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레이디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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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스테이션 모니터 앞에 앉아 차팅을 하고 있던 나는 윤혜선 실장이 갑자기 나타나자 잠시 타이핑을 멈췄다.
인사를 하고서 방문 이유를 물었다.
“여긴 어쩐 일로?”
“잠깐만 여쭤볼 게 있는데, 혹시 괜찮겠습니까?”
“······아아, 네.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즉시 휴게실로 향했다.
“이쪽에 앉으세요.”
아침이라 휴게실은 한적했다.
좀 전에 청소를 한 듯 주변이 아주 깨끗했다.
우리는 작은 테이블을 두고서 마주 보며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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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혹시 오늘 오후나 아니면 저녁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시간?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가씨께서 한번 뵙자고 하십니다.”
한유나가 날 보고 싶어한다고?
“음, 잠시만요. 제 스케쥴이···.”
나는 즉시 오늘 일정을 한번 떠올려봤다.
조금 있다가 병동 환자 관리를 해야 한다.
요즘 병원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요일에 열리게 되는 몇몇 컨퍼런스는 오후 시간대에 잡혀 있어 그때 참석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주부터 레지던트 지원서 제출이 있고, 그래서인지 내가 참여하는 수술 스케쥴이 확실히 줄어든 상태다.
오늘은 신생아 수술도 끝난 터라, 시간이 좀 남아돈다. 그래서 부족한 잠을 중간중간 잘 시간도 충분하다.
“그럼, 오후 5시쯤. 그때가 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후 5시? 그럼 그때 입원실을 방문해주시겠어요? 그땐 저도 일을 마치고 입원실에 도착할 시각이라, 약속 시각으로 잡기엔 딱 좋을 것 같군요.”
그렇듯 삽시간에 오후 5시 약속 시간이 정해졌는데.
이때 나는 슬쩍 호기심이 생겨났다.
내가 알기론 윤 실장은 한유나의 간병인이자 개인 비서다. 2002호에 늘 상주하는 사람.
그런데 그런 윤 실장이 어딘가 나갔다 온다는 말에 나는 바로 신경이 쓰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메인 연계 미션의 대상이 바로 눈앞의 윤 실장이다 보니, 나로선 그럴 수밖에 없다.
즉, [연계 미션(2): 광란의 질주(클래스 A), 신라그룹 윤혜선 실장의 생명을 구하세요!]
이 미션의 주인공이 바로 윤 실장이다.
“혹시 멀리 나가십니까?”
“아뇨. 가까운 호텔 쪽에, 돌아가신 사모님과 친했던 분을 좀 만나기로 했습니다.”
돌아가신 사모님? 한유나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때 내가 물어본 것 이상으로 윤 실장은 아주 상세하게 대답해줬고.
좀 이상하긴 했으나 나는 계속 물어봤다.
“많이 친하셨나 보죠?”
윤 실장은 바로 고개를 젓는다.
“아뇨. 비즈니스 관계여서 꼭 그렇진 않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중요한 일들을 많이 도와주실 분입니다. 참! 그분은 신라증권 부사장으로 재직 중인 백상엽 부사장입니다.”
이때 나는 흠칫하며 윤 실장을 쳐다봤다. 질문 하나 던질 때마다 윤 실장은 너무 상세하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TMI라는 말을 이럴 때 써야 하나.
그런데도 그녀는 더 설명했다.
“그분을 발탁한 건 바로 돌아가신 사모님입니다. 사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백상엽 부사장은 아마 그룹 총괄 부회장까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지금은 조만간 퇴직을 앞두신 분이시지만.”
그러니까 한유나의 어머니는 신라증권 백상엽 부사장을 무척 신임했나 보다. 그런 관계여서 윤 실장은 그를 만나려는 거고.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불안했다.
이번 연계 미션의 타이틀은 [광란의 질주(클래스 A)]!
이 타이틀에서 드러났듯, 이번 사건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병원 바깥에서 윤 실장의 신변에 큰 위험이 닥친다는 말.
그러니 윤 실장의 행보가 계속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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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근데 이번 건은 또 다른 이야기인데··· 송구하지만 조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윤 실장은 잠시 후 또 다른 이야기도 꺼냈다.
“우선 그 전에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무언가를 제안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저희 아가씨를 위해 제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그러고는 바로 치고 들어오는 듯한 윤 실장의 목소리.
“얼마 전, 회장님께서 선생님께 무언가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뜻밖의 언급에 나는 움찔했다.
이건 한태산 회장과 나만의 만남이자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윤 실장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때 회장님께선 어떤 제안을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아가씨와 관련된 일일 겁니다. 그래서 오해를 피하고자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편, 거기까지 말한 뒤 윤 실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윤 실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회장님 말씀들 중엔 저희 아가씨를 위하는 말씀도 있었을 테고, 혹은 회장님 본인을 위한 말씀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윤 실장은 날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 이때, 나는 좀 놀랐다.
혹시 그때 한태산 회장과 했던 대화를 혹시 엿들었나.
갑자기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로 윤 실장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참! 그러고 보니까, 나한텐 관련 [특전]이 있지 않나.
[특전: 거짓 없는 입]
[거짓 없는 입: 대상자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건 중요한 사항이다.
한유나, 윤 실장으로 이어지는 관계에 대해 그 신뢰를 확인할 기회.
더군다나 이번 연계 미션이 끝나면, 이 특전은 소멸될 특전이다.
그래서 나는 즉시 [특전]을 발동시켰다.
“혹시 지금 하신 말씀은 단순히 예상하신 말씀입니까?”
[거짓 없는 입이 발동 중입니다]
“네.”
이때,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는 윤 실장.
곧바로 시스템 알람도 들려왔다.
[대상자는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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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맙소사.
보통 여자가 아니다.
모든 걸 예측하고 있다.
그러니 아버지가 보낸 신라그룹 관련 기밀 서류엔 윤 실장 관련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근데 죄송한데, 윤 실장님. 저는 윤 실장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오해하시는 게 아닌가 해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한유나씨를 구한 건, 오로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한 것뿐입니다. 부담감 가지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듯 생판 모르는 듯한 말을 하자, 이때 윤 실장은 고개를 떨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고개를 드는 윤 실장. 그 표정이 좀 달라져 있었다.
“선생님, 일침견혈(一針見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후한서 곽옥전에 나오는 이야긴데, 침 한 대를 놓으면 반드시 피를 본다는 말입니다. 즉, 침 한 대만 놓고서 병을 낫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죄송하지만, 이렇듯 대화가 겉돌게 되면 결국 본질을 찾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차라리 좀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신라그룹은 안에서부터 곪아 그 부스럼이 언제 터질지 누구도 모르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또 말했다.
“그래서 그곳을 정리하지 않으면 아가씨의 신변에 큰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부친께서는 큰 영향력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까.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송구합니다만, 선생님! 다시 한번 저희를 꼭 좀 도와주십시오! 저희가 번번이 큰 은혜를 입었으나··· 반드시 그 은혜를 언제고 갚겠습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선생님, 회장님께서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든, 저희를 꼭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고는 윤 실장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땅에 머리가 닿을 듯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놀란 나는 즉시 일어섰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윤 실장님!”
그러자 윤 실장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아주 공손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가 아주 염치없고 뻔뻔한 여자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로지 아가씨, 우리 아가씨가 앞으로 잘 되길 바랄 뿐입니다. 선생님!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저희를 꼭 좀 도와주십시오. 저희 아가씨를 도와주십시오. 선생님과 부친의 존재는 저희 아가씨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윤 실장은 다시금 머리를 숙였고.
절대 머리를 들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깐 침묵이 이어졌는데.
결국, 할 수 없이 나는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휴!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일침견혈(一針見血)의 마음으로써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 순간, 윤 실장은 약간 이글거리는 듯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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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나는 드레싱 카트를 끌고, 서둘러 825호로 들어갔다.
72살 노인 환자의 수술 부위를 오픈한 뒤 포비돈을 이용해 소독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흉관 상태도 점검했다.
그리고 바로 옆 베드에 누워있는, 내일 수술이 예정되어 있는 환자의 수술 전 검사(Pre OP lab) 결과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혈액검사, 심전도(ECG) 검사, 기관지 내시경(Bronchoscopy) 검사, 관상동맥 조영술(CAG) 검사, 흉부 CT 검사 등.
각 검사 내역과 판독 결과 등을 확인한 뒤, 수술 집도의에게 노티할 게 있는지 확인하고서 따로 메모해뒀다.
곧이어 병리과로 달려가, 조직 검사를 위해 병리과에 넘겼던 수술 환자들의 검체 목록을 다시금 확인했고.
그러고는 병동을 다시 돌며 때에 따라선 운드 드레싱(wound dressing)을 다시 해 주기도 했고, 동맥혈 가스분석 검사(ABGA)를 위한 환자 채혈을 중간중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잠시 멈춰섰고.
나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문 대 가문, 그 연결을 뜻하는 정략결혼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꼭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한태산 회장도 그렇고, 은근슬쩍 흑심을 드러낸 아버지도 그렇고, 좀 전의 윤 실장마저 나더러 한유나와 약혼하라는 말을 꺼냈다.
사실, 내가 갑자기 한유나의 일에 끼어들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일들이 계속 진행되는 게 참 기이하기도 하다.
결국, 아버지의 정치적 힘 때문에 이런 강력한 인과 관계가 발생한 것 같은데.
다만, ‘한유라’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자가 끼어있어 무척 흥미롭기도 했고.
물론, 한유나가 싫지 않아, 나는 선뜻 그 일에서 손을 뗄 수도 없다
그리고 그사이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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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다이너스티 호텔 프랑스 요리 전문점.
“손님, 이쪽입니다.”
우아한 외투를 입고 명품백을 손에 쥔 윤혜선 실장.
짙게 화장을 한 그녀는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안쪽 룸으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그곳엔 이미 누군가 먼저 와 있었다.
잠시 후, 윤혜선 실장이 안으로 들어서자, 짧은 탄성과 함께 상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신라증권 백상엽 부사장이다.
앞머리 숱이 사라져 넓은 이마가 훤하게 드러난 60대 나이의 남자. 그의 옆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하게 변한 상태다.
“부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윤 실장이 가볍게 웃으며 인사하자, 이때 백상엽 부사장은 밝게 맞이했다.
“하하, 윤 실장. 오랜만이네. 어서 오게.”
“호호, 이렇게 반겨주시니까, 세월이 흐른 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듯 윤 실장이 아주 묘하게 말을 하자, 백상엽 부사장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그리고 잠시 뒤, 백상엽 부사장은 이번 식사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했다.
“참! 윤 실장, 식사는 내가 알아서 주문했는데 괜찮지? 여긴 식사가 너무 늦게 나와서 말이야.”
“네. 괜찮습니다. 오늘은 점심 먹으려고 뵙자는 게 아니니까.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난감해하는 백상엽 부사장.
“왜 그래? 윤 실장! 사람이 먹으려고 일하는 건데, 맛있는 건 맛있는 게 먹어야지. 참, 로얄 레이디께선 잘 계시나? 사고를 당해 좀 다치셨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로얄 레이디, 바로 한유나를 가리키는 그들만의 별칭이다.
“점점 더 좋아지시고 계십니다. 근데 부사장님! 식사 전에 먼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백상엽 부사장의 입가엔 웃음기가 사라진다.
“무슨 이야기? 말해 보게. 내가 윤 실장과 내외하는 사이도 아닌데. 근데, 윤 실장! 자넨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그 돌직구 화법도 여전하고.”
“음,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건은 꼭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백상엽 부사장의 관심을 끌어모은 뒤, 윤 실장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부사장님께선 혹시 둘째 사모님께서 베푸신 그 마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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