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 사회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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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원서 접수잖아. 다들 이제 정했어?”
역시나 그 이야기다.
물론, 의사 인생에서 전공 선택은 워낙 중요해서 김재호 선배는 어쩔 수 없이 계속 그걸 묻고 있다.
특히, 흉부외과 치프인 그는 레지던트 수급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새로 들어오는 레지던트 숫자에 따라 내년 수술방 운영 계획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동욱! 너 정했어?”
김재호 선배는 먼저 이동욱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때, 이동욱은 ‘에휴’ 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 산부인과로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상황이 좀 변해서···.”
“상황이 변했다고? 그럼 어디로 가려고?”
“그냥 피부과··· 피부과로 갈 생각입니다.”
그 순간, 내가 오히려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피부과? 진짜?? 진짜냐??”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방지현이 흉부외과 지원을 포기하면서 과거와 다른 변화가 생겨났었다. 특히, 방지현이 산부인과로 가겠다는 말에 이동욱은 동의했고,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산부인과행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상황은 회귀 전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래. 그냥 피부과 지원하려고. 난 수술 체질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고는 이동욱은 소주 대신에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억지로 트림을 참는 녀석.
“야! 그럼 지현이는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아?”
이때, 나는 참지 못하고 지현이 대해서도 물어봤다.
그러고 보면, 오늘 아침, 최고은 선배에게 지현이에 대해 부탁했다.
사실, 그때 내가 몇몇 느낀 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박윤후 교수님은 내게 흉부외과를 직접적으로 권유했으나.
이상하게도 최고은 선배의 말들이 내게는 훨씬 더 진솔하게 들려왔다.
특히, 환자들과 만나는 최일선, 그곳에서 밤샘을 같이하는 동료이자 선배인 최고은 선배. 그런 사람이 조언한 이야기들이 훨씬 더 내 심장에 크게 와 닿았던 거다.
그러고 보면, 내가 방지현을 직접 설득할 게 아니다.
차라리 최고은 선배가 나서주면 훨씬 더 유리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부탁했던 건데.
잠시 후, 이동욱의 입에선 다시 한번 내 귀를 놀라게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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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이··· 산부인과 절대 안 간대.”
“안 간다고?? 그럼 어디로 간다는 거야??”
“야! 어디겠냐? 당연히 하나밖에 없잖아! 그냥, 흉부외과···. 흉부외과에 들어간대. 점심 때 최고은 선배랑 나갔다 오더니 결국 흉부외과로 최종 결정했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게 이렇게 해결되다니!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되지도 않던 일들.
어느 순간 모든 게 스르륵 풀려버렸다.
물론, 내가 전공 결정을 미루지 않았다면, 최고은 선배가 저렇게 나설 이유가 없다.
결국, 내 노력도 한몫한 것 같은데.
한편으론, 이런저런 아쉬움도 생겨났다.
그냥 처음부터, 처음부터 말이다.
최고은 선배한테 부탁할걸.
그런데 그렇게 했으면 과연 최고은 선배가 내 부탁에 흔쾌히 응했을까.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그래서 나는 계속 고개만 갸웃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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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그럼 방지현이가 우리 흉부외과로 온다고? 야, 이동욱! 그럼 너도 흉부외과로 와!”
김재호 선배는 기쁜 듯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리고 말도 많아졌다. 아마 그 역시 지난번 인턴 모임 소식을 들었나 보다.
얼마 전까지 지원율 제로였던 흉부외과. 그러나 이제 그 상황이 바뀐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는 수술방 체질이 아니라서.”
즉시 이동욱은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인마! 근데 너는 원래 가려던 데가 산부인과 아냐? 거기도 메이저잖아? 수술하는 덴데? 산부인과는 되고 왜 흉부외과는 안 돼?”
“선배님, 죄송합니다만, 지현이도 안 가는 데··· 제가 딱히 갈 이유가 없죠. 그리고 흉부외과는 너무 수술이 많아, 지현이가 간다고 해도 싫습니다.”
“에이씨, 알았다. 인마!”
김재호 선배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가 된 뒤, 김재호 선배는 드디어 날 쳐다봤다. 그 눈빛엔 무척 호기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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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저도··· 흉부외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내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김재호 선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다행이다! 짜식! 왜 그렇게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어?”
“네?”
“너도 잘 알잖아? 흉부외과니까 그런 수술 케이스가 많은 거야. 인턴조차 제 역할을 갖고서 수술에 들어가잖아. 어떤 전공이 고작 인턴한테 그런 기회를 주겠어?”
저 말은 틀린 게 없다.
“하하, 하하하! 갑자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자! 자! 이제 다들 결정했으니까 다들 잘 되길 바란다. 특히, 이동욱!”
“네?”
“피부과 경쟁률 얼마나 나올 것 같아?”
그러자 이동욱은 살짝 미간을 오므렸다.
현재 피부과 레지던트 TO는 딱 두 자리.
그런데 지원 의사가 있는 인턴 숫자는 이미 3명이다.
이제 이동욱까지 가세하면 4명이 두 자리를 놓고서 경쟁해야 한다.
2대 1의 경쟁률.
이게 빡 터지는 경쟁률이다.
“야, 이동욱! 잘 해 봐. 그리고 김정민!”
“네!”
“너는 흉부외과로 오기로 했으니까, 다음 주 수술 스케쥴 다시 바꾸자. 12월부턴 ER(응급실)로 턴이 넘어간다고 했지? 내년 2월에 흉부외과 턴 돼서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아마 여긴 많이 힘들어질 거다. 그러니까 ER 가기 전에 수술 좀 확! 뛰고 가자. 어때? 괜찮지?”
아으! 젠장할.
나는 인상을 팍 썼다.
수술이 싫은 건 아니다.
그러나 다시금 일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것이다.
지금껏 내가 애매한 노선을 탄 덕분에 김재호 선배는 날 배려해주려고 무척 노력한 것 같은데.
그러나 내가 흉부외과로 오겠다고 하자, 즉시 태세 전환을 하는 것이다.
“야, 괜찮지?”
다시 묻는 김재호 선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ER(응급실)로 넘어가면 당분간 수술과는 작별이다.
그 전에 많은 케이스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힘이 들긴 하겠지만···.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병원에 도착했고, 서둘러 8층 흉부외과 병동으로 들어갔다.
병동 스테이션 간호사들은 이때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들을 하고 있다.
운동 삼아 병동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의 모습 역시 평상시와 다름없다.
“야, 정민아, 넌 의국으로 와. 수술 스케쥴 들어가는 거 다시 짜야 하니까 빨리 와.”
그리고 그렇게 다시 ‘바쁨’이 시작되고 있었다.
<84>
“야! 야! 문 열어!”
“······.”
“시바 새끼! 문 열라고! 에이 시바! 부숴버려!!”
검은 마스크를 낀 건장한 덩치의 남자들.
그들은 갑자기 야구방망이를 꺼냈고.
그때부터 자동차 유리창들을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한편, 누군가는 차량 보닛 위로 올라가 전면 유리창을 전력을 다해 내려쳤다.
조수석 쪽에서도 충격이 가해져 백미러가 부서졌고, 차량 유리창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편, 검정 승용차 안의 누군가.
놀란 듯 시동을 켰으나, 차량 앞을 바짝 가로막고 있는 시커먼 봉고차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다.
이때, 세 명의 남자는 미친 듯이 강화 유리창을 내려쳤고.
잠시 뒤, 쩍! 하며 그물 같은 파괴 흔적들이 우수수 나타나는 순간.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남자들이 승용차 안에서 뛰어나왔다.
네 명의 남자들이다.
“야! 시발새끼들! 죽을래!”
“저 새끼들 잡아!”
“X새끼들!”
사방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성국대 병원 본관 지하 4층 주차장은 삽시간에 3대4의 격투 장소로 바뀌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싸움은 간단히 끝나버렸다.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던 그들이 칼을 꺼내 들었고.
주먹과 칼의 싸움은 확실히 싱거울 수밖에 없다.
쑥! 쑥! 찌르고.
누군가 달아날 틈도 없이 모조리 제압되어 버렸다.
그들이 쓰러지자, 재빨리 그들을 봉고차 뒷자리에 실었다.
그러고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봉고차는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뒤.
봉고차가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갈 무렵.
조수석에 탑승하고 있던 중년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대포폰을 꺼냈다.
이 남자는 오른쪽 눈 밑으로 긴 칼자국 흉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곧이어 그는 전화번호를 직접 입력해서 전화를 걸었다.
이때, 한참 신호음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전화 연결이 되었다.
“네, 실장님, 애들 조치했습니다. 쥐새끼처럼 숨어있는 걸 겨우 잡아냈습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네? 저번처럼?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시팔, 이번에도 죽이지 말란다. 좀 있다가 천천히 차 돌려 인천으로 가자. 부두 창고에 넣어 며칠 잡고 있으면, 저 새끼들도 알아서 기겠지. 가자!”
“네! 사장님!”
그 순간, 고속도로 끝 차선으로 바로 옮긴 봉고차는 그때부터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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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 성국대 병원 쪽은 거의 다 정리됐습니다.”
어느덧 늦은 밤.
서재에 앉아 안경을 끼고서 각종 공문서를 검토하고 있던 김윤상 의원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강제철 실장이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김윤상 의원은 자신의 안경을 벗어 데스크 위에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저번에 잡은 인간들이 한윤기, 한윤형 라인이었고, 이번엔 한윤수 라인입니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의원님.”
“확실히 한 회장의 자식들은 보통내기가 아니군요. 한 회장도 지독한 인간인데, 그 자식들도···.”
“의원님! 한윤기 부사장 등은 더는 새끼 늑대가 아닙니다. 이미 다 성장한 늑대들입니다.”
“다 성장했다?”
“네. 아주 포악하고 아주 거칩니다. 하지만 늑대는 늑대일 뿐! 그런 늑대를 더 쉽게 죽일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백발이 다 되어가는 강제철 실장의 말에 김윤상 의원은 피식 웃었다.
“다시 에스키모 방법을 쓰자는 겁니까?”
“네! 날카로운 양날 칼에 동물 피를 잔뜩 바르고, 그 피를 냉동시킨 뒤 꽂아두면, 늑대가 환장합니다. 그 칼날의 피를 그놈들이 핥다 보면, 맹추위 속에서 혀가 얼어붙고 완전히 마비되는 법이죠. 결국, 자신의 혀가 칼에 베여 피가 나오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계속 핥다가 쇠약해지는 법입니다. 그땐 늑대를 너무나도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한태산 회장을 자식들에게 던져 주자는 말입니까?”
“네. 신라그룹을 먼저 쪼개는 게, 도련님께 훨씬 더 유리합니다. 도련님께서 한유나씨와 결혼한다고 가정할 때, 그룹이 해체된 상태에서 다시 도모하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구태여 그룹 전체를 처음부터 짊어지려고 들어갔다간, 성난 늑대들의 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정민이가··· 과연 회사를 운영할 의사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의원님! 도련님이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한유나씨는 신라그룹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한유나씨가 향후 흩어진 그룹을 하나로 모은다면, 결국 도련님께선 힘과 재력을 갖게 되실 겁니다. 의원님께서 이룰 수 없었던, 더 높은 곳까지 도련님께서 올라가실 수도 있습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정민이 그 녀석은··· 그런 담량을 가진 녀석이 아닙니다.”
한편, 김윤상 의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녀석한테 빚을 갚고 싶을 뿐입니다. 강 실장님은 그렇게 알고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러고는 강제철 실장은 조용히 서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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