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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퇴원 날짜는 앞으로 열흘 뒤로 받아뒀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시간이 많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 집도 알아보셨어요?”
“네. 정원이 아주 멋진 곳으로 몇 군데 확인해 뒀습니다. 계약하면 언제든 입주할 수 있습니다.”
한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자신에게 명분도 생겼다.
아빠가 사는 저택으로부터 이제 자신은 독립할 것이다.
그 저택은 너무 지독한 곳이며 너무 답답한 곳이다.
그 저택의 요리사, 정원사, 운전사, 비서 등등, 그 모든 사람들이 자신한테 적이었다.
그들은 한윤기 부사장, 한윤수 부사장, 한윤형 전무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오로지 한태산 회장만 모르는 일이지만.
아니지.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시는 거겠지.
자신의 머릿속이 점점 더 혼탁해진 것도.
날마다 현기증에 시달렸던 것도.
분명 그 집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 병원에 머무는 동안, 오히려 자신의 머릿속이 더 맑아졌고.
늘 자신을 찡그리게 하던 그 지독한 두통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은 자신에게 강요되었던 정략결혼이라는 멍에!
그걸 더는 자신이 강요받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아가씨.”
한유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윤 실장이 뭔가를 가져왔다.
자세히 보니 사진이다.
그녀는 그 사진을 받아 가만히 쳐다봤다.
저번에 한 번 봤던, 아니지 그 호텔에서 봤던 그 남자.
몹시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의 증명사진이다.
“병원 인사팀에 등록된 사진이라 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유나는 괜찮다고 했다.
아마 일년 전에 찍은 사진이라서 그런지, 지금보다 더 앳된 모습.
“아직도 흉부외과에서?”
“네. 11월까진 흉부외과에서 근무한다고 합니다. 12월엔 응급실 근무가 예정되어 있고. 그리고 1월엔 신경외과에서···.”
간단한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한유나가 그 사진을 내려놓고서 창가에 서자, 윤 실장은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앞으로 날씨가 상당히 추워질 것 같습니다. 이맘때, 이렇게 비가 다 오고 나면 언제나 더 추워지거든요.”
한유나는 여전히 흐린 하늘을 가만히 쳐다봤다.
밤새 벼락이 치고 장대비가 내렸다.
현재, 비가 그쳤으나 아직은 흐릿한 하늘.
“실장님.”
윤 실장이 한유나를 쳐다봤다.
“제 미국 여권도 좀 찾아주시겠어요?”
“여행을 가시려고요?”
“네. 퇴원하면, 최대한 빨리 뉴욕으로 가려고요.”
뉴욕??
“혹시?”
“네. 이제 공부도 다시 시작하려고요.”
그 순간, 윤 실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아가씨,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순간 두 눈에 습막이 생기는 윤 실장.
그러나 한유나의 눈빛은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실장님, 제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셨죠?”
“네! 있습니다! 아가씨! 그게 바로 김윤상 의원의···.”
그러나 이때, 한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그윽해진 눈으로 창밖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윤 실장을 그 눈으로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이번 일들로 많은 것들을 잃기도 했지만, 또 버릴 수 있었어요.”
“아가씨, 하지만 다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네. 절대 다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그리도 이제 저도 알게 됐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 그걸 그들이 무서워한다는 걸···.”
“그렇습니다. 아가씨. 다들 늑대나 다름없으나, 한편으론 아가씨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젠 다시는 아빠를 믿지 않겠어요.”
“네! 아가씨. 이제야 아셨군요. 회장님께선 오로지 세상에서 ‘그룹’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러셨던 분이십니다.”
“실장님, 그럼 제가··· 그 그룹을 가진다면···.”
“으음··· 그렇게 된다면··· 회장님께선 어떤 경우든 오로지 아가씨의 편이 되실 겁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지독한 인간이 바로 한태산 회장이다.
그리고 그런 한태산 회장의 자식들이 지금 신라그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의 누군가는 신라그룹의 총수가 될 것이고.
그 중의 누군가는 신라그룹을 위해 살다가 생을 다할 것이다.
한태산 회장은 자신의 핏줄이 언제나 신라그룹의 총수가 되어 자신의 위업이 영원히 지속되길 원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늦은 나이임에도 억지로 세 번째 아내, 손미희 여사를 맞이한 게 바로 다음 총수를 위한 적극적인 안배라고 할 수 있다.
“아가씨, 그거 때문이라도 언제 한 번 그 의사분을 한 번 더 뵙는 게 어떨까요? 미국으로 가시면 아마 시간이 없으실 텐데.”
윤 실장이 다시금 슬쩍 제안했고.
그러나 한유나는 대답 없이 저 멀리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창밖을 계속 쳐다봤다.
그리고 이때, 살짝 자신의 입술을 깨무는 그녀는 그 두 눈이 점점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67>
“준비는 다 됐나?”
“네. 바로 수술하실 수 있습니다.”
강렬한 무영등의 빛이 쏟아지는 수술대.
그 위에 의식을 잃은 남자가 누워있다.
어느덧 오후 5시가 다 된 시각.
응급실 연락을 받은 뒤, 앞선 수술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넘어왔고.
일반외과(GS) 의료진들에 의한 1차 수술이 끝난 환자는 개복된 상태에서 2차 흉부 수술을 받게 됐다.
그래서 인수인계하듯 일반외과(GS) 레지던트 2년차 이재훈 선배로부터 몇 가지 이야기들을 전해 받았고.
그 뒤, 재빨리 흉부 수술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서철성 교수님이 곧바로 들어왔는데.
그렇듯 수술 집도의가 입장한 터라, 이제 수술 시작을 위한 모든 준비가 다 갖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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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2세, 남자.
이름, 이성훈.
직업은 무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대수술을 받고 있는 이 환자는 좀 특이한 환자다.
사제권총의 총탄에 맞아 황급히 응급실로 실려 왔고.
현재, 이 환자의 수술이 끝나길 경찰관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한편, 그는 응급실에서 응급조치를 받은 뒤, 일반외과(GS)로 트랜스퍼됐다고 하고.
이후, 흉부외과 협진이 요청되어 흉부외과 수술을 받게 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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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 결과, 우측 혈흉 외에도 하대정맥 파열이 확인되었고. 우심실 기저부 쪽에 총탄 하나가 박혀 있는 것도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입은 총상은 총 다섯 발!
그 피해가 제법 심각했다.
좌폐하엽과 우폐하엽 쪽도 관통상을 입은 상태이고.
횡격막 측부에 열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하대정맥 파열로 인한 혈복증 증상까지 나타났는데.
앞서 일반외과에서 복막후강에 있는 하대정맥 파열을 봉합했고.
혈복증 상태 등도 어느 정도 처치한 상태다.
대량 출혈의 징후를 우선 수습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심실 기저부 총탄 제거와 폐엽 열상 및 출혈 부위 등에 의한 단순 봉합 시술이다.
그리고 그 집도는 서철성 교수님이 맡기로 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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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 아직 출혈이 다 안 잡혔는데 수혈은 얼마나 들어갔어요?”
서철성 교수님이 즉각 질문하자 마취응급과 박신희 선생은 즉시 대답했다.
“앞서, 20단위 packed red blood cell(농축적혈구), 12단위 fresh frozen plasma(신성동결혈장) 수혈됐습니다.”
보통 농축적혈구 1단위는 200~240mL이고 신성동결혈장의 1단위는 160-180mL이다. 그래서 엄청난 수혈이 진행된 거였다.
“바이탈 확인하고 수혈팩 계속 짜면서 갑시다.”
“네!”
현재, 이 환자는 총상에 의한 출혈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나마 일반외과(GS) 수술을 통해 대부분 출혈을 잡았으나 아직 흉부 쪽 출혈은 다 잡힌 게 아니다.
잠시 후, 개흉하고 나자.
흉막강 내, 상당량의 혈종이 보였는데···.
“석션!”
“석션!”
“이쪽도!”
“석션!”
쉴 새 없이 석션을 통해 혈종은 깨끗하게 제거되었고.
깔끔하게 시야가 확보되기까지 시간은 조금 더 걸렸다.
“박 선생, BP(혈압)는 어때?”
환자가 다량 출혈을 했던 터라 서철성 교수도 계속 신경이 쓰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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