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 사회 01
<82>
띵!
20층에 엘리베이터가 섰고 문이 열리는 순간,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윤혜선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윤 실장은 바로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네, 늦지 않았죠?”
“그럴 리가요? 이쪽으로 가시지요.”
잠시 후, 윤 실장 덕분에 가볍게 보안대를 통과했고.
드디어 2002호실 앞에 섰다.
똑. 똑.
가벼운 노크를 한 뒤, 윤 실장은 문을 열었다.
일전에 방문했던 2002호실의 모습.
그 실내의 모습이 다시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어?
근데 사방에 꽃들이 가득하네.
저번엔 모조 꽃 화병들이었는데 그게 생화로 바뀌어 있었다.
보통 입원실에선 생화를 키우는 게 금지된다. 그런데 이곳 곳곳엔 생생한 꽃들이 가득하다.
내가 가만히 그 꽃들을 쳐다보자, 윤 실장이 간단히 설명했다.
“병원 측에 이야기해서 당분간 가능합니다. 퇴원할 때 모두 가져갈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근데 꽃들이 정말 화사합니다. 향기도 좋고.”
어느덧 겨울을 앞둔 시기.
그러나 이곳 입원실은 마치 화사한 봄날 같다.
이건 윤 실장의 작품일 것이다.
“선생님, 이쪽입니다.”
잠시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윤 실장은 다시 안쪽으로 날 안내했다.
그리고 잠시 뒤.
한유나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잠시만요.”
현재 그녀는 아주 곤히 잠을 자고 있는 중이다.
윤 실장은 잠깐 기다리라고 했고, 한유나를 천천히 깨웠다.
“아가씨, 김정민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아가씨···.”
그러자 조금 뒤척이다가 눈을 뜨는 그녀.
그런데 그녀가 눈을 뜨자 한순간 그녀의 주변이 갑자기 환해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와, 역시 대단한 미인임이 틀림없다.
투명한 듯한 피부.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한 치의 흠도 없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이때, 그 새카만 눈동자는 날 가만히 쳐다봤고.
그녀는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비록 그녀는 평범한 입원복을 입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 미모가 활짝 빛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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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녀는 병상에서 내려왔고.
링거대를 끌고 오더니, 앞쪽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우리는 마주 보며 앉게 되었다.
근데 이렇게 앉아 있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눈앞의 한유나가 약간 왜소해 보인다.
그녀는 조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또한,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 나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알 수 없는 어색함을 지우고자 먼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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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이후 여러 가지 합병증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러자 한유나는 고개를 들며 날 쳐다봤다.
긴 머리카락을 살짝 뒤로 묶고 있는 그녀.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좀 괜찮아졌어요.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이때, 나는 잠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사실, 나도 현재 분위기를 대충 알고 있다.
그래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슬쩍 입을 열었다.
“근데 앞으론 선생님이라고 안 하셔도 됩니다. 제 이름은 김정민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동공이 반짝거렸고.
그녀는 날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신기할 정도로 내 눈을 놀라게 했다.
사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아주 우울한 모습이었다.
눈빛에 가득했던 그 우수. 그래서 다소 몽환적인 느낌도 들었는데.
지금 그녀의 두 눈은 생동하고 있었다.
새카만 두 눈이 밝게 반짝이고 있다.
사람이 갑자기 확 달라진 느낌.
얼굴이 조금 창백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미소가 너무 싱그러웠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내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에 한유나는 뭐가 재밌는지 다시 웃고 있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다가, 잠시 후 한유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론 정민씨라고 하면 되겠군요?”
“네. 그렇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잠시 서로의 시선이 다시금 부딪혔는데.
“고맙습니다. 정민씨.”
“아닙니다. 너무 과분한 감사함은 제가 좀 불편합니다.”
“아, 그럼, 죄송합니다.”
“아뇨, 아닙니다. 하하.”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매가 더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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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절 구해주셔서 윤 실장님을 다시 뵙게 됐습니다. 윤 실장님은 저한테 꼭 필요하신 분이세요.”
그러면서 한유나는 문 쪽을 쳐다봤다.
현재, 윤 실장은 우리의 대화에 끼지 않고 밖으로 나간 상태다.
“그리고 정민씨 덕분에··· 저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네?”
내가 의아해하자, 한유나는 좀 더 설명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보게 된 것인지 몰라도, 아니면 꿈속에서 보게 된 것인지 몰라도, 그녀는 돌아가신 엄마를 그때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엄마가 아주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그게 자신은 너무 슬펐다고 한다.
엄마가 자신의 상황을 무척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그 설명을 하면서 이때 그녀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래서일까. 그 표정이 내 눈엔 좀 더 애처롭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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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씨,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한편, 이런저런 사소한 대화들을 쭉 하며 함께 웃고 떠들다가.
잠시 후 나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꺼냈다.
그러자 한유나의 표정도 아주 진지해지고 있다.
“음, 제가 정민씨한테 여러 번 큰 도움을 받았고, 또한 앞으로 큰 짐을 지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저도 잘 압니다.”
그러고는 그녀는 또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 실장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윤 실장님이 생각하시는 일에 정민씨가 꼭··· 필요합니다. 너무 죄송스럽고 너무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한유나는 날 바라보며 부탁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간절했는데.
이때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론, 평생 처음으로···.
나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고마움의 마음이 조금 생겨났다.
아버지 김윤상 의원!
다시 말해, 아버지의 정치적 권세가 없었다면 아마 이런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유나는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내가 필요하게 되었다.
즉, 의사 김정민이 아니라.
바로 김윤상 의원의 아들 김정민이 말이다.
그녀는 그런 내가 필요했다.
나로선 약간 씁쓸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현재의 나는 그녀가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그곳.
그 최상류층, 그 사회.
그곳에서의 일 때문에 그녀는 힘들어하고 있고, 또한 그곳에서 힘겹게 발버둥 치고 있다.
다 놓고 나오면 그만일 텐데···.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그곳을 잡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는 건, 사람 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닐까.
결국, 자신의 일은 자기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
다만, 이상하게도 이런저런 사유로 나는 한유나와 인연이 생겼고.
회귀 전에는 갖지 못했던 그런 인연이 이렇듯 강하게 생겨나고 있다.
놀라운 점은 계속 내 시선을 끌어당기는 한유나와의 인연이 무척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최악의 아버지라고 해도, 그런 아버지 덕분에 한유나와 나는 이렇게 대면하게 되었고.
기묘한 인생의 인연을 갖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게 참으로 오묘하며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마치 복잡한 경우의 미로 속에서 걷게 되는 듯한 그런 느낌마저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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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로부터 30분 뒤.
나는 후다닥 뛰어서 VIP실 병동을 빠져나왔다.
2002호실에 너무 오래 머물었고.
그 때문에 무척 바빠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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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뵙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어느새 뒤따라온 윤 실장.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나한테 공손하게 인사했고.
나는 재빨리 마주 인사한 뒤,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타고서 곧바로 8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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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왜 이렇게 늦어?”
날 보자마자 투덜거리는 김재호 선배.
5시 40분에 함께 모여 저녁 먹으러 나기로 했는데.
내가 10분이나 늦게 도착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머리를 숙이며 사과한 뒤, 얼른 김재호 선배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나가죠. 야, 동욱아 가자!”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저번 한태산 회장의 수술 성공 때문에 병원장 명의로 받게 되었던 특별 회식비.
그 돈이 아직 남아 있었고.
그래서 일요일 저녁, 우리는 다시 회식하러 병원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번 멤버는 김재호 선배, 이동욱, 나, 이렇게 세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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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 차로 가자.”
잠시 후, 지하 3층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김재호 선배의 93년형 경차 티코에 타게 되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았고, 이동욱은 뒷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티코는 출발했고, 천천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병원에서 차로 5분 정도 달린 끝에 조촐한 횟집에 도착했다.
어느덧 한 번씩 칼바람이 불어대는, 초겨울의 날씨로 접어드는 저녁.
오늘 메뉴는 바로 생선회였다.
<83>
“하! 또 술이 고프네.”
소주가 땡긴다.
으으으!
특히, 이런 날씨엔.
이런 쌀쌀한 날씨엔 회 한 점 먹으면서 술 한잔 딱! 마시면 그게 최고인데.
그러나 술을 마실 수가 없다.
우리는 잠시 빈 소주잔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탄산음료를 계속 입에 털어 넣었다.
“자, 받아.”
내가 사이다를 원샷하자, 마치 술을 따라주는 듯 김재호 선배는 내 컵에 사이다를 가득 따라줬다.
“그래도 맛은 있지? 본래 11월 제철 회가 광어야.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11월에 먹으면 더 달달하면서도 맛있거든.”
고추냉이가 듬뿍 풀어진 간장에 살짝 담근 뒤.
양념장도 조금 넣고 깻잎으로 싸서 입에 넣자 그 맛이 일품이다.
“카아! 매운탕도 죽이네. 날씨도 추워졌는데 이런 게 최고다!”
김재호 선배는 연신 국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스르릅!
“카아! 좋다. 좋아. 국물 맛이 너무 좋아.”
사실, 시간이 없다며, 음식들을 한꺼번에 다 주라고 미리 횟집에 부탁해 둔 터라.
그 음식들이 한꺼번에 다 나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테이블이 꽉 찰 정도로 음식들이 가득했다.
바싹바싹하게 튀긴 튀김류와 생선 조림, 생선튀김 등도 함께 나온 상태라 정말 먹을 게 테이블엔 가득했다.
“야, 빨리 먹어! 갑자기 콜 들어오면 다 끝장이다! 빨리 먹어!”
허기진 우리는 그래서 정신없이 먹었고.
그렇게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자, 다들 한 번씩 휴대폰이나 삐삐를 꺼내 쳐다봤다.
다행히 병원 콜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너도 안 왔지?”
“네.”
“이동욱, 너도 없지?”
“네.”
김재호 선배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말.
그래서 우리는 그제야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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