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핵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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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지.
잠시 윤 실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남편은 아직 복역 중이어야 하는데.
증권거래법 위반, 횡령,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그는 현재 장기 복역 중이다. 그런데 자신한테 전화가 왔다. 더군다나 어떻게 이 휴대폰 번호까지 알고서 자신한테 전화를 했을까.
“놀라지 마. 모범수가 돼서 감형됐고, 또 가석방돼서 일 년 전에 나왔어.”
윤 실장은 그 말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 년 전에 나온 사람이 왜 자신한테 지금껏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법적으로 두 사람은 부부 사이가 아니다. 그가 최종 선고를 받기 전, 합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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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가 있어야지. 억울해서 말이야.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를 좀 했어. 내가 그 일을 다 뒤집어쓰고 들어갔는데, 손 회장은 정말 멀쩡하더군. 얼마 전엔 화려하게 정계 진출도 하더라고···.”
윤 실장은 잠시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다가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또 어떻게 하려고? 설마 손 회장과 치고박고 싸우려고? 그러다가 당신만 다쳐! 왜 아직도 거길 기웃거리려고 그래?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아!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빨리 만나자. 당신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당신 때문에 나도 큰 피해를 입은 거 알지? 그러니 당신한테 꼭 할 말이 있어.”
“그래, 만나야지. 당연히 만나야지. 하지만 그 손 회장 개새끼! 내가 반드시 죽일 거야! 사람을 장기 말처럼 쓰고 헌신짝처럼 폐기 처분하는 그 개새끼!! 내가 반드시 죽일 테야!”
“여보! 제발··· 하, 그만하자. 어쨌든 우리 만나. 만나서 이야기하자. 아가씨께서 지금 주무시고 계시니까···.”
그러고는 윤 실장은 재빨리 약속 장소와 시간을 잡았다.
어떡하든 전남편을 만나야 한다.
일 년 전에 출옥한 그.
그런 그가 지금껏 조용히 있었다면 도대체 무슨 꿍꿍이였을까. 도대체 뭘 준비하고 있었는지 꼭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
전남편이 무척 걱정되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와 합의 이혼을 해야 했다. 혹시 모를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서 교도소 면회조차 가지 않았다. 그 역시 절대 오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전남편이 자신한테 남긴 100억 원의 재산 때문이다.
그걸 어떡하든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범죄 수익으로 환수가 될 수도 있는 돈인데.
그래서 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남편도 억울했고 자신도 억울했다.
왜냐하면, 그 100억 원의 재산은 자신과 남편이 상류층들의 일을 봐 주고 얻은 그런 대가이기 때문. 또한, 새로운 삶을 위한 중요한 밑천이 될 수 있는 그런 돈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상한데. 나한테 돈이 있는데 왜 연락을 안 했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윤 실장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전남편의 태도 말이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뒤에도 윤 실장은 계속해서 휴대폰을 쳐다봤다.
여전히 그 이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일 년 전, 출옥까지 한 그.
그런데 지금껏 연락하지 않다가 이제서야 연락을 취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생긴 걸까.
한편으론 탄식이 새어 나왔다.
모범수 감형이란 것도 있고, 가석방이란 것도 있는데.
자신은 왜 그렇게 무관심했을까.
결국, 자신한테 강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욕심.
수사기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방책.
자신은 무조건 그 100억 원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로부터 연락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그를 멀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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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전화를 받은 뒤 한숨도 자지 못한 윤 실장.
그녀는 몹시 피로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일을 하다가.
오전 10시가 되자, 서둘러 성국대 병원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그녀는 택시를 타고서 한참을 달린 끝에.
늦가을 바람에 잎들이 떨어져 무척 앙상해진 가로수들이 쭉 펼쳐져 있는.
도로변 어느 카페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낸 뒤 그녀는 곧장 내렸고.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서 그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마침내 발견했다.
이때 그가 벌떡 일어서고 있다.
그 순간, 윤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뛰었고.
활짝 팔을 벌리고 있는 남자의 가슴 속으로 꼭 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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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 미국 집 전화번호도 잊어버렸어? 그럴 리 없잖아? 나왔으면 연락을 해야지. 당신! 왜 연락을 안 했어?”
윤 실장은 쉴 새 없이 질문했고.
어느새 흰머리가 곳곳에 보이는 남자는 쓴 미소를 지으며 윤 실장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새벽에 말했지. 준비할 게 있었다고.”
“무슨 준비? 대체 어떤 거?”
“여보. 나는 이미 주가 조작범이야. 별도 달았고.”
남자는 웃고 있지만, 아주 힘없는 웃음이다.
“그래서 진짜 뭔가를 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어. 물론! 이것저것 들은 것들도 꽤 있고, 조사한 것들도 꽤 있어. 그쪽 정·재계 커넥션과 관련해서 몇 가지 알게 된 것들도 있고. 이것저것 잘 다듬을 거야. 그리고 언제고 확 터트릴 생각이고.”
“그래서?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건 뭔데? 알다시피, 손명국 회장 여동생이 손미희 여사야! 한태산 회장의 현재 부인이라고!”
“여보. 그래서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연락을 취한 거잖아.”
이때, 윤 실장은 흠칫하며 그를 쳐다봤다. 다시 말해서, 그가 자신한테 갑자기 연락을 취한 건 단순한 의도가 아니라는 말.
“당신이 한유나 아가씨 일을 다시 맡게 됐다고 들었어. 그래서 연락한 거야. 물론, 내 가석방 기간이 끝날 때까진··· 되도록 서로 만나지 않는 게 좋겠지.”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려고?”
“간단히 말해서, 내가 손명국 회장을 치면, 손미희 여사의 입지도 흔들릴 텐데. 그건 당신 일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윤 실장은 계속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한편, 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 일 년 동안 미친 듯이 생각해 봤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혼자 힘으론 저 위쪽 사람들한테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최대한 머리를 굴렸어. 뭐, 당신만큼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고민했어. 그래서 생각해낸 게 뭐냐면, 결국 나한텐 제대로 된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야.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다신 교도소 같은 데 들어가지 않을 테고. 내가 살 수 있는 끈덕지도 확실히 잡을 수 있어.”
“도대체 무슨 말인데?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윤 실장은 전남편 김경준의 말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계속 지었다. 그가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빙글빙글 헛도는 듯한 그런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다시 진지하게 설명했다.
“말했잖아. 아가씨 일을 다시 맡았다는 이야길 듣고서 내가 전화한 거라고. 당신이 필요해서 전화한 거야. 사실, 우린 잘 알잖아. 손 회장 일가도, 한태산 회장 일가도 얼마나 잔인한 인간들인지. 일반인들은 재벌들을 우러러보지만, 얼마나 속물인지 우린 잘 알고 있잖아.
그러고는 그는 또 말했다.
“그래서 내가 끄집어낸 방법은 내부에서 뒤엎는 거야. 그럼 방법이 뭘까?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들 일가 중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 말이야. 역시 한유나 아가씨밖에 없더라고. 아가씨는 외톨이야. 억울하게도 사생아 취급까지 받고 있고. 그런데 더 가관인 건, 한태산 회장은 자신의 막내딸보다 그룹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는 완벽한 냉혈한이야.”
“음. 그래서?”
“당신이 한유나 아가씨를 돕는 건 변화가 생긴 거야. 또한, 과거와 다르게 손미희 여사까지 얽혀 있고. 나는 신라그룹에서부터 폭탄을 만들고 싶어. 그리고 그 폭탄으로 재계 20위권 명성그룹까지 날려버리고 싶고.”
윤 실장의 두 눈이 약간 커졌다.
그리고 바로 호기심도 생겨났다.
한태산 회장은 그룹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손미희 여사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손미희 여사는 한유나 아가씨한테 더 큰 적이 된 상태다.
그런데 그런 손미희 여사의 뒤에는 단단한 명성그룹이 있지 않은가.
명성그룹에 큰 타격을 입힌다는 건, 아가씨의 일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즉, 아가씨가 우뚝 서게 된다면.
자신 역시 둘째 사모님 시절 가졌던 그 힘을 다시 갖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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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성그룹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손 회장이 큰 영향을 받을까? 손 회장은 이미 명성그룹에서 손을 뗐어. 그는 현직 국회의원이야.”
“그렇지. 손 회장이 아니라 손명국 국회의원이지. 고상중 의원의 고등학교 절친, 손명국 국회의원.”
이때, 윤 실장은 다시금 놀라며 쳐다봤다.
그러자 전남편 김경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한유나 아가씨와 김윤상 의원의 자제분을 엮어 주려는 당신 전략, 나쁘지 않아.”
“근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당신도 잘 알잖아. 별의별 소문들이 정계, 재계, 증권가에 떠돈다는 거.”
“그래서?”
“중요한 건, 김윤상 의원이 얼마 전에 고상중 의원을 공격했다고 하더라고. 그 때문에 고상중 의원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던 손명국 의원, 그 인간이 좀 난처해진 것 같아. 요즘, 손명국 의원은 뒤로 숨어버렸어. 언론에도 잘 나오지 않고.”
그 말까지 하고서 잠시 입을 닫던 김경준.
그는 잠시 후, 하얀 새치가 가득한 앞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냈고.
그러고는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강렬한 동공을 반짝이며 또 말을 이어나갔다.
“여보. 내가 원래 주식쟁이잖아. 주식쟁이의 기본은 정보! 나는 절대 정보 없이 움직이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이젠 나도 한유나 아가씨를 좀 뵙고 싶고··· 그 김정민씨도 꼭 뵙고 싶어. 당신이 만약 다리를 놔 준다면,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한편, 윤 실장은 전남편 김경준의 말을 곱씹으며 가만히 생각을 거듭했다.
자신은 아가씨를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들을 생각하고 또한 제안하고 있지만.
이렇듯 갑자기 전남편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한, 그 바람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손명국 의원 일까지 겹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사안들을 다시금 헤아려 생각하다 보면, 뭔가 이상한 일들이 겹치고 있다.
마치 무언가 퍼즐이 맞춰지듯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며 아가씨한테 그 모든 게 집중되고 있다.
자신도 그렇고, 김정민 선생도 그렇고, 전남편 김경준도 그렇고.
마치 태풍의 핵처럼 아가씨한테 모든 게 몰려들고 있다.
그러다가 이때!
영리한 윤 실장은 불현듯 뭔가 좀 다르게도 생각해 봤다.
따지고 보면, 아가씨가 재기의 발판을 확보한 것은 결국 김정민 선생이 아가씨를 구한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때 중요한 포인트가 발생한 거다.
그런데 그런 유형의 주요 사안들이 더 있지 않은가.
고상중 의원 사건.
특히, 기이한 점은 그 사건이 성국대 병원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조용히 퍼져나가는 소문 속에는, 김윤상 의원이 고상중 의원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성국대 병원에 인턴 수련 중인 김정민 선생이 바로 김윤상 의원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거기다가, 한태산 회장의 심장 수술.
이때, 김정민 선생이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윤 실장은 간호사들을 통해 들은 바가 있다.
만약, 그때 한태산 회장이 사망했다면, 신라그룹은 새로운 총수를 맞이했을 것이다.
바로 한태산 회장의 장남 한윤기!
바로 그가 새로운 총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데다가 최근엔 사제총기 사건으로 인해 김정민 선생은 언론의 큰 주목까지 받고 있다.
분명, 한유나 아가씨는 태풍의 핵이 될 수밖에 없는데.
기이하게도 김정민 선생 역시 그렇다는 인상을 윤 실장은 좀처럼 지울 수가 없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대체 두 사람 중의 누가···.
대체 누가 태풍의 핵이라는 걸까.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윤 실장.
그러나 그녀는 잠시 후 그 생각을 접었다.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전남편 김경준.
그가 이제 그만 나가자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 실장도 일어섰고.
잠시 후, 그녀는 전남편이 운전하는 외제 승용차를 타고서 외곽도로를 달린 끝에 어느 한적한 모텔 주차장에 비로소 도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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