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산 회장의 제안 01
<70>
드르르···.
김태균 경사를 실은 이동식 침대 바퀴가 빠르게 굴러간다.
흉부 수술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총상에 대한 외과 봉합 및 혈관 봉합 수술도 순식간에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척수손상에 대한 수술.
그건 2차 수술로 미루어졌다.
그래서 우선 그를 회복실에 넣었고, 이후 흉부외과 중환자실로 옮길 예정이다.
환자 이송 뒤, 다시 돌아온 나는 수술방 뒷정리를 끝냈고.
그러고는 수술실에서 나오자, 일단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저 멀리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좀 전에 서철성 교수는 기자들 앞에서 수술 경과를 발표했다.
기자들의 요구가 워낙 심해 경찰과 병원에선 어쩔 수 없이 수술 경과보고를 허용했던 모양이다.
어느덧 수술실 통로가 한산해져 나는 좀 더 느긋하게 걸었고.
이때, 작은 창문을 통해, 세상이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아침이 밝은 거다.
역설적으로 나는 긴 밤을 샌 것이다.
아으으. 찌뿌둥해.
기지개를 켠 뒤, 잠시 후 나는 흉부외과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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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오는 이동욱.
방송국 카메라까지 나타났고, 취재진들도 병원 앞에 들끓었다. 그래서 누구든 이번 사태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술은 잘 됐어? 서 교수님은 바로 퇴근하시던데.”
이때, 나는 의아해하며 이동욱을 쳐다봤다.
서철성 교수님이 퇴근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왕 밤을 새운 거. 그럼 바로 이어서 근무를 하실 분인데.
많이 피곤하셨나.
그러고 보니, 수술 내내 그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듯 서철성 교수님이 별다른 말 없이 퇴근하자, 이동욱뿐만이 아니라 스테이션 간호사들까지 나한테 큰 관심을 갖고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현재, 사제총기 사건은 갑자기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 같다.
당연히 우리 병원은 다시 화제의 중심이 될 거고.
그리고···.
우연인 듯 우연이 아닌 듯, 나는 이성훈 환자 수술뿐만이 아니라 김태균 경사의 수술까지 참여하게 된 거다.
“수술은 잘 됐어.”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이동욱.
“근데, 기자들이 널 찾던데?”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순간, 나는 의아해하며 이동욱을 다시 쳐다봤다.
기자들이 날 찾는다고?
왜?
무슨 이유로?
“그중에 K일보 김치훈 기자가 너한테 메모도 남겼어.”
K일보 김치훈 기자?
“무슨 일인데?”
“난 몰라. 연락처, 여기 남겼어.”
이동욱은 나한테 포스트잇 메모지를 건넸다.
거기엔 김치훈 기자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다.
이때, 그걸 유심히 쳐다보며 잠시 생각해 봤지만.
김치훈 기자가 특별히 날 찾을 이유가 없다.
이곳 병원에서 내가 온갖 사건을 다 겪고 있으나.
인턴이라는 신분, 그리고 성국대 병원이라는 울타리가 날 보호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특별히 내가 어떤 기자와 접촉할 이유도 없게 된다.
그런데 나한테 연락처를 남겼다고?
이해할 수가 없다.
?????
#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이동욱과 함께 아침을 먹으러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지하 1층 식당가는 번잡했는데.
바로 새벽부터 몰려든 기자들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 식당가를 피해, 우리는 교직원 전용 식당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배식을 받아 구석진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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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넌 결국, 산부인과로 갈 거냐?”
한편,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다시 물었고.
이동욱은 인상을 쓰며 더는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대체 이 녀석, 어떻게 설득할까.
결국, 머리가 아파져 이내 그 생각을 접었고.
정신없이 된장국에 밥을 먹으며, 간간이 제육볶음도 정신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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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다 먹었지?”
어느새 물컵의 물도 다 마시고 나자, 이때 이동욱도 수저를 내려놓고 있다.
한편, 이동욱은 곧이어 물을 마시며,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전공 모집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꺼냈다.
“참! 너도 알지? 다음 주부터 원서 제출 기간인 거.”
그 말에 나는 다시 이동욱을 쳐다봤다.
벌써 그렇게 됐나.
“다음 주 23일까지가 원서 접수 기간···.”
이동욱은 설명하듯 말했고.
다음 일정도 이야기했다.
즉, 필기시험은 12월 2일, 면접 및 실기시험은 12월 5일에 예정되어 있다.
이후, 레지던트 합격자 발표는 12월 7일.
“그래서 내일 자정 무렵에 인턴 모임 한다던데. 갈 거냐?”
사실, 인턴들이 모두 바쁘다 보니, 올해 인턴 모임은 예년보다 늦어진 거다.
그럼에도 한번 모여 의견 교류를 하게 되면, 원서 접수 때의 혼란을 피할 수 있다.
특히 빡센 경쟁률을 가진 전공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행보를 잘 파악해야 한다.
전기 응시 때 낙방하게 되면 후기 모집 때 엄한 전공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근데 왜 자정에 모임을 한대?”
“야! 우리 병원이 엄청 잘 나가잖아. 환자 숫자도 많이 늘었고. 흉부외과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외래진료가 확 늘었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밤 12시에 모인다고?
하긴, 그렇게 한다면 참여자 숫자는 많아지겠다.
“그럼 어디서?”
“교직원 식당.”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자! 너무 늦겠다.”
잠시 후, 우리는 식판을 반납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곧장 흉부외과 병동으로 올라갔다.
이제부터 쳇바퀴 돌 듯 바쁜 하루가 또 시작되는 것이다.
<71>
알록달록한 주방 앞치마를 걸친 서철성 교수.
넓은 어깨에 다부진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만.
아침에 퇴근한 그는 치지직! 거리는 프라이팬으로부터 오믈렛 하나를 하얀 접시 위로 순식간에 옮겨 담았다.
어느덧 세 개의 오믈렛이 차례로 접시 위에 세팅됐는데.
그 하얀 접시 한쪽엔 샐러드와 방울토마토를 놓았고.
잠시 후, 드레싱 소스도 뿌렸다.
포크, 수저 등을 세팅한 그는 그제야 어깨를 쭉 폈다.
미간에 깊었던 골이 스르륵 풀리며.
수술 집도를 하듯 섬세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놀림도 드디어 멈췄다.
모처럼 주방 일을 하려고 하니 무척 힘이 들지만.
하얀 식탁 위에 세 개의 식사를 모두 세팅하고 나자, 그제야 안도감이 새어 나온다.
‘이제 깨울까.’
서철성 교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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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난 터라 요즘 늦게 일어난다는 딸 아이.
그 딸 아이가 느릿느릿 걸어 나오고 있다.
긴 머리카락, 왜소한 체격. 그러나 키가 유난히 큰 녀석.
아침 갈증에 아마도 물을 마시려고 주방으로 걸어 나온 것 같은데.
이때, 녀석은 갑자기 흠칫 놀라며 서철성 교수를 쳐다봤다.
순간, 놀란 듯 눈이 커지는 딸 아이.
“···아빠.”
그 모습에 서철성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짙은 눈썹은 저절로 갈매기 날개처럼 휘어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사춘기도 훌쩍 지난 딸 아이.
그 딸 아이가 난데없이 자신한테 달려들었다.
녀석이 갑자기 자신의 허리를 꼭 껴안은 거다.
작았던 아이.
어느새 커져 버렸다.
키도 어느새 자신만큼 자라 버렸고···.
“아빠, 병원 안 갔어?”
놀란 딸 아이의 목소리.
그 순간, 서철성 교수는 갑자기 울컥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갑자기 심장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고개를 내미는 딸 아이.
울컥하던 서철성 교수는 억지로 눈시울이 젖는 것을 참아냈다.
“···이따 가려고.”
“언제 왔어?”
밤늦게 퇴근했다가 다시 병원으로 갔고, 동틀 무렵 다시 돌아왔다. 원래는 바로 근무를 시작했을 텐데. 일부러 집에 왔고, 아침을 준비한 거다.
보통, 서철성 교수는 새벽에 집에 들어왔다가 새벽에 집을 나간다.
그 수많은 환자들을 수술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과다. 그래서 대체로 교수실에서 잠을 잔다.
“아까 왔어. 오늘은 학교 안 가?”
“늦게 가도 돼. 수능 끝났잖아.”
그렇지. 수능이 끝났다.
딸 아이가 수능을 잘 봤다고 했던가.
의대를 지망한다고 했는데.
호기심이 문득 생겼다.
하지만 뒤늦게 물어보는 게 이상해져 그 호기심을 참으며 서철성 교수는 식탁을 가리켰다.
“먹자. 할머닌 내가 데려올게.”
“네! 잘 먹을게요!”
유독 밝게 말하는 딸 아이.
이쁜 딸 아이의 두 눈이 환하게 웃고 있다.
녀석,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새카만 눈동자.
짙은 눈썹.
자기 엄마의 미모를 똑 닮았다.
고맙다.
고맙구나.
내가 신경을 못 써 줬는데.
그래도 잘 자라줘서.
날 이해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딸 아이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깊은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서철성 교수는 다시금 울컥해졌다.
아내가···.
아내가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들 녀석도 여기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순간, 깊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사람이란 언제나 계기가 있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계기는······.
하늘나라에 있는 아내와 아들 녀석.
거의 광인처럼 수술에 집중하는, 성국대 철인 교수, 서철성 교수.
그는 그렇듯 잠시 눈시울이 젖다가 이내 씩 웃으며 어머니 방에 가볍게 노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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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선생님, 전화 왔어요!”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오후 2시가 다 될 무렵.
간단한 수술 하나를 마치고 나왔을 때, 스테이션 간호사는 나한테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의아해하며 그 전화기를 넘겨받았고.
수술 모자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김정민입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김정민 선생님이신가요? 반갑습니다! 저는 K일보 김치훈 기잡니다! 혹시 아침에 제가 남긴 메모 보셨습니까?”
상당히 밝은 톤의 젊은 기자의 목소리.
그러나 나는 흠칫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침에 이동욱이 말했던 바로 그 기자다.
이렇게 빨리 통화가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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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네, 보긴 봤습니다만. 제가 좀 바빠서. 근데 무슨 일입니까?”
그렇듯 의구심을 품고서 묻자, 김치훈 기자는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선생님! 인터뷰를 좀 했으면 합니다!”
“네? 제 인터뷰요? 저랑요?”
“네! 시간 좀 내주시면 제가 그 시간에 맞춰 병원 방문을 하겠습니다! 따로 준비하실 건 없고, 그냥 저희가 준비한 몇 가지 질문에 응답해주시면 됩니다. 카메라 팀도 같이 가서 사진도 몇 장만 찍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황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죠? 제가 인터뷰할 게 없는데?”
그러자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 인터뷰할 게 없다니요? 대충 알고 있습니다.”
당황해하며 내가 즉시 묻자, 김치훈 기자는 사정 이야기를 했다.
“신라그룹 한태산 회장의 막내딸 한유나씨! 선생님께서 응급처치하셔서 생명을 구하게 됐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한유나씨가 호텔 난간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면서요? 선생님께서 재빨리 구하셨고. 그리고 저희도 이것저것 조사해서 좀 아는데···. 선생님! 아버님이 김윤상 의원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바로 전화를 끊을 뻔하다가 억지로 참았다.
대체 어떻게 그 사실이 저 기자의 귀에 들어갔을까.
저번에 찾아온 신라그룹 한윤형 전무는 그 사건을 극비에 부칠 거라고 했다. 연회장 참석 귀빈들한테도 부탁까지 하면서.
다만, 사건 전말이 조금 변해 있었다.
한유나가 자살 시도한 게 아니라,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고.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점은 김치훈 기자가 내 아버지의 정체를 안다는 것이다.
“기자님.”
“네, 말씀하십시오.”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면,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으신 겁니까?”
내가 정색하며 묻자, 김치훈 기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몇 초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저희 출처 말씀입니까? 원래, 이런 건 아시다시피 비공갭니다. 근데, 선생님께서 정 궁금하시다면 이 정도까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태산 회장님 취재하다가 저희도 알게 됐습니다.”
한태산 회장을 취재하다가 알게 됐다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명쾌하지 않아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그럼, 인터뷰는 승낙해 주시는 겁니까? 그리고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K일보는 신라그룹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절대 나쁜 취재가 아니니까, 꼭 믿고 맡겨주십시오.”
할 수 없이 나는 대답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저는 고민할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뭐, 좀 더 생각해 보시고, 꼭 좀 연락 부탁드립니다. 좋은 쪽으로 꼭 생각해주십시오!”
그렇듯 밝은 목소리의 남자가 잠시 후 전화를 끊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다시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스테이션 간호사는 그걸 받자마자 다시 날 쳐다봤다.
“선생님, 또 전화··· VIP실 병동에서 전화 왔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금 전화기를 나한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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