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레이디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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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증권 백상엽 부사장.
잠시 눈빛이 흐려졌다.
과거, 자신이 만년 부장에서 임원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둘째 사모님 덕분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의 일.
자신은 회사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
퇴직을 앞둔 상태이다 보니, 윤 실장의 저 말이 다소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야 기억하지. 내가 그걸 잊을 수가 있나. 근데 왜 그래? 윤 실장 혹시 로얄 레이디 때문인가?”
한유나의 별칭, 로얄 레이디.
백상엽 부사장에겐 여전히 익숙한 표현이다.
그러나 신라그룹 비서들은 그런 별칭을 쓰지 않는다.
한유나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
윤 실장 역시 마음 같아선 ‘로얄 레이디’라는 애칭을 다시 쓰고 싶으나, 그건 이미 구시대적인 별칭이 되어 버렸고, 이젠 ‘아가씨’라는 호칭이 더 익숙해진 상태다.
“부사장님, 기억하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가씨께서도 부사장님의 그런 마음을 감사하게 여기실 겁니다.”
한편, 백상엽 부사장은 계속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신라그룹의 계보가 어떻게 이어질지 그 역시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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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후, 단정한 복장의 웨이트리스가 나타났다.
좀 전에 난처해져, 애꿎게 식탁 벨을 누른 백상엽 부사장은 즉시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왜 이렇게 음식이 안 나옵니까? 빨리 좀 갖다 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웨이트리스는 인사를 하고 룸을 나갔다.
백상엽 부사장은 다시 말했다.
“윤 실장! 그래서 나더러 뭘 하라는 거야?”
윤 실장은 말없이 잠시 쳐다봤다.
“혹시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신라증권은 한윤기 부사장님 계열이야.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이제 회사를 떠날 몸이야.”
“네. 부사장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곧 옷을 벗으신다고. 하지만 좀 억울하지 않으세요? 적어도 그룹 부회장 정도는 되셔야 할 분인데.”
그 말에 인상을 팍! 쓰는 백상엽 부사장. 그의 눈가에 가득한 잔주름은 점점 더 거칠게 율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자 하는 제안은, 저희 아가씨를 앞으로 도와주신다면 부사장님께도 분명 아주 좋은 일들이 생기실 겁니다.”
“좋은 일? 대체 어떤 거?”
“아가씨는 현재 신라전자 2대주주입니다. 그리고 더는 힘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변화가 있다는 건가?”
“네! 아가씨께 곧 새로운 후견인이 생기실 겁니다.”
“후견인? 어떤 사람?”
“들으시면 놀라실 텐데요.”
“윤 실장!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봐! 줄 끊어진 연이 어떤 신세가 되는지 날 보면 잘 알잖아. 빨리 말해봐!”
“네, 부사장님. 말씀드리죠.”
그러고는 윤 실장은 짧게 심호흡했다.
지금껏 고립된 거나 다름없었던 아가씨.
가족들에게 외면당했고, 그룹 임직원들에게도 외면당하는 신세.
그러나 이제 모든 게 바뀌게 될 것이다. 아가씨의 위치와 자신의 위치도 바뀌게 될 것이다.
“유력 정치가 김윤상 의원님, 그분께서 아가씨를 돕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에 백상엽 부사장은 잠시 멍해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듣지 못한 거다.
그러나 윤 실장이 좀 더 설명하자, 이내 까무러칠 듯 꽤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김윤상 의원? 그 김윤상 의원!??”
백상엽 부사장의 두 눈에 순간 힘이 잔뜩 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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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선 국회의원, 김윤상.
그런데 백상엽 부사장은 김윤상 의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한때 그룹 일을 했던 백상엽 부사장.
당시의 그는 한태산 회장의 최측근이었다.
그리고 그때 한태산 회장이 김윤상 의원 때문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국세청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신라그룹에 우호적인 언론들마저도 신라그룹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당시 재계 2위권을 넘보던 신라그룹.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공세를 차단하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이상한 장벽에 부딪혔다.
뒤늦게 그 원인을 파악했을 땐, 방법이 없었다. 검찰을 넘어선다고 해도 감히 청와대까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신라그룹 사장급 경영진 6명이 구속됐고.
그중의 4명이 실형 선고를 받았다.
특히, 그들의 총구가 겨눠졌던 한태산 회장은 아주 간신히 실형 선고를 면했는데.
그럼에도 현행 법규에서 실형을 피할 수 있는 최대 형량인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날 이후, 한태산 회장은 그 수치를 잊지 않고 은밀하게 보복 작업을 시작했다.
김윤상 의원의 뒤를 캐서 그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킬 작정이었던 것.
그러나 바로 그 시점.
김윤상 의원은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며 더 큰 날개를 달았고.
결국, 한태산 회장은 김윤상 의원이 아닌 정권과의 싸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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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실장,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김윤상 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서 그래? 그자는 재계를 그저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야! 오로지 자신의 위상과 탐욕을 위한 수단으로써 말이야!”
빽빽! 소리를 지르는 백상엽 부사장의 모습에 윤 실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이내 두 눈에 광기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런 위험에 대해선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부사장님! 구부간(舅婦間,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이 되실 텐데, 과연 김 의원께서 그렇게 매정하실까요?”
“구, 구부간?”
순간, 놀라는 백상엽 부사장.
“물론, 이 이야긴 아직 비밀입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도 이 일에 대해선 깊이 인식하고 계십니다.”
“뭐? 회장님께서?”
다시 놀라는 백상엽 부사장.
이래저래 당황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무언가 정신없이 생각하는 듯 동공이 이리저리 오가더니, 갈수록 그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다.
그러다가 백상엽 부사장의 얼굴이 확 바뀌었다.
“윤 실장! 증거 가져와! 증거 가져오면···.”
이때, 윤 실장은 자신의 가방에서 성국대 병원 인사카드 복사본 한 장과 몇몇 사진들을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가?”
흠칫하며 그걸 받던 백상엽 부사장.
잠시 후, 그는 인사카드부터 보고는 의아해했다.
“김정민?”
“네. 김윤상 의원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입니다. 현재 성국대 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하고 있죠. 그리고 그 사진들은 아가씨와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들을, 제가 몰래 찍은 것들입니다.”
그 말에 백상엽 부사장은 이제 사진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인상을 팍 썼다.
“이 사진들은 그냥 의사와 환자가···.”
“호호. 정말 그렇게 보이십니까? 저희 아가씨께서 김윤상 의원님의 외아들과 말씀을 나누시는 게, 단순히 그렇게 보이시나 봅니다?”
그 순간, 백상엽 부사장은 바로 입을 닫았다.
왜냐하면, 최상류층들의 결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백상엽 부사장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특히,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또한,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한유나는 한태산 회장의 막내딸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그 사진들을 계속 더 쳐다봤고.
그런 그의 모습을 윤 실장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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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편, 바로 그 시각.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나는 넓은 거실.
그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고급 소파들.
그런데 그 소파들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다.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된 여자들, 그녀들은 다소 무료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다리를 꼬고 앉은, 늘씬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은 무언가 심각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한편, 가장 안쪽, 상석 자리.
그곳엔 한태산 회장의 셋째 부인이자 이 대저택의 안주인이 된 손미희 여사가 앉아 있다.
점점 더 날씨가 추워지는 늦가을, 아니 초겨울의 일요일.
오늘 이 시각, 이 저택의 가족들은 대다수 모인 상태다.
물론, 입원 중인 한태산 회장과 한유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오늘은 손미희 여사의 생신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거기서 대형 유리창을 통해 바깥 정원이 보이는데.
그 정원 쪽엔 한 남자는 연신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검은 정장 차림의 비서로부터 무언가 보고를 받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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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백상엽이 윤혜선을 만났다고?”
“네. 좀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강남 다이너스티 호텔에서 식사 중입니다.”
“시팔, 윤 실장이 다시 움직인다는 말인가?”
“그렇게 봐야 합니다. 부사장님.”
“미친년! 다신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해서 그냥 보내줬더니 또 돌아왔어. 근신하고 있어야 할 년이 감히 활개를 치고 다녀? 미친년!”
“부사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윤 실장 사건의 공소시효는 오래전에 끝났습니다. 더는 윤 실장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시팔, 그래서 한유나 그년은?”
“특별히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선?”
“별다를 게 없습니다.”
“지분 상태 변동은?”
“아직 변화가 없습니다.”
“앞으로 윤 실장 그 미친년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도 반드시 확인하고 막아야 돼! 윤 실장 그년 때문에 한유나 지분이 12.8%까지 올라갔어. 원래 7.8%에 불과했던 지분이 말이야. 그게 바로 5년 전의 일이야. 그년이 또 움직이면 앞으로 지분 구도가 어떻게 될지 몰라.”
“부사장님! 차라리 손 여사님의 도움을 받아 지분 문제를 공론화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분 매각 압력을 넣고, 한유나 아가씨의 지분은 공평하게 나누시는 게···.”
“그래서 그년이 뛰어내렸잖아! 정략결혼도 싫다고 하고! 죽기 전에 지분 뺏기는 건 죽어도 싫다고 하고! 차라리 그때 죽지! 죽지도 않고 살아났어!”
“하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한유나 아가씨를 구해준 자가 김윤상 의원의 아들입니다. 김윤상 의원 쪽에서 접촉도 있다고 하고.”
“시팔! 김윤상 의원은 하이에나 급이야. 그런 자가 끼어들면 골치 아파. 근데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어. 고상중 의원 알지? 그자가 그렇게 된 게 김윤상 의원 작품이라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고 하더군. 고상중 의원 아들이 결국 폐인이 됐잖아. 사고 때문이라고 하지만, 김윤상 의원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했어. 그렇게 소문이 돌고 있어.”
“음, 확실히 무서운 사람이군요.”
“무섭지. 아주 무서운 사람. 그러니 자신의 와이프와 둘째 아들까지 죽였지. 그런 사람이 대체 뭘 못하겠어.”
“그게 정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을?”
“방법이 있지. 공식적으론 와이프와 둘째 아들은 사고사로 처리된 거니까.”
“무시무시하군요.”
“아무튼, 조심하자. 쓰레기 정치인들은 항상 독이 발린 칼을 들고 있어. 그걸 죽기 살기로 휘두를 줄도 알고, 어쨌든 쓰레기들은 결국 쓰레기야.”
한편, 잠시 후.
한태산 회장의 둘째 아들 한윤수 신라생명 부사장은 흡연을 마친 뒤 다시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잠깐 사람들의 시선이 한윤수 부사장에게 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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