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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더니 의사가 능력을 가짐-83화 (83/145)

태풍의 핵 03

<87>

2001년 11월 21일 수요일 새벽.

어느덧 새벽 3시가 다 되어가지만, 흉부외과 의국의 불은 환하게 밝혀진 상태다.

레지던트 원서 작성을 하느라 나는 바빴고.

이동욱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방지현은 병동 콜을 받아 잠깐 의국에서 나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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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썼어?”

“어. 얼추.”

나는 꼼꼼하게 다시 확인해 봤다.

그러고는 기지개를 켜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끝났어?”

내가 묻자 이동욱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결국, 방지현과 나는 흉부외과 레지던트에 지원하게 되었고.

이동욱은 자신의 뜻대로 피부과를 지원하게 되었다.

물론, 저 피부과 쪽은 결국 낙방하게 될 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일반외과를 택해야 하는 이동욱.

그런 미래를 알면서도 나는 괜히 나서지 않았다.

괜한 말을 했다간 지금 전공 결정 때문에 민감한 이동욱으로부터 무슨 소릴 들을지 알 수가 없고.

아주 강한 결심을 하고서 ‘피부과’ 행을 택한 이동욱의 의지를 내가 꺾을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당장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나는 모른 척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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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가자.”

의국이 좀 답답했다.

음료수를 마시든, 담배를 피우든.

우선 나가고 싶었다.

“근데 너 또 담배 피우려고? 그러다가 너 골초 되는 거 아냐?”

내가 라이터와 담배를 집어 의사 가운 주머니에 넣자 이동욱이 그렇듯 참견했다.

이때 나는 씩 웃으며 의사 가운 위에 잠바를 다시 입었다.

병원 밖으로 나가면 분명 추울 거라서 그렇게 잠바를 입었고.

그런 뒤에 대충 대답했다.

“조금만 더 피다가, 나중에 끊으려고.”

“야! 대체 언제 끊을 건데? 흉부외과 의사가 담배 피는 건 영 꼴불견 아냐?”

흉부외과 레지던트에 지원한 이상, 내가 앞으로 흉부외과 의사가 될 거라는 걸 잘 아는 이동욱.

그래서 녀석은 참견하고 있었고.

녀석의 저 지적이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흉부외과 특성상 폐암 분야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데 폐암 발현의 주요 원인이 바로 흡연이 아닌가.

그런 흉부외과에서 담당 의사가 애연가다?

이건 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실제, 그런 이유 때문에 회귀 전의 나는 2002년 1월 1자로 담배 절단식까지 하면서 담배를 끊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틈틈이 피던 담배였음에도 그날 이후 금연하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었고.

레지던트 초창기 때 일들이 너무 힘들어지자, 다시금 담배를 손에 잡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레지던트 3년차 김재호 선배 역시 환자들 몰래 흡연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각종 수술들 때문에 생기는 수많은 스트레스들.

여기선 술을 거의 마실 수가 없다 보니 이렇게라도 해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코 좋지 못한 방법이다.

차라리 최고은 선배처럼 틈틈이 바이크라도 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암튼, 나가자.”

나는 이동욱과 함께 의국을 나왔고.

잠시 후, 1층으로 내려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은 뒤,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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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잉!

우와, 이거 참!

진짜 왜 이렇게 추워졌지.

완전히 겨울 날씨라고 해도 다름없을 정도다.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는데.

그 바람에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잎들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이내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야, 우리 저쪽으로 가자.”

나는 우측 쓰레기통 쪽을 가리켰다.

주된 흡연 장소.

그리고 그곳엔 먼저 온 사람이 또 있었는데.

바로 그 장소를 주로 애용하고 있는 응급의학과 조은하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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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희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조은하 선배는 우릴 보자마자 그 말부터 했다.

12월부터 턴이 바뀌면서 이제 우리는 ER 근무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순간, 내가 웃으며 머리를 숙이자, 이동욱은 흠칫하더니 뒤따라 머리를 숙였다.

“근데 내가 잘 해줄 게 있어? 응급실 상황은 너희도 잘 알잖아. 흉부외과만큼이나 골 때리는 데가 바로 응급실인데.”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었고 이동욱도 따라 웃었다.

그 언급 그대로, 응급실 역시 골 때리는 곳이다.

흉부외과는 흉부외과 일만 하면 되지만, 응급실은 온갖 응급환자들을 다 케어해야 한다.

특히, 경증 환자, 중증 환자 등, 온갖 응급 상태에 놓인 환자들이 그곳을 거쳐 가게 되는데.

따라서 익혀야 할 술기들도 상당히 많은 편에 속한다.

흉부외과 응급분야, 소아 응급분야, 신경외과 분야, 산부인과 분야, 호흡기 분야, 소화기내과 분야, 이비인후과 분야, 정형외과 분야, 일반외과 및 외상 분야 등등.

따라서 레지던트 과정 중에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들은 타 전공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특정 진료과에 파견 근무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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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쨌든 전공 결정은 다 한 거지?”

한편, 조은하 선배는 잠시 후 날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네. 했습니다.”

내가 즉시 대답하자, 그녀는 다시 물었다.

“흉부외과?”

“네.”

이때, 피식 웃는 조은하 선배.

한편, 그녀는 이동욱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물었다.

“결국, 안전한 길로 가기로 한 거네?”

딴에는 그렇다고 볼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바로 끄덕였고.

담뱃재를 살짝 털어내던 조은하 선배는 그때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지금 담배 필 거지?”

“네.”

즉시 대답한 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때, 탁! 소리가 나며 라이터 불꽃이 피어올랐고.

불을 붙여준 그녀는 그 라이터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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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춥지 않으세요?”

현재, 이동욱과 나는 잠바를 입고 나온 상태다.

그러나 조은하 선배는 수술복 위에 의사 가운 하나만 입은 상태.

한 번씩 싸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리는데, 무척 추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왜? 잠바 빌려주려고?”

콧등이 약간 빨갛게 변한 조은하 선배.

역시 추운 모습인데.

그 순간, 나는 잠바를 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씩! 웃더니 내 잠바를 받아 자신의 가운 위에 입는 그녀.

이때, 이동욱은 세모 눈을 하고서 날 쳐다봤는데.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의사가운 양쪽 깃을 최대한 가운데로 모아, 밀려드는 찬 바람을 최대한 막았다.

“추워?”

한편, 조은하 선배는 하얀 담배 연기를 뿜어낸 뒤, 다시 날 쳐다봤다.

“아뇨, 괜찮아요. 견딜 만합니다.”

“정말 괜찮지?”

“네.”

“근데 이 잠바, 은근히 따뜻하네. 고마워.”

조은하 선배의 그 감사 표시에 나는 그저 미소를 지었는데.

잠시 후, 그녀는 뜻밖의 이야기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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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너희들, 혹시 파견 근무에 관심 있어?”

“파견 근무? 그게 뭐죠?”

순간, 내가 의아해하며 바로 반문하자, 조은하 선배는 담뱃불을 끈 뒤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협조 공문이 왔는데, 응급실 선생들 좀 파견해달라고 요청이 왔어.”

그러니까 타 병원 파견 근무?

“거긴 우리 병원과 연계된 곳인데, 시골에 있는 데다가 좀 열악해서 의사가 별로 없대. 특히 연말이 되면 각종 사건·사고가 많고, 그래서 지원 좀 해달라는 거야. 혹시 가고 싶으면 말해. 크리스마스 시즌 겸해서 2주 정도 다녀올 수 있는데. 바람 좀 쐴 수 있고.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응급실보단 낫겠지.”

그 순간, 나는 바로 눈이 커졌다.

이동욱 역시 즉각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시골 병원이지만 파견 근무?

이때, 나는 재빨리 과거 기억들을 떠올려봤다.

그래! 그땐 이동욱이 갔었어!

당시, 이동욱이 파견 근무를 원해 내가 그때 양보했었다. 물론, 방지현은 단 1도 관심이 없었고.

그런데 나중에 이동욱한테서 듣기론, 무척 시간이 남는 데다가 모처럼 여유가 있는 의사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들이 떠오르자 나는 즉시 갈등에 빠져들었다.

대략 앞으로 한 달 뒤에나 파견 근무를 가게 되겠지만.

회귀 이후 내가 보낸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너무 바쁜 일상들이 쭉 이어지면서, 지금껏 나는 회귀 이후의 삶에 대해 제대로 통찰해본 적이 없다.

그거 때문이라도 이것저것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모처럼 여유를 갖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듯 머릿속이 정리되자, 나는 이동욱을 쳐다봤다.

이동욱 역시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는 표정.

에이씨! 모르겠다! 먼저 선점하자!

어쨌든 회귀 전엔 내가 양보한 것도 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선배, TO가 몇 자리죠? 전 꼭 가고 싶은데.”

그러자 흠칫하는 이동욱.

녀석의 눈매가 순간 얇아진다.

한편, 조은하 선배는 이동욱도 한번 쳐다본 뒤 대꾸했다.

“그럼 정민이가 가는 거로 교수님께 말씀드려볼까?”

그러면서 이동욱을 다시 쳐다봤는데.

이때, 이동욱은 계속 고민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참, 너희 턴에 지현이도 있지?”

그 순간, 이동욱은 움찔했고.

나는 즉시 대답했다.

“네. 지현이한텐 제가 말해 볼게요. 근데 지현이는 어디 여행 가는 걸 정말 싫어하는 애라서···.”

“그럼 어쨌든 지현이한테 확인하고. 다음에 확정 짓자.”

그렇게 결정되는 순간, 나는 다시 물었다.

“근데 선배님, 혹시 가게 된다면 인턴 한 명만 파견되는 겁니까?”

“아니, 레지던트 한 명 포함해서, 총 2명.”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당시 나는 파견 근무를 가지 않았다.

그래서 자세한 사정을 알 수가 없다. 단지 이동욱이 다녀왔다는 것만 기억날 뿐.

“그럼 어떤 선배님이?”

“그건 교수님께서 결정할 일이라 아직 잘 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볼게. 참, 이 잠바···.”

조은하 선배는 잠바를 벗어 나한테 건넸고.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 응급실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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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근데 너 진짜 파견 근무 갈 거냐?”

“왜? 너도 관심 있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진짜 쉴 수 있냐 싶어서.”

역시 이동욱.

은근히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근데 미안한데.

이번엔 내가 가져가야겠다.

그래서 나는 모른 척하며 계속 대꾸했다.

“시골 병원이라서 시간은 남겠지만, 인프라가 안 좋을 테고. 선배 말과 다르게 나름 힘들지 않을까?”

“정말 그렇겠지?”

“야. 그만 들어가자. 춥다.”

미안하지만, 일부러 나는 그 화제를 접었고.

그러면서도 좀 미안한 마음에 뭔가 고민하다가.

마침 괜찮은 게 떠올랐다.

즉, 이동욱 인생의 지향점이 될 수 있는 그런 거.

그런 조언으로써 그 미안함을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참! 지현이 말이야. 앞으로 교수가 될 생각인 것 같던데.”

“교수?”

순간 눈이 커지며 바로 귀를 쫑긋 세우는 녀석.

방지현의 이야기만 나오면 녀석은 늘 저렇다.

“지현이가 상당히 꼼꼼하잖아. 벌써 세컨 어시로 인정받고 있고. 산부인과 혹은 흉부외과를 두고서 고민한 건, 무조건 수술 때문이잖아.”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해 봐. 될 수 있으면 교수 쪽도 생각해 보고. 이를테면, 지현이랑 가까운 곳에 있다 보면, 정말 서로한테 필요한 뭔가가 생길 수도 있고. 그때 어쩌면 지현이 마음도 바뀔 수 있잖아.”

“그래서 나더러 교수하라고?”

“응. 할 수 있다면.”

그러고는 나는 얼른 앞장서서 걸어갔다.

이때, 이동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후다닥 뛰어 왔고.

우리는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근데 나한테 기회가 있겠지?”

다시 묻는 이동욱.

나는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인마!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게 다 끝인데. 싫지 않은 이상, 왜 포기해? 좀 더 기회를 찾아봐. 진짜 기회가 올 수도 있으니까.”

“그래. 진짜 그렇겠지?”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뭔가 생각에 잠기는 녀석.

한편, 나는 이동욱의 어깨를 꼭 잡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잘 될 거다. 가자.”

잠시 후,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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